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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새 출발로 아름다운 가족의 달☜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계7:1-17절) 십사만 사천 명
이 세상에서도 선택(選擇)을 받은 사람과 선택(選擇)을 받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수험생들이 같은 대학 시험에 합격을 해서 선택을 받은 사람은 그 대학 학생의 신분을 가지고 그 대학이 주는 모든 혜택을 다 누릴 수 있지만, 떨어져서 택(擇)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 대학에 다닐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기업체에 지원을 하지만, 택(擇)함을 받은 사람은 그 회사 사원이 되어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할 수 있지만, 택(擇)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그 회사에 다닐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擇)함을 받은 사람은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靈光)과 축복(祝福)을 마음껏 누리지만, 자격에 맞지 않아 택(擇)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지옥에서 영원히 비참한 상태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화가 로버트 클라크의 그림 중에‘부활(復活)’The Resurrection of Chrst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에는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오실 때, 하늘에 수많은 성도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을 환영(幻影)하는 너무나도 영광(靈光)스러운 그림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재림(再臨)하실 때, 아마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즉 예수님이 공중에 재림(再臨)하실 때, 이 세상에서 환란을 받고, 때로는 순교(殉敎)한 성도들이 모두 살아나서 예수님을 영접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고문을 당해서 다리가 하나 없는 상태에서 절면서 나오고, 어떤 성도는 앞을 보지 못하고 지팡이를 잡고 나오고, 어떤 성도는 치열(治熱)한 영적(靈的) 전투(戰鬪)를 치른 갑옷을 입은 채로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 지금까지 있었던 이단(異端)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유혹(誘惑)했던 성경이 곧 이 요한계시록 7장일 것입니다. 7장에는 앞으로 구원(救援)받을 사람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앞으로 환란을 이기고 구원(救援)받을 사람의 숫자는‘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단(異端)은 이‘십사만 사천 명’이라는 숫자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유혹.(誘惑)하기를 이제 곧‘십사만 사천 명’이 다 차려고 하니까 숫자가 다 차기 전에 빨리 자기들에게로 오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이 숫자에 속아서 이단(異端)에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역시 이 세상의 환란 중에서 믿음을 지키고 승리해서 최종적(最終的)으로 구원(救援)을 얻을 사람의 숫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여기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 명이라는 숫자가 문자적인 십사만 사천 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어떤 상징적(象徵的)인 숫자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섯째 인(印)과 일곱째 인(印) 사이에 끼어있는 내용이 곧 이 십사만 사천 명에 대한 말씀인데, 이런 것을‘중간계시(中間啓示)’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런 중간계시(中間啓示)가 단순한 막간을 보여주는 보충적인 내용이 아니라, 이런 중간계시(中間啓示)가 더 중요한 내용을 전달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Ⅰ.사방에 부는 바람
오늘 본문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첫 장면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서 바람을 붙잡아, 이 바람이 땅이나 바다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7:1절)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우리나라는 매년 여름이 되면 태평양에서 만들어진 엄청난 태풍이 불어와서 많은 비를 내리게 하거나 큰 피해를 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태풍이 불게 되면 나라 전체가 긴장을 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태풍의 피해를 줄이려고 각 방송국에서는 장시간 중계방송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이런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막지는 못합니다. 미국에서도 허리케인이 불어서 미시시피 강이 범람을 하거나 혹은 뉴올리언스가 침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대피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지구에 부는 바람은 단순히 이런 물리적인 바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바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바람은 전쟁(戰爭)의 바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시대에 기독교인들에게 무서운 황제숭배의 바람이고, 교회를 핍박(迫害)하는 바람이었습니다.
20세기에 가장 무서운 바람은 공산주의(共産主義)의 바람이었습니다. 공산주의(共産主義)는 전 세계를 적화(赤化)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많은 나라들을 공산화(共産化)했고, 이들은 공산화(共産化)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재산(財産)을 박탈했으며, 모든 문화(文化)를 파괴했습니다.
2010년부터 2011년에 걸쳐 아프리카나 중동 지역에 재스민 혁명이라고 해서 민중 혁명(革命)이 일어나는 바람에 오래된 독재정권들이 무너지거나 추방을 당했습니다. 이런 것도 모두 일종의 바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함부로 이런 바람이 불지 못하게 네 천사가 땅 사면에서 바람을 붙들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땅 네 모퉁이’라는 것은 온 세상을 말합니다. 즉 이 세상은 어느 곳에서든지 악(惡)한 바람이 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오는 태풍은 대개 생기는 곳이 정해져 있습니다. 즉 우리나라에 오는 태풍은 대체로 필리핀 부근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에는 이런 미친(颱風)이 일어나는 곳이 많고, 특히 전쟁의 바람이나, 혁명의 바람이나, 사탄(詐誕)의 박해의 바람은 어느 곳에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時限爆彈)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네 천사를 시켜서 이 바람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가 너무 많이 쌓여서 하나님께서 그 천사들에게 붙들고 있는 바람을 놓으라!고 하시면, 재앙(災殃)이 터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가정이나 직장이나 나라에 큰 어려움 없이 평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여기저기에 폭탄(爆彈)이 터지듯이 시험(試驗)이 터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 어느 곳도 악(惡)한 바람이 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면 모든 사람들의 그 마음속에 분노(忿怒)의 폭탄(爆彈)을 하나씩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악(惡)한 본성(本姓)을 은혜(恩惠)로 눌러 주시니까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지, 그냥 사람이 하려고 하는 대로 내버려두면, 어느 한 순간에 마귀(魔鬼)의 충동(衝動)을 받아서 사고가 터지게 됩니다. 즉 어떤 집은 평안했는데, 갑자기 아이가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는 바람에 풍파(風波)가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집에서는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는 바람에 평안하던 가정이 엄청난 불행(不倖)에 휩쓸리기도 합니다.
여기에 보면, 천사가 땅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서 바람이 땅이나 바다나 나무에 불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여기서 땅이 무엇이냐? 바다가 무엇이냐? 나무가 무엇이냐? 는 것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대개 바다는 이 세상으로 봅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역(領域)을 말하기도 합니다.
거기에 비해서 땅은 우리 성도들과 믿지 않는 자들이 함께 사는 영역(領域)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무는 우리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믿음의 공동체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단 바다에서 큰 태풍(颱風)을 만나는 것보다는 육지(陸地)에서 바람을 맞는 것이 낮습니다.
왜냐면 바다에서는 폭풍(暴風)이 일어날 때, 바다 전체에 큰 파도가 일어나서 피할 수가 없지만, 육지(陸地)는 그래도 바람을 피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다에서 큰 폭풍(暴風)을 만나면, 웬만한 배(船)라도 파도를 이기지 못하고 침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육지(陸地)에서 바람을 만나면, 피할 수가 있고, 특히 나무숲이 있는 곳에서 바람을 만나면 그래도 나무가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에 안전하게 피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할 수 있는 한 이런 환란(患亂)의 바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히 환란(患亂)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환란(患亂)의 강도를 줄이는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선포해서 사람들의 마음에 숲이 생기게 하는 이것입니다.
교회(공동체)에서 처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만 전하면, 많은 사탄(詐誕)의 시험(試驗)이 끊어질 날이 없을 정도로 환란(患亂)의 바람이 많이 불게 됩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어느 정도 성숙(成熟)하게 되면, 나무처럼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에 교회(공동체)가 거의 시험 없이 부흥의 성령의 불 바람만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부흥의 성령의 불 바람이 일어나는 곳은 하나님께서 사탄(詐誕)의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바람을 붙잡게 하십니다.
요즘 몽골에서는 사막화(沙漠化)가 점점 심화(深化)되는 바람에 황사(黃紗)의 피해가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황사(黃紗)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내 몽골 지역에 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바람을 막는데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공동체)는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무로 키울 때, 사탄(詐誕)의 바람을 줄일 수 있습니다.
천사가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는 동안 하나님은 땅을 해롭게 하는 천사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인(印)을 칠 때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를 해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7:2-3절)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여기서 한 천사는 해 돋는 데서부터 올라오는데, 그는 하나님의 인(印)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즉 이 인(印)은 복음(福音)의 인(印)인 것입니다. 여기서 해 돋는 방향은 하나님의 방향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福音)을 가진 천사가 얼마나 힘이 있는 가하면,‘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는 한, 재앙(災殃)의 바람은 불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복음(福音)은 재앙(災殃)의 바람보다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지식이 있고, 돈이 많은 사람이 힘이 있다고 하지만, 진짜 힘은 복음(福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복음(福音)은 태양과 같은 힘이 있기 때문에 온 세상에 빛을 비추게 됩니다. 여기서‘인(印)을 친다’는 것은 유대인들처럼 몸에 할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으로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해서 확실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통 인(印)을 칠 때, 자기 자신의 소유에 인(印)을 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 인(印)이 있으면, 자기 소유인 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책이 많아도 자기 책은 금방 알아봅니다. 또 여인들은 아무리 그릇이 많아도 자기 그릇은 알아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아무리 사람들이 많아도 자기 백성들을 알아보시는 것입니다.
엡1:13절)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으니”
우리가 복음(福音)을 듣고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인(印)을 치시는데, 우리는 절대로 이 도장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인(印)치는 것이 방언과 같은 성령의 체험이라고 하는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인(印)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는 중에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이 생기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해 돋는데서 부터 하나님의 인(印)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印)을 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기로 택하신 자들에게 복음(福音)을 가지고 가셔서 그들을 꼭 믿게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사탄(詐誕)의 바람이 불어서 이들의 영혼(靈魂)을 빼앗아 가지 못하게 막으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 심판의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영혼(靈魂)을 구원(救援)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과학(科學)을 발전시킨다 해도 그것으로는 전쟁(戰爭)의 바람이나 재앙의 바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과학(科學)의 힘이나 인간의 머리로는 지진(地震)이나 화산폭발(火山暴發), 쓰나미를 미리 막거나 예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공동체)가 열심히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부흥이 일어나는 동안 그리고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전쟁이나 난리(亂離)의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그래서 천사가 인(印)을 들고 다니면서 친다고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복음(福音)을 전하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는 일은 교회(공동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인(印)을 치는 것은 천사가 할지는 몰라도 복음(福音)을 전하는 일은 교회(공동체)에 주어진 일이고 교회(공동체)가 해야 할 사명(使命)입니다.
Ⅱ.구원받은 십사만 사천 명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성도들의 수를 다 알고 계십니다. 특히 옛날 양을 치는 사람들에게 양의 숫자는 아주 중요했습니다. 즉 목자가 양의 숫자를 헤아린다는 것은 그 양을 보호하고 책임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교갱원이 행정서식과 소통을 강조하는 이유?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잠27:23)
구원(救援)받은 자의 숫자를 헤아려보니까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만 이천 명씩 해서 십사만 사천 명이었습니다.
7:4절)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여기에 나오는 이‘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단(異端)에게 속고 있습니다. 즉 많은 이단(異端)들이‘구원받는 사람의 숫자는 십사만 사천 명이기 때문에 숫자가 차기 전에 자기들에게 와야 한다’면서 사람들을 미혹(迷惑)했습니다.
그러나 이‘십사만 사천’이라는 숫자는 문자적 숫자가 아니라, 상징적(象徵的)인 숫자입니다. 그 증거가 곧 뒤에 나오는데 이‘십사만 사천 명’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모두 똑같이 만 이천 명씩 해서 열두 지파이기 때문에 십사만 사천 명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나오는데, 이것은 신약 교회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축복을 계승(繼承)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온 세상을 축복하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신약 교회는 바로 그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한 영적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진액(津液)이 흐르면서 돌 감람나무가 이스라엘의 참 감람나무가 되어 이 기름으로 부흥의 불이 붙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만 이천 명이라는 것은 12라는 숫자도 열두 지파를 의미하는데, 여기서 천이라는 숫자는 많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각 지파에서 만 이천 명이라는 것은 각 나라와 민족과 방언과 교파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입니다.
즉 만 이천 명만 해도 많은 숫자를 상징(象徵)하는데, 거기에 열두 지파가 곱하게 되니까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 많은 민족과 방언 중에서 구원(救援)받아서 참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당시 신약교회는 아직도 자신들을 이방인처럼 생각하고 유대교에 대하여 열등감(劣等感)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교회를 진정한 영적 이스라엘로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7:5-8절)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여기서 특기(特記)할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유다 지파가 가장 선두에 지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여러 지파 중에서 영적인 축복을 받은 지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유다의 생명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이 가장 먼저 모든 것을 정복해 나가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호수아서나 사사기서에도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중심이 되어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갔습니다. 같은 믿는 자들 중에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드는 사람들에게 가장 우선적인 기회와 능력이 주어집니다. 물론 생명의 말씀만이 모든 것은 아니지만, 가장 중심이 되고, 중요한 은사(恩賜)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만히 주저앉아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힘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나가기만 하면, 그것이 나의 땅이 되고, 나의 영역이 되며, 능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 지파는 두 지파가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므낫세 지파요, 다른 하나는 에브라임 지파 대신 요셉 지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이 두 아들은 애굽에서 낳고 키운 애굽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야곱의 아들들로 입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 지파의 분깃(分衿)을 받았습니다. 결국 이들은 선교의 열매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하지 않고, 요셉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에브라임이 너무나 기질(器質)이 강하고 반역(反逆)을 잘했기 때문에 변화된 사람이라는 뜻으로 에브라임 대신에 요셉으로 한 것 같습니다. 이 여러 지파들의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곧 이런 이름 안에 속해 있는 새 이스라엘이며, 구약의 모든 축복의 약속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다른 이스라엘 지파는 다 있는데,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 오직 단 하나의 지파가 빠져 있습니다. 그 지파는 곧 단 지파입니다. 회복되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 단 지파가 빠져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단 지파가 이단(異端) 지파이기 때문에 제외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북쪽 이스라엘 열 지파는 앗수르에 의하여 망하면서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도 단 지파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해 타임즈 지를 보니까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오래 전부터 살아왔던 흑인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서 팔레스타인으로 피난을 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혹시 이들이 없어진 단 지파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단 지파는 사사기 때, 가장 정복하기 어려운 블레셋 땅을 제비를 뽑게 됩니다.
그런데 단 지파는 블레셋과 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약속의 땅을 포기하고 편하게 살기 위해서 가장 북쪽에 있는 쉬운 땅 라이스를 차지해서 단을 그곳으로 옮기게 됩니다. 결국 단 지파는 약속의 땅을 포기하고 쉽게 살려고 하다가 멸망(滅亡)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편하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영적(靈的) 전쟁을 포기한 단 지파는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단 지파를 위해서 삼손이라는 강력한 사람을 준비해주셨지만, 단 지파는 기다리지 못하고 약속의 땅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흑인이든 백인이든 자유인이든 노예든 이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 속해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충분한 숫자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Ⅲ.승리한 무리들의 찬양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아무리 믿음으로 살려고 해도 악한 마귀의 핍박이 있고, 환란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가운데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은 흰 옷을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송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무리들이 흰 옷을 입고 나와서 주를 찬양하게 됩니다. 마치 뮤지컬이나 오페라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맨 처음에는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든 흰옷 입은 무리가 등장합니다. 이 무리들이 얼마나 큰가 하면, 어느 누구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주 큰 소리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합니다. 그 후 이번에는 하늘에 있는 모든 천사와 장로들이 합창을 하면서 그들의 찬양에 화답을 합니다.
이때 갑자기 장로들 중 한 명이 사도 요한에게‘이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모든 청중들의 관심을 한 가지 사실에 집중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때 사도 요한은‘글세?’라고 하면서 장로의 대답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이 장로는 이들이 큰 환란에서 나왔는데, 어린 양의 피에,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장로가 이 흰옷 입은 무리들이 받을 축복에 대해 선언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7:9절)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여기서 '이 일 후에’라는 것은 바람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천사들이 땅 사방을 붙들고 있고, 그 동안에 십사만 사천 명에게 인(印)을 치는 일이 있은 후라는 뜻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 가운데서 나오는데,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무리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결국 인(印)을 맞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구원할 자들을 반드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성도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신앙을 버릴 것을 요구하고, 죄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세상 사람들의 집요한 요구를 모두 뿌리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우선 그들은 흰 옷을 입고 있고,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흰 옷은 순결을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내무가지를 든 사람들이 의미하는 것은 순결로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렇게 악이 들끓고 유혹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의(義)를 지켰다는 뜻입니다. 찬송가 397장 *주 사랑 안에 살면*
즉 이 사람들은 끝까지 죄와 타협하지 않고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첫째 주 예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아니하였다는 뜻입니다.
이들이 핍박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님만 믿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들이 다른 신(神)도 다 인정하고 예수도 믿는다면,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오직 예수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다른 신(神)들은 다 인간이 만든 우상이요, 죽은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람의 가치(價値)는 그가 믿는 신앙만큼 가치(價値)가 있습니다. 즉 돌이나 나무의 우상을 믿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돌(石頭)이나 나무(木石)같이 무미건조(無味乾燥)합니다.
또 음란한 신(神)을 믿는 자는 그 신(神)만큼이나 음란합니다. 또 돈을 믿는 사람은 돈만큼이나 추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신(神)들은 모두 사람의 상상에서 나온 헛된 것들이며, 사람들의 가치(價値)를 형편없이 떨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존귀(尊貴)합니다.
둘째 이것은 자신의 양심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심을 더럽히지 않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양심을 속이지 않고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양심을 좀 속이더라도 세상에서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가치(價値)가 있는 것은 깨끗한 양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양심을 매일 씻음 받아야 합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습니다. 즉 깨끗한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셋째 이 사람들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악을 행할 때, 우리는 금방 복수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복수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할 수 있는 대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라고 보냈지, 복수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것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권리를 주셨지, 그들을 판단하고 미워하고 심판할 권한은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이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큰 소리로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송합니다.
7:10절)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구원받은 성도들은‘자신들이 구원받는 모든 능력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지금까지 꾹 참고 인내하며, 믿음으로 승리한 것이 내 힘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이었습니다.
7:11-12절)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거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하더라”
만약 우리에게 영광이 주어졌다면, 그 최초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 우리에게 지혜가 주어졌다면, 그 지혜를 최초로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존귀와 권능이 주어졌다면, 최초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 장본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중 하나님만이 주목을 받으셔야 하며, 이 모든 진귀한 선물들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이 모든 것에 대한 감사를 돌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랑의 노래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은 도대체 이 엄청나게 많은 이 승리한 무리들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는 것입니다.
7:13-14절)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개 하였느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어디에 있느냐? 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지요, 그러나 교회를 살펴 본 자들마다 고개를 흔듭니다. 왜냐면 교회 안에서 보는 성도들의 모습은 가난에 찌들어 있고 병마와 싸우고 있으며 여러 가지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과 벗 삼아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 믿는 사람들은 마치 신데레라와 같습니다. 즉 파티에 나타날 때는 마차를 타고 멋진 드레스를 입고 유리 구두를 신고 나타났는데, 집에 돌아갔을 때는 집에서 허드렛임이나 하는 하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볼 때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성령충만할 때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그때 이들의 눈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으며, 그들은 은혜로 옷을 입고 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는데, 그렇게 순결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장로들은 이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이 환란에서 나온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즉 환란이 우리 믿는 자들을 이렇게 순결하고 아름답게 준비시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없을 때보다는 환란 가운데 있을 때가 역시 가장 순결합니다. 그때는 교만이나 죄가 파고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환난에서 나오는 흰 옷을 입은 무리들이 나오는데, 누가 봐도 그들은 자랑스러운 그리스도의 신부였습니다. 환란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신부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눈에는 세상의 화려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신부는 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 가운데서 낮아질 대로 낮아지고 깨어질 대로 깨어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루하루 주시는 힘으로 살아온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모든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있고 마음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세상은 이토록 아름답고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의 모습을 보고서 그때서야 그리스도가 헛되게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며, 자기들이야 말로 망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7:15절)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허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위에 하나님께서 장막을 치셔서 낮의 더위나 밤의 추위가 상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곳은 하나님의 영원한 지성소입니다. 이곳은 가장 거룩한 곳 중의 거룩한 곳입니다.
7:16절)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하나님은 다시는 우리들에게 고통이 없도록 지켜주실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다시는 배고픈 것이나, 목마른 것이나, 뜨거움이나 다른 어떤 고통도 없습니다.
7:17절)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어린 양이 친히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 샘으로 이끄십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생수가 언제나 솟아나기 때문에 우리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의 기쁨으로 위로해주시기 때문에 슬프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도 우리의 장막이 되어주시고, 천국의 위로로 위로하여 주셔서 우리의 잔이 넘치게 하시고, 결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주리지 않도록 채워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질 흠도 티도 없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죄와 유혹을 이기는 복 받은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아-멘 찬송가 336장 *환란과 핍박 중에도*
1월 8일 주일 예배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
셀(cell)가족 공동체 의무는 첫째 예배, 둘째 교육, 셋째 전도, 넷째 성도의 교제
※새벽(冬)5-6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늘에 보물 쌓을 교갱원 설립 創立member ▽교갱원 설립할 온라인 특별 헌금▽
농협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 종류)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심방(尋訪) 및 궁금한 내용 문의 ☞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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