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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한국인들이 일제에 의해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었기에 일제시대가 35년인줄 아나, 실제는 1876년(고종 13년)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주권(主權)을 상실하고 맥없이 무너지게 된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締結)후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조선의 외교권(外交權)과 내정권(內政權)을 박탈하고 1907년에는 군대를 강제로 해산(解散)하였다.
아래 첨부(添附)한 지도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육지측량부(陸地測量部)에서 1916년 측도(測圖)하고 1917년 제판(製版)한 지형도(1: 10,000)중 충주도엽(忠州圖葉)이다.
합방된지 불과 6년만에 지방도시인 충주가 지도에서 보는 것 같이 변모(變貌)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1876년 강화도 조약후 부산(1876년), 원산(1880년), 제물포(1883년) 개항장(改港場)을 시작으로 전국 주요 도시까지 일본인들은 대거 이주하였고, 근대화를 한답시고 읍성(邑城)을 허물고 시가지(市街地)를 정비(整備)하고 주요 신작로(新作路)를 개설(開設)하였다.
서울 노량진(鷺梁津)과 인천 제물포(濟物浦)를 잇는 경인선(京仁線)이 개통(開通)된 것이 1899년이다. 서울 영등포(永登浦)와 부산 초량(草梁)을 잇는 경부선(京釜線)은 1905년, 서울 용산(龍山)과 신의주(新義州)를 잇는 경의선(京義線)은 1906년 개통되었다. 충북선(忠北線) 증평(曾坪) - 충주구간은 1928년 12월 25일 개통되어 조치원(鳥致院)에서 경부선과 연결되었다.
재래(在來)의 조선(朝鮮)은 혁파(革罷)되고 전통(傳統)은 단절(斷絶)되고 소멸(消滅)되어 갔다. 그 시대에 살았던 조선인(朝鮮人)들은 가치관(價値觀)의 전도(顚倒)와 혼돈(混沌)을 느꼈으며 나라 잃은 식민지(植民地) 백성(百性)으로 전락(轉落)하여 평생(平生) 울분(鬱憤)을 삭히며 살아야 했다.
조선인(朝鮮人)으로 호의호식(好衣好食)한 자(者)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극히 일부(一部)에 지나지 않았고 대다수(大多數) 민초(民草)들은 누추한 초가집에서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며 살아 나갔다.
일제시대 지도가 일반(一般)에 공개(公開)된 것은 여러 해 지났지만, 그 이전에는 일부 연구자들을 제(除)하고는 접근하기 어려웠다. 나름 사정(事情)은 있어 보인다. 기본이 없는 수많은 아마추어들이 단지 자신의 공명심(功名心) 때문에 오남용(誤濫用)할까 우려(憂慮)해 이용(利用)에 제한(制限)을 두었을 것이다.
나름 정직(正直)하게 쓰려 노력했으나 무지와 능력의 한계(限界)로 많은 오류(誤謬)를 범(犯)하리라 본다. 이는 차후(此後) 공부를 하면서 수정(修整)할 계획이다.
오늘날까지 충주는 나름 발전하여 왔으나 나이든 토박이들은 어린시절과 학창시절 기억이 남아있어, 일제시대 지도를 보더라도 대략 어디쯤인가는 짐작(斟酌)하리라 본다.
큰틀은 변함이 없고 지금 구시가지(舊市街地)를 걷는다 하더라도 40, 50년전과 다를바 없는 곳이 수두룩 하다. 지방 소도시인 충주는 변화가 더딘 곳이고 토박이들이 많이 살고 있어 옛기억이 살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초기 충주읍내(忠州邑內)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세(詳細)한 기록은 지도(地圖)만한게 없으리라 본다. 그리고 일제시대 충주를 다룬 책들이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1)최근지충주(最近之忠州,무라카미 토모지로(村上友次郞),1915년) : 일제 초기 충주의 모습을 담고 있다.
2)충주발전지(忠州發展誌,가나타니 마사키(金谷雅城),1916년): 충주 지역의 생산, 교통, 상업 등 발전 현황을 정리하고 있다.
3)충주관찰지(忠州觀察誌,오토구이 텐카이(奧土居天外,1931년): 당시 사회상과 지리적 특징 등을 기술하고 있다.
4)충주발전사(忠州發展史,이 영(李 英),1933년): 충주 지역의 변화와 발전을 연대기(年代記)로 정리하였다.
※참고
「1906년 2월 한국통감부를 설치한 일제는 한국정부에 건의하여 4월 치도국(治道局)을 설치하고 도로건설 계획을 수립하여 도로 개설을 시작하였다. 1907년 제1기 도로개수사업을 시작으로 1911년 4월 총독부는 ‘도로규칙’을 제정하여 도로의 폭을 1등도로 7m, 2등도로 5m, 3등도로 3m로 정하였다.
경부선과 도청소재지인 청주를 잇는 조치원~청주선은 1920년 3월에 기공(起工)하여 1921년 11월 개통하였다. 청주~청안(1922.5.~1923.5.), 청안~충주(1922.5.~1928.12.) 구간을 차례로 개통하였다.
인터넷자료 」
「 한일합방 전해인 1909년 충청북도 인구수는 50만 4,885명이었고 충주의 인구수는 8만 406명이었다. 1909년 8월말 충청북도에 거주하는 일본인 가구수는 663호, 인구수는 1,769명이고 충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가구수는 63호, 인구수는 156명이었다.
[한국충청북도일반] 충주시편(1909년) 발췌(拔萃)
1915년 1월말 충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가구수는 452호, 인구수는 1,446명이었고, 조선인 가구수는 18,067호, 인구수는 86,992명이었다.[최근지충주, 1915년]
---> [최근지충주]는 통계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원문을 확인중에 있다. [충주발전지, 1916년]나 충북산업지, 1923년]와 비교하면 너무 차이가 난다.
충주에 거주하는 총가구수는 17,338호 총인구수 85,595명, 일본인 가구수 267호, 인구수 909명이었다.[충주발전지, 1916년]
1921년말 현재 충북도청 조사
충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호수는 310명, 인구수는 1,005명이다.
<충북산업지, 아마노 유키타케(天野行武) 著, 1923년>
1927년 12월말 기준.
충주에 사는 일본인 호수 310호, 조선인 19,538호, 외국인 호수 34호, 합계 19,882호.
일본인 인구 1,062명, 조선인 102,869명, 외국인 123명, 합계 104,054명.
<1928년도 충청북도요람, 1928년>
※ 이 자료는 주요시가(主要市街)만 통계로 집계한 것으로 충주읍 전체가 아니다. 이 점 주의해야 한다. 충주읍의 경우 대수정, 본정, 영정, 금정만 해당된것 같다.
조선인 호수 418호(331호), 남녀 합계 1,599명(1,741명) , 1927년 12월말 기준.
충주읍 주요시가 일본인 호수 비율이 33%, 엄정면 목계의 호수 비율 3.2%.
충주읍 주요시가 일본인수 비율 30%, 엄정면 목계의 인구수 비율 1.7%로 충주읍 주요시가에 상대적으로 많은 일본인들이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엄정면 목계가 1920년대말경에 상업과 운수업이 발달했음을 보여준다.
<조선총독부 관보(1928년)>
충주에 거주하는 조선인 호수 1만 9,823호, 일본인 호수 348호, 외국인 호수 42호. 합계 2만 213호
조선인 인구수 10만 4,630명, 일본인 인구 1,203명,
외국인 146명. 합계 10만 5,979명[충주관찰지, 1931년]
1935년 10월 1일 충청북도 총인구수는 95만 9,490명이고 국적별로 일본인 8,653명, 조선인 95만 207명, 대만인 1명, 만주국인 17명, 중화민국인 600명, 기타외국인 12명이다.[조선국세조사보고서,1935년] 」
충주시 중심가(읍내) 모습, 아래는 확대.
충주읍성 훼철(毁撤)은 다음 신문 기사에 잘 나와 있다.
[1869년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의 주도로 열 달에 걸친 충주읍성(邑城) 수축(修築)이 있었다. <중략>
그러나 수축된 충주읍성은 1896년 을미의병 호좌의진(湖左義陣)의 충주성 공략을 계기로 다시 파괴되기 시작했다. 이후 손쓰지 못한 채 방치되어 왔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어 일제의 통감정치(統監政治)가 실시되었고, 1907년에는 성벽처리위원회가 구성되고 전국 주요 도시의 소위 읍성의 철거와 처리에 관한 규정이 만들어졌다.
이때 충주읍성은 1896년에 개교한 이래 독립 건물이 없던 충주공립소학교(현, 충주교현초등학교)의 교사(校舍) 신축을 위한 석재(石材)로 읍성 북벽을 헐어 사용했다. 본격적인 훼철(毁撤)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실시된 충주시구개정(忠州市區改正)에 의해 성벽과 성문 등 읍성이 철거되고 그 자리는 식민지 충주의 길로 변했다. 충주신문 참고.]
<일제시대 조선충주전경, 엽서>
멀리 뒤에 보이는 산은 계명산이 맞다. 중간쯤에 보이는 낮은 산이 충일중학교 인근에 있는 만리산으로 보인다. 충주 중심가를 찍은 오래된 사진이다.
<일제시대 경성전매지국 충주출장소, 엽서>
<일제시대 충주군청정내(忠州郡廳庭內) 금불(金佛)과 실상탑(實相塔), 엽서>
일본인들이 금불(金佛)이라 했으나 금도금한게 아니고 오랜 세월 노천에서 세월을 보냈고 일제시대 유리원판 사진을 보면 철불(鐵佛)이 맞다. 충주철조여래좌상(忠州鐵造如來坐相)이 공식명칭이다.
<일제시대 탄금대 모습, 엽서>
지금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으나 민둥산이다. 오른쪽 바위들이 많은 곳이 지금 탄금장례식장 아래 배를 대던 선착장이 있었던 탄금대 계선대(係船臺)라고 한다.
지도 위쪽을 보면 금제지(金堤池)와 금제동(金堤洞)이 보인다. <쇠지울못>을 가리키고 충주시청 인근 서쪽편에 있다. 구한말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편찬한 [충주군읍지, 1899년]를 보면 금지동제(金知洞堤)라 썼다. <쇠지울못>을 최근에 가보았는데 매립(埋立)된 곳이 많아 규모가 작아졌다. <쇠저울못 생태습지>가 생겼는데, 인근에 도로가 새로 나면서 주변 모습은 많이 변했다.
금제지(金堤池) 쇠저울못은 저수지 면적 412평에 104두락(斗落)을 관계(灌漑)하고 있었다. 1두락(斗落)은 논 한마지기를 말한다. 이 책에서는 100평으로 보고 있다.
[한국충청북도일반] 충주시편(1909년).
두락(斗落)은 마지기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1마지기는 1말들이 종자를 가지고 뿌릴 수 있는 논과 밭의 면적을 말한다고 하는데, 중요한 것은 소출(所出)이 얼마냐이다. 농사는 그 해 기후조건, 토질과 수리안전답이냐 봉천답(奉天畓)냐에 따라 다르니 논의 경우 상등답, 중등답, 하등답으로 구분하여 세금을 매겼다.
그리고 도지(賭地)를 얻은 소작인들은 가을에 지주와 수확을 분배할때 당연 논과 밭의 비옥도를 따졌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농지를 매매하는 경우 상등답의 경우는 150평을 한마지기로 보고 보통 200평을 한마지로 했다. 밭의경우는 300평을 한마지기로 했으니 논보다 소출이 적었기 때문이다. 보통 한마지기 논이면 3~4가마니 나락벼를 수확한다고 한다. 흔히 모내기 할 때 못줄을 띄어놓고 줄을 맞춰 심는 것은 일제시대때 도입된 것으로 정조식(正條式)이라 한다. 당연 소출이 높고 잡초를 제거하기 쉽고 농사에 편리한 방식이다.
1마지기가 지역마다 다른 것은 관습의 차이도 있지만 평야지대냐 산간 고지대냐에 따라 소출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마지기로 따져 벼농사를 짓고 농토를 매매하는 것이 농민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일 수 있으나 표준이 되는 도량형(度量衡)을 쓰는 것이 근대화로 가는 길임에 분명하다. 1909년 일본 도량형법이
도입되어 우리가 아는 1자(尺, 30.3cm)나 1평(3.3㎡)은 일본에서 전통적으로 쓰던 기준이다.
마지기가 들어가는 지명으로 <마지기>들이 있으며, <마리들, 마릿들>이 있다. <마리들>을 <마루들>로 풀이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말(斗)의 들>의 방언으로 봐야 한다. 두락을 논두락, 논두럭, 논뚜럭, 논두렁, 논다락, 논다래, 다래, 다래이, 다리 등등 다양하게 말한기도 한다. 다락논, 다랑이논, 다랭이논도 두락(斗落)이란 말과 무관하지 않다. 또 다락(樓)을 연상하여 생긴 말로 볼 수 있다.
논과 관련해서 배미라는 말이 있다. 논배미 할때 쓰는 말로 논을 가리키거나 논의 수량을 말할때 쓴다. 한자로 야(夜)나 율(栗)로 옮긴다. 괴산군 불정면에 건배미(乾夜味), 칠성면에 둔배미(屯栗)가 있다.
도로 표지판을 보면 <쇠저울>이라 쓴 걸 볼 수 있다. <쇠지울>과 <쇠저울>은 <쇠제울>의 방언이다. 산제당(山祭堂)을 산지당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쇠제>가 있어 이를 <금제(金堤)>라 하고 마을이름 <골>을 붙여 <쇠제골>, <쇠제울>이라 했는데, 나중엔 저울을 연상해서 <쇠저울>이라 부른 것이다. 쇠저울, 쇠지울이라 했다. 필사본 조선지지자료(1914년)를 보면 쇠주울이라 했다.
충주시청에서 용탄동 충주산업단지를 가다보면 예전 영광장례식장(지금 교원예음 충주장례식장) 가기전, 오른쪽으로 참빛충북도시가스(주)가 있는 곳이 예전에 쇠를 캐던 광산(鑛山)이라 한다. 연수동 철광산(連守洞 鐵鑛山)이라 하며 이 광산이 금제(金堤)와 관련있다.
연수동 금곡(金谷) 약수터 인근도 쇠를 캐던 곳으로 금곡리(金谷里)라 하고, 연수동 뒷산인 계명산 줄기 작은민재 너머 용탄동 절골 계곡(로뎀나무 요양원 일대)에 가면 철광석(鐵鑛石) 바위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일대 지하에 철광석이 매장(埋藏)되어 있는 것이다.
금제지(金堤池) 서쪽이 팽고리산(광명산(光明山), 객망산(客望山))이고 동쪽이 충주시청이 자리한 곳인데 낮은 언덕에 사과 과수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충주시청은 1959년 문화동 이마트 자리로 옮겼다가 1997년 지금 위치(금릉동 700번지)로 이전하였다. 이 일대는 화강암이 풍화된 마사토(磨沙土) 토양이다.
복개되기전 연수천(連守川)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 임광사거리 일대에는 집중호우시 도심침수를 방지하느라 우수암거(雨水暗渠) 공사가 한창이다.
연수천이 복개(覆蓋)된 것은 1995년 <연수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실시된 이후다. 이 때 복개된 연수천을 드러내고 재시공하는 것이다.
<참빛충북도시가스(주)에 있는 연수동 철광산 폐광터, 2026년 4월>
연수동(連守洞), 연원동(連原洞)과 동수동(東守洞), 아래로 주봉리(珠峰里)가 보인다. 조선시대 연원역(連原驛)이 있었다는 연원마을에 주택(住宅)이 많이 보인다. 역원제도는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이후 폐지되었다 한다. 이 지도는 연원역이 폐지된 20년후의 모습이다.
연원(連原)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 여러 읍지에 썼으나 대동여지도나 채색필사본 동여도, 개인문집에는연원(連源)으로 표기했다. 그러나 공식으로 쓴 건 연원(連原)이다.
조선시대 연원역(連原驛)이 있어 물류의 중심이 되고 근원을 연결한다고 풀이하나 지극히 충주중심 사고방식이고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근원(根源)은 임금이 계신 한양(漢陽)이다. 왕조시대에 왕은 하늘같은 존재이고 불가침 성스런 존재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당연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 조선시대 역원제도는 한양과 전국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에 약 30리 간격으로 역(驛, 공무 여행자에게 말과 숙식 제공)과 원(院, 일반 여행자에게 숙식 제공)을 설치하여, 중앙집권적 통신·교통 업무와 인적·물적 교류를 담당한 핵심 국가 시스템이다. 전국에 약 500여 개의 역(驛)이 운영되며 왕명 전달, 사신 접대, 죄인 압송 등을 수행하였다. 구체적으로 역(驛)의 기능은 지방 통치를 위한 공문서의 전달, 관물·세공의 수송 및 관원사행(官員使行)에 대한 마필의 공급과 숙식 제공, 변방군정(邊方軍情)의 보고 등을 담당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종6품인 찰방(察訪)과 종9품인 역승(驛丞)을 파견하여, 도내(道內)의 역정(驛政)을 관할하게 하였다. 」
원(原)은 원주(原州), 중원(中原), 남원(南原), 서원(西原) 등등 많이 쓰던 한자로 언덕, 벌, 근원의 뜻이 있고 음성지역에는 감원역(坎原驛)이 있었다. 멀리서 보면 연원역이 있었다는 연수동 뒷편을 계명산 줄기가 포근히 감싸며 팽고리산까지 길게 이어져 있다. 연원의 연(連)은 계명산 낙맥(落脈)을 의식해서 나온 말일 것이다. 멀리서 연수동쪽을 바라보고 연원(連原)의 뜻을 곰곰히 새겨보기 바란다.
연원(連原)은 <언덕에 이어져 있다>고 시문(詩文)에서는 풀이한다. 한문(漢文)에서 부동물(不動物)인 산과 초목, 하천과 언덕이 주어(主語)가 될 수 없다. 우리말에도 이런 예는 없었으나 현대에는 영어 번역문투에 익숙하다보니 사물이 3인칭 주어가 되고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는 것이다.
충주분지에 이어진 작은 분지(盆地)를 연원(連原)이라 했는데 위에서 계명산 낙맥(落脈)을 의식했다고 했다. 계명산 안쪽에 있어 토박이들은 연안(連安)이라 부르기도 한다. 안(安)은 지명에서 안(內)의 뜻으로 흔히 쓴다. 신니면에는 용원(龍院)이 있었고 용안역(用安驛)이 있었다.
驛院 : 連原驛。在州北五里。察訪。本道屬驛十四:丹月,仁山,坎原,新豐,安富,嘉興,用安,黃江,壽山,長林,靈泉,吾賜,泉南,安陰。○察訪一人。嘉興驛。在州北三十里。用安驛。在州西四十五里。舊屬陰城。成宗九年移屬于州。丹月驛。古丹月部曲之地。在州南十里。驛南有溪月樓。(이하생략) [신증동국여지승람]
동수(東守)는 <동수마루>라고 한다. 마루는 마을의 뜻인데 산등성이를 산마루라 하듯이 마루처럼 높고 평평한 곳을 일컫기도 한다. 충주에 마루가 들어가는 마을로 대소원면 장성리 성마루(城宗), 엄정면 신만리 성마루, 종민동 민마루(民宗)가 있다.
주봉리(珠峰里)는 야현천주교와 예성초등학교 일대를 가리킨다. 필사본 조선지지자료(1914년)를 보면 주봉(珠峰) 준주봉이라 써놓았다. 일반 사람들이 준주봉이라 부른 것이다.
예성춘추(蘂城春秋) p60을 보면 1869년 조병로(趙秉老) 목사가 충주읍성(忠州邑城)을 개축(改築)할때 주봉(珠峰) 산상(山上)의 암석을 채취하여 썼다고 하며 그 결과 지금처럼 밋밋해졌다 한다.
진주(眞珠)는 동그란 모양이니 산봉우리가 둥글거나 산정상에 둥근바위가 있어 진주봉(珍珠峰)이라 한 것 같다. 봉우리가 진주봉이니 화강암의 둥근 봉우리로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준주봉은 진주봉의 방언이다.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를 진주할아버지, 진주할머니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방언에서는 증자와 진자가 진자와 준자가 넘나든다.
예성초등학교나 인근 교현아파트(1980년 준공) 일대를 보면 거무스름한 화강암이 지표면(地表面)에 노출(露出)된 것을 볼 수 있는데 흑운모화강암(黑雲母花崗岩)이다. 예성초등학교와 야현천주교 축대(築臺)는 화강암을 잘라 견치석(犬齒石)을 쌓은 것이다. 이 일대에서 나온 화강암을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야현천주교는 1945년, 예성초등학교는 1971년 9월 1일에 지금 위치로 이전(移轉)하였다 한다.
흑운모화강암 보다 밝은 게 백운모화강암이다. 야현천주교 아래 카톨릭회관 옆에 세워진 검은색 돌이 흑운모화강암이다. 때로 짙은 녹색으로 보이므로 청석(靑石)이라고도 한다.
성루가서원이 있는 카톨릭회관을 공사한 사장님 얘기에 의하면 기반암이 너무 야무져서 파쇄(破碎)하느라 애를 먹었다 한다. 흑운모화강암에 철(Fe)과 마그네슘(Mg)성분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화강암은 구성광물이 어떤 비율로 정해진게 아닌 혼합물이라 한다.
흑운모 화학식은 (Fe, Mg)3(AlSi3O10)(OH)2 - K(Fe, Mg)2Al(Al2Si2O10)(OH)2 이고,
백운모 화학식은 KAl2(AlSi3O10)(F,OH)2 - (KF)2(Al2O3)3(SiO2)6(H2O).
한가지 상상을 더하면 오래된 절집이나 교회가 자리한 곳은 이전에 기도처(祈禱處)였던 곳이 많다 한다. 신앙의 자리에 훗날 믿음의 건물이 들어선다고 한다.
옛날 주봉산(珠峰山) 정상에는 기묘한 바위들이 있었을 것이고 인근 주민들의 기도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화강암이 풍화되면 타포니(Tafoni) 현상으로 기묘(奇妙)한 모습이 된다.
충주목 별첨지도를 보면 邑자 옆에 진주봉(眞珠峰)이라 써있다. 조선시대 여러 읍지나 고지도에는 주로 주봉(珠峰)이라 써있다. 향교 옆에는 만리현(万里峴), 북변면 옆에 객망산(客望山) 지금 팽고리산 , 鎭자 옆에 빙현(氷峴), 망티(望峙, 望峴과 같음), 명당암(明堂岩) 옆에 월은티(月隱峙), 남산에는 창룡사(蒼龍寺)와 봉황산(鳳凰山), 금봉암(金鳳庵)이 보인다. 막의진(幕衣津), 조둔진(早遯津), 면위산(免危山), 북진(北津)이 보인다.
지금 남산에는 석종사, 창룡사, 대원고등학교 앞 남산 골짜기에 백운사(白雲寺)가 있다. 백운사는 1958년도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지도에 나오는 금봉암(金鳳岩)이 어디인지는 의문이다. 약막(藥幕)에서 가까운 남산 골짜기에 절터골이란 곳이 있다. 이 지도가 제작된 것이 1870년이니 금봉암은 나중에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에는 대략 창룡사와 맞은편인 지금 백운사 자리쯤 되나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다. 제3의 장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골에 가면 예전에 작은 암자가 있었던 불당골이 있고, 절이 있었으나 기록조차 없는 골짜기가 의외로 많다.
탄금대(彈琴坮) 아래 회도(囬島)는 봉방동 섬말(島村) 같다. 도촌(島村), 도리(島里)숲이라고 한다. 조선오만분일지형도 2차지도에는 조리(鳥里)로 써있고 가타카나로 초오친(チョ- チン)으로 음표기 되어 있다. 鳥는 일본어로 토리와 쵸우로 읽을 수 있는데, 지명 도리숲을 옮기면서 혼동이 있는듯 하다.
조(鳥)를 일본어 한자 훈(訓)으로 읽으면 토리(흔히 도리라고도 함)이고 리(里)를 한자 음(音)으로 읽으면 리이다. 그럼 鳥里는 도리리(とりり-)가 된다.
사진 중심은 여수월 일대로 1990년대 초반과 2014년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크게 변하였다.
유원하나 1, 2차(1993년 7월 ~ 1995년 1월) 입주, 교현동.
동아아파트(1990년 12월) 입주, 교현동.
충주 엘리시아(2007년 2월) 입주, 안림동.
안림LH 천년나무(2015년~ 2017년) 입주, 안림동.
대우 푸르지오 2차(2016년 10월) 입주, 안림동.
하천 합류지점은 <중원청년회의소> 인근이다.
여수월은 여수골에서 유래하였다. 유원 하나 2차 아파트 앞쪽을 말한다. 여우의 옛말은 여ᅀᆞ인데 흔히 여수, 여시라고 한다. 여수골에서 여수울, 여수월로 변한 말이다. 이 땅에서 여우가 사라진 사연은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충주 푸르지오 2차 아파트가 들어 선 곳으로 논이 있었다. 2002년 5월 29일.
<안림LH천년나무 단지를 공사하고 있다. 2014년 5월 2일>
뒷편에 엘리시아 아파트가 보인다.
야현리(冶峴里), 소학교(小學校), 천교(泉橋), 교현동(校峴洞), 교동(校洞), 향교(鄕橋)인 문묘(文廟)가 보인다.
야현마을 인근 예전 공설운동장 자리에 야현체육센터가 들어섰다. 친환경 공원이 잘 꾸며져 있으며 여러 우여곡절 끝에 올해 정식 개장한다고 한다.
소학교는 지금 예성공원에 있었고 정식명칭은 <충주공립심상소학교(忠州公立尋常小學校)>이며 충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자녀들 교육을 위해 1911년에 개교하였다 한다.
천교(泉橋)는 예성교(蘂城橋)에 해당되고 북문다리라고 불렀다. 자연 용출(湧出)하는 샘이 있었던지 천정(泉町)이 근처에 있다. 정(町)은 일제시대 일본인이 거주하던 시가지를 일컫는 일본식 행정구역 단위로 1914년 이후 생겼다 한다. <마치>나 <쵸>로 발음하는데 천정(泉町)은 이즈미초가 된다.
교현동의 유래는 예성공원 앞 예전 교현·안림동사무소 자리에 세워진 <교현동 마을유래비>에 잘 나와 있다. 교현·안림동 행정복지센터는 2016년 8월 16일 안림동으로 이전하였다.
「文鄕校峴一體同心
교현동(校峴洞) 마을유래(由來)
우리동(洞)은 소백산맥(小白山脈)의 지맥(支脈)인 계명산(鷄明山)으로부터 흘러내린 만리산(萬里山)에서 북서쪽으로 주봉(珠峰)을 지나 대가미(大加味)까지 이어진 야산 언덕을 척추로 삼고 이 고장 제1명당인 향교(鄕校)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온 마을이다.
1914년 이전에는 북변면(北邊面) 교전리(校前里)로 불려오다 야현(冶峴), 대가미(大加味)를 합하여 교현동(校峴洞)이 되었으며 1985년 11월 1일 교현1, 2동으로 분동(分洞)되었다.
염바다들(鹽海坪)은 교현동 남쪽 넓은 평야로서 어림리 앞들에서 남산아래까지 대부분 논이었으나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삼한시대 어림리에 고도(古都)가 있었는데 신라(新羅) 효공왕(孝恭王) 4년(900년)에 견훤이 후백제 도읍을 정하려다 자신이 지렁이의 후신(後身)이라 고도(古都)앞이 염(鹽)바다라 하므로 의심하여 전라도로 옮겼다 한다.
섬마을(島村)은 교현천변 남쪽마을을 말하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홍수시 교현천과 남산에서 내려오는 개천이 범람할 때 섬모양으로 돌아나서 형성된 마을이다.
만리산(萬里山)은 현 충일중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산을 말하며 만리재(萬里峴)라고도 한다. 옛날부터 윤달이 든 해 봄 이 산에 오르면 돌림병에 안걸린다고 하여 음력 4월 초8일이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어 왔다. 이 산을 찾아 천리 만리서 찾아왔다 하여 만리산(萬里山)이라 한다.
황새모랭이(황새머리)는 만리산 아래를 돌아 안림동으로 통하는 교현천 개울가의 큰바위가 있는 곳을 지칭하며 이곳에 소나무가 우거져 특히 황새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향교(鄕校)는 공자를 위시한 5聖4賢과 명현18인을 모신 대성전(大聖殿), 동무(東廡), 서무(西廡),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明倫堂) 등의 건물이 있으며 조선 太祖 7년(1398년) 안림동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仁祖7년(1629년 3월) 현 위치에 옮겨 세웠다. 그 주변 마을을 향교말이라 불러왔다.
갱고개는 향교 동쪽 낮은 고개를 말하며 옛날에는 안림동과 여수월로 통하였으며 지금은 연수동쪽으로 큰 도로가 나 있다. 수록골(水綠谷)은 갱고개 너머의 마을을 말하며 지금은 신우골 또는 신흥골이라 한다.
야현(冶峴)은 향교말 서북쪽에 있는 낮은 고개로 현재 교현국민학교 뒷편을 통하여 여수월로 넘어가는 길목을 말하며 옛날에 대장간이 있어 풀무질을 하던 곳이라 풀무고개라고도 부른다.
교현국민학교는 관보 제434호에 '1896년 9월 21일 지방공립소학교 위치 정함 충청북도 관찰부 충주'로 되어 있으므로 우리 고장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학교이다.
(유래비에는 9월 17일로 나오나 관보 확인결과 1896년 9월 21일(건양 원년 구월 이십일일 월요일이 맞아 고침, 관보 삼천오백육십일호 광무십년 구월 십팔일 화요일(1906년 9월 18일) 학부령 제이십팔호에 의해 공립충주소학교에서 공립충주보통학교로 명칭을 변경한다.)
여수월은 향교에서 동북방으로 1km 떨어진 부락으로 옛날에 여우가 많아 여우골이라 하던 것이 여수골로 와전된 것인데 참나무가 많고 인적이 드물어 송장을 버린 일이 있어 송장골(송정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고북문(古北門)은 주봉(珠峰) 동쪽 거리를 말하는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한시대에 어림리에 고도(古都)를 정한후 이곳을 고북문(古北門)이라 하였다 한다.
흰갈매기들(白鷗坪)은 고북문거리 이남을 말하며 옛날에 흰갈매기 떼가 많이 날아들어 붙여진 이름인데 현재는 교현국민학교와 충주여자중학교, 예성공원, 경찰서 등이 있는 지역이다.
예성공원은 시립소공원으로 옛날 충주성의 이름을 따 예성(蘂城)이라 부르며 일본인 초등학교인 본정 소학교(本町 小學校)가 있었고 광복후 충주사범부속국민학교(현 예성 국민학교), 충주여고 등으로 사용하다 철거후 1977년 공원으로 조성되고 1978년 중앙일보사에서 건립 기증한 충주시립중앙도서관이 있다.
대가미(大加美)는 주봉 서남쪽 마을을 말하며 조선 중기 인가(人家)가 전혀 없을때 당상관(堂上官)을 지낸 사람이 현 교현천주교 서남쪽 언덕 위에 묘소를 썼는데 이곳을 대감의 묘(墓)가 있는 곳이라 해서「 대감묘앞」이라 부른데서 와전되어 대가미라 하며 일제초기까지는 대감리(大甘里)라고 한 바도 있다.
이 비는 우리동의 유래와 자랑거리를 길이 보전하고자 주민들의 뜻을 모아 세웠다.
1994년 12월 27일 」
위 지도 확대 부분.
동문리(東門里), 법원지청(法院支廳), 육군관사(陸軍官舍), 보통학교(普通學校), 군청(郡廳), 헌병분대(憲兵分隊), 우편국(郵便局), 본정(本町), 금정(錦町), 면사무소(面事務所)가 보인다.
예전 교육청 자리에 천운정(天雲亭)이 2022년에 복원되었다. 상연당(上蓮塘)도 함께 복원되었는데 보통학교라 써있는 곳이다. 이 학교가 교현초등학교의 유래가 된다. 예전 세무소 자리에는 여학생이, 교육청 자리에는 남학생이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데 교실이 두군데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자료를 보면 예전 세무소 자리에 있었다 하는데 이를 혼동한 듯하다.
문화회관 자리에 법원이 있었고 1979년에 지금 법원로터리 부근으로 이전하였는데 건물이 낙후되어 안림도시개발지구로 이전한다는 얘기가 있다.
본정(本町)은 본정통(本町通)이라 하고 성내동 가구점 골목 일대이다. 한때 충주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하는데 지금은 관아골이라 한다. 본정(本町)은 일본말로 혼마치라 한다. 금정(錦町)은 카네마치 혹은 킨초라고 한다.
면사무소(面事務所)는 충주군 읍내면(邑內面) 사무소를 말하는 것 같다.
충주읍성내에 있었다는 상연당(上蓮塘)과 천운정(天雲亭), 일제시대 출처: 2005년 신동아별책부록. 외국인이 소장한 100년전 한국사진.
<일제시대 충주 육각당 엽서, 인터넷자료>
최근에 복원된 천운정(天雲亭) 일제시대 모습이다. 천운정(天雲亭)은 주희(朱熹)의 觀書有感(관서유감)이란 시(詩)에서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노닌다) 구절을 따온 것이라 한다. 햇빛과 구름이 연못에 비친 것을 표현한 것이다.
위 사진을 보면 정자 왼쪽 계명산쪽으로 수풀이 무성하다. 지금 이 부근을 가면 상상할 수 없는 시골풍경이다. 위 지도(1916년 측도)를 보면 논이 보일뿐 깜끔하다. 연못에 물이 많이 차올랐고 연잎이 무성하며 정자 주변에도 잡초가 무성하다.
아래 사진은 관아 건물이 많이 보인다. 사진을 찍은 원근(遠近)과 계절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위 사진이 오래되고 아래 사진이 나중에 찍은 것이다. 아래 사진은 [최근지충주, 1915년] 사진보다 이전이다. [최근지충주] 사진을 보면 정자 왼편에 작은 미루나무가 하나 더 보인다. 나중에 심었을 것이다.
청녕헌 모습, 일제시대 충주군청이 있었다 한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1983년 해체. 보수되었는데 지붕수리중 상량문(上梁文)이 발견되었다. 청녕헌 상량문은 호서읍지(湖西邑誌)에 나오지 않는다. 청녕(淸寧)은 노자도덕경에 나오는 하늘은 맑고 땅은 편안하다(天淸地寧, 昔之得一者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는 뜻을 취한 것이다.
어림리(御林里), 피병원(避病院)이 보인다. 피병원 옆 공동묘지가 보인다. 피병원(避病院)은 전염병 격리시설이라 한다. 지금 충일중학교 자리가 된다.
충일중학교는 1964년에 지금 자리로 이전했다 한다. 그 이전에 이곳에 화장장(火葬場)이 있었고 남산으로 이전했다가 2006년 목벌동 하늘나라로 옮겼다.
일제시대 이곳에 일본인들도 묘(墓)를 많이 썼다 한다. 해방후 조선인들이 훼손하였고 나중에 후손들이 찾아 왔다하며 목행동 공원묘원에 가면 일본인들이 세운 위령비(慰靈碑)가 있다. 부산 아미동 비석마을 사연을 떠올리게 한다.
韓日親善に盡した日本人こ眠る
(한일 친선에 힘쓴 일본인이 잠들어 있다)
목행동 충주공원묘원 24단지 부근에 있다.
建設者 鷄明會 會長 加藤雄一
忠州 日本人 小學校同窓會 會長 小田賢勝
元忠州在住 日本人遺族會 會長 水野俊雄
가토 유이치(加藤雄一), 오다 마사카츠(小田賢勝),
미즈노 토시오(水野俊雄).
「 石井みよ(이시이 미요), 宇野佐平(우노 사헤이), 宇野とみ(우노 토미), 宇野土佐(우노 토사), 小川豊吉(오가와 도요키치), 小川ハル(오가와 하루), 三宅敬子(미야케 게이코), 三宅 某(미야케 모), 小田靜香(오다 시즈카), 川村信一(가와무라 신이치), 川村重雄(가와무라 시게오), 川村正子(가와무라 마사코), 河相ツタノ(가와이 쓰타노), 河相昭和(가와이 쇼와), 河相道子(가와이 미치코), 加藤二郞(가토 지로), 加藤和江(가토 가즈에), 熊谷雪野(구마가이 유키노), 小松光枝(고마쓰 미쓰에), 小松 昭(고마쓰 아키라), 外村二三(소토무라 후미), 田代保郞(다시로 야스로), 中村ぬい(나카무라 누이),中村淑子(나카무라 요시코), 中村京子(나카무라 교코), 原口クマ(하라구치 구마), 原口一二(하라구치 가즈지), 原口尙信(하라구치 나오누부), 松本梅子(나쓰모토 우메코), 松本安子(나쓰모토 야스코), 松本榮一(마쓰모토 에이이치), 松本笹代(마쓰모토 사사요), 松本初代(마쓰모토 하쓰요), 松本芙美(마쓰모토 후미), 松本正男(마쓰모토 마사오), 水野シヨ(미즈노 시요), 水野京子(미즈노 교코), 水野弘子(미즈노 히로코), 阿部利弘(아베 도시히로), 阿部昭三(아베 쇼조), 阿部喜久雄(아베 기쿠오), 阿部淑子(아베 요시코), 小倉美夫(오구라 요시오), 小倉淸枝(오구라 기요에), 小倉久夫(오구라 히사오), 澁谷 豊(시부야 유타카), 澁谷威人(시부야 다케히토), 向井妙子(무카이 다에코), 向井和子(무카이 가즈코), 向井昌子(무카이 마사코), 向井湧子(무카이 유코), 加藤カネ(가토 가네), 加藤千代(가토 치요), 久島次男(히사시마 쓰기오), 久島好江(히사시마 요시에)
他御靈御 一同 」
타어령어(他御靈御)란 타지에서 원령(怨靈)이 된 분들이란 뜻이고,타어령어일동은 충주에서 살다 충주에 묻힌 일본인 명단을 말한다. 이들의 묘지(墓地)가 훼손되었다는 것은 위에서 썼다.
<일구팔칠년 팔월 사일 건립제막(建立除幕)>
그리 오래된 비는 아니다.
제2로타리 인근에 수비대(守備隊)가 보인다. 일본군(日本軍)이 주둔(駐屯)한 곳이다. 이 지도에서 유의할 것이 본정에서 수비대라 쓴 곳으로 있는 도로는 지금 제1로타리에서 제2로타리로 나있는 도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도로는 예전 세무소 골목에 나있는 도로다.
금정(錦町)이라 쓴 왼쪽 도로가 제2로타리로 나있는 도로다. 지금 제1로타리에서 제2로타리 지나 충주교라 쓴 지현교로 나 있는 도로는 정확히 남북으로 나있다. 수비대의 위치도 예전 세무소 자리에 가깝다.
수비대 옆 천변으로 논이 보이고 하천이 크게 휘어져 있는데 하천정비 사업으로 매립하고 오늘날 모습으로 변한 것 같다. 지현동 주민센터쪽으로 새로 하천을 내었다.
대가미리(大加味里), 대수교(大手橋), 일출교(日出橋)가 보인다. 대수교는 지금 대수정다리, 충주교(忠州橋)가 공식이름이다. 일출교는 한양프라자 성서교(城西橋) 자리를 가리킨다.
<대수정다리에서 바라본 현대타운 일대, 2026년 4월 26일>
봉계교(鳳溪橋)는 국원고(國原高) 인근에 있으며 지금도 이름이 봉계교이다. 탄금대쪽으로 나있는 도로 양편으로 가로수를 심었다.
봉방리(鳳方里) 봉계동(鳳溪洞), 상방동(上方洞), 하방동(下方洞)이 보인다. 주변이 온통 논(畓)이다. 봉계(鳳溪)의 봉(鳳)은 새 봉자이다. 큰 새들이 많이 날아들어 봉계라한 것이다.
분대제동(分大堤洞)이 써있는 곳은 지금 호암지(虎岩池)를 말한다. 집들이 보이는데 연못둥지를 말한다. 분대제동(分大堤洞)이란 대제동에서 갈라진 마을이란 뜻 같다. [필사본 조선지지자료, 1914년]를 보면 호암(虎岩) 범바위, 관주동(貫珠洞) 관주골, 도장동(道庄洞) 도장골, 대제(大堤) 수청골이 법정리 호암리(虎岩里)에 속했다.
호암지는 일본인 수리조합장 스즈키 세이이치(鈴木政一) 주도로 1922년 착공하여 1923년 준공하였다 한다. 일제시대에는 호암제(虎岩堤)라 했다. 위 지도는 호암지 준공전의 모습으로 저수지 주변으로 논(畓)이 많이 보인다.
<忠州水利組合長 鈴木政一氏 事業成功紀念碑>
뒷면(後面) 公本日本山梨縣人也 明治 四十年 來居忠州 篤愛鮮人 常思爲鮮人 設永遠之事業奐在壬戌創立水利組合 於郡西達川平野 使民蒙利資生積石五百町○○○○
申凡十一年間公一心董勵夙夜靡懈○○○○○
故土鮮人友情其志不忘○○○○○
永世不忘之誼爾 昭和 八年 癸酉 五月 立
忠州水利組合員一同
<일제시대 호암제 표지석, 2023년 3월 3일 촬영>
위에 보면 화약고(火藥庫)가 보인다. 문화동 럭키아파트 부근으로 보이고 이 지도는 군사용(軍事用)으로 쓰였던 것 같다.
지도 오른쪽 상단에 충주군 읍내면이라 써 있다.
대제동(大堤洞)은 함지못 인근 수청골을 말하는데, 이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다. 대제동이라 써있는 곳은 충주종합운동장 인근에 있는 사양(斜陽)재 부근 같다. 호암지 아래로 논에 물을 대는 도랑과 수로(水路)가 보인다.분대제동(分大堤洞)이라 쓴 글씨 아래는 호암지인 소제(小堤)를 가리킨다. 분대제동은 연못둥지이고 마을이름을 가리킨다.
수청동 소제언은 면적 828평에 62두락에 관개하고 있었다.
[한국충청북도일반] 충주시편(1909년).
호암지에서 달천평야로 흐르는 물도랑과 물을 가두는 제언(堤堰)을 볼 수 있다.
위 지도는 제언(堤堰)과 보(洑)에 대해 잘 보여 준다.
달신리(達新里) 옆에 고촌농장(高村農場)은 일본인 소유다. [최근지충주, 1915년]를 보면 고촌농장은 일본인 고촌심일(高村甚一, 타카무라 진이치)이 경영하였는데 이곳에 담배 건조실이 있었고 엽연초를 경작하였다고 한다.
타카무라 진이치(高村甚一)는 일찌기 1895년 부산(釜山)으로 건너와 갖은 고생끝에 자수성가하여 충청북도 제일의 부호(富豪)가 되었다 한다. 학교조합 관리자로, 농사경영자로, 충주의 대지주로 최고참자(最高參者)였다.[충주발전지, 1916년]
달천평야 논에 물을 대기 위한 제언(堤堰)이 여러 군데 보인다. 그리고 대제(大堤)인 함지에서 흐르는 물도랑이 보인다.
[한국충청북도일반], 충주시편(1909년).
대가미제언은 제언면적 356평, 관개(灌漑)두락 245두락.
금제언은 제언면적 412평, 관계두락 104두락.
수청동 소제언(지금 호암지)은 제언면적 818평, 관개두락 62두락.
하단동 대제언(지금 함지)은 제언면적 198평 으로 31두락을 관계하고 있었다.
달천동 모사평제언 4곳이 보인다. 총 제언면적은 945평이고 총 관개두락은 24두락을 관개(灌漑)하고 있었다. 모사평(毛沙坪)은 모시래들을 가리킨다.
면적은 평(坪), 두락(斗落)은 한 마지기로 100평으로 봐야 한다. 책에 나온다. 하지만 지금도 논은 곳에 따라 150평, 200평을 한 마지기로 보고, 밭은 300평으로 보기도 한다. 이 통계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아래 [최근지충주, 1915년] 자료와 비교하면 비록 년도가 다르지만 차이가 있다. 대가미제언과 금제언은 1909년과 1915년 사이 제언면적이 무려 10배 차이가 난다. 관개면적은 오히려 줄었다. 두 자료 모두 통계자료에 문제가 있다.
1畝는 30坪을 말한다. 일본에서 쓰는 단위다.
대제는 제언면적 9,600평, 관개면적 54만평.
대가미제는 제언면적 3,274.4평, 관개면적 7,080평.
소제는 제언면적 10,830평, 관계면적 21만평.
금제는 제언면적 4,050평, 관개면적 7,500평.
<최근지충주, 1915년>
대제(大堤) 및 호암제(虎岩堤): 몽리구역(蒙利區域,
몽리구역은 수리안전답(水利安全畓)을 말하며 관개(灌漑)하여 혜택을 보는 논을 말한다.) 340정보(町步, 1정보는 10단(段), 약 3,000평으로 102만평 ),충주에서 거리 약 10정(町, 1정은 109m로 1,090m로 약 1km), 최근 다시 그 몽리구역을 500여 정보(町步,150만평)로 확대하는 공사를 착수했다.(호암제(虎岩堤)를 일본인 수리조합장 스즈키 세이이치(鈴木政一) 주도로 1922년 착공하여 1923년 준공하였다 한다. 이를 말한다.)
<충북산업지, 1923년>
※ 참고로 예성춘추 p47를 보면 다음과 같다.
三三. 大加味堤 대가미교 북쪽 어정평(漁汀坪)에 있는데 단기(檀紀 四二六二年 己巳(1929년)에 교현천수(校峴川水)를 인수(引水)하여 신축저수(新築貯水)하고 어정평을 관계(灌漑)케 하니 몽리면적(蒙利面積)은 육십이정보(六十二町步)다.
--->62정보는 18만 6천평이다. 이 책에는 대제(함지)는 몽리면적 307정보, 소제(호암지)는 몽리면적이 87정보라고 한다. 둘을 합하면 달천평야에 관개하는 논이 394정보로 118만 2천평 된다. 예성춘추는 6.25전쟁후 50년대말 기록인데 일제시대 기록(충북 산업지) 150만평보다 적다. 그 차이는 32만평으로 적지 않은데 일제시대 대제와 호암제를 수리하고 증축한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 .
달천리(達川里), 달신교(達新橋)가 보인다.
<1910년 측도, 1913년 제판. 조선오만분일지형도 2차지도>
호암지와 함지가 보인다. 대제동(大堤洞)이라 쓴 곳은 수청골을 말한다.
<1915년 측도, 1916년 제판 조선오만분일지형도 3차지도> 호암지와 함지, 달천평야에 제언(堤堰) 두 곳이 보인다.
<호암동 수청골 일대 택지개발 모습, 2017년 2월 11일>
<관주골에서 바라본 수청골 모습, 2024년 3월 21일>우미린 에듀시티(2019년 8월 입주)와 호암두진하트리움 아파트(2019년 10말 입주)가 들어서 있다.
<호암동 일대 택지개발 모습, 2017년 6월 17일>
사진 중앙이 세경아파트이고, 충주중학교 운동장 건너 용산아파트가 보인다. 용산아파트는 지금 한화포레나 아파트로 재건축하고 있다.
탄금대 주변모습. 금대동(琴臺洞)과 탄금대 주변으로 샛강과 습지(濕地)가 보인다. 위쪽으로 묘지(墓地)도 보인다.
충주댐(1985년 준공)이 생기기전 홍수가 나면 남한강은 범람(氾濫)이 잦았다. 1957년 괴산댐이 완공되었지만 탄금대 일대는 달천이 합수(合水)하는 곳이라 물난리가 나면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침수(浸水) 되곤 하였다.
특히 1972년 장마때는 충주 일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 2023년 7월에는 괴산댐이 월류(越流)하여 수주팔봉 일대가 침수되어 수해를 입었고 하류지역 단월, 달천, 봉방동 일대에 대피령이 내려졌었다.
금릉리(金陵里) 능암동(陵岩洞), 칠금리(漆琴里) 칠지동(漆枝洞), 신촌리(新村里), 금제교(金堤橋), 하방동(下方洞), 능암습지(陵岩濕池)가 보인다.
탄금대로 가는 도로, 일제시대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1916년 유리건판.
대신궁(大神宮)은 일본신사(日本神社)를 말하고 사직산(社稷山) 정상에 사직단을 헐어내고 1912년에
세웠다. 예전 어머니회관에서 사직산 정상으로 길이 나있고 대신궁이 자리하고 있다.
중간쯤에 세운 것은 기념비로 사직산정로기념충혼비(社稷山征路紀念忠魂碑)이고 예전 어머니회관쪽이 입구였던것 같다.(최근지충주, 1915년) 사직산정로기념충혼비(社稷山征路紀念忠魂碑)는 러일전쟁(1904 ~ 1905)때 일본군(日本軍) 전몰자(戰歿者)를 기리기 위해 세운비다. 일본군 전몰자는 13만 5,000명이라 한다.
충주고 앞에서 호암지로 나있는 큰도로가 표시되어 있다. 당시에는 집들이 없고 논이 보인다. 검은선은 전선(電線)이라 한다.
충주고 정문 예전 용암파출소가 있던 곳을 <검지고개>라 한다. 도로를 내느라 고개 양옆을 파냈다. 호암지에는 흙을 매립하고 도로를 내었다.
지금은 나이드신 분들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고개라 생각되는데, 지명유래를 <옛날에 나무가 우거져서 검지고개라고 불렀다>고 풀이한다. 장기덕 교장 선생님이 쓴 [중원향토기, 1979년]에서도 본 것 같다.
그런데 의문이 이 곳에 나무가 우거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옛날 사진을 보면 탄금대를 비롯하여 계명산 중턱까지 온통 민둥산이고 나무를 해다 땔감으로 썼는지 어린나무밖에 보이지 않는다.
고개이름은 첫째 고개 자체의 모양이나 특징을 따서 이름짓는다. 두번째는 고개 저편 마을이름을 가리켜 이름짓는다. 세번째는 고개가 어느 마을에 가까운 경우에는 그 마을이름을 붙인다.
우선 누가 이름을 지었을까 따져야 한다. 검지고개는 지곡(芝谷)이나 용산동(龍山洞)에 산 사람이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일제시대 지도를 보면 검지고개 너머와 호암지(당시 소제(小堤)나 연지(蓮池)라 했음) 주변으로 논이 보인다. 검지고개의 <검지>는 큰못(大堤)의 뜻으로 본다. 검지고개의 지명풀이는 분량이 넘치므로 다음 기회로 미룬다.
지도 아래 공동묘지(公同墓地)가 보이는데 예성여중,예성여고 부근을 말한다. 예성여중이 1980년, 예성여고가 1982년 개교하였으니 1970년대 말경까지 있었다.
지금도 사직산(社稷山) 부근 지현동(芝峴洞)에 가면 무속인들의 점집이 많다. 조선시대 토지의 신(神)인 사(社)와 곡식의 신(神)인 직(稷)에게 제사 지내던 사직단(社稷壇)이 있어 무속인들이 모여 들었다고 얘기하는 분을 보았다.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다. 대원사(大圓寺), 용운사(龍雲寺)도 인근에 있다. 앞에서 주봉리(珠峰里)를 설명하면서 신앙의 자리에 훗날 믿음의 건물이 들어선다고 했다.
<충주 일본신사 사진들, 인터넷자료>
지현동과 용산동 일대 모습. 지현동 일대는 당시 용산리(龍山里)에 속했다. 서부동(西部洞)은 빙현(氷峴)에 해당한다.
지현동(芝峴洞)은 지곡(芝谷)과 빙현(氷峴)에서 한 자씩 따온 동이름이다. 빙현(氷峴)이 오래되고 지곡(芝谷)은 나중에 생겼는지 아래 첨부한 <1872년 지방지도>에는 빙현(氷峴)만 나와 있다.
위 지도를 봐도 지곡(芝谷)에는 집들이 많지 않다. 빙현(氷峴)은 빙고(氷庫)가 있어 유래했고 나중에 주봉(珠峰) 동쪽 고북문(古北門, 지금 야현사거리) 부근으로 옮겼다고 한다.
예성춘추(蘂城春秋) p51를 보면 빙현교(氷峴橋) 부근에 백정(白丁)들이 집단 거주하는 부락(部落)이 있어 피촌(皮村)거리라 불렀다는 구절이 나온다. 제천시에도 백정들이 살던 곳이 지명으로 나온다.
<필사본 조선지지자료 제천군편. 1917년>을 보면 읍부리(邑部里)에 백정촌(白丁村)이 나온다.
우선 빙고(氷庫)는 관(官)에서 필요해서 세운 건물로관아소유물(官衙所有物)로 관아(官衙)에서 가까운데 있었다고 봐야 한다. 백정들도 짐승을 잡아 고기를 팔고 가죽을 만들었다 하니 시장이 가까운 곳에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얼음과 고기는 관(官)에서 귀빈(貴賓)을 접대하고 제수(祭需)로 많이 쓰고 고기를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얼음이 필요했을 것이다.
「 倉庫 氷庫 : 在州南二里 十二間, 湖西邑誌(1870)」
이런 이유로 개천이 흐르는 빙현(氷峴) 부근에 백정들이 몰려 살았을 것이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관습(慣習)이 사람을 지배했다. 조선시대에는 백정뿐 아니라 관노(官奴)도 있었고 관기(官技)와 무당(巫堂)들도 있었다. 이들은 자유민(自由民)이 아니라 관(官)의 간섭과 지배를 일반 백성보다 심하게 받고 사는 하층민(下層民)이자 예속인(隸屬人)이었다.
일제는 조선인들의 체격측정을 한다고 사진을 남겼다. 이들은 충주에 살던 백정들이라고 한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일제시대 필사본 조선지지자료(1914년)에 지곡(芝谷)으로 나오는데, 용산(龍山), 지곡(芝谷), 서부(西部)가 용산리(龍山里)에 속했다. 빙현(氷峴) 대신 서부(西部)라 한 것이다. 지현동은 원래 용산동에 속했다가 1962년 지곡.빙현동으로 분동(分洞)했다가 1969년 지현동으로 통합(統合)했다. 지현동이라 한지 오래된게 아니다.
지곡(芝谷) 지명풀이를 지초(芝草)가 많이 자라는 곳이라 지곡(芝谷)으로 이름지었다고 책에 쓴 분이 있다. 이 곳은 약초(藥草)가 자랄만한 산골이 아니다. 그렇다고 지초(芝草)를 많이 재배한 곳일까? 아무리 봐도 한자(漢字) 그대로 풀이한 것이다.
책에 쓰다보니 그리된 것인데, 지현동 일대를 흐르는 충주천(忠州川) 주변에도 논이 보이고 충주고앞 야트막한 <검지고개>를 넘으면 지금과 이름이 다르지만 호암지(小堤), 함지(大堤)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
「 큰 방죽[大堤]이 1이요, 작은 방죽[小堤]이 1이다.【길이 4백 80척(尺)인데, 66결(結)의 논에 물을 댄다. 】大堤一、小堤一。 【長四百八十尺, 灌漑六十六結。】 세종실록지리지 1454년(문종 2년)」1結을 3,000평으로 보면 66結은 19만 8천평이 된다. 대제, 소재는 함지와, 호암지에 있었다.
지곡은 지곡(池谷)에서 온 말인데 지곡(芝谷)으로 표기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예는 많고 음(音)이 같은 한자중(漢字中)에 뜻이 좋은 글자를 골라 쓰게 된다.
예성춘추(蘂城春秋) p56를 보면 빙현리(氷峴里)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했다는 전설이 있다. 어떤 부호(富豪)가 충주천 물을 집안에 끌어들여 유상곡수를 즐겼다는 내용이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池洞)은 수원천변(水原川邊)에 있으며 큰못이 있어 못골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엄정면 용산리(龍山里) 목동(牧洞)은 못골을 한자로 옮겼다. 못을 한자 목(牧)으로 음표기(音表記)한 것이다.
지현동 주변은 온통 물(水)의 기운(氣運)이 왕성(旺盛)한 곳이다. 빙현(氷峴)이 그렇고, 충주천(용산천), 소제(小堤, 蓮池, 호암지), 대제(大堤)가 그렇다.
1871년 편찬된 [호서읍지(湖西邑誌)]나 1898년 [충청북도각군읍지忠淸北道各郡邑誌] 제언(堤堰)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상세(詳細)하게 나온 [호서읍지]만 옮긴다.
제언(堤堰)
소제(小堤) 在州南五里 南邊面 周面 二千六十八尺 水深 三尺
함주제(含珠堤) 在州南三里 南邊面 周面 九百二尺 水深 三尺
대제(大堤) 在州南八里 周面 一千九百八尺 水深 三尺
조선시대 1里를 420m로 잡고 1尺을 30.3cm로 보고 계산하면 다음과 같다. 주면(周面)은 저수지 둘레길이를 말하는 것 같다. 저수지가 만수(滿水)했을때 둘레를 말할 것이다.
소제(지금 호암지)는 관아에서 거리가 2.1km, 주면은 626.6m, 수심이 1m.
함주제(위치 불명)는 관아에서 거리가 1.26km, 주면 273.3m, 수심이 1m. 원으로 환산하면 지름 87m의 못이다.
대제(지금 수청골 함지)는 관아에서 거리가 3.36km, 주면이 578.1m, 수심이 1m.
그런데 함주제의 위치는 어디일까? 예성춘추(蘂城春秋)에는 함주제(含珠堤)를 함지인 대제(大堤)와 같은 것으로 써놓았는데 잘못이다. 관아에서 1.26km 거리면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관아에서 직선거리로 3리면 남산초등학교 뒤 사천개교와 충주중학교에 해당된다. 아래 지도에 보면 사직단(社稷壇)까지 거리가 관(官衙)에서 3리라고 나오는데 실제거리는 3리가 안된다.
함주제(含珠堤)는 구슬을 머금은 못이란 뜻이다. 호암동 관주(貫珠)골은 앞에 있는 산봉우리가 구슬을 꿴듯한 형상이라서 유래한 마을이라 풀이한다.
[충주군읍지, 1899년] 산천(山川) 항목을 보면 연주현 재주남오리 대림산래(連珠峴 在州南五里 大林山來), 연주현은 관아에서 남쪽으로 오리에 있는데 대림산에서 산줄기가 온다고 나온다.
오리(五里)는 2.1km이다. 관주골 북쪽에 있는 야트막한 안산(案山)과 일치한다. 조선시대 고지도에는 연주산(連珠山)으로 표시했다. 다담뜰 한식뷔페 뒷산이다. 연주현(連珠峴)은 조선시대 지도에 많이 나오는데 뜻은 관주(貫珠)와 같다.
그럼 함주제(含珠堤)도 연주현, 관주골과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연주현과 관주골은 이웃에 있는 고개와 마을이름이다. 함주(含珠)는 구슬을 품다, 구슬을 머금다는 뜻이고 함연주(含連珠), 함관주(含貫珠)로 쓰면 연주현을 품은, 관주골을 품다는 뜻인데, 함주제(含珠堤)는 이곳과 멀지 않다고 본다. 현재 관주골에 소관주제(小貫珠堤)가 안산 인근에 있으나 함주제로 보기에는 거리가 맞지 않는다.
수안보면 오산마을 뒷산으로 봉수대가 있는 주정산(周井山)은 온정(溫井, 수안보 온천)을 두르고 있는, 온정 주위에 있는 산이란 뜻이다. 함주제도 이렇게 풀어야 한다.
<충주관찰지, 1931년>
이 책 20. 충주 수리조합 경영방법 및 실적을 보면
「 그리고 작은 저수지(小堤) 동쪽 호암에서부터 충주읍으로 흐르는 충주천 상류에서 직접 도수로에 의해 물을 공급받고, 작은 저수지(小堤)를 확대하는 것이...후략(後略)」이 나온다.
남산초등학교 뒷편 사천개 용산보에서 호암지로 물을 공급한다. 조선시대 함주제(含珠堤) 위치는 사천개 일대로 본다.
사천개를 한자로 사천계(泗川溪)로 쓸 수 있다. 개천은 개천(開川)으로 쓰고 우리말 개는 한자 계(溪)에서 왔다 한다. 골을 뜻하는 곡(谷)같이 음이 흡사하고 뜻이 같다. 우리말 골도 한자 곡(谷)에서 온 말이다. 아래 [1872년 지방지도 충주목]을 보면 빙현(氷峴) 옆에 사천(泗川)이 쓰여 있다.
<조선오만분일지형도 3차지도. 1915년 측도, 1916년 제판>
중앙 충주면(忠州面) 글자 面이 위치한 일대가 사천개(泗川溪)인데, 모래톱이 쌓여 있고 논이 있다. 사천(泗川)의 泗는 물이 풍부한 물가라는 뜻이다. 사천개는 발티와 남산 뒷편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직동에서 만나 흘러내리는데 비가 많이 오면 하천이 범람해서 <사천개 다 떠내려 간다>는 말이 있다. 사천개에 사는 분한테 직접 들은 얘기다. 사천(泗川)이란 지명은 이를 적절히 표현했다.
그리고 호암동 토성(土城)이 있는 한신더휴 아파트와 힐데스하임 아파트 일대, 세경아파트 너머 지현동 신촌 일대는 화강암이 풍화된 석비레 마사토(磨沙土) 땅이다. 사천개 일대에 모래가 쌓일 수 있는 여건(與件)이 된다. 그럼 모래내인 사천(沙川)으로 쓸 수 있다. 사천(沙川)이나 사천(泗川)은 음이 같다.
사천개 지명풀이를 이렇게 해야 하는데 인터넷을 보면 용산동 일대에 신라와 관련된 민담이 많다하고 전설(傳說)로 풀이하고 있다. 이런 전설들은 조선시대 읍지류(邑誌類)에 많이 나오는 충주의 건치연혁을 읽고 상상한 것이다.
「建置沿革: 本高句麗國原城。一云未乙省,一云薍長城。新羅取之。眞興王置小京,徙貴戚子弟及六部豪民以實之。景德王改中原京。」
신라초기에 육부(六部)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량부(沙梁部)다. 그리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원효불기(元曉不羈)에 원효대사가 요석공주(瑤石公主)와 만나기전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신 곳이 문천교(蚊川橋)이며 사천(沙川)이다. 「 已自南山來過蚊川橋(沙川俗云年川又蚊川又橋名楡橋也」
경주 일대는 화강암(花崗岩)이 많은 분지(盆地)이고 <모래내> 사천(沙川)은 보통명사에 가까운 지명이다. 화강암이 기반암인 나라에서 흔하디 흔한 지명이 사천이다. 동량면 대전리 사천마을을 우리말로 <모라내>라 한다. 실제로 이곳을 가면 모래가 하천에 듬성듬성 쌓여있다. 대전천(大田川)이 지나는 금가면 사암리 기곡마을부터 하류는 더 심하다. 경주의 사량부(沙梁部)와 사천(沙川)을 사천개와 결부(結付)시킨게 아닌가 한다.
진흥왕이 소경을 설치하고 신라의 귀족층을 이주시켰는데 경덕왕이 중원경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학계에서는 중원경의 위치를 충주 중심가가 아닌 중앙탑이 있는 곳으로 보고 있다.
용산동(龍山洞)은 충주에서 가장 오래된 곳이고 한때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고 전한다. 땅을 파면 오래된 기와 조각이 흔하게 나온다 한다. 그리고 지금 지현동, 문화동을 아우르는 큰 동(洞)이었다. 1960년, 1970년대만 해도 담배 수매철이면 돈으로 흥청거리던 곳이다.
1872년 지방지도 충주목 부분.
남변면(南邊面) 자관남거십리(自官南距十里) 면내각리 중부 성내(面內各里 中部 城內) 남부 용산 상단 하단 풍동(南部 龍山 上丹 下丹 楓洞) 서부 달천 관산(西部 達川 觀山)
편호 일천칠십사호(編戶 一千七十四戶, 1,074호)
인구 남 일천사백구십육구 여일천이백육십구(人口 男 一千四百九十六口 1,496구, 女一千二百六十口, 1,260구)
사직단(社稷壇) 자관서거삼리(自官西距三里), 사직단은 위치가 잘못 그려져 있다.
빙현(氷峴), 사천(泗川), 소제(小堤), 대제(大堤)가 보인다.
동문리(東門里) 옆에 지상정(池上町)이 보인다.
이케가미초가 된다. 지상정(池上町)이라 쓴 곳에 충주시내 유일한 박샘이 있다. 흔히 용산동 박샘이라 하는데 성남동(城南洞)에 있다. 동문리는 충주읍성의 동문이 있어 유래하였고 지금 동촌(東村)마을에 해당한다.
충주읍성에 사대문이 있었는데, 동문은 조양문(朝陽門), 남문은 봉아문(鳳阿門), 서문은 휘금문(輝金門), 북문은 경천문(敬天門)으로 불렀다 한다.
「사문즉 동왈조양 서왈휘금 남왈봉아 북왈경천(四門卽 東曰朝陽 西曰輝金 南曰鳳阿 北曰敬天)
상량문(上梁文)
조양문 상량문 : 계존음우지우 피상두이태철 취저조양지의 개오동의시생 북공이성중환 동개약수만절 (朝陽門 上梁門: 戒存陰雨之虞 彼桑圡而迨撤 取諸朝陽之義 盖梧桐矣是生 北拱而星衆環 東開若水萬折)
휘금문 상량문 : 복이 충신위노조가명어산하 성덕재금납휘광어일월 개합종편 왕래불궁(輝金門 上梁門 : 伏以 忠信爲櫓肇嘉名於山河 盛德在金納輝光於日月 開闔従便 徃來不窮 )
봉아문 상량문: 복이 협통금우의동관어촉도 문제봉조 남풍권아 실지방림 익연사혁 (鳳阿門 上梁文 : 伏以 峽通金牛擬東関於蜀道 門題鳳鳥詠南風於券阿 室之方臨 翼然斯革)
경천문 상량문 : 복이 황도위경진 지중관백이험 단성공극경 천체명만억년 거두지남 약성환북 (敬天門 上梁文 : 伏以 黃圖衛京秦 地重関百二險 丹誠拱極敬 天体命萬億年 居斗之南 若星環北)
※풀이
조양문(朝陽門) 상량문(上梁文)
경계함은 날이 흐리고 비가 올 때를 근심함에 있으니 저 뽕나무 뿌리를 비 오지 않을 제 거두고, 조양(朝陽)의 뜻을 취함은 대개 오동(梧桐)에서 나왔네. 북으로 에워싸며 별들이 둘러 있고, 동문을 여니 물길이 만 번 꺾여 있는 것 같다.
조양문은 동문(東門)으로 음양오행에서 木에 해당되고 色은 靑色이며 左靑龍, 인의예지신 오상(五常)에서 인(仁)은 木과 東에, 의(義)는 金과 西에, 예(禮)는 火와 南에, 지(智)는 水와 北에, 신(信)은 土와 中央에 연결된다.
조양(朝陽)은 시경 권아(卷阿)에서 따온 것이고 오동(梧桐)도 마찬가지이다. 충주 동문(東門)은 마스막재로 통하는데 오동산(梧桐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 계명산이다. <山川 梧桐山. 在州東七里. 신증동국여지승람>
이 산에 실제로 오동나무를 많이 심기도 했고 유교경전의 구절에서 따서 산이름을 지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梧桐生矣(오동나무 파릇파릇).
※참고:◦桑土綢繆(상두주무)- 새는 폭풍우(暴風雨)가 닥치기 전(前)에 뽕나무 뿌리를 물어다가 둥지의 구멍을 막는다.
◦시경 대아 권아 - 鳳凰鳴矣(봉황명의) 于彼高岡(우피고강) 梧桐生矣(오동생의) 于彼朝陽(우피조양).
◦논어 위정편: 정치를 하되 덕으로써 하는것은 비유하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나머지 모든 별이 그를 중심으로 고개를 숙이고 도는 것과 같다. 子曰 爲正以德 譬如北辰居其 所以衆星公之.
휘금문(輝金門) 상량문(上梁文)
복이(伏以) 충성과 신의가 망루[樓櫓]가 되어 아름다운 이름을 산하(山河)에 여니, 성한 덕[盛德]이 쇠[金]에 있으므로 빛나는 빛을 일월에서 간직하네. 열고 닫음이 편리하고, 가고 오는 것이 다함이 없네.
오행에서 西는 義와 金, 白과 右白虎에 해당된다.
※참고: 복이(伏以)는 상량문이나 축문, 혼서지(婚書紙), 관찰, 관에 올리는 문서에서 상투적으로 쓰던 말이다. 상량문은 엎드려 읽는다고 하면 복이(伏以)란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특별히 해석하지 않아도 될 말이다.
봉아문(鳳阿門) 상량문(上樑文)
복이(伏以), 골짜기는 금우(金牛)로 통하고, 동쪽 관문은 촉도(蜀道)에 비기고, 문은 봉새라 지으니 권아(卷阿)에서 남풍가(南風歌)를 읊었네. 건물에 바야흐로 임하니, 날개를 펼친듯 깃을 치는듯 하다.
※참고 : 협통금우(峽通金牛)는 금우협(金牛峽)을 지나 촉(蜀) 땅으로 통한다는 의미.
익연사혁(翼然斯革)은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간(斯干)에 나온다. 여기사익(如跂斯翼) 여조사혁(如鳥斯革)
남문(南門)을 봉아문이라 한 것도 시경 권아(卷阿)에서 따온 것이다. 권아(卷阿)는 굽이진 언덕의 뜻이다. 南은 오행으로 火와 赤色, 禮에 해당되고 사신도(四神圖)에서 南朱雀이라 한다. 朱雀은 붉은 봉황(鳳凰)이라 한다. 남문(南門)은 용산(龍山)과 대림산(大林山)을 바라보았지만, 충주 남산을 금봉산(金鳳山)이라 했으므로 이를 의식한 것이다. 그리고 왜 남산(南山)이라 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山川 金鳳山. 在州東五里.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천문(敬天門) 상량문(上梁文)
복이(伏以) 황도(黃圖)가 경성을 호위하여 진(秦)나라를 백 두겹을 거듭 잠가서 험한데, 붉은 정성이 임금을 껴안아서 하늘을 공경하니 천명(天命, 天休命)이 만억 년이라. 북두성의 남쪽에 거하여, 별들이 북으로 둘러있음과 같네.
※참고: 경천근민(敬天勤民), 용비어천가 125장. 호서읍지 (1870년)」
일제시대 충주읍성 사진이라 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요즘에 보기 힘든 철비(鐵碑)가 보인다.
대수정(大手町), 천정(泉町), 중정(仲町), 금평정(琴平町), 천기정(川崎町)이 보인다.
대수정은 오테마치, 중정은 나카마치, 금평정은 고토히라초, 천기정은 가와사키마치라 읽는다.
사진 아래 서부동(西部洞), 남부동(南部洞) 아래 충주교(忠州橋)는 지금 용산교(龍山橋)에 해당된다. 흔히 지곡다리라 부른다.
용산교 건너 시장을 이라 했는데 2017년에 으로 이름을 바꾸고 시설을 현대화 했다. 남부시장 일대는 남변면(南邊面) 지역으로 호서읍지(1871년)에 남부(南部)로 나온다. 남부시장 이름속에 조선후기 마을이름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남부리(南部里), 남부동(南部洞)이라 했는데 1914년 용산리(龍山里)에 편입되었다. 이 지도는 1916년 측도하고 1917년 제판하였는데 남부동, 서부동이 괄호로 표시되어 있는 것은 법정리(法定里)인 용산리(龍山里)에 편입된 것을 나타낸다.
「 湖西邑誌(1871年) 坊里 南邊面 南部 自官門南門外 龍山里 自官門南門外 中南部 自官門一里 西部 自官門西門外」
용산리(龍山里), 전매과출장소(專賣課出張所)가 보이는데 잎담배를 수납했던 전매청(專賣廳) 자리다.
1960년대 지현천변 모습. 작은 언덕 능선으로 봐서 남부시장 조금 아래쪽이다. 이 때는 산이 온통 헐벗었다.
출처: 사진으로 본 충주 100년사
<충주관찰지, 1931년>
탄금대 위쪽에 남한강(南漢江)이라 쓴 글자가 보인다. 언제부터 남한강(南漢江)이라 했는지 논란이 있다. 남한강 이름을 딴 남한강 초등학교는 1965년부터 문화동에 있다가 2020년 호암동으로 옮겼다.
탄금대앞 신촌마을에 井자 부호는 우물을 가리킨다.
하방마을에도 井자 표시가 있는데 우물을 가리킨다. 봉방동(鳳方洞)은 봉계(鳳溪)와 방정(方井)에서 한 자씩 따온 동이름이다. 방정(方井)이란 네모난 샘이란 뜻이고 봉방동(鳳方洞) 일대는 저지대(低地帶)라 지하수원(地下水源)이 풍부한 곳으로 하천변에는 자연으로 물이 용출(湧出)하는 곳이 많다.
지도 중앙 봉계마을 개천변 반원모양 기호는 물방앗간으로 일본어로 수차방(水車房)이라 한다.
<1910년 측도, 1913년 제판 조선오만분일지형도 2차지도 충주도엽>
용두리와 만적동 사이 지금 교통대 앞 마을이름이 수차동(水車洞)이다. 가타카나로 스추쿠톤이라 음표기했다. 물방앗간이 있어 유래한 이름이다. 물방아는 수대(水碓)라 했고 물레방아는 수차(水車)라 했으나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수대(水碓)는 방아에 수차(水車)는 물레바퀴에 주목하여 지은 이름이다. 수차는 무자위에 쓰여 논에 물을 양수(揚水)하는데 썼다.
노은면 안락리 본평마을 물레방아, 1960년대.
출처 : 노은면지(2013년)
대가미연못이 위쪽에 있다. 2003년에 매립하여 대가미체육공원으로 바뀌었다.
대가미제언(大加味堤堰)은 면적 356평으로 245두락을 관개(灌漑)하고 있었다.
[한국충청북도일반] 충주시편(1909년).
---> 충주방언으로 묘(墓)를 <모이>라 한다. 수안보 조정철(趙貞喆)묘를 <조감사모이>라 한다. 대가미의 유래도 대감(大監)을 지냈던 인물의 묘가 있어 유래했다 하는데 근거가 있다. 대감묘, 대감모이에서 대감미, 대가미로 변한 말이다. (모이에서 모의 오음이 생략되면 미가 된다. 그러니까 묘(墓)를 발음하기 어려우니 풀어서 모이가 되고 줄여 미가 된 것이다. 그리고 대감미에서 감의 ㅁ이 생략되어 대가미가 된다.)
김씨 집안에서 묘를 많이 쓴 곳이라 란 지명이 있다. 김가묘(金哥墓)께의 방언이다. 金은 중국어로 진이다. 김가모이, 진가모이, 진가미, 진개미. 대가미를 대개미로 부르는 노인들도 있다. 움라우트현상이다. 1916년 당시만 해도 탄금대를 비롯 곳곳에 묘른 쓴 게 보인다. 2000년도 초반만 해도 예성초등학교 병설유치원앞 소공원에 묘가 있었다.
중앙 왼쪽에 대수정 다리가 보인다. 대수정다리 주변 건물은 오래되어 2025년부터 철거하였다. 아래 일출교(日出橋)는 지금 성서교(城西橋) 부근이다. 일출교 옆 토굴(土窟) 모양 기호는 기와를 굽던 와요(瓦窯)나 도자기를 굽던 도자기요(陶磁器窯)라 한다.
청주시 도심 가까운 곳에 기와를 굽던 와요(瓦窯)가 있었다. 충주의 경우도 기와를 굽던 와요(瓦窯)라고 본다. 당시 기와에 대한 수요가 높았고 왜사기(倭沙器)가 도입되고 조선에서도 왜사기 공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최근지충주,1915년] 를 보면 읍내면 용산리 산본기와공장(山本蓋瓦工場)이 나온다. 업주(業主)는 야마모토 하치로(山本八郞)이고 당시엔 지현동, 문화동 지역도 용산리에 속했고 기와공장이 있는 곳은 지금 한양프라자 성서교(城西橋) 건너 지현동 은혜삼겹살 인근이다.
지금도 기와를 굽고 제작하기가 훨씬 쉽다. 우선 재료인 흙을 고르기가 까다롭지가 않다. 도자기 원료가 되는 태토(胎土)는 특정 지역에서 구할 수 있고 고열(高熱)에서 구워지므로 불을 지피는 나무의 수요(需要가 많다 하겠다.
[한국충청북도일반, 1909년] 충주군편을 보면 도자기는 지금 신니면 광벌(廣伐)과 내포(內浦), 앙성면 산정(山亭)에서 만들고 있었다.
5. 기와(瓦)
기와는 옛날부터 그 산출량이 많지 않고, 겨우 지역에서 쓰일 수요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토질이 매우 좋고 또한 원료가 풍부하여, 대규모 공장을 설비하고 임금이 싼 조선사람을 부려서 제조에 착수한다면 장래 유망한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판매 경로는 제천 부근, 단양 방면, 괴산 방면, 한강 연안 지방으로 보급할 수 있다.
현재 읍내면 용산리 산본기와공장(山本瓦工場)의 생산액을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연도 1913년 1914년 1915년
금액 800원 1,000원 1,500원(예상)
[최근지충주, 1915년]
대수교(大手橋)뿐 아니라 일출교(日出橋), 천정교(泉町橋), 충주교(忠州橋)는 나무로 된 목교(木橋)라 한다. 아래 사진을 참고하면 이해가 쉬울듯 하다.
<일제시대 목교(木橋), 인터넷자료>
오른쪽 천정(泉町)이라 쓴 글자 아래 기호 市는 시장(市場)을 나타낸다. 일제시대부터 충주장(忠州場), 읍내장(邑內場)이라 했고 해방후에도 충주장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자유시장(自由市場)이라 한다.
<1915년 측도, 1916년 제판한 조선오만분일지형도 3차 충주도엽>
비슷한 시기 <1: 10,000 지형도, 충주도엽>과 비교하면 시장(市場)을 표시한 기호 市 위에 이를 뒤집은 기호가 나오는데 도수장(屠獸場)을 가리킨다. 84라 쓴 곳은 대수정 다리가 된다.
<충의동 일대에는 쇠전거리, 싸전거리, 포목전이 형성됐고 교현천 제방에는 나무전이 진을 쳤다.>는 기사가 있는데 싸전거리는 충인동 자유시장 제2주차장 인근으로 충인동 25번지 일대를 말하고, 고추전, 포목점도 충인동에 있다.
쇠전거리는 충주풍물시장이 열리는 충의교 인근 천변이다. 충의동에 197년대 중반까지 우시장(牛市場)으로 있다가, 위생문제를 이유로 안림동(安林洞)으로 옮겨갔다가, 1980년대 남산아파트 건축으로 단월동 풍동 지금 충주축산농협 인근으로 옮겼다.
<1958년 중앙공설시장 모습>
오른쪽 멀리 보이는 산은 대림산이고 제1로타리에서 바라본 중앙시장이다. 사진 중앙에 <충주중앙공설시장>이라 써 있다. 줄여 중앙시장이라 불렀는데 2025년 철거를 시작하여 지금은 도심 주차장으로 변했다.
출처: 사진으로 보는 충주 100년사.
사진 중앙 건물이 우시장이다.
보통학교 왼쪽 文자 기호는 학교(學校)를, 아래 卍자는 불우(佛宇) 즉 절을 가리킨다. 군청(郡廳) 아래 사내정(寺內町)이 보인다. 일본어로 테라우치마치라 한다. 사내정(寺內町)으로 쓰고 군청 가까운 수비대 옆에 사원이 있었다는 것은 이 사원(본파 본원사 충주 포교소)의 위상을 보여준다. 관의 비호를 받고 활동했음을 말해준다. 일제시대 일본에 뿌리를 둔 여러 불교 포교소는 무슨 역할을 했을까? 관련하여 논문을 인용한다.
「일본불교는 해외·식민지의 일본인 사회 건설 초기부터 법회, 강연회와 장례와 제사 등의 종교적인 활동뿐만 아니라 교육, 자선사업, 감옥교화(敎誨), 군대위문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지역사회와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었다. 사원의 경영은 해당 지역사회 신도의 기부금, 본산(本山)의 지원금, 각종 사업의 수입으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수입은 신도들의 기부금이었다. 해외·식민지 일본인 사회는 기부금을 통하여 사원경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를 종합하면 일본불교의 다양한 활동들이 일본인 사회의 정착과 안정에 기여하였고, 동시에 일본인 사회의 안정은 기부금을 통해 다시 일본불교 사원의 안정과 발전으로 이어지는 상호보완적 관계였다.」
1915년 발행한 [최근지충주]를 보면 충주 선종포교소(忠州 禪宗布敎所) 포교사(布敎師) 시미즈 모토오(淸水機雄)가 나온다.
「 충주에는 1912년 선종포교소가 문을 열었고, 1913년 11월 시미즈 모토오(淸水機雄) 포교사의 부임이래 그 교리 보급에 쉴 새 없이 노력하고 있으나 ... 」
1931년 [충주관찰지(忠州觀察誌]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 본파 본원사 충주 포교소: 1915년 본파(本波)의 승려 사토 기요노부(佐藤淨信)가 충주에 와서 홀로 포교를 하며 다른 이들에게 본원(本願)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염불을 널리 미치도록 하는데 전념하였다.
1915년 9월에는 총독부령(총독부 관보 제1266호를 보면 대정5년(1916) 10월 8일에 포교소설립허가를 받는다.)에 따라 개교하고 본부의 인가를 얻어 공인되어 본파 본원사 충주 포교소(진종본원사파)의 개설을 보게 되었다. • • 중략 • • 1928년 군청 구내에 있던 지금으로부터 1,200년전의 대금불석가상을 경내(境內)에 봉안하여 매년 4월 8일 석가탄신법회를 열었으며, 조선인과 일본인 선남선녀의 참배객이 많았다. 」
---> 본파 본원사는 서본원사(西本願寺, 니시혼간지)이며 정토진종계열이다.
조동종 예성사: 충주 시가지의 북쪽 끝 교현천 하천 기슭에 앵두나무 울창한 곳에 하나의 가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조동종(曹洞宗) 예성사(蘂城寺)이다. 1911년 나가노현(長野縣) 사람인 시미즈 키오(淸水機雄) 포교사가 도(道)를 설하고 법(法)을 가르쳤다. 불제자인 기웅사(機雄師)는 지역주민들의 간청으로 금정(錦町) 안쪽 통로에 포교소를 두고... 」
1910년 측도하고 1913년 제판한 조선오만분일지형도 2차 지도에는 보이지 않고, 1915년 측도하고 1916년 제판한 조선오만분일지형도 3차 지도에 卍자 기호가 나온다. 위치는 지금 성남동(城南洞) 169번지(삼익캐슬 앞) 일대가 된다.
일제시대 일본인이 세운 본원사(本願寺)가 제2로타리 보성한의원 인근에 있었다고 하는데 서본원사 충주포교소다. 본원사는 [충주관찰지(忠州觀察誌), 1931]에 수록된 <충주가도(忠州街道)>에 나온다.
이 부분은 좀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1917년 대전도엽(大田圖葉)을 보면 동본원사(東本願寺)가 보이고, 같은해 청주도엽(淸州圖葉)을 보면 동본원사포교소(東本願寺布敎所)가 보인다. 동본원사(東本願寺)는 일본에 뿌리를 둔 정토진종(淨土眞宗) 종파(宗派)다. 동본원사(東本願寺, 히가시혼간지)는 정토진종 대곡파(大谷波, 오타니파)라고도 한다.
본원사(本願寺)는 나중에 마하사(摩訶寺)가 된다. 본원사에는 지현동(芝峴洞) 대원사(大圓寺) 충주 철조여래좌상(忠州 鐵造如來坐像)이 한때 모셔져 있었다한다. 서본원사 충주포교소가 나중에 본원사가 되었는데 <충주관찰지 수록 충주 시가도, 1931년>에 위치가 잘못되어 나온 것일까?
그럼 1:10, 000 지형도(1916년 측도)와 조선오만분일지형도 3차지도(1915년 측도)에 나오는 卍자 기호는 무얼 가르키는 걸까? 군청과 수비대와도 가깝다. 본파 본원사 충주포교소(서본원사)가 맞는 것 같다.
제2로타리 보성한의원 인근에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일제시대 영정(榮町) 116번지에 서본원사 충주포교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성남동 116번지로 보고 위치를 추정하면 제2로타리 보성한의원 인근이 맞다. 아래 충주시가도에는 본원사가 금정(錦町)에 보인다.
본원사가 왜 세군데나 있을까? 조선총독부 관보를 살펴보면 일본에서 건너온 본원사 포교소의 활동이 전국에 걸쳐 있었다. 이외에도 금광교(金光敎), 천리교(天理敎)까지 진출했다. 지금도 종교활동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고 포교소도 곳곳에 난립하고 없어지기도 하며 개중에 정식으로 등록이 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명칭과 소재지에 혼란이 생기는 것 같다.
「 조선총독부 관보 제1053호
발행일: 大正5年 2月 9日 ( 1916년 02월 09일 )
기사제목: 既設布教所屆出 대정4년 12월 23일 조동종 충주포교소 충주군 읍내면 충주읍 시미즈 키오(淸水機雄) ---> 기설포교소계출(旣設布敎所屆出)이란 기존에 설치되었던 포교소를 관(官)에 신고했다는 뜻 같다. 1912년 충주에 선종포교소가 문을 열었고 시미즈 키오(淸水機雄)가 대정4년 1915년 12월 23일에 조동종(曹洞宗) 충주포교소를 신고했으며 1916년(대정 5년) 10월에 예성사(蘂城寺)를 건립하였고, 1917년(대정 6년) 7월 사원창립허가가 나온다. 지금 성내ㆍ충인동행정복지센터 인근이 된다.
조선총독부 관보 제1162호
발행일: 大正5年 6月 19日 ( 1916년 06월 19일 )
기사제목: 布敎屆出 眞宗本願寺派 忠州郡 카토 키요노부(佐藤淨信)
조선총독부 관보 제1266호
발행일 : 大正5年 10月 21日 ( 1916년 10월 21일 ) 기사제목: 布敎所設立許可 本派本願寺忠州布敎所(眞宗 本願寺波)
조선총독부 관보 제1347호
발행일: 大正6年 2月 2日 ( 1917년 02월 02일 )
기사제목: 布敎擔任者屆出 本派 本願寺 忠州布敎所(眞宗 本願寺派) 忠州郡 카토 키요노부(佐藤淨信)
조선총독부 관보 제1955호
발행일:大正8年 2月 15日 ( 1919년 02월 15일 )
기사제목: 布敎者死亡 대정 12월 27일 眞宗本願寺派 忠州郡 카토 키요노부(佐藤淨信)
조선총독부 관보 제1990호
발행일: 大正8年 3月 31日 ( 1919년 03월 31일 )
기사제목: 布敎擔任者變更 本派 本願寺 忠州布敎所(眞宗 本願寺派) 忠州郡 카토 키요노부(佐藤淨信)에서 오오츠 타가오(大津隆雄)로 변경.
조선총독부 관보 제2069호
발행일: 大正8年 7月 4日 ( 1919년 07월 04일 )
기사제목: 布敎擔任者變更 本派 本願寺 忠州布敎所(眞宗 本願寺派) 忠州郡 오오츠 타가오(大津隆雄)에서 오다 켄준(小田賢順)으로 변경.
<충주시가도, 1931년>을 보면 본원사(本願寺)는 제2로타리 지나 사직로 방향으로 조금 가서 있었다. 금정(錦町)에 해당된다. 아래에 설명하지만 위치가 잘못 표시된 것으로 봐야 한다.
충주 철불좌상 1916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
장소는 충주 군청내 정원같다. 같은 년도 1916년에 찍은 사진에 청령헌 건물이 나오는 철불상 오른쪽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충주발전지(1916년)에도 뒷배경이 같은 사진이 나온다. 아래 사진과는 뒷배경이 다르다. 철불좌상 뒤로 수건이 걸려있는 것으로 봐서 누가 기숙하는 집으로 보아야 한다. 충주군청 구내에 있었다고 하니 숙직(宿直)하는 건물로 보는게 맞다.
충주 철불좌상 1933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유리건판.
간판에 <충주불교부인회>라고 써있다. 장소는 영정(榮町) 116번지 서본원사 충주포교소이다. 철불상 뒷편 나뭇가지 사이로 본원(本願)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 진종본파 본원사 포교소(眞宗 本波 本願寺 布敎所)라고 써 있다.
지금 대원사에 모셔져 있는 충주철조여래좌상의 이동 동선(動線)을 살펴보면 흥미진진한 충주의 역사 한 단편이 드러난다.
오랜 세월 충주 공고 인근 노천에 있다가 일제시대 충주군청 정원내(1915년 이전,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의 조선사적유물조사와 그의 행적 -1915년(4월 22일~8월 2일)을 中心으로- 참고)로 이전하였고, 1928년 영정 116번지 서본원사 충주포교소(나중에 마하사로 이름을 바꿈)로 옮겼다가, 1959년 대원사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주군청 정원에서 10년 이상 세월을 노천에 있었다는 건 의문이다. 잠시 충주군청 정원에 있다가 1916경 만든 지도(조선오만분일지형도 3차지도, 1: 10,000 축척 지도)에 卍으로 표시된 본파 본원사 충주포교소에 잠시 옮겼다고 봐야 한다. (충주관찰지에는 군청구내(郡廳構內)로 나온다.
기구한 운명을 겪고 전설까지 서려잇는 그 사연을 살펴본다.
[철조여래좌상은 원래 염해평 서쪽 현재 충주공고 운동장 북쪽 길가에 서쪽을 향해 봉안되어 있었다. 간혹 불상이 노천에 방치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사람들이 건물을 짓고 철조여래좌상을 봉안하면 당우가 소실되었다고 한다. 향불을 피우고 예불을 올리면 꼭 괴질이 유행하므로 이 철조여래좌상을 광불이라 불렀으며 그 거리도 광불거리라 불렀다고 한다. 본래 완전했던 철불의 두 손을 어떤 무뢰배가 부숴 버렸다고 전해진다.
(중략)
철조여래좌상은 보호각도 없이 대원사 경내에 모셔져 있다가 1982년 대웅전 오른쪽에 단칸의 보호각을 건립하였다. 이후 1994년 누전으로 인한 화재로 보호각이 소실되고 철조여래좌상도 일부 손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불과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시골에서는 여러 민속(民俗)이 행해졌다. 마루위 안방을 드나드는 문위 지붕밑에는 성주신을 모셨고, 뒤안 장독대 옆에는 터주신을 짚으로 터주가리를 만들어 모셨다. 그 밖에 민간신앙은 여러 가지였는데 충주공고 옆 노천에 방치된 광불(狂佛)은 오랜세월 그 일대에 살던 수많은 민초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이자 의지처로 위해지고 보호되어 왔다.
고려초기에 조성되었다 하니 그 자세한 사연은 수수께끼이나 한 때 사찰에 봉안되어 예배의 대상이 되었겠고 절이 폐사된 이후에는 어느 사찰에 옮겨져 봉안되었을 법한데 노천에 방치된채 모진 세월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당우를 짓고 봉안하면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것은 노천에 허름하게 짓고 축원하느라 촛불이나 등불을 켜두었기 때문일것이다. 향을 피우고 예불을 올리면 괴질이 돌았다는 소문도 화재를 염려한 비방(秘方)으로 봐야 한다. 일제시대 사진을 보면 태반이 초가집이었다. 6.25사변때도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대원사로 옮겨지고도 화재로 일부 소실되는 화(禍)를 입었다고 하니 중생구제를 위해 조성될 때를 비롯하여 지옥의 불세례를 여러번 겪고도 살아난 셈이다.
소화 8년(1933년)도 고적조사 복명서 충청북도고적유물 보존상황 조사 충주 남문밖 철불상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소재지가 충주읍 영정 116번지 서본원사 충주포교소내이다. 소화 3년(1928년) 4월 20일 서본원사 포교소 본당전(前)으로 이전하였다고 나온다.
「등록번호 제36호 충주 남문 외 철불상
소재지: 충청북도 충주군 충주읍 영정 116번지
서본원사 충주포교소 내
소화 7년(1932년) 12월 27일자 충북지사 보고에 의거 등록
대장(기록대장)에 기재된 소재지에 현재 존재함
사유: 소화 3년(1928년) 4월 20일, 충주읍내 영정 116번지 서본원사 포교소 본당 앞에 이전함
현상: 비고와 같이 서본원사 충주포교소 본당 앞 우측에 위치, 높이 약 2척 23촌 (하부 콘크리트로 덧입혀 불명확) 방(方) 2척,
양면에 문자를 새기고 석단 위에 두었으며, 그 위에 좌대를 놓음. 」
충북유물부근지적도: 충주읍내 철불좌상 부근 지적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1. 일본인 포교 도내에는 신도(神道) 2개교, 불교 8종파가 있으며,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대곡파(大谷波)이며, 포교현황은 다음과 같음.
<충청북도요람, 제7장 종교. 1928년>
동본원사(東本願寺, 히가시혼간지)는 일본불교 정토진종 대곡파(大谷波)로 오타니파라 하며 부산을 시작으로 목포 등 주요 개항지에 세워진 일본사찰이며 동본원사 목포별원이 유명했다.
그리고 서본원사(西本願寺, 니시혼간지)는 진종본묘(眞宗本廟) 혹은 정토진종(淨土眞宗) 혼간지(西本願寺)파이며 서본원사 부산별원, 서본원사 인천포교소가 큰 활약을 하였다.
충청북도에서는 오타니파 동본원사(東本願寺)가 세력이 크다고 했다. 포교소, 포교사 수(數)에 있어 숫자가 많지만, 표를 보면 진종 본원사파인 서본원사(西本願寺) 신도수(1,429명)가 더 많다. 위 표에서 진종본원사파는 서본원사(西本願寺)를 말한다. 」
우체국 옆 왼쪽 기호는 은행을 나타낸다. 지금 안경나라와 복서울해장국집이 있는 성내동 428번지(지도에 빨간 정사각형으로 표시된 곳)에 1906년 9월 20일 <충주농공은행(漢湖農工銀行)>이 개업하여 1918년 10월 30일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1933년 12월에 바로 앞 성내동 243번지에 신축하였다 한다.
해방후 조선상호은행, 한국상공은행, 한국흥업은행, 한일은행 충주지점 건물로 쓰였다 한다.
1917년 1:10,000 대전도엽을 보면 한호농공은행(漢湖農工銀行)이 보인다. 충주도엽은 1916년 측도(測圖)하고 1917년 제판(製版)하였으니 <한호농공은행 충주출장소>가 맞다.
[한국충청북도일반] 충주시편(1909년)을 보면
<한호농공은행(漢湖農工銀行) 충주출장소(忠州出場所)가 1906년 9월 20일 개업한거로 나온다. 이것는 오류다. 1906년 9월 20일 개업한 것은 <충주농공은행>으로 봐야 한다.
인터넷에 소개된 여러 자료를 보면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을 설명하면서 1906년 3월에 <농공은행조령>이 제정되고 1907년 <충주농공은행>이 설립되었다가 같은 해 6월 <한호농공은행>과 합병하여 <한호은행 충주지점>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무언가 혼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르게 잡으면 다음과 같다.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은 1906년 3월에 <농공은행조령>이 제정되고 1906년 9월 20일 <충주농공은행>이 설립되었다가 1907년 <한성농공은행>에 합병되면서 <한호농공은행 충주지점>이 되었다. 1908년 9월에 출장소로 격하되기도 하였고, 1912년 8월부터 영업소 신축에 착수하여 11월에 현 성내동 428번지에 완공되었다. 1918년 6월 <조선식산은행령> 공포(公布)에 의해 1918년 10월 30일에 식민지 산업금융기관인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33년 12월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을 현재의 자리(성내동 243번지)에 신축하였다.
[농공은행은 1906년 3월에 제정, 공포된 「농공은행조례」에 의거해 전국 주요 도시에 설립되었던 지방은행이다.
1906년서울에 한성농공은행을 시작으로 평양·대구·전주·진주·광주·충주·해주·경성(鏡城)에 각각 설립되었고, 1907년에 공주·함흥 등 모두 11개의 농공은행이 설립되었다.그러나 1907년 충주농공은행·공주농공은행이 한성농공은행에 합병되면서 한호농공은행(漢湖農工銀行)으로 개칭되었다. (한성과 호서에서 한 자씩 따옴)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의 업무를 대행하게 되면서 일본인들의 식민지 정착을 위한 농토 구입자금까지 공급하였다. 1918년 농공은행을 모체로 한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이 설립되면서 이에 흡수, 해체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농공은행(農工銀行) 항목 참고.]
아래에 오처정(吾妻町)이 보인다. 아즈마마치라고 읽는다.
용산동 전매과출장소 건물옆 세 개의 기호는 창고(倉庫)를 나타낸다. 큰 창고 2개와 작은 창고 1개가 보인다. 큰 창고 2개는 엽연초(葉煙草)를 수매(收買)하여 보관하는 창고 같다.
연수동 동수마루 동쪽에 분묘(墳墓)들이 보인다. 이 곳은 충북원협 인근 남쪽이 된다. 연수동 고묘군(古墓群)이라고 발굴 조사되었다. 주소지는 충북원협 뒤쪽이 된다. 연수동 토박이분에게 물으니 공동묘지가 있었다 한다.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국립충주기상과학관 위쪽으로 공동묘지가 있는데 <연수동 뒷산 공동묘지>라 한다.
국립충주기상과학관과 주위에 있는 연수자연마당(충주 동수근린공원)은 2020년에 정식 오픈했는데 발굴보고서 [충주 동수근린공원 조성부지내 연수동 유적, 2020년]을 보면 신라, 고려시기 묘(墓)와 부장품(副葬品)이 출토되었다. 오래전부터 묘(墓)를 썼던 곳이다.
이 곳은 충주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계명산 산록(山麓)에 위치하고 겨울에도 따듯한 남향(南向)이다. 명칭이 동수근린공원이지 아파트 단지에 가려서 동수마을과는 멀게 느껴진다.
1970년대 말경 동수마을 입구에는 제재소가 있었다. 한양 하이츠 빌라가 1987년 준공되고 낙원아파트가 1993년 5월에 입주하였으니 동수마을 일대는 1980년 중반부터 변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중반이후 현대힐스테이트, 계룡 리슈빌 1차, 세영리첼 아파트가 인근에 들어서면서 예전에 과수원과 야산이 있던 연수동 일대는 크게 변하였다. 주변에 여러 상가가 들어선 것은 한참후가 된다.
연수현대힐스테이트 2007년 7월 6일 준공. 11개동 871세대.
연수계룡리슈빌 (1차): 2007년 7월 12일 준공. 7개동 594세대.
연수세영리첼(1·2단지)은 2014년 4월 준공.
<필사본 조선지지자료 1914년>
충주읍(忠州邑), 교현동(校峴洞), 용산리(龍山里).
달천리(達川里), 봉방리(鳳方里), 칠금리(漆琴里), 금릉리(金陵里), 연수동(連守洞), 안림리(安林里), 일부(一部).
이부(二部), 삼부(三部), 동문리(東門里), 남부(南部), 내리(內里), 교동(校洞) 향교골, 야현(冶峴) 불무고개, 주봉(珠峰) 준주봉, 대가미(大加味), 용산(龍山) 지곡(芝谷), 서부(西部)
대제(大堤) 수청골.
달천(達川) 달내, 달신대(達新垈) 달내새터, 봉계(鳳溪) 도리수(島里藪) 도리숩, 상방정(上方井) 상방졍골, 하방정(下方井) 하방졍골, 칠지(漆枝) 옷갓, 신촌(新村) 새말, 금대(琴臺) 탄금대.
도리숩은 지금 도촌(島村)을 말한다.
능암(陵岩) 능바우, 금제(金堤) 쇠주울, 연원(連原) 연원 , 동수(東守) 동수마루.
능암(陵岩) 능바우, 금제(金堤) 쇠주울, 호암(虎岩)은 응골을 말하는데 법정리(法定里) 금릉리(金陵里)에 속한다. 응골은 응달지거나 골짜기 안으로 들어간 마을을 뜻하는데 한자 호암(虎岩)으로 바뀌었다. 조선오만분일지형도 2차에는 호암(虎岩), 3차지도에는 호암리(虎岩里)로 나오지만 이후 사라진다.
어림(御林) 으림.
<충주시구개정도(1912년)>
[충주발전지,1916년]에 수록됨.
충주심상고등소학교, 충주지청관사 왼쪽에 태야정일정목(泰野町一丁目)이 보인다. 태야정(泰野町)은 야스노초이다. 대신궁, 위수분병원(衛戍分病院), 헌병대, 공립보통학교, 금융조합, 수비대가 보인다
<충주시가도(1931년)>
[충주관찰지,1931년]에 수록됨.
충주관찰지에 천리교는 사직산 언덕으로 1924년, 금광교도 사직산 언덕으로 1926년에 이전하여 준공한거로 나온다. 본원사는 1920년 포교소 신축을 발의하고 부지를 기부 받아 이듬해 대정 10년(1921)에 낙성식을 하였다고 나온다. 또 소화 3년(1928년) 군청구내(郡廳構內)에 있던 지금으로부터 1,200년전의 대금불석가상(大金佛石伽相)을 경내(境內)에 봉안(奉安)하여 매년 4월 8일 석가탄신법회를 열었으며라는 구절이 나온다. (원문을 살펴보니 최근에 나온 번역본에 년도와 번역이 잘못 나온다.) 위 [고적조사 보고서, 소화8년(1933년)]에는 철불좌상을 소화3년(1928년) 4월 20일에 서본원사 포교소(영정 116번지)로 옮긴거로 나온다. 그럼 위 [충주시가도]에 나오는 본원사(本願寺)는 위치가 잘못 그려진 것으로 봐야 한다. 서본원사 포교소는 신축한 건물로 [충주관찰지]에 소개될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면 당연 지도에 표시되어 있어야 한다.
대수정(大水町)는 오오미즈초, 금정(錦町)은 니시기초, 본정(本町)은 혼마치, 영정(榮町) 사카에마치로 읽는다. 정(町)은 쵸나 마치로 읽을 수 있다. 대수정(大水町)은 충인동과 충의동, 금정(錦町)은 성서동, 본정(本町)은 성내동, 영정(榮町)은 성남동에 해당된다.
심상고등소학교는 지금 예성공원, 천교(泉橋)는 예성교, 예성사(蘂城寺), 충주역(忠州驛)이 표시되어 있다.
충주역은 1928년 12월 25일 개통되었다. 충주시 시내버스 차고지가 원래 자리이고 1980년 3월 12일 지금 봉방동 위치로 이전하였다. 지금 새로 충주역사를 신축중이나 시공사 부도로 준공이 늦어지고 있다. 충북선 충주역 원래(元來) 자리는 1962년 용산동에서 분동(分洞)하여 역전동(驛前洞)이라 했다가, 1992년 문화동으로 명칭을 개정했다.
지현동에 충주수리조합, 대신사, 천리교(天理敎), 대원사(大圓寺), 금광교(金光敎)가 보인다. 성서교를 지나면 충주전기주식회사, 본원사(本願寺), 옆으로 부산일보지국이, 상무관(尙武館), 충주경찰서가 지금 제1로타리 부근에 있다.
본정으로 가면 공립보통학교, 군청, 공주지방법원충주지청, 식산은행지점, 우편국, 읍사무소, 생견(生繭)
육지면(陸地棉) 공동판매소가 보인다. 생견(生繭)은 생고치를 말한다.
영정(榮町)을 지나 용산동으로 가면 연초경작조합, 경성전매지국 충주출장소, 국자조합(麯子組合)이 보인다. 국자(麯子, 麴子)는 누룩을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