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 영화 <오디세이>를 되세김하다 지난해 쓴 아래 글이 생각나서 올립니다. 묵은 원고를 들추어 보는 재미도 쏠쏠 합니다. 많은 작품을 쓰려고 욕심내기 보다는 오래된 원고를 다시 퇴고하고 다듬는 글쓰기 방법도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영웅이었던 오디세우스가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다(Nobody)'"라고 말하는 장면이 참으로 기가막히는 복선입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길을 잃고 외눈박이 거인(사이클롭스)인 폴리페모스의 동굴에 갇히게 됩니다. 폴리페모스는 거대한 바위로 동굴 입구를 막아버린 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하루에 두 명씩 잔인하게 잡아먹기 시작합니다. 모두가 거인의 밥이 될 위기에 처하자, 오디세우스는 계략을 꾸밉니다. 오디세우스는 거인에게 다가가 자신이 가져온 독한 포도주를 대접합니다.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진 폴리페모스가 고마워하며 답례로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에 대한 보답으로 맨 나중에 잡아먹겠다"고 묻습니다. 이때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이름을 "우티스(Outis), 즉 '아무도 아니다(Nobody)'"라고 거짓으로 알려줍니다. 폴리페모스가 술에 취해 완전히 골아떨어지자,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미리 달궈놓은 거대한 나무 말뚝으로 거인의 유일한 눈을 찔러 장님으로 만듭니다.
비명 소리를 듣고 동굴 주변에 살던 다른 외눈박이 거인들이 몰려와 동굴 밖에서 소리칩니다. "폴리페모스, 누가 너를 죽이려 하느냐? "친구들이여, 나를 죽이려는 자는 '아무도(Nobody)' 아니다!
밖에서 동료 거인들은 "아무도 너를 해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이 내린 벌일 테니 우리도 어쩔 수 없다" 고 소리치며 그냥 돌아섭니다.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때 비로소 살아날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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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가 떠난 자리의 파수꾼들
수필가 정임표
인류의 역사는 거대한 거인들(힘이 센 자들)의 발자국을 따라 흘러왔습니다. 막스 베버가 이름 붙인 이른바 '카리스마적 지배' 시대의 변천사가 곧 인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베버는 "어떤 개인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 짓게 하는 비일상적인 자질"이라고 카리스마를 정의했습니다. 그는 이 자질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았거나(초자연적 신탁), 한 개인의 행동이 영웅적이거나, 혹은 다른 이들에 비해 모범적인 것으로 여겨질 때 인간사회에 대한 개인 '지배의 정당성'이 생긴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인간사회는 왜 이토록 카리스마에 열광하는 것일까요? 또한 그 거대한 카리스마적 존재가 사라진 빈자리를 사회는 또 어떻게 메워가고 있는가요? 인류사를 수놓았던 육체적, 예언자적, 그리고 혁명가적 카리스마의 궤적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 육체적 카리스마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리처드 1세 (사자심왕:獅子心王) 같은 사람은 그들이 타고난 압도적인 신체 능력이나 전술적 천재성으로 집단을 결집시켰으며, 직접 전장에서 가장 위험한 곳을 돌파하며 병사들의 숭배를 받았습니다. 그들의 용맹함은 군대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종교적 아우라로 발전했고, 거대한 종교적·군사적 조직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구약성서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아 그들의 육체를 만든 '신의 피를 이어받은 거인'인 "네피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들이 낳은 자식들은 고대의 용사로서 명성이 자자한 사람들이었다(창세기 6: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의 피를 이어받은" 반신반인에 대한 이런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서 비일비재하게 등장합니다. 인간의 육신이 나약하니 이런 영웅들의 나타나서 인간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라는 우리의 심리가 만들어낸 환영일 것입니다.
- 예언자적 카리스마
그 후 이러한 육체적 힘의 카리스마에 반하여, '신의 뜻'이나 '절대적 진리'를 대변하며 민중의 영혼을 흔든 자들이 나타나는데, 개인의 남다른 영성에 의지해서 하늘의 사명에 의해 부름을 받은 예언자적 카리스마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지도자로 모세 (Moses)가 있고, 동서양의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과 잔 다르크 (Joan of Arc)가 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라는 배경을 뒤로하고, '신의 대변인' 자격으로 노예 상태의 히브리 민족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물리적 무기 없이 오직 '계시'와 '법(십계명)'으로 수백만 명의 운명을 장악했습니다. 잔 다르크 (Joan of Arc)는 평범한 농민 소녀였으나,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는 확신만으로 패배주의에 빠진 프랑스군과 국왕을 움직여, 100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녀의 카리스마는 육체적 힘이 아닌 초자연적인 확신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믿음이 산을 움직인다는 성서적 표현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 혁명가적 카리스마
근세에 들어와서는 "이데올로기를 통한 조직의 장악으로 혁명가적인 카리스마가 등장"하는데,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설계하며, 대중을 열광시킨 인물들이 뿜어내는 카리스마를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소련 공산당을 이끈 블라디미르 레닌, 마오쩌둥, 체 게바라 같은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정교한 이론과 '전위당'이라는 강력한 조직론을 바탕으로 혁명을 이끌었으며, 민중의 분노를 조직화 된 권력으로 변모시켜 낸 현대적 카리스마의 전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오쩌둥은 대장정(Long March)이라는 고난의 여정을 통해 자신을 전설적인 존재로 우상화하는 데 성공했으며, 농민들의 마음을 얻는 '선전 선동'과 '철저한 규율'로 거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을 재편했습니다. 체 게바라는 사후에 더욱 강력해진 카리스마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 사례인데, 혁명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희생정신이 하나의 상징(Icon)이 되어, 국경을 넘어 전 세계 청년들을 결집시키는 힘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베버가 간파했듯, 카리스마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거대한 카리스마가 사라진 자리에는 반드시 '카리스마의 일상화(Routineization)'가 찾아오게 됩니다. 뜨거웠던 혁명의 열기는 차가운 법전과 행정 규정으로 변모하고, 그 자리는 비범한 영웅 대신, 규칙을 준수하는 관료(파수꾼)들이 채우게 됩니다. 이것이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합리적 지배'의 모습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이제 거인의 발자국 대신, 조직화된 시스템이라는 정교한 지도 위를 걷고 있는 것입니다.
-광장의 열기는 영원할 수 없다.
비범한 영웅의 목소리가 잉크 냄새 진동하는 법전의 문구로 박제될 때, 인류 역사는 근대라는 이름의 거대한 기계 안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베버는 이 여행의 끝에서 우리에게 경고를 던집니다. 효율과 계산, 절차만이 남은 세상은 인간을 보호하는 울타리가 아니라, 영혼을 가두는 ‘철의 창살(Iron Cage)’이 될 것이고, 법이 인간의 삶을 보듬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릴 때, 관료제라는 기계는 피도 눈물도 없이 작동한다고 내다 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차가운 창살 안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낼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인가요?“
그 해답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고대하는 영웅이 아니라 ‘법의 가변성(변법)’과 시민의 ‘깨어있는 의식’에 있습니다. 과거의 전통이 "신성불가침의 성벽"이었다면, 현대의 법은 시민의 합의라는 설계도에 따라 언제든 다시 지을 수 있는 건축물입니다. 법은 화석이 되어서는 아니 되고, 시대의 맥박에 맞춰 박동하는 생명체여야 합니다. 구성원들이 현재의 법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낄 때, 그 낡은 법을 폐기하고 새로운 정당성을 부여하는 ‘변법(變法)’이야말로 "철의 창살"에 숨구멍을 내어 인류에게 다시 희망을 꿈꾸게 하는 유일한 길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엄중한 책무를 지는 이들이 바로 정치인입니다. 정치인의 준법의식은 단순한 개인의 도덕성을 넘어, 시스템 전체의 신뢰를 지탱하는 주춧돌입니다. 법을 만드는 이들이 스스로 법의 권위를 무너뜨릴 때, 시민의 자발적 복종은 냉소로 변하고, 사회는 다시 약육강식의 야만으로 후퇴합니다. 우리가 권력을 쥔 자 곧 정치인들로 하여금 '법의 정신" 앞에서 겸허히 고개를 숙이도록 만들어 낼 때, 비로소 법은 억압의 도구가 아닌 공동체의 평화를 지키는 성스러운 약속이 됩니다.
결국, 카리스마가 떠난 황량한 제도 위에 꽃을 피우는 것은 ‘깨어있는 파수꾼(깨어 있는 시민들)들’의 행동하는 양심입니다. 법망의 허점을 찾는 영악한 "법 기술자(율법주의자)"들의 야비한 눈이 아니라, 법의 공정함을 묻는 시민의 눈동자에 더하여, 그 시선을 두려워하며 소명을 다하는 사람의 모습이 합쳐질 때, 거기서 우리를 가두고 있는 철의 창살은 녹아내립니다. 이런 관점에서 섹스피어가 남긴 소설 <베니스의 상인>은 불멸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더 이상 영웅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고대해서는 아니 됩니다. 카리스마적 지배가 사라진 그 자리를 우리가 직접 법의 주인이 되어 매일 조금씩 그 창살의 구멍을 넓혀나가야만 합니다. 깨어있는 나와 당신의 노력이 지속되는 한, 법은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아니고 우리를 더 행복한 세상으로 인도하는 다리가 될 것입니다. 이게 예수께서 크리스마스에 탄생하시어 우리에게 들려주신 거룩한 말씀의 본질입니다. " 네가 대접 받고자하는 그대로 대접하며" , 거짓 선지자들이 "내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미혹되지 말고(마태복음 24:23), 오히려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보시는 이에게 기도하라(마태복음 6:6)"는 그분의 가르침은, 그런 진지한 기도 속에서 우리 내면으로부터 깊은 깨우침(시민 의식)이 일어나게 하여서, 우리를 가두고 있는 모든 엉터리 환상인 우상을 깨부수고, 내 생명이 참으로 귀하고 존엄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카리스마를 만들고 싶어 하는 인간들에게 고합니다.
카리스마는 우상입니다. 예수 그분은 카리스마를 포기하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거인이 떠난 황량한 삶의 들판 위를 꽃피우는 것은, 혁명과 이적을 기다리는 군중이 아니라 제도와 시스템의 모순을 바라보는 깨어있는 시민의 눈동자입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사라진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때때로 '강력한 지도력'에 대한 향수를 느끼기도 하지만 '건전한 법치를 향한 깨어있는 시민 의식'으로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성숙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이러한 '제도적 성숙' 앞에서 갈등하고 번뇌하고 혼돈에 빠진 것으로 진단합니다만 머지않아 이 혼돈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속에 문학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예술은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 속에서 넘쳐 나올때 비로소 살아 있는 목소리가 되는 때문입니다. (2025. 1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