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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진 자
출 9: 1-21
재능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장점입니다.
그 재능이라고 하는 것은 달란트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이며
늘 해도 지치지 않고 힘들지 않고 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에릭 리들이라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육상선수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말하기를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달리기를 아주 잘 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재능이다.
그래서 그 재능을 내가 포기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 조건이 있다. 주일 날 시합하면 나가지 않겠다.
평일 날 나가서 나는 금메달을 따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평일 날 나가서 금메달을 땄다고 합니다.
에릭 리들이라는 육상선수는 신앙을 위해 재능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나중에 중국에 선교사로 가서 일생을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내가 재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한 일이고
그렇게 쓰임받은 것도 중요한 일인데
재능에다 노력을 더해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가장 큰일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분은 빨리 달릴 수 있는 재능에서 시작해서
사명을 완수하려고 선교사로 영혼살리는 일을 하였답니다.
위대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성공하는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하는데 있습니다.
성공은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지만 섬김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김을 통해서 나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명을 이루는 삶이 진정한 가치가 있고
진정한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것 즉 다른 사람은 못하는 것을
무기로 재능 즉 달란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달란트를 통해서 자신의 성공을 이루지 말고
그 달란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사명을 이루어서
정말로 빚진 자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십시다.
빚진 자의 삶으로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셨으니
우리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일생을 바쳐야 합니다.
우리도 삶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이 빚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게서 원하시는 사명을 이루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서서
5번째와 6번째와 7번째 재앙의 이적을 베푸는 내용입니다.
먼저 5번째 재앙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로 앞에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내일 생축에게 악질을 보내겠다고 하라고 했는데
바로가 백성들을 보내지 않으니까
이틀 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악질이 났는데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짐승은 하나도 죽지 않고
애굽 사람들의 생축만이 다 죽어 버렸습니다.
그래도 바로는 마음이 강팍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으니까
다음에는 6번째로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들이 풀무 재를 두 움큼 쥐어서 하늘에 날려라
그러면 그것이 전부 독종이 되어 사람에게 붙어서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도 바로가 말을 듣지 않으니까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하늘에서 우박이 내릴 것이라고 경고하였는데
바로가 경고를 안들으니 하늘에서 우박이 내려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 피했는데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은 종들과 생축을 그대로 들에 두었다가
우박이 떨어져 다 죽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향해 지팡이를 손을 펴자 우박이 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질에 걸리지 안했고
독종에 걸리지 안했고 우박에 맞아서 죽지 않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많은 빚을 졌습니다.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애굽 왕 바로는 그것을 모르고 자기의 위치만 지키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즉 빚진 자로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
즉 애굽 백성들과 짐승들은 죽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짐승은 하나도 죽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많은 은혜을 입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 큰 은혜를 받고
그 은혜 가운데서 출애굽하고 가나안땅에 올라가서 빚진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을 완수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음으로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별로 하나님 앞에 아무 것이 한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값을 받게 하셨음으로
그 분에게 우리는 많은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빚진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가 빚진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1절 2절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네가 만일 그들 보내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잡아 두면 여호와의 손이 들에 있는 네 생축 곧 말과
나귀와 약대와 우양에게 더하리니 심한 악질이 있을 것이며”
어떻게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첫 번째는 말씀에서 하나님을 인정을 해서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야 됩니다.
본문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로에게 들어가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다.
너희가 내 백성보내기를 거절한다고 하면
너희 말과 나귀와 낙대와 우양에게
내일 심한 악질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때가 되어도 보내지 않으니까
악질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오지 않았지만
애굽의 생축에게는 와서 생축이 다 죽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안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있는 모든 애굽 백성의 생축은 다 죽었습니다.
그래도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을 하지 않했습니다.
우리는 내 생각에 맞든지 안맞든지 좋든지 나쁘든지
그것이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 뜻 없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다 이유가 있어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기 때는 부모들이 하시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요?
성가시게 생각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애가 커서 어른이 되면 똑 같은 소리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이 듣기 싫고 내 마음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면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빚진 자로써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많은 빚을 진 자로서 빚을 갚아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먼저 무엇을 해 드려야 되느냐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에서 하나님을 인정을 해서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전도서 12장 13절을 보면
우리가 해야 할 도리가 나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을 지키는 것이
본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을 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것이 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말씀에서 하나님을 인정을 해서
빚진자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22장에 보면 25년만에 어렵사리 얻은 아들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거기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을 하고
그 다음날에 종과 아들과 함께 삼일 길을 걸어갑니다.
아들은 그것도 모르고 따라 가는데 산에 거의 다 와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드릴 재물이 없는대요 라고 아들이 물어보자
네가 재물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다 준비하시겠지 하고 올라갔는데
아브라함의 마음 속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리고는 아브라함은 산에 도착하자 종은 거기에 있으라고 하고
아들과만 산으로 올라갑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안했다고 하면
세상에 25년을 기다리게 하다가 자식을 주고
내가 얼마나 잘못했다고 이 자식을
번제로 드리라고 한데요 이럴수가 있데요
우리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요 아브라함은 아무 말도 안했어요.
실제로 아들을 잡아 죽이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급하게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에게 손을 대지 말라
그래서 뒤를 돌아보니까 어린양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이레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고 하시며
아브라함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에서 하나님을 인정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9절 10절을 보겠습니다.
“그 재가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되어 애굽 온 땅의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독종이 발하리라 그들이 풀무의 재를 가지고 바로 앞에 서서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날리니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 독종이 발하고”
어떻게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두 번째는 자신을 하나님에게 헌신을 해서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야 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풀무 재를 두 손에다 쥐고 하늘에서 날려라.
그러면 바로 사람과 짐승에게 독종이 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술객도 그 앞에 서지 못하고 독종이 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에게 독종이 발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애굽이 섬기는 의술의 신을 하나님께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의 건강을 지킨다는 그 신을 이겨
독종이 발하게 된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의술의 신이 자신들을 고쳐준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뒤집어 엎혀서
전혀 그들이 어떻게 하지를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의술의 신을 의지하고 의사를 의지하는 것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에게 헌신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건강을 의지해 보았던들 안 되고
자신이 또 어느 의사를 의지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어느 우상 신을 의지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에게 헌신해서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내 자신의 건강을 내가 지키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우상 앞에 아무리 빌어서 나 건강을 하게 해 주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하면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그만 주시면 나는 하나님 앞에 갈 것이고
더 건강을 주시면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 것이라고 믿고 받아 드려서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세요 라고 하나님에게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건강을 유지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하나님을 빼고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건강을 유지해 보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빼고 내가 건강을 유지해 보려고 하지 말고
내 자신을 하나님에게 드려서 빚진 자의 삶을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건강을 유지해 보려고 다른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니까 하나님에게 드려서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야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2장 26절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저를 귀히 여기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내 자신을 하나님에게 드리고 잘 섬기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히 여기시고 인정을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다 자신을 하나님에게 헌신해서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갈렙은 85세가 되어서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
헤브론 산지를 주시라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85세 되면 나는 나이가 많이 먹었으니까
나 죽을 때까지 편히 살 수 있는 것을 주라고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힘이 있는데까지는 그 일을 하겠다고 하며
자기 자신을 하나님에게 드리므로 얼마나 감개무량하셨겠습니까.
갈렙은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안했습니다.
건강을 의지하려고 하지 하려고 하지 않고
또 어떤 땅도 의지하려고 하지 않려고 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에게 드려 버렸습니다.
이 사람이 곧 믿음의 사람입니다
빚진 자의 삶을 살다간 사람입니다
.
우리도 많은 것을 받은 빚진 자입니다.
갈렙과 같이 내 자신의 권리 주장을 하지 않고
내 자신을 하나님에게 드려서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18절 19절입니다
“내일 이맘때면 내가 중한 우박을 내리리니 애굽 개국 이래로
그같은 것이 있지 않던 것이리라 이제 보내어 네 생축과 네 들에 있는 것을
다 모으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릇 들에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은 자에게는
우박이 그 위에 내리리니 그것들이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어떻게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세 번째는 환경에서 하나님을 깨달아서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야 됩니다.
악질 재앙이 나도 말을 듣지 않고
독종 재앙이 나도 말을 듣지 안해서
이제는 애굽 왕과 백성들에게 우박 재앙이 내려집니다.
그래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됩니다.
바로 우박이라는 환경을 통해서 때려도 바로는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이런 재앙을 만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내일 이맘 때면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져서
너희들 생축이나 사람이나 들에 있는 모든 식물들이
다 죽을 것이라고 했는데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환경을 통해서 말을 했는데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위에 있는 환경을 가지고
말씀하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와 똑 같이 왜 환경이 어렵냐?
그러면서 환경을 풀려고만 하고 나쁜 환경을 좋게 뒤집어서
내가 원하는 환경으로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빚진 자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됩니다.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 저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디서 떨어져서 이렇게 어려움이 왔나요?
내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렇게 해야 하거든요.
신앙은 내가 깨달아서 이해해서 신앙이 자라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하려고 하면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면
그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쪽으로 가면
그 환경은 또 다른 환경으로 바꾸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깨달으려고는 하지 않고
나쁜 환경만 좋은 환경으로 바꾸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답답해 하십니다.
사람들이 문제 해결 집회라고 하면 많이 가요.
신앙은 아무 것도 없는데 문제만 풀려고 해요.
가령 어려운 문제를 풀었다고 해도
그 문제가 또 옵니까 언옵니까? 또 오지요. 또 와요,
문제가 올 때마다 그렇게 할래요?
아니면은 공식을 알아서 올 것이 왔군요.
그러면서 공식에 대입해서 그 문제를 풀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날 때마다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옵소서 라고
예언을 잘하는 족집게 한테 물어 보러 다닐래요?
우리는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때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편 145편 14절에서 16절은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바로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다윗이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광대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고백하며
그 섭리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펴셔서 모든 생물을 만족케 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어떠한 제스쳐를 해 주시면
그 제스쳐 속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는 것이
우리가 빚진 자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환경이 오면 환경을 바꾸려고만 합니다.
아닙니다.
그 환경 속에 내가 그대로 있으면서 내가 변화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바꿔 버리십니다.
우리가 환경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환경을 주신 하나님을 깨달아서
빚진자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박국은 처음에는 유다의 나쁜 사람들이 더 잘 되니까 하나님 앞에 물었습니다.
하나님!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들보다 더 잘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바벨론을 통해서 유다를 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박국은 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바벨론 같은 나쁜 사람을 통해서 더 좋은 유다를 쳐요?
안 믿는 사람을 통해서 믿는 사람을 때립니까?
말이 됩니까? 의문이 더 생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다 정한 때가 있는 거야. 너는 믿음으로 살아.
내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 알고 있어.
바벨론으로 때리지만 바벨론을 내가 심판할거야.
바벨론이 이런 죄가 있고 저런 죄가 있는 것을 내가 다 알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하박국이 그때 이해를 한 것입니다.
그렇구나 하고 환경에서 하나님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환경을 보면서 판단하고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고
그 환경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 가를 깨달아야 됩니다
우리 믿음은 환경을 통해서 깨달을 때 믿음이 자라는 것이지
그 환경을 바꾸어서 믿음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베풀어 주신 은혜를 깨달을 때
즉 그 환경을 통해서 깨달을 때 우리는 빚진 자의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내가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을 해서 빚진자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는 자로써
우리는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는데
어떻게 빚진 자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첫 번째는 말씀에서 하나님을 인정을 해서 빚진 자의 삶을 살고
두 번째는 자신을 하나님에게 헌신을 해서 빚진 자의 삶을 살고
세 번째는 환경에서 하나님을 깨달아서 빚진 자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인정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가장낮은자
독종 재앙 교훈
출 9: 8-12
오늘은 여섯 번째 재앙인 독종 재앙입니다. 애굽 짐승과 사람이 독한 종기, 악한 종기, 급성 종기, 생명위협을 느끼는 공포의 피부병이 퍼진 것입니다. 오늘 독종 재앙을 통해 지금까지 주어진 다섯 재앙과 다른 세 가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이 오늘날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악성 종기 재앙이 다른 다섯 재앙과 다른 점은 사람의 생명에 피해를 주는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생명피해가 없었습니다. 다섯 번째 재앙에 처음으로 생명피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여섯 번째 재앙으로 처음으로 인명피해를 주는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다. 어쩌다 이루어진 재앙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 하에 진행되는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치료의 신인 뒤폰(타이폰) 또는 임호텝 신을 섬겼습니다. 질병을 주관하는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왕궁에 뒤폰 여신의 제단을 만들어 그곳에서 사람을 불태워 제사를 드렸답니다. 악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희생제물을 사람으로 삼았는데 자국민이 아니라 외국인으로 삼았고 재관은 다 타고 남은 재를 공중에 뿌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떨어지는 곳마다 재앙이 달아난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세계관과 관습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사용하는 유사한 방법으로 독종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독종을 통증과 열을 지닌 성홍열 또는 상피병이나 한센씨 병과 같은 발진성 피부염으로 봅니다. 고열이 심하고 피부가 간지러워 긁어야 하고 전염력이 강하며 심하면 사망하는 전염병입니다. 이 병이 그들이 섬기는 뒤폰신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질병을 치료하는 신은 임호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세 번째 재앙처럼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으시고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마솥 밑에 있는 그을음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쥐어라. 그리고 모세가 그것을 바로 앞에서 공중에 뿌려라 그것이 이집트 온 땅 위에서 먼지가 되어, 사람과 집짐승에게 악성 종기를 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재를 뿌림으로 뒤폰신(타이폰)이 진노를 거두고 독종이 치료해 줄 것을 믿었는데 오히려 재를 뿌리니까 독종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신뢰하는 마술사들도 독종에 걸렸습니다. 이미 재단에서 타서 무균이 된 재입니다. 이것이 독종을 일으키게 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는 사건이겠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성경의 독종 재앙에 대하여 다른 부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독종 재앙이 한 곳 더 나와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이 때 엘리 제사장도 죽고 아들들도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오늘 출애굽 10가지 재앙이 있은 후 400년 만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이주한 지 400년 만에 독종 재앙이 임했는데 다시 400년 만에 블레셋에 독종 재앙을 내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힘의 원천이 법궤에 있는 줄 알고 빼앗아 갔는데 아스돗에 가져다 놓으니까 아스돗 사람이 독종에 걸리고, 가드로 옮겨 놓으니까 가드 사람이 독종으로 죽습니다. 에그론으로 옮겨 놓으니까 에그론 사람이 독종에 걸립니다. 그러자 블레셋 제사장과 복술자들이 모여 의논을 합니다. 결론은 법궤를 새 수레에 실어 젖 나는 소 두 마리로 끌게 하여 벧세메스로 보내자는 것입니다.
똑바로 벧세메스로 가면 여호와 하나님이 재앙을 내린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지 않으며 우연히 내린 것으로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아직 젖을 먹이는 송아지가 있기 때문에 똑바로 갈 확률은 지극히 낮은 것입니다. 새끼를 생각하여 새끼 있는 쪽으로 갈 것입니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똑바로 간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무엇을 알게 된 것입니까? 독종은 하나님께서 내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연히 이루어 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400년 전의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시험을 할 때 삼상 6장 6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같이 어찌하여 너희(블레셋)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하나님)가 그들 중(애굽)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삼상 6:6)”
애굽의 독종 사건이 있은 후 3500여년이 지난 지금 이 시간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하나님을 살아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과학문명이 발달된 이 시대에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신화 속에 존재하시는 하나님 아닙니다. 예배시간에만 존재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으로 오늘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십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시는 분은 뒤폰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뒤폰 신에게 재사를 드리고 재를 뿌린다고 질병이 치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치유시켜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렘 30:17)”
지난 주(2009년 05월 15일) 기독신문을 보니까 췌장암에서 살려주신 하나님을 간증한 목사님(이남웅)의 글을 보았습니다. 교회를 개척하여 2000명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답니다.
그런데 정기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혈액에서 CA19-9(종양지수)가 높게 나왔답니다. 1년 내내 몇 달에 한번씩 검사를 받았는데 결국 췌장암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교회에는 “내일부터 한 주간 목사님을 위한 기도회로 모입니다. 이유는 오시면 압니다.”하고 입원을 했답니다. 수술하던 날 신자들이 중한 수술을 하면 목사님이 가서 기도해 주는데 목사인 자신이 수술하는데 기도해 줄 사람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서 “기도합시다”하고는 수술을 잘 마치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의사들이 깜짝 놀라더라는 것입니다. 여섯 시간쯤 걸려 수술을 하였답니다. 췌장암은 사망률이 91.6%라고 합니다. 수술을 해도 일 년 안에 재발되는 병이고 합니다. 항암 치료의 여러 부작용들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답니다. 식욕부진, 구토, 울렁거림, 피부발진, 이명 증상, 불면증, 우울증, 혈기, 변비, 소변불통 등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머리는 휑하니 다 빠져 버렸다고 합니다. 항암치료 15회, 방사선치료 27회를 받는 동안 머리가 두 번이나 빠졌답니다.
수술 후 6개월 후 C. T 확인을 하던 주치의는 병이 재발되었고 폐에까지 전이 되었다고 “정리하세요”라고 말했답니다. 다른 병원에도 가 봤지만 똑같이 희망이 없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답니다. 하나님께서 마태복음 8:17절의 “우리 연약한 것과 병을 짊어지셨도다.”하신 말씀과 벧전2:24절의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나니”하는 말씀으로 내 심령을 강타하였답니다. 참으로 예기치 못했던 놀라운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내 죄 뿐이 아니라 내 병도 짊어지시고 가셨다면 내 췌장암도 가지고 가신 것이 아니냐. 또 채찍에 맞으심으로 나음을 입었다 하신 그 말씀 그대로 믿으면 내 병은 나았네’. “아! 내 췌장암은 나았구나” 이런 깨달음이 오면서 나았다는 확신이 왔다고 합니다.
몇 달 후 다시 C. T를 찍었는데 주치의가 기적이 일어났다고 했답니다. “재발된 췌장암의 부위가 점점 소멸되어 가다가 현재는 객관적으로 췌장암의 증상이 사라졌음”이라고 소견서를 써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간증 말미에 고백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안에 있는 무조건적인 속죄와 무조건적인 치유를 믿노라’
오늘날도 우리 하나님의 치료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히스기야기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 얼굴을 벽에 대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홀로된 나인성 여인의 죽은 아들도 살리신 예수님입니다. 절망적인 38년된 앉은뱅이도 고치신 예수님이십니다. 불치의 병인 한센씨 병도 치유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소경 바디매오를 고치셨습니다. 중풍병자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하나님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 15:26)”
2.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결국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다섯 번째 재앙과 특이한 것은 이 여섯 번째 재앙은 바로의 술객들에게 임하였고 이후로는 술객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술객은 애굽의 지혜와 능력을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주술이나 마술 등을 연구하여 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재앙에 대하여 어떻게 대항합니까?
첫 번째 나일 강물이 피로 변하는 피의 재앙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미 변해 버린 물을 가지고 술객들이 마술로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흉내 냅니다. 바로는 그것을 보고 자기 술객도 할 수 있구나 생각하고 마음이 강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 7:22)”
두 번째 개구리 재앙을 내립니다. 그 때 술법으로 그들도 모세를 모방하여 개구리를 땅으로 올라오게 합니다.(출 8:7) 그러나 그들은 한계를 드러냅니다. 오히려 더 고통만 줍니다. 개구리를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세 번째 이의 재앙을 내립니다. 이제 흉내를 내지 못합니다. 사단의 힘을 빌려 몇 가지 흉내는 내어도 새로운 생명의 창조는 흉내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다루는 하나님의 사람을 흉내도 못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객들이 어떻게 합니까? 바로에게 고합니다.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 8:19)” 그러나 바로는 자신이 신뢰하는 술객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무 이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애굽의 백성을 구별하여 내린 네 번째 파리 재앙과 다섯 번째 악질 재앙 앞에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흉내 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독종 재앙 앞에 그들도 당하였습니다. 바로를 믿게 하였던 가장 측근들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 무기력해진 것입니다. 바로는 측근들이 하나님의 재앙 앞에 아무 손도 못쓰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말씀하시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술객들은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자신조차 구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술객들은 자연 현상이나 마법을 통해 진리를 왜곡하고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능력 앞에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아론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결국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 독종에 대하여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계시록에 다시 나옵니다. 인류 마지막 재앙인 대접 재앙 때 나타납니다. 첫 번 대접 재앙 때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며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계 16:2)”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술객들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여기 나오는 풀무는 벽돌 가마나 금속을 녹이는 용광로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벽돌을 굽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살았습니까? 그런데 용광로의 재가 그들을 괴롭혔던 애굽 백성들에게 날려 독종으로 죽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재단의 재였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재단에서 불살라졌을 텐데 그 재단의 재가 날려 술사들을 독종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울부짖은 고통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은 결국 승리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억울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모든 대적을 물리치고 승리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7)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내가 할 수 없다고 두려워하며 낙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도 인류의 역사를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종로5가, 인창 한의원의 원장이었던 이인복 집사의 간증입니다. 그는 중풍병의 권위자였기 때문에 중풍병에 걸린 사람은 전부 그에게 몰려와서 떼돈을 벌었답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대그룹 회장이 되는 꿈을 품고 인창 무역회사를 만들어, 설악산 관광 사업, 호텔 사업, 도매상 등 돈이 되는 것은 이것저것 다 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300억 정도의 부도를 맞았답니다. 다 처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서 숨어 다니는 신세가 되었답니다. 전전긍긍하면서 술만 마시고 홍콩까지 도망갔답니다. 양주 3병을 마시고 자살을 하려고 하니까 옆에 있던 동료가 왜 죽으려고 하느냐,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이 없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는 순간, 죽기 전에 딸들이나 한 번 보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홍콩까지 도망갔다가 막내딸을 보려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답니다. 그리고 또 호주 시드니에 있는 첫째 딸을 보기 위해 호주까지 가서 첫째 딸을 보았답니다.
그런데 첫째 딸집에 가서 술을 마시다가 그만 중풍으로 쓰러져 시드니 메디컬센터에 입원하여 뇌경색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답니다. 병원에서는 그를 포기했고 이 방법, 저 방법 다 해 보았으나 병을 고치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마침 둘째 딸이 울면서 "아버지, 소망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믿고 일어서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 하면서 간절히 전도했답니다. "제가 아버지를 위해서 10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저하고 같이 교회 한번 가보세요."
그래서 그는 교회에 나갔습니다. 마음속에 감동을 받고 자기가 지금까지 잘 못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믿으려면 온전히, 철저히 하나님을 믿겠다.' 라고 작정하고는 새벽 기도를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6년 동안을 다녔답니다. 새벽 기도를 다니면서 하루에 7시간씩 기도하고 성경을 수십 장씩 보고 본격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6년 만에 그는 안수집사가 되었고, 질병에서도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한의원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나는 이제 덤으로 삽니다. 하나님 나를 통해서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하면서 무료 진료를 떠났답니다. '라파 선교회'를 조직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다고 합니다.
3. 우리는 이해되지 않은 일도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앞선 다섯가지 재앙과 다른 점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여섯 번째 재앙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하나님 스스로 완악하게 만들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다섯 번째 재앙까지는 바로 스스로 완악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섯 번째 재앙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스스로 책임이 있는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증거를 갖기 위해 성경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 물이 피가 되는 재앙이 임할 때 바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 7:22)”
두 번째 개구리 재앙이 임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8장 15을 보십시오. 바로가 강퍅하였습니다.
세 번째 이 재앙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술객이 바로에게 고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케 되어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 8:19)”
네 번째 파리 재앙도 마찬가지입니다(8:32)
다섯 번째 가축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9:7)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여섯 번째 인간들에게 독종의 재앙을 내린 후에도 바로가 보내지 않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9장 12절을 보십시오. 다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강퍅케 하였다는 것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께 원인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의 온유한 마음을 하나님이 강퍅케 만들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본래 강퍅한 바로의 마음을 그대로 놓아 두었다는 것입니다. 유기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하나님은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28)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롬 1:29)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 1:30)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롬 1:31)”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마음 먹으면 인간 마음 쉽게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지난 주 전직 대통령이 돌아가시는 일이 벌어졌을 때 보십시오. 똑같은 사건이지만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마음이 확연히 다른 것을 보지 않습니까? 같은 보수에서도, 같은 진보에서도 주류와 비주류에 따라 다릅니다.
상대를 적으로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쉽게 동정적으로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설득한다고 잘되지 않습니다. 증거를 보여준다고 잘되지 않습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그런 경험들을 합니다. 제가 만만만 생명운동을 하면서 필리핀에 학사를 세우니까 우리 아이들 가르치기 위해 세웠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나쁜 사람되어야 내가 좋은 사람되기 때문입니다. 내 명분이 서기 때문이고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증거를 대주어도, 책임을 맡고 있는 목사님이 그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주어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직접 보아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친분에 의해, 심적적으로 같은 편이기 때문에 언론 보도를 통해, 소문을 통해 그렇게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일일이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세와 아론처럼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 말씀 붙들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라하면 사랑하고, 전하라하면 전하고, 용서하라하면 용서하고, 가족이라고하면 가족으로 대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다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사람, 새마음을 가져야 바뀝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엡 4:24)”이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골 3:10) 그래야 사랑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같은 편이고,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강퍅한 인간들과 함께 살면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근본적인 의미는 바로가 강퍅한 것 그것 역시,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넓게는 그것 역시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적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의 완악함도 내가 하는 것이고 적들이 마음대로 괴롭히는 것도 내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강퍅한 바로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받고 핍박받는 것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위로의 말씀입니다.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 11:32)”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3)”
우리는 살다보면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해 두시는가라고 이해되지 않은 일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바로를 쳐서 보내주시지 이렇게 복잡하게 10가지 재앙을 내리는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로를 먼저 쳐 버리면 될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당하지 않으니까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애굽 사람들이 섬기고 있는 잘못된 우상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거짓된 세계관과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집트를 완전히 초토화 시키는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은 약 6개월에 걸쳐 내린 재앙입니다. 애굽 나라는 적어도 1500년에 걸쳐 대국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입니다. 쉽게 무너질 나라가 아닙니다.
첫 번째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나갔다면 금방 잡혀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학교에서 40년간 훈련받을 동안 다시는 추격할 수 없을 정도로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짐승들을 죽입니다. 경제력을 파탄 내는 것입니다. 회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을 죽입니다. 기마병을 홍해에서 죽입니다. 장자를 죽입니다. 군사력을 파탄내 버립니다. 나귀와 약대를 죽입니다. 교통수단을 제거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광양에서 훈련받는 동안은 절대 추적하지 못하도록 파탄을 내 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나는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게 했는가? 왜 저 원수같은 사람을 내 눈에서 살아지지 않게 하는가? 왜 저 거지같은 사람이 잘 살고 나는 이렇게 고통을 받는가? 왜 이런 남편, 이런 아내, 이런 부모, 이런 자식 만나 고통을 받는가? 이런 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로 낙심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400년 동안 바로의 노예로 살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25년 동안 기다리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모세를 40년 동안 살인자로 도망자 신세가 되어 광야에 살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을 기름 부은 후 적어도 15년 이상 훈련받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렘 29:1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시킨 이유를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 8:2)”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 8:16)”
각 개인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최적의 길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브라함의 길이 있습니다. 흉년을 피하고 아내를 두 번이나 속이는 수치스러운 길이 있었지만 마침내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조상으로 삼았습니다. 야곱에게는 욕심을 부리고 사기 치는 치욕스러운 아픔의 길이 있었지만 그를 통해 12지파를 만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팔리고 노예생활을 하며 억울하게 감옥에 가는 고달픈 인생길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17년의 고난의 길을 통해 마침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4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약속을 성취했습니다.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자라는 작품이 나옵니다. 가난한 농가에 한 아이가 태어났지만 누구도 가난하다는 이유로 대부나 대모가 되어 주려 하지 않습니다. 대부를 찾아 간 아버지가 길 가던 사람에게 부탁하여 대부가 되어 줍니다. 그는 시내 부자 상인의 딸에게 가면 대모가 되어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이가 자라 10살이 되었을 때 부활절 날 대부를 찾아갔습니다. 산속의 큰 성이었습니다. 집 구경을 시켜주면서 방 하나만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방에 들어가 구슬을 드니까 사방에 세상이 보입니다. 아버지 집 밭에 도둑이 든 것입니다. 소리치자 아버지가 깨어 도둑을 잡았습니다. 대모의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 주자 정부를 때리고 남편을 쫓아냅니다. 집에 도둑이 들어 어머니를 죽이려하자 구슬을 던집니다. 그러자 도둑이 그것을 맞고 죽습니다. 이 때 대부가 들어옵니다.
그가 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버지가 잡은 도둑은 감옥에 갔다 와 더 나쁜 악당이 되어 아버지의 말을 훔치고 집을 불태우고 도망합니다. 대모는 술로 살아가고 정부는 타락한 여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도둑을 죽인 죄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세상을 운행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느냐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복잡한 세상을 우리의 머리로 조화롭게 다스리며 움직일 수 없습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고난에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기다림에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질병에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아픔에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전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1.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2.왜 이런 슬픔 찾아왔는지 원망하지마세요 당신이 잃은 것 보다 주님께 받은 은혜 더욱 많음에 감사하세요 <후렴>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찌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어떤 고난도 견딜수 있잖아요)”
하늘의 재와 땅의 독종
출 9: 8-12, 고전 1: 21-25
메아리의 법칙이란 것이 있습니다. 깊은 산 속에 할머니와 단둘이 외롭게 살고 있는 한 소년이 하루는 할머니께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네가 미워!”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메아리도 “나는 네가 미워!”라고 흉내를 냈습니다. 더욱 화가 난 소년이 계속 외쳤더니 메아리도 질세라 더욱 큰 소리로 울려왔습니다. 이것이 메아리의 법칙입니다. 메아리의 법칙은 결국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격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생각나는 대로 모두 적어 내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남의 이름을 많이 적어낸 학생이 대체로 남의 미움도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메아리의 법칙은 인간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시집살이 호되게 한 사람들이 며느리 형편 알텐데 며느리 보면 시집살이 더 호되게 시키지요? 이것이 인간관계에서 메아리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역을 준 도구로 고역을 준 만큼 애굽인들에게 고역을 다시 주십니다. 풀무에서 벽돌을 구워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박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노예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풀무의 재와 티끌이 그들에게 고역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독종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메아리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메아리는 무서운 형벌입니다.
애굽인들에게는 재앙입니다. 마태복음 7:12에는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라고 가르치십니다.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전체를 의미합니다. 구약 전체의 핵심적 말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메아리 법칙이 구약의 핵심적 권면입니다. 여섯째 재앙은 재가 티끌이 되고 독종이 되어 애굽인들과 술객들까지 독종에 걸리게 되는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첫째, 모세의 이적은 하늘의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재와 티끌을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고 하십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해 날렸습니다. 이 말씀의 주체를 보세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셨고,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따랐습니다. 모세의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늘을 향하여 날리라고 하신 것은 재앙이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의미합니다. 모세가 재앙을 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재앙이 사람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모세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 그 다음에 있을 우박의 재앙이나 흑암의 재앙도 보세요. 모세가 하늘을 향해 손을 높이 듦으로써 임하였습니다. 왜 모세가 손을 하늘을 향하여 높이 들었을까요? 재앙이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재앙입니다. 자연적인 재앙이 사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욥기 28:26에는 “비를 위하여 명령하시고 우뢰의 번개를 위하여 길을 정하셨음이라”고 합니다. 욥기 38:25에는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라고 합니다. 모든 자연 법칙이나 재앙도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것들입니다. 자연의 질서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재앙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8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오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모든 것을 내가 하려고 합니다. 너무 지나치게 자신의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하려다 안되면 그제야 하나님께 의존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까? 모세가 보이지 않게 되자 그들을 이끌 신을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을 이끈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인본주의입니다
.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에 왜 아홉 제자가 산아래서 한 간질병 걸린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자신들의 경험과 힘에 의지하여 고치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왜 우리는 고치지 못했습니까?”라고 했을 때에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힘에 의존할 때에 실패하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을 때에 실패하였습니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하면서도 내 힘에 의존하고 내 경험에 의존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패의 이유입니다. 기도원에서 가끔 환자를 때려 죽였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왜 환자를 죽입니다. 밧줄이나 쇠사슬로 묶어놓고 몽둥이로 때려 죽였답니다.
하나님이 고치신다는 생각보다 내가 고쳐보겠다는 영웅심리가 죽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때리지 않아도 나을텐데 내 힘으로 하려고 하니 때리게 되고 죽이게 돕니다.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의 흉내를 내고 하나님을 대신하려니 이런 사고가 생깁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은 제일 싫어하십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모세가 바로 앞에서 하늘을 향하여 재를 날리라고 하십니다. 다른 때는 아론이 대신했지만 이번에는 모세가 직접 하게 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늘을 향하여 날렸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요구가 점점 강경해집니다. 하나님도 바로에 대하여 강경하게 대하십니다.
둘째, 풀무의 재가 티끌이 되어 독종을 발하게 하였습니다.
풀무에서 발생한 검댕이가 먼지가 되어 독종을 만들었습니다. 독종은 뜨거운 열을 발생하는 염증 같은 질병입니다. 통증과 열을 함께 지닌 질병입니다. 독종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쉬힌’인데 끓다, 부풀다, 터지다에서 나온 ‘솨한’이란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벌써 그 말의 의미부터가 얼마나 아픈 병이겠습니까? 성홍열, 상피병 혹은 한센씨병 같은 병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탄저열이라고 합니다. 탄저병이라고 하면 작년 미국의 911사태 이후에 미국과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 넣었던 병입니다. 상당히 치명적인 병입니다. 이런 무서운 병이 애굽 전역에 퍼진 것입니다. 독종은 욥이 받았던 고통입니다.
욥기 2:8에는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라고 합니다. 욥이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16:2에는 독종이 마지막 날의 심판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으며 악하고 독한 헌데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나더라”.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에게 독종이 날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에 있어질 현상을 애굽에서 미리 보여 주십니다. 애굽은 이미 마지막 심판 같은 형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벌써 심판을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왜 벽돌 굽는 용광로에서 나온 재가 독종이 됐는지 아십니까? 이 재는 애굽인이 두려워하는 악신 ‘튀폰’을 달래기 위해 바친 제물을 태운 재라고도 합니다. 우상을 섬긴 뒤의 찌꺼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벽돌을 굽게 하여 괴롭힌 그 대가를 이제 그 풀무에서 나온 재로 받게 합니다. 풀무의 매연 재로 애굽인을 징벌하십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던 그 것이 그들에게 재앙으로 돌아옵니다. 사람들이 번성하게 되자 바벨탑을 쌓아 흩어짐을 면하게 하자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하나님을 대항하여 탑을 쌓았습니다. 바벨탑을 쌓아 그들이 흩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흩어졌고 언어도 혼돈하게 되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장대를 높이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장대에 자신이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로 그들이 재앙을 받습니다. 이것이 자승자박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호화 주택 높은 담 아래로 초라한 판잣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판잣집 주인은 윗집과 자신을 비교하여, 가난이 죄라며 불만도 서러움도 많았습니다. 그런 판에 저택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구정물이 쏟아져 내려왔습니다. 어느 날 판잣집 주인은 저택을 찾아가 자기 집이 있는 쪽으로 구정물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저택 주인은 인상을 써가며 언짢은 말투로 일축했습니다. “아니,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게 마련인데 시비는 무슨 놈의 시비요?” 일순간 판잣집 주인은 저택 주인을 괘씸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곧 바로 저택 정원을 향해 굴뚝을 높이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땔감만 골라서 불을 지폈습니다. 저택에선 냄새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도도하게 판잣집에 엄중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판잣집 주인은 코방귀를 뀌며 말했습니다. “아니, 그렇게도 지체 높으신 분께서 연기가 낮은 데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이치도 모르셨던가요?” 그 후 호화 주택은 냄새 때문에 견디질 못하고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지는 꼴입니다. 야고보서 2:13에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합니다. 애굽인들은 긍휼 없는 노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고 그들의 괴롭히는 그것으로 이제 그들이 재앙을 맞고 있습니다.
셋째, 술객들은 티끌을 만들지도 없애지도 못하고 독종이 발하였습니다.
술객들은 애굽의 지혜와 능력을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처음 두 재앙은 모세를 모방하였지만 셋째 재앙 때는 모방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는 모방은커녕 독종에 걸려 모세 앞에 서지도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처럼 흉내내고 맞서는 이들이 이제는 독종에 걸려 나타나지도 못합니다. 결국 애굽의 능력자들은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자신조차 구원할 수 없는 존재이었습니다. 인간의 힘과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잠시는 흉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인간의 한계는 드러나고 맙니다.
고린도전서 1:25에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감히 견주거나 대항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무력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절대 맞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맞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는 상대가 안 되는 존재입니다. 이걸 알면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사람들은 이걸 아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모릅니다. 빨리 알수록 복입니다. 빨리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술객들은 자연현상, 마법을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들은 진리를 왜곡하고 하나님 뜻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정죄의 대상입니다
. 레위기 20:27에는 “신접한 자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합니다. 말라기 3:5에는 “내가 술수하는 자에게 심판하러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1:8에는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2:15에는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잔꾀를 가지고 하나님처럼 행세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고 마지막 비참한 멸망을 당하게 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술객들이 이제는 대항도 못하고 재앙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결론 존 템플턴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대도시의 러시아워 시간에 대형 트럭이 지하로 입구에서 꽉 끼어버리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차는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운전사는 지하로 입구와 자동차 지붕 사이에 몇 인치 정도는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것입니다. 경찰이 출동하고 구경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기술자들이 차를 빼내기 위하여 궁리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한 소년이 트럭 운전사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아저씨 제가 차를 빼낼 방법을 가르쳐 드릴까요?” “됐다 꼬마야, 어른들이 알아서 할거다.
다친다 저리 가라” “타이어에서 공기만 빼면 돼요”. 정말 어른들은 그 아이의 말을 듣고 타이어의 공기를 조금 뺐습니다. 그러자 트럭은 쉽게 빠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과 대치하는 인간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인간관계에서 대치하는 우리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우리 자신이 조금만 바람을 빼면 쉽게 문제는 해결됩니다. 내 무력함을 인정하면 문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끼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낮추면 절대로 재앙이 없습니다
. 모든 것이 조금만 바람을 빼면 금방 해결될 문제입니다. 그러나 너무 바람이 빵빵하여 부딪치고 끼고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진노만 삽니다. 바로는 하나님 앞에서 너무 바람이 빵빵하게 들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재앙이 유난히 많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마음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에서 말합니다. “혼자 치유해 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실망만 더 커질 뿐이다. 그러므로 너의 무력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네가 무력하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나님이 치유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무력함을 인정하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치유하십니다. 내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이 내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힘을 과시하고, 자신을 높이고, 대항하는 이것이 재앙의 원인입니다. 자신을 과시하고 높이고 대항하는 그 자체가 재앙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힘을 빼세요. 자신을 낮추세요. 내 무력함을 인정하세요. 이 때 비로소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치유됩니다.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의 탄생 교회로 들어가는 문은 낮습니다. 모든 사람이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할 만큼 작습니다. 낮은 데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자는 누구나 낮아져야 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 예수님처럼 낮추고 낮은 자의 친구가 된다면 복된 성탄이 될 것입니다.
바람도 빼고 낮아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낮은 자의 예수님을 만나는 성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출 9: 13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기니의 두 소년 14살 된 야긴코이타와 15살 된 퐁데퉁가라는 지난 8월 1일 오전 아프리카 기니에서 브리쉘로 향하는 벨기에 항공 소속의 한 비행기에 숨어들었습니다. 이들은 공항 직원과 경비원들의 눈을 피해 항공기 바퀴에 기어올랐고 착륙장치 격실에 올라타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비행기가 이륙하면 무섭게 추워진다는 사실을 알았던지 각각 속옷과 바지 세 벌씩 껴입었습니다. 하지만 방한화도 구할 수 없어 고무 샌들만 신고 비행기에 탄 이들이 고도 1만 미터 상공의 영하 50-55℃의 살인적 추위와 무서운 강풍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한지 10여 시간이 지난 2일 오전 이들을 발견했을 때 두 아이는 서로 부둥켜안은 채 자는 듯 평온한 얼굴로 얼어죽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자비하시며 믿는 사람들은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힘없고 불쌍한 사람들을 그토록 사랑하시는데 왜 이 아이들을 도와주지 않으셨을까? 하는 궁금점을 가지게 됩니다. 이 아이들이 비행기까지 들어가기에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을까요? 만약 이것을 한 편의 영화로 생각한다면 마지막 순간에는 하나님께서 살아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다 알지 못하고,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인색하신 이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얼어죽은 아이들이 쥐고 있던 편지 내용을 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유럽 여러 나라 제일 높은 분들과 정부의 책임자들께 드립니다. 당신들의 아름다운 대륙에 사랑을 호소합니다. 우리가 기댈 곳은 당신들의 자비뿐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세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엄청난 전쟁과 질병 그리고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극소수의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을 위한 사립학교를 제외하면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없습니다. 우리의 무례한 행동에 노여워 마시고 아프리카에 사랑을 베풀어주세요. 1999년 7월 29일 기니의 두 소년들이 썼습니다' 라는 말로 이 글은 마감되었습니다. 그들이 죽기 이틀 전에 쓴 글이었습니다. 이 편지를 읽은 유럽은 온통 눈물로 뒤엉키게 되었고, 벨기에 외무부 장관 루이 미셀은 크게 감동을 받아 아프리카의 비극 해결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생각하면 가끔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 너무 다르고 때로는 엉뚱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크신 사랑은 변함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지금 비록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늘 가장 좋은 계획으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따뜻한 가슴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에 들어간 지 430년, 노예로 지낸지도 수 백년이 지났습니다. 많은 노역과 고역으로 인한 신음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하기 위하여 모세를 보내셨고, 그 손에 능력을 주셔서 계속적으로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에집트 사람들은 많은 고통을 당하였는데 오늘 본문까지 합하면 이적과 재앙이 일곱 번이나 거듭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집트 왕 바로는 고집을 꺾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두 번도 아니고 바로가 이렇게 계속해서 미련스럽게 버티는 이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맨 처음 일어난 이적과 재앙은 피였습니다(출7:20-25). 요즘 말로 한다면 수돗물을 틀기만 하면 피가 나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든 물을 구할 수가 없고 온통 피로만 가득 찼으니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이어지는 개구리와 이의 재앙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파리 한 마리만 있어도 식사를 잘 하지 못하는데 한 마리가 아니고 온 세상이 파리로 가득했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출8:1-32) 이처럼 에집트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에집트 왕 바로는 계속해서 완강하게 버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바는 세상의 모습이 이렇게 무지(無知)하고 미련스럽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고통 당하고 신음하면서도 하나님께 승복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미련스러운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우연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재앙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생축과 에집트의 생축을 구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것은 하나도 죽지 않게 하겠다고 친히 선포하셨습니다(4절). 한 나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고센만을 구별하셔서 재앙을 피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에집트 왕 바로는 사람을 보내 이스라엘 자손의 짐승이 하나도 죽지 않은 것을 확인하여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계속 버티며 백성들을 보내지 않았습니다(7절). 보고도 믿지 않은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하시는 것은 세상만 이렇게 미련스러운 것이 아니고 신자(信者)들 가운데서도 기독교 역사나 성경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이렇게 미련스러운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다는 것을 고발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사는 고센 땅에는 우박이 내리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보여주셨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26절).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에집트 왕 바로의 고집이 상당히 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의 고집은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바로가 열 가지 재앙으로 고집이 꺾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만약 바로가 열 가지 재앙으로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백 가지 천 가지 만 가지의 재앙을 보내어서도 기어이 꺾고 마십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고집을 보십시오. 천사와 씨름하여 이길 정도라고 성경에서 표현할 정도로 그는 고집이 셉니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것은 엉덩이 뼈가 부러진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강퍅하면 할수록, 완강하면 할수록 남는 것은 더 세게 당하여 처절하게 깨어지는 것 밖에 없습니다. 끝내 무릎 꿇는 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세상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이적을 행하시고 바로 또한 계속해서 고집을 꺾지 않고 버티는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만 치시면 바로의 고집을 꺾으실 수 있으실 터인데 이렇게 일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세상은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른 왕이 치리(治理)한다 하여도 그 사람은 깨끗한 것 같지만 세상은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해서 기대하시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도 기대하지 마시고 세상에 대해서 요구하지도 마십시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주님께서 보여주시는데 하나님의 제 1차 목적은 세상 사람과 세상 사회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부패와 모순이 많은 세상이 변하는 것을 바라지 아니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세상이 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이고 궁극적인 목적이지만 일하시는 방법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회가, 세상 사람이 변하여 그 사회가 바뀌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먼저 변화되어서 이 사회를 바꾸어 나가는 것을 기대하십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고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신자들로서 해야 할 일은 나를, 우리를 말해야 합니다. 내가 우리가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 사회가 이렇게 되었다는 처절한 고백이 있어야 하고 우리를 침이 있어야 사회가 변화되는 것이지 우리가 사회를 향하여 소리지른다고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변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어두운 세상에 내 한 몸으로 작은 빛을 발하여 이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밝게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썩어져 가는 이 사회에 소금이 되고 빛의 역할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고 개혁시키시는 방법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핑계를 대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변하라고 요구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바꾸시지 않는 것에 대한 의문은 이처럼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많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의문 하나는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질질 끌면서 복잡하게 처리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말씀하시기를 여러 번의 재앙을 주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한두 번 보여 주어서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만 보아도 일곱 번 재앙을 보여주어도 에집트 사람들이 믿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파리 떼의 재앙이 있는 그 날에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곳에는 파리 떼가 없게 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똑똑하게 알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8:22). 역사의 주인, 파리까지도 움직이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이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바로를 한꺼번에 치지 아니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네 마음과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너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 내가 손을 펴서 온역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14-16절)..바로가 먼저 알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가 바로에게 말하기를 내가 성에서 나가자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뇌성이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않을지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29절)..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야곱도 처음에는 그렇게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여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6)하고 고백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른 장에 비해서 놀라운 일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여전히 내 백성 앞에 자고하고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느냐 내일 이맘때면 내가 중한 우박을 내리리니 애굽 개국 이래로 그 같은 것이 있지 않던 것이리라 이제 보내어 네 생축과 네 들에 있는 것을 다 모으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릇 들에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은 자에게는 우박이 그 위에 내리리니 그것들이 죽으리라(17-19).. 하고 말씀하셨는데 재미있는 것은 바로의 신하중에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 종들과 생축을 집으로 피하여 들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20절). 에집트 사람들 중에서 모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있다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날에 들에 있는 자기 종들을 다 소환하여 밖에 나가지 말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바로의 신하들까지도 모세의 말대로 따라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자 하는 목적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까지는 자기 신들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일곱 번째부터는 자기를 지킬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야겠다고 결행하여 시행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열매를 맺히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질질 끌듯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바로가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바로가 고집을 부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일을 위해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 여러분 앞에 고집 센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잘 보십시오. 그들이 아무리 강퍅하고 완악하여도 모두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세우신 좋은 계획을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 저들을 도구로 만드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그리고 어떤 뜻을 이루어 가실지 잘 알지 못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은 여러분들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한 디딤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저들을 움직이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미워하거나 노여워하지 말고 웃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을 도구로 쓰신다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실 것입니다. ♥
히스기야의 기도
열왕기하 19장 ─────────────────
본문 열왕기하 19장은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남아 있는 남 유다의 히스기야왕 때의 일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대단히 경외하고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산당을 제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산당을 제하는 일을 하였으며 신앙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왕하18:3-6). 군사정책에 있어서도 인본주의(人本主義)를 취하지 않았으므로 아버지 아하스가 친(親)앗수르 정책을 폈던 반면 아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향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을 이기겠다고 작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앗수르로부터 유다는 두 번의 침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침공 때 완전히 허물어져 조공을 바치라는 앗수르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많은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유다에게 대단히 화가 난 앗수르는 두 번째 침공을 하였습니다. 두 번째 침공 전에 먼저 선전포고를 하였는데 세계 어느 나라의 신도 앗수르의 왕의 손에서 그 백성을 구출한 적이 없으므로 여러분의 신 여호와도 우리 손에서 유다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니 하나님을 의지하면 여호와가 너희를 구출할 것이라는 히스기야의 말에 넘어가지 말고 자신에게 항복하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왕하18:29-35).
여기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어려움을 당했던 지금까지 다른 왕들과 달리 정말로 하나님을 경외한 히스기야를 챙겨주시지 않고 그대로 두고 보시는 이유가 의아해질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을 하신 분들이 계실 것이고 앞으로 이런 경험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면서 어둠은 어떻게 하든 간에 하나님의 사람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신실한 사람들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저 믿기만 하면 모든 일들이 형통해 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상당한 어려운 일들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실 것은 여러분들이 충분히 감당할만한 시험까지만 주시고 그 다음은 허락하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둠은 여기까지만 공격하게 됩니다.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위협하는 내용을 잘 보면 어떻게 하든 간에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왕하18:30).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것인데 그들의 목적은 이것입니다. 그리고 열국의 모든 신 중에서 아무도 건지지 못했으므로 예루살렘도 마찬가지로 내 손에서 패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하는 것입니다(왕하18:35).
끝까지 여러분을 공격하는 것은 단 하나 가장 취약점인 믿음입니다. 절대로 자기들을 당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세상적인 관념을 심어주고자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여러분도 세상에서는 세상의 방법으로 해야지 신앙으로 하면 아니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신앙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마음에 평안을 줄뿐 현실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현실은 현실적으로 해결해야 하고 신앙으로 해결해서는 아니 된다고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는 성경에서 앗수르 장군이나 왕이 협박하는 내용과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실 것은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 여러분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자녀교육 문제를 예로 보아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대학으로 인도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갖가지 세상적인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과외를 시키거나 학원을 보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사실과 어둠은 끊임없이 이것을 떼어 내려고 한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 일을 통해서 어둠이 이러한 일을 하는 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믿음의 현주소를 똑똑히 보게 하는 기회를 주십니다. 히스기야가 얼마나 믿음이 대단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가 앗수르에게 줄 조공으로 여호와의 전(殿)에 있는 은과 문과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금을 주었습니다(왕하18:15-16).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보면서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의 현실의 구체적인 삶에 있어서 믿음의 현주소를 똑똑히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저 이 사실을 보는 것에 그치지 말고 지금까지 생각했던 우리의 믿음이 현실에 합(合)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과 실제 내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을 보게 되면 처절하게 무릎을 꿇으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나의 믿음이 대단하다고 할지라도 그 때마다 그 사람들이 말하는 그러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히스기야에게 보여 주셨고, 그로 하여금 자기가 여호와의 전에 있던 은과 금으로 조공을 주었던 자신을 회개하고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기회를 통해서 자기 믿음의 부족함을 깨달아 그것을 축복의 기회로 삼아가야 합니다. 한 번의 실수로 좌절할 것이 아니라 다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현실의 삶에서 넘어지거나 깨어지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면서 실패를 딛고 굳건히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시련은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란 신앙뿐만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도 잘못 가거나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 다시는 이 길로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믿음의 사람들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사실입니다. 음주를 예로 들면 술이란 음식으로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실수하거나 다른 사람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자기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믿는 사람의 바람직한 모습으로 가지 않는다고 판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길로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번 생각 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업에서 경리 담당자를 인선(人選)할 때 그 사람이 과거에 경리사고를 일으켰나를 점검해 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번 실수한 사람은 반드시 또 다시 실수할 수밖에 없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실수 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 심지어 예수 믿는 사람들도 또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시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하신 한 번의 실수를 돌이켜서 회복하는 계기로 삼지 못한데 그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말을 잘못하여 다른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기도 하고 그로 인해서 관계가 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함부로 말한 것을 후회하는데 세상 사람들이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까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을 잃어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여러 사람을 잃어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이 돌이킴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에 있던 은금으로 조공을 주었던 자기의 잘못을 돌이켰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다시는 실수로 인해서 당한 아픔이나 고통 속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가진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절한 심정으로 나를 교육시키시기 위해서 고통과 아픔을 맛보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이 아픔과 고통 그리고 시련을 주신 까닭을 보셨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앗수르의 두 번째 침공 때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간구하는 과정들을 보면 아주 배울 것이 많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종 이사야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1-4절). 히스기야 자신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종에게 사람을 보내어 자기와 백성들 그리고 나라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후 히스기야는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였습니다(14-15절). 어디에서든 기도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곳이라고 특별히 정해놓으신 전(殿)에 와서 기도하는데 구체적으로 기도내용이 담긴 편지를 펴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기도내용의 편지를 내놓고 기도하지 않아도 되지만 흉내내는 것도 참으로 귀한 일이 될것입니다.
그의 기도 내용 또한 아주 대단합니다. 혹 여러분이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드릴 일이 있을 때 오늘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편지를 들고 와서 한 기도를 잘 보시고 하나님께 이와 같은 기도를 드려보십시오.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15-16절) 라고 말하면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19절)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와 아울러 드리는 히스기야의 기도는 수많은 나라들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신은 나무나 바위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을 구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분이시며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틀림없이 이 세상을 구원해 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17-18절). 얼마나 구체적으로 드리는 기도입니까!
이 기도 내용은 평신도 느헤미야가 조국 이스라엘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하는 내용을 방불하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느1:5-9).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이렇게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여러분의 삶이 기도로 서원하신 것처럼 된다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기도를 보면서 하나 더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신약의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붙잡혔다 돌아온 후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했을 때 드렸던 기도입니다(행4:24-29). 이런 대단한 기도를 드렸으므로 천지가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행4:31). 기도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히스기야 역시 이렇게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먼저 이사야를 통해서 이제 당신이 일하실 것이므로 저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역사하셨습니다. 성경은 그 결과에 대해서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의 군사 십팔만 오천을 죽였고 앗수르 왕 산헤립는 니느웨로 도망갔지만 그 부하들에 의해서 죽었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35-37절). 여러분, 얼마나 대단하신 하나님이십니까? 그렇게 큰소리 친 그가 이스라엘에 대해서 손 한 번 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보실 것은 두 번의 앗수르 침공 때 히스기야의 대응입니다.
첫 번째 대응은 전쟁에서 지고 나서 그들의 요구대로 조공을 바쳤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만 앗수르가 또 다시 쳐들어오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따라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면 우선 효과가 있고 문제가 풀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얼마나 큰 곤욕을 다시 당했습니까? 그러나 두 번째 침공에 대한 대응은 다시는 조공을 바치지 않겠다고 생각하여 철저히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신앙으로 해결하였습니다. 그 결과 앗수르는 멸망의 길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시적인 무엇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잠깐 동안의 효과에 기대하지 말고 그것이 전부인양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주시기를 원하시고 이 승리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히스기야가 얻었던 것처럼 여러분들이 얻기를 원하십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언제 일하시며 언제 역사하시고 기적을 바라시는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침공으로 히스기야는 아주 무기력해지만(3절) 앗수르는 의기양양하여 하나님을 모욕하기까지 하였습니다(왕하18:23).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장 강할 수 있을 때는 세상적으로 가장 약할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자신은 한없이 낮아지고 상대방은 그 앞에서 한없이 높아질 그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라는 것입니다. 악이 여러분을 마음껏 유린하지만 여러분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입니다.
누가 여러분 앞에서 마음대로 큰 소리 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악이 여러분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있습니까? 이 때 뒤에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면서 웃으십시오.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당당하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세상적으로 여러분이 힘을 내어 물리치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세상적인 방법을 너무 동원하지 마십시오. 물론 모든 힘과 능력을 발휘해야겠지만 너무 애쓰다 보면 하나님을 의지할 힘이 없어집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 힘을 모으십시오.
또한 여러분들이 계속적으로 능력 있게 살 수 있는 길을 도출해 봅니다. 여러분, 이 세상 살면서 재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어떠하든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을 도와줄 권력자가 여러분 주위에 있든 없든 간에, 지식이 많든 적든 간에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듯이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내가 가진 것이 아무리 많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여야 하고, 비록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할지라도 히스기야처럼 아무 힘없이 하나님 앞에 섰으니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면 히스기야가 얻었던 승리가 여러분의 승리가 될 것입니다. ♥
참회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 드립니다. 심히 부족하고 연약하여 믿음도 없고 죄와 허물로 가득찬 저희들을 다시 기억하셔서 이렇게 주님의 귀한 전에 불러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저희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는 사유함과 용납함이 있음을 알기에 나왔습니다. 이 시간 모든 죄와 허물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오니 받으시고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험악하고 죄가 많은 세상에서 죄와 타협하면서 살았습니다. 불의 의 길로 행했고 알게 모르게 지은 죄가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 양심을 통하여 당신의 소원을 일러 주셨건만 우리는 그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 사람 앞에 약속한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며 살아온 신실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한 걸음만 뒤로 돌아보면 별 것 아닌 일인데 하찮은 이득에 연연하면서 살았습니다. 조금마한 일에도 욕심에 사로 잡혀 그것이 한없이 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겼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비추어 보면 아무 쓸데없고 때로는 오히려 우리들에게 해로운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감정에 휩쓸려 다른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부족하여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추어지며 더구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어떠한 일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살면서도 우리 마음 속에는 오히려 불만과 원망과 불평이 많았습니다. 말이 많았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입이 있다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닐진대 내 입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상심하게 하였으며 더군다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얼마나 많이 아프게 하였습니까? 우리는 후회하면서도 또 같은 일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용서하여 주시고 저희들을 도와주시옵소서.
저희들에게 그렇게 소중한 하루 하루를 허락하셨고 순간 순간 시간들을 허락하셨건만 우리는 게으르고 나태하여 그것을 소중한 하루를 만들지 못했고 소중한 시간으로 장식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아버지여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 악과 불신앙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시고 우리를 그 허물에서 건져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