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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소와 밀레의 작품세계Ⅰ
[1845~1865]-Jean Francois Millet
(1814 ~1875 : 프랑스)
농부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
장프랑수아 밀레(프랑스어: Jean-François Millet, 1814년 10월 4일 - 1875년 1월 20일)는 프랑스의 화가로, 프랑스의 지방에 위치한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의 창립자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이삭 줍기,' '만종,' '씨 뿌리는 사람' 등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들로 유명하며, 사실주의(Realism) 혹은 자연주의(Naturalism) 화가라 불리고 있다. 그는 데생과 동판화에도 뛰어나 많은 걸작품을 남겼다.
유년 시절
밀레는 장 루이 니콜라(Jean-Louis-Nicolas)와 에메 앙리에트 아델라이드 앙리(Aimée-Henriette-Adélaïde Henry) 밀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노르망디의 그레빌 아그(Gréville-Hague)에 있는 작은 마을 그뤼시(Gruchy)에서 태어났다. [1] 이곳은 농업이 주된 삶이었던 지역이었기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농부들의 삶을 관찰하며 자라났다. 마을의 두 개신교 목사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밀레는 라틴어와 근대의 문학 작가들에 대해 배웠다. 일찍부터 성인전에 감명을 받아 종교적인 장면의 데생을 즐겨 그렸다.
1833년 그는 재능을 인정한 아버지에 의해 셰부르(Cherbourg)로 보내져 그곳에서 초상화가 폴 뒤무셸(Paul Dumouchel)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1835년 밀레는 그로(Baron Gros)의 제자였던 뤼시앵 테오필 랑글루아(Lucien-Théophile Langlois)에게서 정식으로 그림 수업을 받게 되었다. 랑글루아와 다른 이들이 밀레에게 준 장학금으로 1837년 그는 파리로 이사하게 되며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서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에게서 그림을 계속 배우는 한편, 루브르 박물관에서 푸생의 작품을 연구하였다. 1839년에 그의 장학금 수여는 종결되었으며 파리 살롱에 제출했던 그의 작품은 거절당하게 된다.[1]
파리
그의 첫 작품이었던 초상화가 1840년 파리 살롱에 전시되게 되자, 밀레는 셰르부르(Cherbourg)로 돌아가 초상화가로 개업하게 되었다. 이듬해 폴린 비르지니 오노(Pauline-Virginie Ono)와 결혼하였으나 생활이 어려워 다시 파리에 나와 간판·미인화 등을 그려 생활해 나갔다. 1843년 파리 살롱에서 작품 전시를 거절당하고 아내인 폴린이 폐병으로 죽자, 밀레는 셰르부르로 다시 돌아갔다.[1]
1845년 그는 카트린 르메르(Catherine Lemaire)와 함께 르아브르(Le Havre)로 이사하여 1853년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9명의 자식을 갖게 되었고 이후 그녀는 밀레의 여생 동안 함께 살게 된다. 르아브르에서 그는 초상화 작품이나 풍속화들을 그리면서 몇 달간을 보내다가 다시 파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1840년 중반 즈음 밀레는 콩스탕 트루아용(Constant Troyon), 나르시스 디아즈(Narcisse Diaz), 샤를 자크(Charles Jacque)를 비롯하여 후에 밀레처럼 바르비종파 화가로 알려지는 테오도르 루소(Théodore Rousseau)와 친구가 된다.
또한 밀레는 그의 명암 기법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된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와 밀레의 전기 작가이자 정부 관직을 지내고 있었으며 훗날 밀레 일생의 후원자가 된 알프레드 상시에(Alfred Sensier)와 만나게 되었다.[3]
1847년 그는 처음으로 파리 살롱에서 성공적인 전시회를 갖게 되었는데, 이때 전시된 작품으로는 Oedipus Taken down from the Tree가 있었다. 1848년 그려진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The Winnower)는 정부가 직접 구입하기도 했다.
바르비종
The Sower , 1850,보스턴 미술관
1849년 밀레는 '추수하는 사람들'(The Harvesters)를 그려 국가에 기증하였다. 파리 살롱에서는 같은 해에 '숲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양치기'(Shepherdess Sitting at the Edge of the Forest)라는 작품을 전시했다. 이 작품은 매우 작은 유화작으로 이전까지 그가 그려왔던 미화되고 목가적인 주제에서 보다 더 사실적이고 화가 개성적인 기법을 사용했다.[4]
같은 해 6월 그는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하자 파리의 교외인 바르비종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농민 화가로서 전원 생활의 정경을 그렸다. 그는 가난에 쪼들렸으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농민의 모습을 종교적인 분위기로 심화시켜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였다.
1850년 밀레는 그의 열렬한 후원자인 상시에에게서, 그에게 작품을 그려주는 대가로 지속적인 후원을 약속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물론 그는 다른 구매 희망자를 위해 작품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해에 파리 살롱에서 밀레는 '이삭 줍는 사람들'(Haymakers)와 '만종,' '이삭 줍는 사람들' 과 함께 걸작이라 평가되는 3개의 작품들 중에 가장 초기 작품인 '씨 뿌리는 사람'(The Sower)를 전시하게 된다.
1850년에서 53년까지 밀레는 그가 가장 중요시했으며 가장 오랫동안 작업하게 된 작품 '추수하는 사람들의 휴식시간'(Harvesters Resting)을 그리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나 푸생과 같은 그의 개인적인 영웅 화가들에게 필적하기 위하여 그려진 이 그림은, 밀레의 그림 인생에 있어 농부들의 일상만을 상징적인 형태로 표현하기보다 사회적인 상황 자체를 상징적인 기법으로 나타내는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이 작품은 밀레가 날짜를 기록한 유일한 작품이며, 파리 살롱에서 1853년 2위에 해당하는 메달을 수여받으면서 공식적인 명예를 쌓도록 도와준 작품이었다.[6]
이삭줍는 여인들
The Gleaners,1857,84 × 111 cm, color on canvas, 오르세 미술관
밀레의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걸작인 이 작품은 1857년에 그려졌으며 1854년 세로로 긴 캔버스에 그렸던 첫 번째 버전을 다시 각색하여 그린 작품이다. 또한 1855년에서 56년까지의 에칭 기법의 영향은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에 전시된 현재의 작품에 대한 예시이기도 했다.[7]
이 작품은 여인들이 밭에서 허리를 굽히고 추수 이후에 남겨진 이삭을 줍고 있는 모습을 그렸으며 곤궁에 처한 유럽과 아메리카의 노동자 계급(working class)에 대한, 그러니까 근대 민중들의 삶을 그린 상징이자 기념이었다.
추수 이후에 남겨진 것들을 줍는 것은 사회에서도 가장 최하급의 일들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밀레는 이 작품에서 이 여인들을 마치 영웅과도 같은 구도 속에서 표현하고 있다. 이전에 그려졌던 첫 번째 버전에서는 옆에 시중드는 종까지 그려넣어져 가난하고 멸시받는 민중들을 마치 귀족이나 왕과 같은 존귀한 인물들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 작품에서는 그 모습은 사라지고 대신 빛이 열심히 일하는 그녀들의 어깨를 밝게 비추고 있다. 그들의 뒤로 수평선까지 끝없이 펼쳐진 밭은 드넓고 장대한 하늘아래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이 세 명의 여인들의 모습은 이렇게 밝게 빛을 받은 밭과 달리 그림자가 많이 들어가 배경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만종(The Angelus)
The Angelus,1857–1859, Oil on canvas,53,3 × 66 cm, 오르세 미술관
이 작품은 부유한 미국인이었던 토머스 G. 애플턴(Thomas G. Appleton)의 청탁으로 그리게 된 작품으로, 1857년 여름에 교회의 뾰족탑을 배경에 더하면서 완성되었다. 밀레는 처음에 이 작품에 "감자의 수확을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가 "만종"으로 바꾸었다.
1859년, 작품의 구매자가 이 작품을 가져가지 못하게 되자, 밀레는 1865년부터 이 작품을 공개적으로 전시하게 되며 작품에 나타난 손을 여러번 바꾸게 된다. 몇몇 사람들은 그의 정치적인 공명을 의심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밀레는 손의 모양을 계속 바꿈으로서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십여년 뒤 밀레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이 작품을 사기 위한 경매 경쟁이 계속되었으며 몇 년 후, 프랑스 측에서 80만 프랑을 제시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이렇듯 그림의 가치는 비싼 가격으로 매겨졌지만 정작 생존해 있는 밀레의 가족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이러한 불균형은 'droit de suite'를 고안해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Droit de suite'란, 화가의 작품을 되팔게 될 경우 그 수익의 일부를 화가나 화가의 가족에게 필수적으로 지급하는 정책이다.
노년기
빵을 굽는 여인, 1854년. Kröller-Müller 박물관, 오텔로: Frau beim Brotbacken,1854, Oil on vanvas,, 55 × 46 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파리 살롱에 전시했던 그의 작품들에 on canvas,, 대한 각양 각색의 비평들에도 불구하고 밀레의 명성과 성공은 1860년대까지 계속해서 자라났다. 이 시기에 그는 달마다 봉급을 받는 것으로 3년간 25여 점의 작품을 작업할 것을 계약하게 된다.
1865년 또다른 고객, 에밀 가베(Emile Gavet)는 훗날 90여 점의 작품을 수집하게 되는 그의 수집품 목록에 추가하기 위해 밀레에게 파스텔 작품을 의뢰했다. 1867년에는 World's Fair에서 밀레의 작품들 중 '이삭줍는 여인들,' '만종,' 그리고 '감자를 심는 사람들' 등을 전시회의 대표적인 작품들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프레데리크 아르만(Frédéric Hartmann)은 2만 5천 프랑에 '사계'를 그려줄 것을 의뢰하게 되며 밀레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아 Chevalier de la Légion d'Honneur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1870년 밀레는 파리 살롱의 심사위원으로 채택되었다. 이후 그는 그와 가족과 함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피해 Cherbourg와 Gréville로 이사를 가게 되며 1871년 때까지 바르비종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노년기는 상업적인 큰 성공과 공식적인 명성의 정점으로 평가되었으나, 밀레는 건강이 악화되어 정부에서 의뢰했던 작업을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었다. 1875년 1월 3일, 그는 카트린(Catherine)과 결혼하였으며 1875년 1월 20일에 빈곤하였을 때 얻은 결핵이 원인이 되어 61세로 숨을 거두었다.
훗날의 영향
밀레는 빈센트 반 고흐의 초기 시절 작품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밀레와 그의 작품은 반 고흐가 그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노르망디를 그린 클로드 모네의 작품들은 밀레의 풍경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또한 밀레의 작품들의 구도나 상징적인 요소 등은 쇠라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밀레는 마크 트웨인의 연극 Is He Dead? (1898년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며 극에서 그는 명예와 부를 위해 그의 죽음을 가장하는 젊은 화가로 등장한다. 극에서 묘사되는 밀레는 대다수가 허구이다.
밀레의 작품 L'homme a la houe는 에드윈 마컴에게 영감을 주어 유명한 시 "The Man With the Hoe" (1898년)가 탄생하기도 하였다.
"만종"은 19세기와 20세기에 자주 화가들에게 각색되어 그려지기도 했다. 살바도르 달리는 이 작품에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다고 하며 이 작품을 분석하여 "밀레의 만종에 숨겨진 비극적인 신화"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달리는 이 작품을 정신적인 평화를 표현한 작품으로 보지 않고 이 작품이 어떠한 메시지와 억압되어 성적 호전성을 상징하고 있다고 믿었다. 달리는 또한 작품 속의 두 명의 인물들이 삼종 기도를 올리는 게 아니라 땅에 묻힌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달리의 끈덕진 주장 덕분에 이 작품은 그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엑스 레이 분석을 거쳐야 했다. 엑스 레이 분석으로 알아본 결과 놀랍게도 이 작품은 최종 덧칠 전에 관과 비슷한 형태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11] 그러나 이 형태는 굉장히 불확실하여 정말로 관의 모양인지, 그리고 밀레가 마음을 바꾸어 만종을 그리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몇몇 화가들이 모델을 더이상 상류층 사람들에 한정하지 않고 하류층 사람들을 모델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미술에서의 조용한 혁명이었다. 가난한 인생을 주제로 한 작품이 낭만주의 문학과 음악에서 종종 나타났으며, 회화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의 주요인물인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1814-75)가 가난한 농부를 그린 그림들은 여러분에게 아주 낯익을 것이다. 밀레는 시골 바르비종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1857년에는 <이삭줍는 사람들 The Gleaners>을 그려 농부들의 삶에 숭고함이 있음을 알렸다. 그의 이러한 점은 1830년대와 40년대 사회에 대한 인식을 그림과 조각에 반영시킨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1808-79)와 더불어 20세기에 출현한 사회사실주의Social Realism 회화의 선조가 되기에 충분했다.
밀레는 가난한 농부들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으므로 빈센트 반 고흐는 그를 가리켜 ‘농부 화가’라고 불렀다. 밀레는 여인들의 얼굴이나 표정을 세밀하게 표현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손을 크고 뭉툭한 형태로 묘사했다. 밀레 작품의 특징은 강인한 조각적 형태와 인물의 뚜렷한 윤곽이다. 고된 노동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를 묘사하는데 밀레를 추종할 화가는 없었다.
허리를 구부린 여인들의 자세는 너무 오랫동안 구부리고 일하느라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보인다. 여인들 뒤로 빛을 가득 품은 추수 장면은 흰색이 섞인 창백한 색조로 채색되었으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경이 보다 어둡고 침침한 색조로 표현되었다.
또한 무거운 짐이 실린 수레와 커다란 건초더미 그리고 이삭을 줍는 여인들 앞에 놓인 한 줌의 낟알 사이에도 날카로운 대비 효과가 나타났다. 멀리 오른편 농장 건물 앞에 일꾼들을 감독하는 사람이 말에 타고 있다. 그는 이삭줍는 여인들에게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데, 이는 배경의 부유한 농장과 전경의 가난한 여인들 사이의 구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바르비종파란 명칭은 파리 근교 퐁텐블로 숲속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유래했다. 바르비종파의 지도자는 테오도르 루소와 장 프랑수아 밀레였다. 두 사람 모두 파리에서 활동했지만 가난을 이기지 못해 1846년 루소가, 1849년에 밀레가 바르비종에 정착했다.
많은 풍경화 화가와 동물화 화가들이 그들을 좇아 이 마을에 모여들었다. 이 마을에 모여든 화가들 대부분 파리 화단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들이 토대로 삼은 건 17세기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화가들의 풍경화와 동시대 영국 화가들의 풍경화였다.
그들은 섬세한 관찰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주제에 접근했다.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들은 위풍당당한 자연의 풍경보다는 소박하고 평범한 자연의 풍경을 강조했다. 영국 화가 컨스터블이나 터너와는 달리 그들은 빛과 색의 효과나 대기의 변화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영국의 풍경화가 프랑스의 풍경화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
Portrait of a Young Woman (the Artist's Sister Emélie), 1838-1840 ,
oil on canvas , 41 cm X 32 cm , Private collection
Louise-Antoinette Feuardent 1841
Oil on canvas , 70.2 x 60.5 cm. Louvre, Paris, France
1837년 고향 세르브르의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나온 밀레는 들라로시의 아틀리에에서 지도를 받는 한편, 루브르를 자주 방문하면서 주로 미켈란제로와 푸생 등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고전 작품을 연구했다. 그가 처음으로 살롱에 입선한 것이 40년이니까 파리에 나온 지 3년 후가되는 셈이다.
이 시기 밀레의 작품은 주로 초상화와 신화(神話)를 테마로 한 그림들이었으며, 검은 색을 주조로 하면서 백색의 효과를 살리는, 전통적인 수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고향 세르브르에 돌아와 주문받은 초상화 가운데 하나로, 검은 색을 기조로 하면서 뉘앙스가 풍부한 수법을사용, 인물의 내면의 섬세한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태도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Young woman ,1844-1845, Oil on canvas
Art Institute of Chicago (Chicago, Illinois, United States)
1845년경 밀레는 목가적인 연인들을 테마로 한 몇 점의 작품을 그렸다. 이 작품도 그러한 목가적(牧歌的) 분위기를 띠고 있는 그림이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현실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입과 반쯤 뜬눈의 꿈꾸는 듯한 표정이 더욱 그런 분위기를 나타낸다.
초기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단정하고도 엄격한 수법을 엿 볼 수 없고, 터치가 즉흥적이면서 다소 거칠게 나타나 있다. 일련의 누드화에서도 그렇지만, 밀레의 눈은 호색적(好色的)이지 않다. 그가 나중에 로코코 화가들을 특히 호색적인 면에서 비판하고 있음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Two Bathers, 1848
밀레는 농민 화가로서의 자기 위치를 찾기 이전 초상화와 신화화(神話畵)를 그렸고,또 일련의 노동자들의 일 하는 모습을 담았다. 이 작품은 그 소재가 다소 예외 적이긴 하나, 노동자들의 모습을 다룬 그림과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인체의 억센 형체감을 살리려고 한 의도가 노동자들의 그림들과 일치된다. 작품은 남녀가 멱을 감는 정경에서 취재된 것인데, 물에서 올라오는 여인을 남자가 안아서 끌어올리는 모습이다. 두 인체가 마치 격투라도 벌이고 있는 듯한 억센 동감으로 표현되고 있다. 밀레가 미켈란젤로에게 매혹되었다고 하는 설이 이 그림을 통해 뒷받침된다.
The bather, 1846-1848, Oil on panel,19 x 24.1 cm, Private Collection
Susanna and the Elders, ca 1846-49
The Winnower 1848, Oil on canvas,58.5 x 79.5cm, Musée d'Orsay, Paris, France,
1848년 이후, 밀레는 지금까지의 초상화와 신화적 테마의 범주를 벗어나 농부나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직접 묘사하는 새로운 전환을 시도했다. 이른바 농민화가(農民畵家)로서의 밀레의 출범을 알리는 전환이었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시기에 제작된, 농민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 해 살롱에 출품한 최초의 농민화 이기도 하다. 그의 태반의 농민화가 그렇듯이 이 작품의 소재도 너무나 단순하고 일상적이다. 고티에는 이 소재의 단순함을 칭찬해 마지 않기도 했는데, 바로 이런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 속에 농민과 농촌 생활의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두운 곳간에서 키를 까불고 있는 남자의 프로필이 일하는 이의 감동을 잘 포착하고 있다.
The Hay Trussers, 1850-1851, Oil on canvas, 56 x 65 cm, Musée du Louvre (France )
밀레가 바르비존으로 오면서 그 해 살롱에 출품한 작품으로, 점차 농민화의 전경을 드러내고 있다. 밝게 쏟아지는 햇볕 속에 건초를 묶고 있는 두 남자와 왼편에 건초를 긁어 모으는 여인의 모습은 일하는 즐거움과 노동의 신선함을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특히 명암의 강한 콘트라스트가 주는 긴장감과 더불어 거대한 자연과 투쟁하는 인간의 숭고한 모습이 극적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하겠다. 밀레의 농민화에서 발견되는 공통된 요소 역시 자연과 인간의 대비적이면서도 조화 있는 관계의 설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의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거칠고 투박한 표현이 농민화의 특성에 더욱 걸맞는 효과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The Shepherdess, 1850-1852 , oil on canvas, 20.3 cm X 32 cm
Victoria and Albert Museum - London (United Kingdom - London)
The Carder, 1854, Pencil on paper , 31.1 x 26 cm
The dresser in Gruchy, 1854, charcoal on paper ,28.9 x 22 cm
The Boiler, 1853-54
어두운 실내에서 빨래통에 물을 붓고 있는 시골 아낙네의 모습을 붙잡고 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단조로와서 모티브로서도 선뜻 선택하기가 어렵게 보이는 데도, 밀레는 이를 드라마틱하게 처리하고 있다. 전체가 단순하면서도 명암에 의한 대상의 견고한 형태와 볼륨이 모뉴멘탈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같은 조각적 조형은 고전주의가 즐겨 사용한 대상의 파악이나, 밀레는 고전주의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평범한 시골 아낙네의 일하는 모습에서 숭고한 어떤 것을 각인(刻印)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시류적(時流的)인 고전주의와는 그 발상에서부터 궤(軌)를 달리 한다.
Peasand spreading manure, 1854-1855, 111.76 x 81.28 cm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The Knitting Shepherdess, 1856-1857, Pastel on paper ,33.7 x 25.4 cm
Maternal Care, 1855-57
밀레가 옮겨가 산 바르비존은 가난한 한촌이었다. 밀레도 이 마을의 가난한 농부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아마도 밀레의 농민화가 너무 나도 비참하게 보인다는 평도 어쩌면 이 가난한 마을의 정경을 솔직하게 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밀레는 두 번째 아내 카트리느와의 사이에 9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내 카트리느는 아내로서 뿐 아니라 어머니로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밀레는 갸륵한 어머니로서의 카트리느와 그 아이들을 모델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도 그 중의 하나다. 견고한 돌문 사이로 아이와 어머니의 모습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드러나고 있다. 두 아이의 천진한 동작과 어머니의 보살핌이 밀레의 눈을 통해 영원화되고 있다.
Woman with a rake,1856-1857, 34.29 x 39.68 cm ,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Peasant Loading Wheat in a Cart, 1854-1858 , chalk Black conté crayon, charcoal and pastel heightened with white on paper, 31.2 cm X 46.8 cm , Private collection
The Sheepfold, 1856-1860. Glasgow City Art Gallery
The Gleaners. 1857. 타작 Winnowing 을 끝 낸 농장의 밭Agriculture 에서 밀Wheat 이삭 줍는 사람들 Oil on canvas. 83.7 x 111 cm. Musee d'Orsay, Paris, France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 루소는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과 어렴풋이 보이는 나무들을 그리면서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낸 반면, 밀레는 자연과 가까이 하고 사는 미천한 농부들의 고귀한 삶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렸다. 바르비종파의 미술사적 의의는 순수하고 객관적인 풍경화를 프랑스의 정통 장르로 확립하는 데 이바지한 점이다.
1850년을 전후하여, 쿠르베의 작품에서 보았듯이, 화가들은 자신을 고용한 상류계급이 선호하는 주제를 그리는 대신, 일상 주제에서 가져온 다양한 장면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밀레는 가장 빈곤한 계층 사람들이 겪는 고된 노동을 주제로 삼았다.
<이삭줍는 사람들>은 막바지에 접어든 추수의 현장을 묘사한 것으로, 화면의 배경 오른쪽에 보이는 농부들은 마무리 작업에 한창이다. 농부들은 말을 탄 감독의 지휘 아래 곡식을 모두 수확했다. 짐수레는 일꾼들이 실어놓은 짐의 무게 때문에 버거워 보이고, 들판에는 몇 개의 건초가리가 세워져 있다.
화면 왼쪽의 건초더미 두 개는 비교적 선명하게 묘사되었으나 보다 멀리 놓인 나머지 건초더미들은 희미하게 처리되었다. 이는 추수의 규모가 크다는 걸 암시하며, 올해는 풍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화면 앞쪽에서 이삭을 줍는 여인들은 풍요로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이들은 농장에 고용된 사람들이 아니다. 여인들은 지방 관청의 허가를 받아 추수가 끝난 후 들에 남아 있는 낟알들을 주워가는 사람들이다. 이 일은 오로지 손으로 일일이 주워야 하는 고된 노동이다. 게다가 먼저 추수한 사람들이 거의 모든 곡식을 수확한 뒤 그루터기만 남겼기 때문에 이 가난한 여인들의 현실은 우울하기만 하다. 밀레는 여인들의 곤궁함을 성스러운 모습으로 표현했다.
<이삭줍는 사람들>은 그려진 그 해 1857년 살롱에 전시되면서 적대적인 반응을 받았다. 1857년이라면 1848년의 프랑스 2월 혁명의 기억이 아직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던 때였다. 당시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다.
184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루이 필립이 입헌 군주로 즉위했지만, 1848년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립 왕정이 무너지고 제2 공화정이 성립했다. 2월 혁명 중 치러진 보통선거에서 온건 공화파가 의회를 독점하자, 일부 과격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진압되었고, 마침내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손자인 루이 나폴레옹이 공화정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런 시기에 <이삭줍는 사람들>이 전시되었으므로 몇몇 비평가들이 이 작품을 사회적 불안을 조장하기 위한 정치적 항의라고 해석했다., 2월 혁명에 대한 밀레의 시각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삭줍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이 상당히 복합적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밀레가 1852년과 53년에 그린 그림들에는 이삭줍는 사람들의 모습이 계절적으로 묘사되었고, 행복한 표정의 어린아이들이 등장해 분위기가 밝았지만, <이삭줍는 사람들>에는 선동적인 요소가 있다. 그렇지만 밀레의 의도는 정치적이기보다는 미적이었던 것 같다. 당시 사실주의가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실제 상황을 그대로 전하려는 의도에서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밀레의 작품은 주제와 양식으로 인해 빗발치는 비난을 초래했는데, 정치적 혼란기에 영웅을 그리는 대형 캔버스에 농부들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양식적으로 그의 작업이 거칠고 완결되지 않다는 공격을 종종 받았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체로 과장되었으며, 색채는 따듯하고 순박하며 채색은 두텁게 표현되었다. 세밀한 부분들을 제거한 그의 양식은 훗날 신인상주의의 리더 조르주 쇠라와 후기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들 중 하나인 빈센트 반 고흐에게 영향을 끼쳤다.
The Gleaners. 1857. Oil on canvas. 83.7 x 111 cm. Musee d'Orsay, Paris, France
밀레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1857년 살롱에 출품되었던 작품.밀레는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상당히 오래 전부터 계획한 흔적을 보여 주고 있는데, 특히 많은 데상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농민화 가운데서도 비교적 주제가 뚜렷한 것으로, 어떤 점에선 밀레의 사상의 단면을 보여 준다고까지 할 수 있다.
허리를 굽혀 이삭을 줍고 있는 두 여인과 그 오른편에 약간 허리를 굽힌 한 여인의 배치가 주는 견고한 짜임새와, 세 여인이 지니는 양감이 먼 지평의 배경을 통해 더욱 리얼하게 전달되고 있다. 농민 가운데 가장 하층의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다룬 이 작품은 바로 그러한 견고한 인물의 설정 때문에 일종의 사회적 향의의 성격을 띤다고 비평가들은 말하고 있다.
작품감상 : 이 작품은 여름철의 노동과 노동에 의한 피로를 표현하고 있다. 세 여인의 일련의 정지된 듯한 동작을 모노톤 배경과 더불어 시간을 초월한듯 마치 성서의 한장면인것 같은 인상을 준다. 조화롭고 안정된 구도와 갈색톤의 자연적인 색채속에서 부드러운 빨강, 파랑, 노랑의 대비는 고전적인 성화를 연상시킨다.
"추수 이후에 남겨진 이삭을 줍고 있는 모습을 그렸으며 곤궁에 처한 유럽과 아메리카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상징이자 기념이었다. 추수 이후에 남겨진 것들을 줍는 것은 사회에서도 가장 최하급의 일들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밀레는 이 작품에서 이 여인들을 마치 영웅과도 같은 구도 속에서 표현하고 있다.
이전에 그려졌던 첫번째 버젼에서는 옆에 시종까지 그려넣어져 마치 귀족이나 왕과 같은 분위기마저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빛이 열심히 일하는 그녀들의 어깨를 밝게 비추고 있다. 그들의 뒤로 수평선까지 끝없이 펼쳐진 밭은 드넓고 장대한 하늘아래 저물어가는 노을빛을 받아 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이 세 명의 여인들의 모습은 이렇게 밝게 빛을 받은 밭과 달리 그림자가 많이 들어가 배경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The Angelus, 1857-1859
The Angelus, 1857-1859, Oil on canvas, 53,3 × 66 cm Musée d'Orsay, Paris, France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 있는 장 프랑수와 밀레의 <만종>은 원래 ‘수확에 감사하는 부부’가 아니라 ‘아이의 죽음에 슬퍼하는 부부’였다고 한다. 작품 속의 부부가 삼종 기도를 올린 것이 아니라 땅에 묻힌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는 미술가 살바도르 달리의 끈덕진 주장 때문에 엑스레이 분석으로 알아본 결과, 놀랍게도 최종 덧칠 전에 관과 비슷한 형태가 그려져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작품은 부유한 아메리카인이었던 토마스 G 애플튼의 청탁으로 그리게 된 작품으로, 1857년 여름에 교회의 뾰족탑을 배경에 더하면서 완성되었다. 밀레는 처음에 이 작품에 ""감자의 수확을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가 ""만종""으로 바꾸었다.
1859년, 작품의 구매자가 이 작품을 가져가지 못하게 되자, 밀레는 1865년부터 이 작품을 공개적으로 전시하게 되며 작품에 나타난 손을 여러번 바꾸게 된다. 몇몇 사람들은 그의 정치적인 공명을 의심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밀레는 손의 모양을 계속 바꿈으로서 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렸을 뿐이었다.
십여년 뒤 밀레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이 작품을 사기 위한 경매 전쟁이 계속되었으며 몇년 후, 프랑스 측에서 80만 프랑크를 제시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 명백한 작품의 가치에 비해 생존해 있는 밀레의 가족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이 불균형은 'droit de suite'를 고안해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Droit de suite'란, 한 작가의 작품을 되팔게 될 경우 그 수익의 일부를 화가나 화가의 가족에게 필수적으로 지급하는 정책이다.)
The Angelus, 1860, conte crayon, 31.7 cm X 45.4 cm
Walters Art Museum - Baltimore (United States - Baltimore, Maryland)
Le Nourrisson or L'enfant Malade ,1858,
30.98 x 38.1 cm Cont crayon and pastel Private collection
w Haven, Connecticut)
Still Life, 1860-1865 ,
oil on canvas, Van Gogh Museum (Netherlands - Amsterdam)
Study for the Four Seasons: Spring (Daphnis et Chloe), 1860-1865 , oil on canvas,
46 cmX 38 cm , Victoria and Albert Museum - London (United Kingdom - London)
Tending His Flock, 1860-1865, oil on canvas, 81.8 cm X 100.5 cm
Brooklyn Museum (United States - New York)
The Sower , 1865, pastel and crayon or pastel on cream buff paper, 43.5 × 53.5 cm
Walters Art Museum, Mount Vernon-Belvedere, Baltimore, Maryland
Norman Milkmaid
Mother and Two Infants
Mountainous Landscape with a Citadel
.
Woman Sewing By Lamplight
농부 화가 - 장 프랑수아 밀레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몇몇 화가들이 모델을 더이상 상류층 사람들에 한정하지 않고 하류층 사람들을 모델로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미술에서의 조용한 혁명이었습니다. 가난한 인생을 주제로 한 작품이 낭만주의 문학과 음악에서 종종 나타났으며, 회화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의 주요인물인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1814-75)가 가난한 농부를 그린 그림들은 여러분에게 아주 낯익을 것입니다.
밀레는 시골 바르비종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1857년에는 <이삭줍는 사람들 The Gleaners>을 그려 농부들의 삶에 숭고함이 있음을 알렸습니다. 그의 이러한 점은 1830년대와 40년대 사회에 대한 인식을 그림과 조각에 반영시킨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1808-79)와 더불어 20세기에 출현한 사회사실주의Social Realism 회화의 선조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밀레는 가난한 농부들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으므로 빈센트 반 고흐는 그를 가리켜 ‘농부 화가’라고 불렀습니다.
밀레는 여인들의 얼굴이나 표정을 세밀하게 표현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손을 크고 뭉툭한 형태로 묘사했습니다. 밀레 작품의 특징은 강인한 조각적 형태와 인물의 뚜렷한 윤곽입니다. 고된 노동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를 묘사하는데 밀레를 추종할 화가는 없었습니다.
허리를 구부린 여인들의 자세는 너무 오랫동안 구부리고 일하느라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보입니다. 여인들 뒤로 빛을 가득 품은 추수 장면은 흰색이 섞인 창백한 색조로 채색되었으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경이 보다 어둡고 침침한 색조로 표현되었습니다.
또한 무거운 짐이 실린 수레와 커다란 건초더미 그리고 이삭을 줍는 여인들 앞에 놓인 한 줌의 낟알 사이에도 날카로운 대비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멀리 오른편 농장 건물 앞에 일꾼들을 감독하는 사람이 말에 타고 있습니다. 그는 이삭줍는 여인들에게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데, 이는 배경의 부유한 농장과 전경의 가난한 여인들 사이의 구분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바르비종파란 명칭은 파리 근교 퐁텐블로 숲속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유래했습니다. 바르비종파의 지도자는 테오도르 루소와 장 프랑수아 밀레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파리에서 활동했지만, 가난을 이기지 못해 1846년 루소가 1849년에 밀레가 바르비종에 정착했습니다.
많은 풍경화 화가와 동물화 화가들이 그들을 좇아 이 마을에 모여들었습니다. 이 마을에 모여든 화가들 대부분 파리 화단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토대로 삼은 건 17세기의 프랑스와 네덜란드 화가들의 풍경화와 동시대 영국 화가들의 풍경화였습니다.
그들은 섬세한 관찰과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주제에 접근했습니다.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은 그들은 위풍당당한 자연의 풍경보다는 소박하고 평범한 자연의 풍경을 강조했습니다. 영국 화가 컨스터블이나 터너와는 달리 그들은 빛과 색의 효과나 대기의 변화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국의 풍경화가 프랑스의 풍경화보다 훨씬 진보적이었습니다.
건초더미 가을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 루소는 광활하게 펼쳐진 풍경과 어렴풋이 보이는 나무들을 그리면서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낸 반면, 밀레는 자연과 가까이 하고 사는 미천한 농부들의 고귀한 삶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바르비종파의 미술사적 의의는 순수하고 객관적인 풍경화를 프랑스의 정통 장르로 확립하는 데 이바지한 점입니다.
1850년을 전후하여, 쿠르베의 작품에서 보았듯이, 화가들은 자신을 고용한 상류계급이 선호하는 주제를 그리는 대신, 일상 주제에서 가져온 다양한 장면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밀레는 가장 빈곤한 계층 사람들이 겪는 고된 노동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이삭줍는 사람들>은 막바지에 접어든 추수의 현장을 묘사한 것으로, 화면의 배경 오른쪽에 보이는 농부들은 마무리 작업에 한창입니다. 농부들은 말을 탄 감독의 지휘 아래 곡식을 모두 수확했습니다. 짐수레는 일꾼들이 실어놓은 짐의 무게 때문에 버거워 보이고, 들판에는 몇 개의 건초가리가 세워져 있습니다.
화면 왼쪽의 건초더미 두 개는 비교적 선명하게 묘사되었으나 보다 멀리 놓인 나머지 건초더미들은 희미하게 처리되었습니다. 이는 추수의 규모가 크다는 걸 암시하며, 올해는 풍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화면 앞쪽에서 이삭을 줍는 여인들은 풍요로운 현실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농장에 고용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인들은 지방 관청의 허가를 받아 추수가 끝난 후 들에 남아 있는 낟알들을 주워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일은 오로지 손으로 일일이 주워야 하는 고된 노동입니다. 게다가 먼저 추수한 사람들이 거의 모든 곡식을 수확한 뒤 그루터기만 남겼기 때문에 이 가난한 여인들의 현실은 우울하기만 합니다. 밀레는 여인들의 곤궁함을 성스러운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삭줍는 사람들>은 그려진 그 해 1857년 살롱에 전시되면서 적대적인 반응을 받았습니다. 1857년이라면 1848년의 프랑스 2월 혁명의 기억이 아직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던 때였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184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루이 필립이 입헌 군주로 즉위했지만, 1848년 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립 왕정이 무너지고 제2 공화정이 성립했습니다. 2월 혁명 중 치러진 보통선거에서 온건 공화파가 의회를 독점하자, 일부 과격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폭동은 진압되었고, 마침내 나폴레옹의 조카이자 손자인 루이 나폴레옹이 공화정의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이삭줍는 사람들>이 전시되었으므로 몇몇 비평가들이 이 작품을 사회적 불안을 조장하기 위한 정치적 항의라고 해석했습니다., 2월 혁명에 대한 밀레의 시각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삭줍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이 상당히 복합적이란 사실은 분명합니다.
밀레가 1852년과 53년에 그린 그림들에는 이삭줍는 사람들의 모습이 계절적으로 묘사되었고, 행복한 표정의 어린아이들이 등장해 분위기가 밝았지만, <이삭줍는 사람들>에는 선동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밀레의 의도는 정치적이기보다는 미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사실주의가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실제 상황을 그대로 전하려는 의도에서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밀레의 작품은 주제와 양식으로 인해 빗발치는 비난을 초래했는데, 정치적 혼란기에 영웅을 그리는 대형 캔버스에 농부들의 삶을 표현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양식적으로 그의 작업이 거칠고 완결되지 않다는 공격을 종종 받았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체로 과장되었으며, 색채는 따듯하고 순박하며 채색은 두텁게 표현되었습니다. 세밀한 부분들을 제거한 그의 양식은 훗날 신인상주의의 리더 조르주 쇠라와 후기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들 중 하나인 빈센트 반 고흐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누워있는 누드
밀레의 농민화에서 발견되는 노동하는 남자들은 한결 같이 당당하고 늠름하게 묘사되고 있으나, 농가의 여성들은 조용하고도 우아한 모습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일을 하고 있는 순간이라도 그 동작은 크지 않고 여성 특유의 청순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보는 여인도 그 동작이 크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동작이나 표정이 다소곳하면서도 수줍은 듯한 여성다움을 보여 주고 있다. 두 개의 물통에 물을 붓고 있는, 약간 구부린 여인이 정직하게 화면 가운데 자리잡고, 그 배경으로 농가의 뒤뜰이 보여 주는 정적이 오히려 정답기까지 하다. 저쪽 문 쪽으로 뒤뚱거리며 가고 있는 집오리의 모습도 농가의 한가로움을 더욱 실감시켜 준다.
프랑스의 사실주의(Realism) 혹은 자연주의(Naturalism) 화가.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의 주도적 인물로 소박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농민들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 밀레는 농사를 지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19세쯤 되어서는 셰르부르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837년에 그는 파리로 와서 폴 들라로슈의 문하생으로 등록했는데, 이 화실에는 1839년까지 다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40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가 낙선된 뒤, 그는 셰르부르로 돌아가 1841년 말까지 그곳에서 지내면서 초상화를 그렸다. 1844년에 〈우유 짜는 여인 The Milkmaid〉과 파스텔화 〈승마 교습 The Riding Lesson〉으로 처음 성공을 거두었는데, 〈승마 교습〉은 그가 1840년대에 그린 작품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특징으로 관능적 성격을 갖고 있다.
농부에 관한 주제는 1850년 대 초부터 그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지만, 이 주제가 처음으로 뚜렷하게 드러난 중요한 작품은 1848년 파리 살롱전에 입선한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 The Winnower〉이었다. 이 그림은 나중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농촌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씨뿌리는 사람 The Sower〉·〈저녁기도〉·〈소치는 여인〉 등이 있으며 그 외에 일상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한 파스텔화 및 소묘들을 많이 남겼다.
한동안 심한 고생을 겪은 밀레는 1849년에 파리를 떠나 퐁텐블로 숲속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에 정착했다. 그는 농부를 그린 그림을 계속 발표했고, 그 결과 사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밀레의 입장을 옹호하던 그 당시의 편지들은 그림에 대한 그의 접근방식이 근본적으로 고전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1860년대 중엽에 이르자 밀레의 작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1867년의 전시회에 9점의 주요작품을 출품한 뒤인 1868년이었다. 미국 보스턴의 미술관과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이삭줍기 The Gleanes〉(1857, 루브르 박물관)· 〈만종 The Angelus〉(1855~57, 루브르 박물관) 등 밀레의 중요한 그림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만종〉은 해질 무렵의 빛의 효과를 이용해 시적 정감이 넘치는 분위기를 창조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출처] 장 프랑소와 밀레의 작품세계 Ⅰ [1845~1865]- Jean Francois Millet|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