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편품>
이때 마침 법회에 있던 증상만을 품은 오천의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려 세존의 발에 예배하고 나서 대회에서 물러갔다. 저들은 자신의 선근을 자만하여 증상만에 빠진 탓에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여기고 또 아직 깨치지 못한 것을 깨쳤다고 여기거늘 세존께서도 침묵으로 승낙하시었다.
그때 세존께서 존자 사리불에게 이르시었다. 사리불이여 이 법회에서 겨는 깨끗이 치워졌고 찌꺼기도 없어졌나니 이제 이 법회는 믿음의 힘으로 견고히 자리잡았노라. 사리불이여 저 증상만에 빠진 이들이 떠난 것은 또한 좋으니라.
<정진품(권지품)>
저 겁나는 말세 사람들은
삿되고 굽고 비뚤어지고 둔하고 증상만에 빠진지라
얻지 못하고도 얻었다고 착각하여
무지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되
...
오히려 자기들이 이익과 명성에 기운
외도면서도 저희가 그러하다 말하고
또 꾸며낸 이야기를 설하리이니
참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비구들이옵니다
저들은 이익과 명성을 탐하는 까닭에
마음대로 경을 조작하면서도
오히려 대중 가운데
저희가 도작했다고 힐난하며
부처님 설법시에 교만의 덩어리인 증상만들은 설법을 듣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떠난 이들은 오히려 그 죄가 가볍습니다. 법화경을 듣지 못할 뿐 법화경을 해치거나 법화행자를 욕보이는 큰 죄업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부처님의 자비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말에 동의합니다.
왜 대상을 가려 설법하라고 법화경의 앞부분에서 그리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자비가 아닐까 싶습니다.
법을 다 설해도 근기가 되는 이만이 제대로 알아듣습니다. 자기 그릇만큼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그래서 보살을 가르치는 경이라고 하심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보살승에 오른 근기 정도가 되어야 법화경의 법문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대학 강의실에 입장이 자유로워도(모두를 대상으로 하여 강의를 해도) 그 강의를 들을 수준이 되어야 비로소 교육을 제대로 받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모두 들을 수 있지만, 진짜 들을 수 있는 이들은 모두가 아닙니다.
그만큼의 선근이 쌓이고 근기가 되는 순간이 되면 다 들리고 부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부처님께 법화경 홍포를 권유받은 보살들은 삿되고 굽고 비뚤어지고 증상만에 빠진 자들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은 얻지 못했는데 얻었다고 착각합니다. 그리고 교만하지요. 그래서 오히려 법을 바르게 홍포하는 보살들을 힐난합니다. 증상만들은 자신들이 착각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진실입니다. 아무리 말을 해줘도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물론 언젠가는 그들도 깨닫는다고, 그래서 증상만의 모욕을 끝까지 다 참겠다고 보살들은 말합니다.
법화경을 읽으면서, 그리고 이런 저런 글을 보면서 법화경 제대로 읽지 않으면 정말 위험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이미 부처인듯이 말하는 이도 보았고 자신만을 주장하는 이도 보았습니다. 기이한 현상을 이야기하고 현란한 앎을 제시하면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마음 한번 잘못 돌이키면 나역시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끔 느낍니다. 그래서 자꾸 돌이키지요.
물론 길을 나아가는 과정임을 알고, 저 또한 저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기에 옳다 그르다를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부처를 가까이 한다면 불향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지장경을 자비의 경이라 생각해왔는데 따지고 보면 일대사인연을 밝힌 법화경이야말로 대자비의 경, 지혜의 경이 아닐까 싶네요. 그런 경을 오랜 시간 가까이 한다면 적어도 자비 한줄기를 느낄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냥 좋은 책을 읽어도 사람이 변하는데, 하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은 어떻겠습니까?
증상만, 교만의 끝자리에 서 있는 자.
눈을 밖으로 돌려 남을 비판하기보다 오늘 내가 그런 모습은 아닌가를 엄격하게 확인하는 날 되었으면 합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삭제된 댓글 입니다.
글쎄요.
뜬구름 한번 잡아볼까요? ^^
불성이 흐르는 모양과 색깔을 갖추고 불성에 깨어있는 자가 주도하는 조직.
육바라밀이 흐르고 육바라밀을 갖춘 이가 주도하는 조직.
이름이 어떠하든 그 목적이 무엇이든 그런 조직이라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불교뿐만이 아니지요. 종교가 무엇이든 그 종교가 지향하는 성품이 흐르고 그 성품에 가까운 자가 주도하는 조직.
세상이 바람직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道道(寶 華) 현실가능성이라. 가능함을 믿고 나아가야지요.
부처가 멀다고 하지만 부처됨을 믿고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는 입으로 말하면서 속으로 의구심을 품지만, 누군가는 완전하게 믿지요. 누군가는 아예 믿지 않지요.
누가 부처에 가까울까요?
좋은 하루 보내시길.
@道道(寶 華) 특정인을 말함이 아닙니다.
제가 이해한 바를 말하면.
모든게 허깨비지만 부처님은 그 허깨비같은 세상 속으로 들어와 가르칩니다.
없지만 없는 것도 아니요, 있지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불성은 그 모두를 통찰하지만, 허깨비같은 세상으로 들어와 자비로 가르칩니다.
중생에게 부처가 되어 그 모든 것을 통찰할 것을 말합니다.
무상하지만 허망한 것이 아닙니다.
무상하다하여 무상함에 그친다면 그것은 온전한 불성은 아닐 것입니다.
일체유심조는 쉽게 말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서.
사유시작하며 잠시 중단된 것이라.
단 그 수준 근기가 되어야 편안히 쓸 수 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道道(寶 華) 치우친 집착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닙니다.
'너무 집착'은 장애가 있을 겁니다.
너무 강하게도 느슨하게도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흐르면 좋은 것 같습니다.
집착이 아닌 그냥 그런 것. 어떤 것이든 과정을 거쳐 끝이 그러면 좋을 것 같네요.
오늘 집착으로 부처놀음하더라도 내일 어찌될지 모른다고 봅니다.
변하니까요.
내 안의 나는 참된 나, 불성을 말합니까?
불성은 이미 말했듯 무상함을 꿰뚫어보지만, 그 안에서 자비로 밝힙니다.
다만 마음의 작용임을 말할 때에는 어떤 마음인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변하는 마음, 탐진치가 주도하는 마음을 지나 불성 그대로의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무상, 허무에 머물지 않을 거예요.
@道道(寶 華)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대상이 남이라고 나라고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스스로 이런 것을 밝힐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서 답을 할 때 고민을 좀 했지만 굳이 질문을 계속 하시니 답했을 뿐입니다.
저는 아는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수행자일 뿐입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배우는대로 아주 조금씩이라도 변해간다는 겁니다.
앞으로는 만족할만한 사람, 덕이 높은 사람, 앎이 깊은 사람, 님의 근기에 맞는 분에게 질문하시면 좋겠습니다.
당신이나 잘하라는 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물론 그래야하지요. 수행은 철저히 나의 문제니까요.
@道道(寶 華) 道道님, 미안한데 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법화경 증상만과 바람직한 조직의 모양과 색깔, 주도자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님이 제 글과 관련하여 무엇이 궁금해서 무엇을 묻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질문과 대답은 서로 이해를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제가 최초에 질문을 제대로 이해못하고 답을 한 것이 큰 불찰인 것 같습니다.
씁쓸한 웃음이 남는 글들이네요. 유익함이 없는 글들 님도 힘들었겠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