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덕리 고분군은 총 4기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분구묘((墳丘墓))라는 독특한 양식이다. 자연 구릉 경사면을 깎아 평평한 네모 모양(방대형)으로 기초 단을 먼저 만든 뒤, 그 위에 돌방(석실)이나 옹관(항아리 무덤) 같은 매장 시설을 넣고 흙을 덮어 완성했다. 특히 발굴조사가 완료된 1호분은 동서 약 70m, 남서 약 52m, 높이 9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로, 전북 지역에서 발견된 분구묘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2009년 발굴조사 당시, 1호분의 4호 돌방무덤(석실)은 도굴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 이 안에서 최고급 위세품(왕이 지방 세력가에게 권위를 인정하며 하사한 물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바닥에 타격용 스파이크(말목)가 박혀 있고, 측면에는 용, 봉황, 인면조(사람 얼굴을 한 새) 등이 화려하게 투조(뚫어 새김)된 최고급 유물이다.
봉덕리 고분군은 영산강 유역을 제외하면 마한 전통의 대형 분구묘 중 가장 북쪽에서 발견된 유적이다. 이는 5세기 전후, 백제 중앙 정부가 고창 지역의 강력한 토착 세력을 무력으로 찍어 누르기보다는, 화려한 금동신발과 중국제 청자 등을 하사(위세품 사여)하면서 지방 간접 지배 체제를 유지했음을 생생하게 증명해 준다. 이후 6세기 중후반 성왕 시기에 이르러 백제가 직접 지배 체제(오방제)로 전환하면서 이 지역 수장층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백제가 마한의 잔존 세력(전라도 일대)으로 영역을 넓힐 때, 모든 곳을 전쟁으로 짓밟고 중앙 관리를 파견(직접 지배)하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었다. 대신 백제 왕실은 토착 수장들의 기존 지배권을 인정해 주는 대신, 중앙의 권위가 담긴 물품을 내려주어 "우리는 이제 한 배를 탄 군신 관계"임을 공인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택했다.
지방 수장 입장에서는 백제 왕이 공인한 최고급 금동신발을 받아 착용함으로써, 지역 주민들과 주변 경쟁 세력에게 "나는 백제 왕실이 보증한 정당한 통치자"임을 과시할 수 있었다. 또 백제 왕실 입장에서는 큰 군사적 비용 없이 지방 세력을 백제 중심의 서열 체제 안으로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었다.
백제가 지방에 내린 위세품 중에는 토기, 장식성 칼(환두대도), 귀걸이 등 다양한 등급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금동신발과 금동관모는 오직 최고위급 수장에게만 지급된 '최고 등급의 패키지'였다. 이를 통해 백제는 지방 세력 간의 서열을 나누고 쥐락펴락하며 통제력을 발휘했다.
출토된 금동신발들을 보면 바닥에 뾰족한 스파이크(말목)가 돋아 있고, 판이 얇아 실제로 신어 지면을 밟고 걷기는 불가능했다. 이는 수장이 살아생전 특별한 국가 의례 때 자리에 앉아 권위를 세우는 용도로 쓰였거나, 사후 무덤에 묻힐 때 "저승에서도 백제 왕실이 보증한 고귀한 신분"임을 증명하는 장의용(葬儀用)으로 특별 제작된 정치적 오브제였다.
고창 봉덕리를 비롯해 공주 수촌리, 익산 입점리, 나주 신촌리 등 전국의 거점 유적에서 발견되는 금동신발들은 웅진·사비 시기 백제 중앙 공방의 고유한 금속 공예 기술(투조, 타출 등)을 고스란히 공유한다. 이는 백제의 세련된 선진 문화가 지방 깊숙이 스며들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고창 봉덕리를 비롯해 공주 수촌리, 익산 입점리, 나주 신촌리 등 전국의 거점 유적에서 발견되는 금동신발들은 웅진·사비 시기 백제 중앙 공방의 고유한 금속 공예 기술(투조, 타출 등)을 고스란히 공유하고 있다. 이는 백제의 세련된 선진 문화가 지방 깊숙이 스며들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첫댓글 봉덕리 고분군(사적 제531호)은 5세기 전후 마한의 전통과 백제의 영향력을 동시에 보여주는 고대사의 핵심 유적이다.
당시 이 지역을 지배했던 강력한 토착 세력(마한 모로비리국 수장층 추정)의 무덤군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봉덕리 고분군은 총 4기의 무덤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분구묘((墳丘墓))라는 독특한 양식이다.
자연 구릉 경사면을 깎아 평평한 네모 모양(방대형)으로 기초 단을 먼저 만든 뒤, 그 위에 돌방(석실)이나 옹관(항아리 무덤) 같은 매장 시설을 넣고 흙을 덮어 완성했다.
특히 발굴조사가 완료된 1호분은 동서 약 70m, 남서 약 52m, 높이 9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로, 전북 지역에서 발견된 분구묘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2009년 발굴조사 당시, 1호분의 4호 돌방무덤(석실)은 도굴되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 이 안에서 최고급 위세품(왕이 지방 세력가에게 권위를 인정하며 하사한 물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바닥에 타격용 스파이크(말목)가 박혀 있고, 측면에는 용, 봉황, 인면조(사람 얼굴을 한 새) 등이 화려하게 투조(뚫어 새김)된 최고급 유물이다.
중국에서 건너온 청자 반구호(접시 모양 주둥이를 가진 항아리)와 왜(일본) 계통의 소호장식유공광구호(작은 항아리가 붙고 구멍이 뚫린 넓은 입 항아리)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봉덕리 고분군은 영산강 유역을 제외하면 마한 전통의 대형 분구묘 중 가장 북쪽에서 발견된 유적이다.
이는 5세기 전후, 백제 중앙 정부가 고창 지역의 강력한 토착 세력을 무력으로 찍어 누르기보다는, 화려한 금동신발과 중국제 청자 등을 하사(위세품 사여)하면서 지방 간접 지배 체제를 유지했음을 생생하게 증명해 준다.
이후 6세기 중후반 성왕 시기에 이르러 백제가 직접 지배 체제(오방제)로 전환하면서 이 지역 수장층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백제 중앙 세력이 지방 수장층에게 금동신발을 하사했던 '위세품 체제'의 핵심 목적과 고고학적 의미는 백제가 영토를 확장하던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지방 세력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포섭하기 위해 펼친 고도의 정치적·외교적 전략이었다.
백제가 마한의 잔존 세력(전라도 일대)으로 영역을 넓힐 때, 모든 곳을 전쟁으로 짓밟고 중앙 관리를 파견(직접 지배)하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었다.
대신 백제 왕실은 토착 수장들의 기존 지배권을 인정해 주는 대신, 중앙의 권위가 담긴 물품을 내려주어 "우리는 이제 한 배를 탄 군신 관계"임을 공인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택했다.
지방 수장 입장에서는 백제 왕이 공인한 최고급 금동신발을 받아 착용함으로써, 지역 주민들과 주변 경쟁 세력에게 "나는 백제 왕실이 보증한 정당한 통치자"임을 과시할 수 있었다.
또 백제 왕실 입장에서는 큰 군사적 비용 없이 지방 세력을 백제 중심의 서열 체제 안으로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었다.
백제가 지방에 내린 위세품 중에는 토기, 장식성 칼(환두대도), 귀걸이 등 다양한 등급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금동신발과 금동관모는 오직 최고위급 수장에게만 지급된 '최고 등급의 패키지'였다. 이를 통해 백제는 지방 세력 간의 서열을 나누고 쥐락펴락하며 통제력을 발휘했다.
출토된 금동신발들을 보면 바닥에 뾰족한 스파이크(말목)가 돋아 있고, 판이 얇아 실제로 신어 지면을 밟고 걷기는 불가능했다.
이는 수장이 살아생전 특별한 국가 의례 때 자리에 앉아 권위를 세우는 용도로 쓰였거나, 사후 무덤에 묻힐 때 "저승에서도 백제 왕실이 보증한 고귀한 신분"임을 증명하는 장의용(葬儀用)으로 특별 제작된 정치적 오브제였다.
고창 봉덕리를 비롯해 공주 수촌리, 익산 입점리, 나주 신촌리 등 전국의 거점 유적에서 발견되는 금동신발들은 웅진·사비 시기 백제 중앙 공방의 고유한 금속 공예 기술(투조, 타출 등)을 고스란히 공유한다. 이는 백제의 세련된 선진 문화가 지방 깊숙이 스며들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고창 봉덕리를 비롯해 공주 수촌리, 익산 입점리, 나주 신촌리 등 전국의 거점 유적에서 발견되는 금동신발들은 웅진·사비 시기 백제 중앙 공방의 고유한 금속 공예 기술(투조, 타출 등)을 고스란히 공유하고 있다. 이는 백제의 세련된 선진 문화가 지방 깊숙이 스며들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백제의 금동신발 하사는 "지방의 자치권은 인정하되, 중앙의 서열 아래 묶어둔다"는 고대 국가 성장기의 세련된 통치 전략이었으며, 6세기 성왕 시기 전국에 관리를 직접 파견(군현제·5방제)하기 전까지 백제 지방 통치의 핵심 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