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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자서전]
시지포스의 언덕
- 문학, 그 궁극적인 짓거리
김혁
동란의 문화대혁명이 일던 첫해의 어느 가을날, 고색 짙은 변강의 오지인 룡정현에서 시장부근의 한 교원가정은 암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봉당에는 보자기에 동여진 아기 하나가 그 무슨 물건처럼 내쳐져있었다. 태여 난지 이제 겨우 사흘이 되는 아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석현에 있는 어느 처녀가 결혼 전에 아기를 뱄는데 부모의 결사적인 반대와 항간의 눈이 무서워 룡정의 병원에 와서 아이를 낳고 버렸다고 한다. 그 아이를 룡정 어느 소학교의 아이 낳이를 못하는 교원이 안아왔는데, 아이가 풍을 일구고 담이 목에 막혀 우유도 넘기지 못한 채 죽어 가는지라 막 버리려던 참이었다.
이때, 이웃집 영감이 여느 때와 같이 마실 돌이를 왔다. 봉당에 놓인 들숨도 쉬지 못하는 아이와 그 사연을 들은 영감은 자기가 아이를 살려보겠다고 나섰다. 중의경력이 있다지만 고주망태로 이름 있는 데데한 영감인지라 집 식구들이 반신반의하고 있는데, 영감이 부엌으로 씽- 내려가더니 솥 가마를 뽑아들었다. 웬일이냐고 모두들 경악하는데 영감이 가마 밑굽에 앉은 흙 그을음을 긁어내더니 대접에 물을 담아 그 먼지를 삭혀냈다. 먼지를 삭혀낸 물을 아기의 입에 흘려 넣었다. 순간, 목구멍에 꽉 막혔던 담이 내려갔고 아기가 급기야 미약하게나마 울음을 터뜨렸다.
민간토방법의 힘을 입어 가마 밑굽의 먼지를 삭힌 물을 먹고 살아난 아이, 불운의 화인(火印)을 찍고 세상을 버리지 않은 그 아이가 바로 나였다.
1. 동년
옹근 동년을 나는 병원에서 지내다시피 했다. 엄중한 칼슘결핍증에 몸은 장작개비처럼 말라있었고 대신 머리만은 어른의 모자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어릴 적 내 흑백사진을 보면 머리가 되박처럼 크고 눈이 알전구만한 가분수모양, 꼭 마치 할리우드 공상영화 속에 나오는 외계인 같은 형상이다. 나의 생모가 배 속의 나를 떨어뜨리려고 각가지 약들을 람복한 결과였다.
신체가 약한 만큼 성정미도 여리였던 나는 종일 양모의 치마꼬리를 떠날 줄 몰랐다. 몸이 좋지 않아 집에서 몇 년 간 휴학을 하고 있던 어머니는 심심풀이삼아 나에게 글을 배워주었다. 다섯 살에 나는 철자를 다 떼였고 독서가 가능하였다. 학교에 붙던 날, 나는 등록하는 선생들 앞에서 고과서 읽기는 물론 모택동주석의 <로삼편>이며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장시 <서사군도에서의 싸움>이며를 줄줄 외워 모두들을 놀라게 했다.
병원 장 출입에 온 몸 어디라 없이 주사바늘을 꽂고 부어오른 곳을 뜨거운 물에 담근 수건으로 찜질을 해주며 아파서 우는 나를 달래는 방식의 하나가 바로 그림책을 사주는 것이였다. 나는 병원에서 집에서 내내 그림책하고 벗해 지냈다. 어찌 보면 련환화(連環畵) 읽기는 내 동년의 전부라 할 수 있었다. 48권으로 된 <삼국연의>며, 40권으로 된 <수호전>이며, 22권으로 된 <서유기>며, 15권으로 된 <악비전>과 같은 고전명작들, 그리고 구쏘련 작가 고리끼의 자서전적 3부작 <동년>, <인간세상>, <나의 대학>이며를 나는 맨 처음 모두 그림책으로 접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책이 한꺼번에 한 질이 출판되는 것이 아니라 며칠을 사이 두고 한 권 한 권씩 나오는 바람에 그 기다림 나에게는 피를 말리는 일이였다. 나는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처럼 매일이고 서점에 붙박여 신간 련환화들이 나오면 모조리 사들였다. (지금도 룡정 신화서점의 퇴직일군들은 당년의 극성스런 꼬마단골이었던 나를 한눈에 알아본다.)
아버지는 신발장에 페인트를 칠해서 책장을 만들어주었고 나중에 더 넣을 자리가 없게 되자 또 찬장을 고쳐 책장을 만들어주었다. 그 신발장 책장에, 찬장 책장에 잃어질세라 서배에 번호를 단 련환화들을 차곡차곡 꽂아 넣었다. 이렇게 옹근 동년에 나는 천 권에 달하는 련환화를 소장했다. 그때 나는 룡정에서 책이 가장 많은 아이로 불렸다.
그렇게 진중하다고 정평이 나있던 내가 어느 한번 온 룡정을 놀래 우는 사건을 저질렀다. 어쩌다가 방화범이 되여 헛간에 불을 질렀던 것이었다. 불은 헛간을 다 태우고 번져 나와 곁에 붙여지은 변소와 이웃집 반 채를 태워버렸다. 온 동네가 불끄기에 떨쳐나섰고 소방차 두 대까지 동원되어서야 드디어 불을 끌 수가 있었다.
나는 너무도 무서워 김치 움에 숨은 채 큰 숨도 바로 쉬지 못했다. 이웃 아낙에게 발견되어 어스름이 내릴 때에야 김치 움에서 끌려나왔다. 모두가 그 영문을 따져 물었다. 나는 울먹이며 내가 저지른 동기를 말했다. <화소야우(火燒野牛)>라는 그림책이 있었다. 홍군의 덕택으로 소작농이 겨우 집 한 채를 마련했는데 토비들이 그 집에 들이닥쳐 홍군토벌음모를 꾸미는지라 토비들을 소멸하게 위해 소작농의 아들애가 소중한 자기 집에 불을 다는 그런 이야기의 그림책, 그 그림책을 읽고 나는 소작농의 아들의 본을 내여 그처럼 거사를 치르려 했던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이웃들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그 후로 소학 시절 내내 나의 별명은 <불조심>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성인들의 책을 읽기 시작했고 장편도 손에 쥐였다. <들끓는 광산>, <안명호반>, <홍남투쟁사>, <백양정의 용사들>, <상앙의 이야기>, <공가점의 둘째주구 맹자>..... 지금처럼 어린이들의 심성에 맞는 아동도서가 많지 못했던 그 시절 죄다 어른들의 책을 읽었다. (많지 않은 아동도서 중에서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것은 구사회를 경유해온 이의 자서전적 소설 <고옥보>였다)
그러다 비판용으로 앞머리에 모택동주석의 어록이 몇 폐지나 붙은 <수호전>이 나왔는데 그 록림호걸들의 이야기는 나를 환혹시키기에 족했다. 수호전을 줄줄 외우다시피 했다. (그때 우리 학교선생들이 아직도 철자를 바로 익히지 못하고 있는 아이들을 훈시하는 말의 한마디가 아무 반급의 혁이라는 애는 장편을 왕왕 내리읽는다던데 너희들은 이게 무슨 꼬라지냐? 였다.) 반급 애들이 내게서 <수호전>이야기를 들으러 방과 후면 우리 집에 가맣게 모여들곤 했다. 개구쟁이들이 한 구들 모여 앉은 그 양말 구린내가 천지를 진동하는 방에서 재봉침 우에 올라앉아 나는 중국 옛 찻집의 평서(評書) 이야기꾼처럼 장회체로 <수호전>을 내리엮곤 했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양부였지만 나에게 친아버지 못지않은 사랑을 몰부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문화대혁명 때, 나치스집중영 같은 <5.7간부학교>에서 치른 옥고를 빌미로 장기간 투병 끝에 한 많은 눈을 감은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장례 날, 동료들이 많이도 모여왔고 하늘 향해 조총을 울리였다. 모두들 비감에 물젖어있었지만 나의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었다. 그 조총을 쏠 때 튕겨 나온 탄알 깍지가 못내 갖고 싶어졌다. 그래서 장례식이 끝나기 바쁘게 허겁지겁 탄알 깍지를 줏는데, 어머니가 <이 철없는 것아!> 하고 오열하며 나의 뒤통수를 철썩 아프게도 때렸다. (나의 첫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중에 이러한 나의 동년의 모습이 가감 없이 세세히 그려져 있다.)
그때, 탄알 깍지나 탐내던 개구쟁이였던 나는 양부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제 덧쌓여지게 될 불행에 대해서는 예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2. 등단
양부가 세상 뜬 5년 만에 의붓아버지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내가 일곱 살 적에 우리 집에서는 오누이를 만들어준다며 또 3살짜리 여자애를 수양했다. 이로서 우리 집은 한 가정에 성씨가 다른 네 사람이 모여든 특수한 가정으로 어우러졌다. 특수한 가정이라 남보다 더 잘 보듬어야 했지만 의붓아버지는 그런 도량형의 인간이 아니었다. 한때 어떤 작은 잡화점을 경영한 적 있다고 자신을 경리님이라 불러야 흡족해 하는, 나의 양모가 네 번째 여자였던 의붓아버지의 출현은 외려 온가족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1년 사철 하는 일이란 어중이떠중이들을 불러 술 마시는 짓거리, 입만 열면 저속하고 상스러운 말들이 튕겨 나오고 이제 백만 원 잡아온다, 천만 원 잡아온다 하며 허풍을 쳐댔지만 결국 어머니의 퇴직비나 말아먹는 용모마저 추악했던 의붓아버지였다. 의붓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년내내 사사건건 싸움으로 나날을 보냈다. 교원가정의 청고한 분위기에서 자랐던 나는 의붓아버지로 인해 돌변하는 상스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했다. 따라서 의붓아버지의 눈에 나는 속곳에 든 가시였다. 나는 침묵으로 아버지에게 항거했다. 나중에 모순이 극화되어 꼬박 3년 동안 아버지와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한 밥상에서 밥도 먹지 않았다.
바로 이때에야 나는 자기가 입양아라는 사연을 알게 되었다. 의붓아버지가 이 원체 복잡한 가정에 들어오면서 일으키는 역작용에 또 내가 어머니의 친자식이 아니었다는 엄청난 비밀에 나의 무양하던 심기는 정을 잘못 맞은 못처럼 외곬으로 꼬부라들기 시작했다.
한 가슴 가득 찬 실의를 이기지 못해 나는 사회의 불량배들과 휩쓸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아침 새에 문제아로 변해버렸다. 나중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교외 쪽에 집을 잡고 나가버렸고, 어린 나 혼자만 집에 남았다. 어머니가 때때로 와서 쌀 사주고 밥 지어주고 갔지만 그 짙고 쓴 외로움과 고독감은 내 소년기에 큰 응달로 자리 잡고 있다.
그 고독감을 달래준 것이 또 책이었다. 이때는 온 나라가 동란의 부진을 씻고 좌적인 철쇄에서 벗어난 시기라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고 금서로 치부되었던 세계명작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나는 신들린 사람처럼 걸탐스럽게 독서를 했다. 세계명작들을 거의 다 이 시기에 읽었다. 어머니가 명심해 주문하는 <인민화보>, <연변문예> 외에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나오는 <세계문학>과 <아리랑>, 민족출판사에서 나오는 <진달래>총서들을 빠짐없이 사들였다. 그 잡지와 총서들을 통해 나는 세계문학과 중국문학, 중국조선족문학에 대해 알게 모르게 대량 접촉하게 시작했다.
그때 나에게 화약 같은 인상을 남긴 작품들로는 다니엘 디포의 <로빈손 크루소>, 엑또르 말로의 <집 없는 소년>, 로신의 <벼린 검>과 구쏘련작가 라 쁠레예브의 <마흔한 번째>, 중국 작가 량효성의 <여기는 신비한 땅덩어리>, 진국개의 <난 어쩌면 좋아요?>와 일본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추리소설과 호시가라 싱이치의 꽁트들, 그리고 연변작가들의 작품인 김성휘의 <떡갈나무 아래에서>와 림원춘의 <몽당치마>였다.
그리고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 일본영화 <행복의 노란 손수건>, 중국영화 <고뇌하는 사람의 웃음> 브라질의 TV드라마 <여자노예>, 중국통속가수 등려군, 정림의 노래와 프랑스영화 <텍사스의 파리> 중의 여배우 나타샤 킨 스키와 중국영화배우 장유와 통기타와 디스코음악과 나팔바지와 원숭이해의 원숭이 우표 등등을 나는 좋아했다. 나는 음식 탐을 하는 허기진 애 마냥 그 경전과 류행들을 내 작은 두뇌의 빈 동공(洞空)속에 아낌없이 부어넣었다.
그때, 학교에서 나는 줄곧 어문과 대표를 맡고 있었고 작문 짓기에서 큰 기량을 보였다. 내가 쓴 작문이면 죄다 범문으로 낭독되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 이후 전국적으로 처음 있게 되는 제1회 전국조선족중학생 작문콩클에서 지도교원도 없이 나절로 써서 투고한 작문이 우수상을 수상하여 라디오와 상패를 수상하는 잊지 못할 벅찬 나날이 있었다,
나의 앳된 영혼을 들쑤셔주는 벅찬 문화적인 감수에 못 이겨 나는 필을 들었고 작문에만 그치지 않는 본격적인 창작을 언감 시도했다.
당시 일본추리영화와 무협영화가 처음 나와 우리 또래는 그에 열광했다. 하여 나는 무협소설과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썼고 학교에서는 내가 싫어하는 수학시간에도 썼다.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각각 3만 여자에 달하는 무협소설 <소사연의(小寺演義)>, 추리소설 <경각사에 비낀 음영>을 써냈다. <소사연의>는 무협영화의 고루한 형태의 본을 내여 절을 배반하고 나간 무림계의 흑세력을 동자중들이 성장하여 타승하는 내용을 <수호전>처럼 장회체로 썼고, <경각사에 비낀 음영>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흥행했던 일본영화 <추격>과 문화혁명 때 수사본으로 유행되었던 반 간첩 소설 <꽃신>을 한데 버무려놓은 모방작들이었다. 그 중에도 나름대로의 창의성이 보인다면 주인공이 나처럼 남의 집 양자로 자랐다가 아버지를 찾고 보니 자기가 대결하고 있는 흑세력의 두목이었다는 그런 나만의 정감을 부여한 점이었다.
나의 이 소설이라 해야 할지, 영화대본이라 해야 할지, 작문이라 해야 할지, 쟝르를 획분할 수 없는 글들은 당시 학생들 중에서 <베스트셀러>로 대인기를 누렸다. 반급 애들이 다투어 돌려보고는 휴식시간이면 작중 인물들의 무림초식(招式)이나 그들의 운명에 대해 열변을 토하곤 했다. 그들은 자기 신변에 선 작달만한 애가 이 책의 저자라는 것을 감감 잊은 채 어떤 명작이나 영화를 담론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곁에서 눈을 슴벅이며 득의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해했다. (지금도 82년 고중시절에 수학공책 뒷장에 쓴 이 글들을 나는 고이 보존해두고 있다. 일전 서가를 정리하다 다시 오점투성이인 그 글을 보면서도 나는 그 시절의 내가 스스로 대견해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나는 교정 문만 나서면, 썰렁한 집에만 들어서면 다른 아이로 변하군 했다. 무리싸움에 이은 무리싸움, 그것이 방과 후면 하는 가장 큰 짓거리였다.
결국, 고중2학년에 나는 룡정 말발굽 산에서 있은 어느 한차례의 큰 무리싸움의 주모라는 죄장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말았다. 애를 이제 완전 망쳤나보다고 어머니는 낙루를 하셨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의 배짱이 있었다. 내가 가장 숭배했던 쏘련작가 고리끼처럼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유명작가가 될 거라고 나의 퇴학소식을 접하고 걱정스레 모여온 친지들 앞에서 호기에 넘쳐 선언했다.
아이러니적인 것은 그로부터 한 달도 못되어 내가 쓴 작문이 또 중학생작문 콩클 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허나, 시상식 날 수상자는 퇴학당하고 없었다. 학교교무처의 선생들과 반주임이 상품인 반도체라디오와 상장을 들고 우리 집에 찾아와 장끼가 있는 학생인지라 다시 학교에서 받아들일 의향을 말했다. 허나, 성숙치 못한 치기에 넘쳤던 나는 호의로 찾아온 선생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색안경 끼고 나를 사회 불량배 대하듯 하는 학교는 싫다, 광활하고 할일 많은 사회대학을 나와 이제 고리끼처럼 명작가로 될거다! 며 가슴을 탕탕 쳤다. 아직도 천지분간 못하는 애송이었던 나는 스스로 다가오는 어떤 기회를 잘라 던졌고 그 기회를 잃고 그 후로 내내 큰 대가와 무거운 부하를 겪어야 했다.
나의 모교- 용정중학.
대성중학으로 불렷던 학교는 시성 윤동주의 모교이기도 하다.
그때의 용어를 빈다면 나는 취업대기청년이 되어버렸다. 직업은 없고 하여 친구들과 함께 샌들장사에 나섰다. 연길로 와서 그때까지도 시공 중인 서시장의 골목길에서 대련에서 넘겨온 샌들을 팔았다. 허나 장사에 재미를 붙일 무렵, 불량배들에게 샌들을 빼앗겼고 그것을 지키려다가 늘씬히 얻어맞고 장사도 그치고 말았다.
다음에는 룡정 과수농장에서 꾸리는 주물공장에 취직을 했다. 하수도 덮개와 스팀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자전거로 오가는 출근길만 해도 반시간 푼히 걸려야 하는 자그만 민영공장에서 기능공들이 단숨에 100여차 휘두르는 메를 10여차도 못 휘두르고 헐떡이었고, 지글지글 끓는 쇳물 바가지를 어떻게 주체할길 없어 그 앞에서 쩔쩔매었다. 그때 내 나이가 17세, 번중한 로동이 힘에 버거워 속눈물을 떨군 적이 얼마였는지 모른다. 허나, 처음 당착해보는 직장생활은 나에게 불꽃 튀는 영감을 주었고, 그 주물공자의 생활을 모태로 하여 무협이나 추리가 아닌 순수소설이라 생각하고 작품 한편을 썼다.
<피그미의 후손들>, 세계에서 키가 가장 작은 인종인 피그미라는 토착민들처럼 평균 키가 작은 주물공장의 몇몇 청년들의 사업과 사랑에 대해 쓴 1만 7천자짜리 단편소설이었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루 강아지>였던 나는 그때 이 작품에 대해 신심이 컸다.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중국작가 장자룡의 공업소설 <교공장장 부임기>에 못지않을 대작이라고 스스로 만족의 미주를 기울였다. 당시 젊은이들 층에서 인기 높은 종합지였던 <청년생활>잡지에 투고했다.
석달 후엔가 편집부에서 신씨 성을 가진 편집 한분이 나를 찾아왔다. 양모의 학교를 연계주소로 했기에 편집들은 나를 40대의 교원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름도 필명인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 애송이티를 가시지 못한 나를 본 편집이 헛 밟은듯 움찔했고 허구픈 실소를 머금었다. 편집부에 한번 왔다가라는 말만 남기고 두서 없는 행차를 한 듯 돌아가버렸다.
며칠 후, 나는 토끼를 품은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추리며 연길에 있는 <청년생활>편집부를 찾아갔다. 편집선생들이 모조품을 보는 듯한 웃는 눈길로 나를 에워쌌다. 표절, 혹은 번역작품으로 미심쩍어하지만 그 의사를 완곡적으로 얘기해주는 편집원들에게 나는 미덥지 못하면 내가 또 한편의 작품을 써 보이겠다고 배심 두둑이 여쭈었다. (나이가 어린지라 애초에 발표한 나의 작품들은 늘 표절이 아니면 번역 작품이라는 의심을 사곤 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나의 글 수준을 고도로 인정해주는 거나 다름없다고 나는 배포를 머금었다.) 편집들은 마지못해 나의 하회를 기다렸다.
친지를 볼모로 둔 심정으로 돌아와 그 작품을 구하기 위해 또 한편의 작품을 썼다. <단꼬와 백설공주>라는 제목으로 남을 위한 좋은 일만 해서 백치로 몰리는 한 쌍의 신혼부부의 밀월기간에 일어난 사연을 소재로 단편을 만들었다. 여자 손목도 쥐여 못 본 애송이가 어떻게 밀월을 썼던지 모르지만 그 작품마저 읽은 편집원들이 내 어깨에 신뢰의 손길을 얹어주었다.
드디어 1985년 8월호 <청년생활>지에 나의 첫 소설 <피그미의 후손>이 실렸다. (그 이듬해에 나는 자매편 <모함메드의 후손>을 <은하수> 잡지에 발표하여 작지 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3부작으로 예정하고 <나우루의 후손>을 창작, 아쉽게도 채용되지 못했다.) 편집들의 면려로 소설뒤끝에 짤막한 약력까지 첨부되어 나갔다. 지금 보면 가위의 장정설계도 조야하기 그지없고 잡지 값도 겨우 45전, 하지만 처녀작이 실린 그 잡지를 받아든 나의 기쁨은 하늘에 닿을 듯했다. 대번에 여섯 부를 사서 친지와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초등학교 반주임이며 룡정에 있는 리태수, 김재권 등 작가분 몇몇이 우리 집에 모여와 작은 파티를 열어주었다. 십대의 나이에 그것도 정학처분을 받은 내가 유명잡지에 당당하게 처녀작을 냈고, 선생들과 의붓아버지 앞에서 나의 호언을 완수해 가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나의 기쁨은 하늘에 닿을 듯하였다.
하지만 의붓아버지의 빈축의 눈길은 여전하였다. 그 눈길이 싫어져 그 무렵, 나는 집을 나와 버렸다. 연길로 와서 동쪽 교외의 동광양계장에서 달걀을 깨우는 부란공일을 하게 되었다.
장장 21일을 자지 못하고 열을 고루 받도록 부란기의 손잡이를 반시간에 한번 꼴로 돌려주며 <캉베르>오리 알이며 <288>종자달걀을 깨웠다. 그 부란기의 동음이 귀청을 멍멍하게 하는 부화실에서 군용침대에 엎디어 나는 쉴새없이 읽고 또 썼다. 처녀작을 발표하던 19살 그해에 련이어 <노아의 방주>, <맥주 두병> 등 3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개간지>잡지에서 잡지 뒷면에 나의 작가사진을 실어주었고, 작가협회 기관지 <천지>에서 조직한 문학 강습반에서는 우수학원으로 선정되어 중국의 대문호 로신의 반신상을 상패로 수상했다.
그 석고상을 부란실의 창턱에 놓고 바라보며 문학이 주는 즐거움과 성취감에 나는 가정에서의 소외감이며 번중한 로동의 고달픔이며를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운명의 신은 나와 글쓰기라는 짓거리를 단단한 동아줄에 옭매듭으로 칭칭 얽동여놓았다.
3. 입사
그 이듬해도 나는 <북두성>, <은하수>, <송화강> 등지에 육속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와 함께 나의 인생이 궤적이 느닷없이 바뀌게 되었다. 당시 창간초기의 인원결핍으로 고민하던 성급신문인 <길림신문>사에서 파격적으로 나에게 요청을 보내왔다. 하여 학교에서 정학처분을 받은 문제아였던 나는, 어느 사영기업의 양계장에서 달걀이나 깨우던 허드레 부화공이였던 나는, 필재가 양양한 문학청년으로 인정받고 일조일석에 신문사기사로 변신을 했다. 그때 내 나이가 만 스무 살이었다.
중학교문도 채 나오지 못한 스무 살 내기가 일약 신문기자로 된다는 것은 그 당시 편집원들이나 내 곁 사람들의 경악에 쳐들린 눈초리가 보여주다시피 말도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사회접촉면이 넓은 기자 사업에서 단련하면서 나의 눈과 필봉을 벼리여 당시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던 중국작가 호연과 같은 대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뼈물어 먹었다. 한낱 뜨내기 부화공이 기자로 발탁되는 조건은 가혹했다. 2년의 시간은 고험기로 견습기자, 그 기간 로임이나 장려가 한 푼도 없다는 조건이었다. 대신 원고비는 내준다고 했다. 이를 작가로 향발하는 길에서의 기회와 전환으로 여긴 나는 그 조건을 겁 없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86년 5월, 온 거리에 흩날리는 하얀 비술나무 씨를 축복처럼 맞으며 좀은 어리친 모습으로 나는 신문사 편집실에 발을 디밀었다. 배치되어 맨 처음 맡겨진 임무가 선배들과 함께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장편실화 <당산대지진>을 번역하는 것이었다. 선배들은 일찍 번역을 마치고 차물을 마시고 있었지만 나는 점심도 먹지 못한 채 팥죽 땀을 흘려가며 번역에 매어있었다. 번역이 늦어져 부장이 곁에서 재촉하고 주필님까지 찾아와 지켜보는데 난해한 단어들이 많아 안달아난 나머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날 밤을 꼬박 새워가며 겨우 번역을 마무리했다.
내가 쓴 첫 기사는 86년 전국소수민족운동회에서 그네가 정식경기종목으로 되였다는 예고소식이었댜. 그런데 신문기자습작에 관한 강의나 학습도 없이 착수했던 나는 그 기사를 밥도 죽도 아닌 <혼돈 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앞머리에 그네에 대해 읊조린 옛 문사들의 시조를 곁들였고, 소식에 그네 뛰는 여인들에 대한 찬미의 서정까지 토로했다. 글을 들고 울지도 웃지도 못하던 주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길림성을 상대로 한 성급신문이라 취재범위가 넓었다. 룡정을 작은 반경으로 다람쥐 채 바퀴 돌리 듯했던 나는 상경한 시골 닭처럼 전전긍긍하며 장춘, 길림, 교하, 류하, 통화, 매하구, 구태, 장백 등지를 사철 내내 돌아다녔다. 촌부락에 내려가서는 하도 어린 나이였기에 가짜기자로 의심받고 초대도 받지 못한 채 어스름이 내렸으나 잠자리도 찾지 못하다 학교접수실의 마음씨 고운 당직 아바이에게 청구하여 한 온돌에서 비비 닥이며 자기도 했다. (그때 나는 어린 모습을 조금이라도 가려보려고 덜 고운 의붓아버지에게 청구하여 호구부를 고쳐 나이를 한살 올렸고 콧수염을 무성히 기르고 다녔다.) 그렇게 어려운 기자 생활 중에서 나는 문자라는 부호의 합의된 배열법칙과 음훈을 익혀나갔고 따라서 나의 필봉은 서서히 벼려지게 시작했다.
하지만 로임을 주는 날이 내게는 가장 어려운 감내를 겪어야 하는 날이었다. 매양 19일날, 모두가 희희락락 로임봉투를 타들고 음식점을 찾아 갈 때면 나는 조용히 자리를 피하군 했다. 신문사를 멀리한 상점으로 가서 가련한 원고비를 잘라 홀로 맥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렇게 8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신문기사를 곧잘 다루는 합격된 기자행렬에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신문의 <반딧불>, <일분 간 에세이>와 같은 칼럼란에서 나의 이름과 필명을 하루 멀게 볼 수 있었다. 북향, 초군, 설봉, 각설이 그때 나의 필명만 해도 13가지나 되었다. 그때 문단의 원로 김학철선생의 신랄한 잡문에 홀딱 반해 나는 잡문쓰기에 커다란 열성을 보였다. 지어 선생의 풍격인 글 사이에 풀이표를 쳐주는 것도 꼭 같이 모방하여 잡문을 저그만치 10여편 발표했다. 한편, 기자생활에서 받은 감수로 20여 편의 소설과 100여수의 시를 발표할 수 있었다.
그 8년간 대학졸업장이 없다는 단 한 가지 리유로 학교 문을 갓 나서고 취업한 애송이들보다도 적은 가련할 정도로의 로임을 받았고 직함이나 대우, 집 분배 등 기본적인 면에서 아무런 보장도 없었다. (신문기자 행업에 투신한 17년이란 기간 그런 대우는 내게서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어찌 보면 나는 졸업장 한 장으로 한 사람의 우렬을 제쳐놓고 락인부터 찍어놓는 그런 미완숙한 사회규제의 가장 큰 희생자였는지도 모른다.)
오른손잡이를 위해 고안된 세상에서 왼손잡이의 불편함을 망각한 그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오로지 오기와 치기로 한곳 향해 매진하는 외뿔 소마냥 문학의 뿔을 혼자서 갈고 닦으며 버텨내었다.
기자라는 것은 나에게서 직업이었고 문학은 본능이었다. 이를 나는 개인적 수행의 방법으로 간주했다. 그 방법을 통해 나는 어섯눈을 개안할 수 있었고 부족한 나의 천성을 다독이며 달랠 수 있었다. 넋 건지기에서 닭을 희생시키듯 하나의 제물로 나는 문학의 제단에 던져져 있었다. 그런 제물이 되여도 나는 유감이 없다.
8년간의 고험을 거쳐 글 다루기에서 제법 웃자라난 나를 두고 광복과 함께 창간된 조선족 최대의 일간지 <연변일보>에서 백락처럼 손짓했다. 94년, 나는 <연변일보> 해란강문예부간 편집기자로 전근하게 되었다. 스무 살에 시작하여 10여년의 기자생활에서 제법 이름 있는 로기자라는 딱지가 앉게 되였고 그 기간 나는 1,000건에 달하는 기사를 발표, 문학상과 전국소수민족신문상을 비롯한 각종 신문보도상 20여차를 수상하게 되였다.
4. 동호(同好)
여려서 사회에 내쳐졌고 기자와 작가라는 이중신분으로 여러 계층에서 자맥질해왔던 만큼 나에게는 각종 부류의 친구들이 많다. 그중에서 물론 가장 도타운 친구들은 문학동호인들이다. 나는 문학인들과 적극 사귀였고 각종 문학협회를 꾸리는 남다른 열성을 보여 왔다.
처녀작을 발표하던 85년, 룡정에서 젊은 문학도들과 함께 <희망봉>문학협회를 꾸렸다. 비서장을 맡고 각 현시 문학도들을 조직했고, 한편 등사본잡지에 상당한 분량의 무협소설 <피로 물든 야명주>를 련재하기도 했다. 그 후에는 룡정의 유명작가들이 꾸린 <보름달>협회에 가입, 보름에 한번 씩 열리는 작품합평회에 참가하러 퇴근 후면 늦은 밤 버스를 잡아타고 룡정으로 빠짐없이 다녔고 회의마다에 작품을 내놓았다.
<길림신문>에 입사한 86년 나는 또 <백조>문학협회를 만들었다. (협회 이름은 당시 의기투합됐던 지금의 <료녕신문>사 최호사장과 함께 백조사진관에 가서 협회창립기념을 남기며 내가 사진관 이름을 본 따 단 것이었다.) 연길시 당안관 자리를 빌어 협회명의로 60여명의 작가와 문학 지망생들이 참가한 대형 련환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백조> 등사본잡지를 몇 기 발행, 창간호에 나는 '설봉'이라는 필명으로 <발전의 견지에서 본 조선족과학환상소설>이라는 평론을 실었다. 그러한 우리 문학도들을 대견히 여겨 등사본잡지의 앞머리에 김학철선생과 리상각시인께서 왕붓을 허비해 제사까지 써주셨다. (그 동아리들 중에서 대부분이 사회 각 기관의 어마어마한 령도인물로 성장. 오직 나만이 외줄타기로 지금도 경황없이 글밭을 경작하고 있다.) 그후에도 여러 문학협회에 적극 참여, 청년시인협회인 <5월시회>의 부회장직을 맡고 수천원의 자금도 협찬 받아오고 내가 경영하고 있던 식당을 협회전용처럼 내밀고 각 잡지에 동호특간도 조직해내고 하면서 동호회를 만드는데 혼신을 기울이기도 했다.
어떤 동아리를 만들기에 열중하는 나이가 지났음에도 그러한 지인들지간의 이해와 교류의 분위기의 멋을 잊지 못해 몇 해 전에도 전국 각지의 기성문인들을 동원하여 <사이섬 글 동네>라는 인터넷동호회를 설립, 한국의 유명홈에 개설한 우리 동호회가 그중 가장 활약적인 양상을 보여 왔다.
문학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만큼 나는 나의 동인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동인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즐겨 읽는 무협지중의 녹림인물들처럼 자신을 내던지곤 했다. 당년에 책을 쌓아 놓고 나면 엉덩이도 간신히 들이밀 나의 8평방짜리 셋방 집에 들리지 않은 동년배 동인이라곤 없다. 싸구려 생맥주에 북어끄트러기라도 맛나게 찢으며 문학을 안주삼아 밤을 지새곤 했다. 문예부에서 편집을 하면서 나의 손으로 편집하고 그 작품이 상을 받은 내 또래 동인이 10여명이 된다. 문학 외에 아는 것이란 또 문학밖에 없는지라 합격 못된 세대주로 첫 혼인이 파렬된 후에 거칠 것 없는 나의 셋방 집은 아예 문학 살롱이 되다시피 했다.
우리집에 묵으며 꼬박 2년간 나와 함께 지낸 문학도들이 몇몇 있다. 석탄도 사지 못해 한겨울에 불 때지 못한 친구들에 이불 몇 채씩 깔고 앉아 매운 소주에 청국장 하나만 달랑 놓고도 우리는 문학의 진미를 담론했다. 그사이 우리 집 식객이었던 그 문학도들의 내가 편집한 작품이 어느 해에는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제일제당상>, <생활수기상>을 몽땅 도거리해서 보람으로 기쁨에 눈굽을 적신 적도 있었다. 회사에서는 불경기로 로임까지 체불 받으면서 직장도 없는 그애들을 부둥켜안고 책을 팔아 쌀을 사야 하는 극난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그 나날에 나는 일곱 편의 중단편소설과 수십 수의 시를 발표, 4차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조선족 최대의 사회열점을 건드린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를 집필, 연재, 출판해 내었고, 첫 작품집 <천재 죽이기>를 내놓았다. 그네들과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무원조하고 지지리도 어려운 그 나날을 버텨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문학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요즘 세월에도 문학의 외길을 고집하며 함께 하는 그네들을 나는 좋아한다. 친지가 적은 내게서 그들은 살밭은 형제와도 같다. 바른 심성을 갖춘 그들이 문학에 불어넣는 생의 기미에 대한 전언을 읽어내고 서로 긍휼을 나누는 지음이 될수 있기를 나는 진심 바랬다.
5. 무드(mood)
신문기자로 발탁된 이듬해 연길로 이사 오면서 나는 28개의 사과배광주리에 나의 전부의 가산인 소장한 책들을 담아 싣고 왔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내 붙박이로 책 더미에 내 옹근 몸뚱아리를 부장품처럼 묻어버렸다.
나의 일상에서 독서가 없는 나날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나는 편집광적인 독서광이다. 언감 이 세상에 나오는 모든 좋은 책들을 모조리 읽고자 망상하고 있다. 시시때때 그 시대의 의식형태에 맞추어 나오는 각종 종류의 책들을 모조리 읽으려 들었다.
종소리에 반응하는 파블로브의 실험용 동물처럼 좋은 책만 나오면 예민한 후각으로 알아내고 선참 사들여 허겁지겁 읽었다. (멋모르고 읽다나니 독일철학가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한어로 읽고 중국인으로 여긴 웃음거리를 자아내기도 했다.)
삶에서 우리가 취하는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은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중 적극적인 보상으로서는 어떤 가치의 획득이고 소극적인 보상으로서는 자기유지이다. 적극적인 보상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자기유지를 해야 한다. 체계적인 교육을 재대로 받지 못한 콤플렉스가 심각하기에 남보다 몇배로 되는 책을 읽고 있다. 그것이 이제는 내 생리적인 행위에 가깝게 체질화되었는가 보다.
나의 독서범위는 오지랖이 넓어도 무지 넓은 편, 단 문학류 뿐 아니라 종교, 천문학, 회화, 동식물학, 민속 등등 여러 부류의 책들도 대량 사들여 읽는다. 신간베스트셀러면 죄다 사들이는 외에도 꼬박 10 여년 주문하거나 사서 읽는 잡지만도 다섯 10여 종류가 된다.
<소설월보>, <이야기회>, <독자>, <오묘한 비밀>, <우표수집>, <월드스크린>, <련환화보>, <시각>, <유머대사>, <고금전기>.......
보잘것없는 박봉마저 그 3분의 2는 잘라 거의 사흘에 한 번꼴로 책과 잡지를 한 아름 사드는 나를 두고 안해는 우리 집이 내내 쪼들리고 있는 까닭은 책을 너무 사들이기 때문이라고 찬사 절반 푸념 절반을 섞곤 한다. 일찍부터 나는 책을 사면 책의 맨 앞장에 나의 이름 병음자모와 책을 산 곳과 일시를 적곤 했다. 그 날자가 적힌 5천여 권의 책과 매달기수가 빠짐없는 수천 권의 잡지들을 배열해놓으면 나의 지금까지의 문학적 행보가 년보처럼 역력히 엿보인다. (89년도에 생활고를 덜어보고자 나는 주 공안국 부근에 책방 하나를 차린 적 있다. <쉐익스피어>라는 대문호의 이름을 딴 서점, 그 서점을 꾸릴 적에 내가 소장한 책 수천 권이 있었기에 맨손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바람벽을 꽉 메운 책장과 침실, 주방 지어 화장실까지 쌓여있는 책 속에 파묻혀 나는 예이제 없이 신들린 듯 독서에 혼줄을 앗긴다. 나를 잃는다.
전국유명체인서점인 석수(席殊)서점은 책 안 읽는 풍토의 연길에서 고작 한해가 못 되여 문을 닫았다. 나는 그곳의 가장 충실한 고객이였고 회원이였다. 보통회원으로부터 준회원 고급회원으로 되려면 천 원어치씩 사야 한 급씩 오른다. 남들이 4,5년 지나야 될 수 있는 고급회원증을 나는 불과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땄다. 1년 사이에 3천 원 어치, 매달 평균 3백원 어치의 책을 사다 읽었다는 얘기가 된다. 사들여서는 허기 끝의 탐식처럼 읽는다. 송충이가 솔잎을 떠나 살 수 없듯 어려서부터 길러 온 미친듯한 독서 관습은 골수깊이 체질화되어 있다.
내가 열광적인 영화디스크 수집애호가라는 것을 문인들은 다 알고 있다. 이 시가지에 있는 음향테이프 점들에서 나를 모르는 경영자들이 없을 정도로 나는 영화광이다. 어릴 적부터 영화에 심취되어왔다. 명작개편영화와 할리우드의 대작영화 중국 신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비디오테프와 VCD디스크로 대량 사들였다. 세계명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부터 상업흥행작 <타이타닉 호>에 이르기까지, 4,50년대의 명감독 히치콕의 <나비 꿈>으로부터 당대 명감독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 이르기까지 중국명감독 진개가의 <패왕별희>로부터 중국신세대감독의 신작 <플랫폼>에 이르기까지 3천여부의 영화작품을 소장, 우리 집은 짜장 하나의 영화고(庫)와도 같다. 개봉영화,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경전영화. 그리고 신예감독들의 끼 넘치는 실험영화 지어 애들이 보는 애니메이션까지 모조리 사들여 본다. 열심히 영화전문지를 사들여 새 영화의 개봉일시를 알아내고 연인을 열렬히 기다리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새로운 개봉작을 기다린다. 매장의 구석에서 남들이 내쳐 둔 먼지 묻은 흑백의 경전 한 장을 찾아내도 나는 그 테이프 한 장에서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한다.
소학교 때부터 우표수집에 흥취를 가져왔다. 그때는 학교에서 집단적으로 조직하는 과외취미활동같은 것이 없었지만 집에서 주문해보는 <인민화보>에서 강치방(姜治邦)이라는 우표수집대가를 소개하는 문장을 읽고 우표를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백장의 중외우표를 수집하고 있다.
독서에서 잡식적인 취미를 가졌던 만큼 홀로 조용할 때면 무게 있는 명작이나 철학서들을 새겨 읽고 술 마신 뒤면 자유분방한 시집을 펼쳐들고 명절이 맞 띄면 권수가 좀 많은 판타지나 연정소설 같은 기분 좋은 쪽으로 찾아 쥐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종합지 같은 것을 읽는다. 그리고 휴식일이면 할리우드 영화 한편, 중국영화 한 편씩, 정극 한편, 오락물 한편씩 곁들이면서 온 하루 영화 파티를 벌린다.
지금은 소설 창작에 전념하고 있지만 창작에서도 문학의 거의 모든 장르를 필촉으로 건드려왔다. 직업적인 신문보도상 외에도 내가 지금까지 수상한 20여차의 문학상을 보면 소설, 시, 수필, 아동문학, 실화문학 지어 가사 상까지도 있다. 애초에는 추리소설과 과학환상소설, 역사소설도 발표했고 근자에는 시나리오, 다큐멘터리와 소품도 내놓았다.(<중학생신문>의 력사소설 <혼불>을 일면 창작면서 연재한 뒤를 이어 또 <스포츠신문>에 추리소설 <스포츠살인>을 연재하기도 했고 신문사 취재를 하는 여가에 연극단의 청탁으로 소품을 썼고 TV방송국의 청탁으로 대형다큐멘터리 대본창작을 하기도 했다.) 그런 나를 두고 도대체 타이틀이 뭐냐고 따져 물으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천재시인 이상의 본을 내여 <모든 예술을 사랑하는 인간이외다!>고 넉살좋게 말하곤 한다.
내 서재에 스스로 붙인 이름은 <허강재(虛崗齋)>이다. 빈 언덕, 몸과 마음을 비운 곳이라는 뜻. 그 <허강재>가 나의 소우주(小宇宙)다. 그 속에 쌓여있는 5천여 권의 책과 2천여 부의 영화 테이프가 나의 전부다. 좋은 작품 한 권에, 좋은 영화 한 부에서 나는 법열(法悅)을 느끼듯 몸을 부르르 전율한다. 그 속에 진리의 말씀이 있고 슬기의 샘터가 있고 고난을 이겨 나가는 주문이 있고 뮤즈의 노래가 있다. 그속에 들어앉아 무더기로 사들인 신간 잡지와 서적들을 미친 듯이 읽고 새로 개봉되는 영화 테이프들을 대량 소장하고는 보고 읽고, 읽고 본다. 그리고 쓴다. 그 피스톤의 작동 같은 따분한 동작이 여태껏 내가 해 온, 그하고 있는 그리고 할줄밖에 모르는 짓거리다. 순수한 심안(心眼)으로 보고 읽는 그것이 내 인생에 보탬이 될 황금의 열쇠인줄을 나는 안다. 그것은 내 불운을 <액막이>해 줄 팥 한 주머니이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살아가게 한다. 그런 아름다움에 집요하게 천착(穿鑿)하며 나는 불운한 내 신세를 잊는다. 어쩌면 나는 문학과 예술을 위해 태여나고 내내 그에 목말라 하며 홀로 서성이는 우주적인 짐승 한 마리일가!
그래서 치명적인 아픔을 껴안고도 남들의 눈에 비친 나는 언제보나 여유 있는 터무니없이 낙관적인 모습이다. 마냥 정장을 거부하는 편한 캐주얼(休閑)차림으로 어깨를 솟구고 다니며 입만 열면 유머가 폭포로 쏟아져 나오고, 맥주 집 가서는 맥주 반 박스쯤은 거뜬히 재끼며 남보다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온갖 화제를 터뜨리고 둥글게 만드는 주체하지 못할 감성으로 팽배해 있고 터무니없이 행복해 하는 남자, 이렇게 나는 매일 매일을 스스로 빚어 만든 문학적인 무드에 젖어 살고 있다.
산다는 것은 참으로 운문(韻文)적인가보다. 나 같은 인간이 살아가는 율법(律法)은 따로 있는 것 같다. (불이 잘 들지 않아 매연연기가 자옥한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서도 책을 쳐들고 있는 나를 우연히 찾아왔던 어느 한 소설가가 못 말려!하고 채머리를 떤 적이 있었다.) 끝임 없는 보기와 듣기 그리고 쓰기가 내 일상의 전부다. 문학이라는 그 비실제적 효응에 대한 매력을 기르면서 그 성취에 대한 동경과 확신 하나만으로 여태껏 살아왔다. 그와 같이 나의 삶의 비망록에 적힌 하많은 사연들은 모두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6. 아집
이 나이에 벌써 지지부진한 인생을 운운하는 것은 객기라 하겠다. 허나 어찌 보면 산다는 건 객기이다. 삶은 그저 도취이며 마술 같은 것이다. 진정한 성숙을 꿈꾸는 자는 늘 미숙한 채로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항상 자기의 처지를 최악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여유와 달관[達觀]이 보인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또한 용기이며 도전이다.
오늘로 오기까지 나는 정말로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져 왔다. 어떻게 되다보니 내가 걸어 온 길은 다른 사람들이 여유 작작 노량으로 걷고 있는 탄탄대로가 아닌 뒤안길, 아니면 국도를 벗어난 진창길이 아닌가 싶다. 삶의 길이 너무나 울퉁불퉁했다. 삶의 굽이굽이에서 해일처럼 밀려와 연줄로 들이닥친 불상사가 호된 일격으로 육신을 강타했다. 무릎이 탁탁 접히는 것 같은 고통이 정신을 촛농처럼 만들어버리곤 했고 그 고통은 나를 함몰시키게 족했다.
말하거나 나의 삶은 조악하였다. 강보의 몸에 버려졌고, 양모와 의붓아버지의 끝없는 소시민적 갈등 속에서 암울한 사춘기를 지내왔고, 대학문전도 못간 몸으로 엘리트 속에 묻혀 필봉 하나만 믿고 신심을 혹사해왔으며, 청빈한 문인신세 때문에 혼인이 파열되었다. 30대중반이 넘도록 안식할 보금자리 하나 마련 못해 수천책의 책 꾸러미를 지고 메고 열다섯번씩 이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오로지 사랑하는 딸애와 타향 멀리 떨어져 함께 지낼수 없는 살을 도려내는 마음의 진통 속에 거액의 빚짐에 눌리워 수년간 내내 리자돈을 꾸어대야 하는 나날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세대주로 인생을 감당해야 할 나이에 어수룩한 일에 휘말려 직장을 말고 한지에 쫓겨나야 하는 이변까지 일었다. 내 인생의 초반부터 덧쌓인 그 수많은 절망의 소품들.... 초현실주의 수법으로 예술화한 그 아픔이 나의 중편소설집 <천재 죽이기>의 구구절절에 배어있다.
세상살이의 올곧지 못함에 부대껴온 나날이였기에 화려하고 거창한 것과 내 인생은 거리가 멀었다. 그저 구질구질하고 고달픈 것의 연속이었다. 장애물경주에 나선 사람처럼 그런 것들을 나는 회피할 수 없었다. 때로 운이 좋아 작은 휴식과 성취를 맛볼 수 있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물굽이 우에 떠올랐다 꺼지고 마는 거품과도 같은 것이였다. 그리고 세상은 한 번도 나에게 출구를 내여 주지 않았다. 설사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조금 보였다 하더라도 언제나 개구멍을 지나는 것 같은 주눅들림과 비굴함으로 그것을 통과하게 했을 뿐.
허나, 나는 중력에 굴복하는 무거운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의 불쾌한 먼지와 소음의 기류를 덮어쓰고 나는 절망감의 정체와 아득바득 싸웠다. 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어둠에 적응하게 하는 방법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다. 끝이 없을 것 같은 농밀한 어둠을 더듬는 와중에 문학이라는 빛이 있어 내게는 다행이라 하겠다.
나를 고통의 류황불에서 빠져 나오게 한 구원의 빛이 바로 문학이였다. 절망의 정체를 저울질하게 하는 도구, 말 못 할 사정과 가슴 터질 슬픔을 상쇠해 주는 엔돌핀이 바로 문학이였다. 문학, 그 비실제적인 효능에 대한 매혹을 기르며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놓고 탐미해 들었다. 작품의 문학성보다는 황금성이 중요시되는 세월에 하필이면 이 세상 가장 열렬한 문학광으로 등장했다.
현학적인 표현이 넘치는 왕성한 실험으로 현실과 환상사이를 넘나들며 독자적인 자신의 영역을 만들었다. 내 작품의 제재는 모두가 욕망이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사회의 구도 속에서의 한 개인의 처절한 몸부림과 그 개체가 어떻게 부서져 가는지를 갈파한 작품들이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모두가 상식, 윤리, 가정, 법의 규정된 테두리 속에서 숨 막혀 죽어가는 인물들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기도 했다.
문학은 물리적 해결을 도모하는 방편이나 수단이 아니었다. 그러면 왜 문학을 해야만 하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왜 문학을 해야 하는가? 하는 화두를 내놓고 자문을 구한 적이 많다. 그 답을 나는 오랫동안의 대가를 치른 뒤에야 몸으로 찾았다.
이처럼 문학은 내가 컴컴한 생의 동굴 속에서 변신을 이루게 하는 쑥과 마늘이었고, 내 삶의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바란 자기투척이었고, 내 무채색의 삶을 채색으로 만들어주는 조색판이었다. 아픈 나날에 내 흩어지는 마음과 행동을 붙들어주고 위로해준 것이 바로 그 문학이었고, 초라니 같던 나를 어엿이 증명해준 것이 바로 그 문학이었고, 끊임없는 생활의욕의 에너지를 준 것이 바로 그 문학이었고, 상처투성이 내 삶을 표구할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그 문학이였다. 나에게 삶을 주시고 그것을 볼 수 있는 시선을 주신 문학에 나는 감사한다. (문학보다는 그 황금성이 중요시된다는 요즘 세월에 하필이면 나같이 문학에 환혹해 있는 얼간이를 사랑하는 한 처녀와 다시 결합하면서 결혼식 날 내가 하객들에 대한 답사의 첫마디가 바로 다른 사람도 아닌 문학에 대한 감사였다.)
남과 달리 단 한곳에 아집을 거는 것은 기실 괴로운 일이다. 어쩌면 줄곧 예술적인 요구와 현실사이의 간극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나는 나 자신의 률법대로 살아가는 실성한 인간일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유폐(幽閉)된 자아를 지니고 세상으로부터 중절된 인간일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생의 어느 시기 블랙홀에 잘못 빠져 들어가 중력을 상실해 버린 사람일수도 있다.
하지만 주어진 운명을 속여 비켜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미 나는 혼자서 쉼없이 달리는데 익숙해 있다. 스스로의 무드를 만들고 그로서 생성되는 엔돌핀에 도취되는 나는 문학과 예술이라는 거대한 씻김굿의 휘모리에 신들려 있다. 속박 없는 본연의 삶에 대한 동경은 자기구제의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 그 내가 달려가려는 궁극은 문학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카뮈의 철학에세이 <시지포스 신화>를 열심히 읽은 적 있다. 카뮈가 인용한 희랍신화에서 신들은 시지포스에게 끝없이 바위덩이를 산꼭대기까지 짐 져 올리는 형벌을 내렸다. 허나, 그 자체의 무게에 의해 바위덩이는 곧 다시 굴러 떨어지고 시지포스는 영겁으로 그 바위를 짐 져 날라야 했다. 나는 문학이 곧바로 숙명의 돌 굴리기라고 생각한다. 올리고 굴리고 다시 올리고 굴리고·그 고행 속에서 끊임없이 절망하고 끊임없이 연소하는 숙명적인 짓거리.....
나의 행보는 아직도 먼먼 도정위에 있다. 아직도 정상이 까마득히 보이는 산기슭에 있다. 아직도 문학이라는 숙명의 돌을 끊임없이 올리고 굴려야 하는 것이다. 문학적 텍스트에 관한 긴장감을 잊지 않고자 나는 부과된 숙제처럼 매일 매일을 열심하고 있다. 글쓰기의 괴로운 행복 속에 묻혀있다.
너나가 문학의 현기증 나는 가치하락을 경험하고 있는 요즘 같은 세월에 문학만을 고집하고 부르짖는 내가 사람들에게 우습게 광대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허나, 치기를 가진 사람이 가장 순수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임을 나는 안다. 그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신념이 나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리라 나는 믿는다. 애초에 개설한 내 홈페이지의 이름은 <고독한 파수군-작가 김혁의 방>이다. 나는 숙명으로 문학이라는 이 황금의 밭뙈기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거듭날 것이다.
카뮈의 <시지포스 신화>의 몇 구절을 빌어 한 문학광의 껄끄러운 경력과 집요한 아집을 해석해본다
시지포스의 말없는 기쁨이 모두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곧 그의 것이다. 그의 돌은 그의 것이다.
시지포스는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죽음에 의해 봉인될 그의 운명이 되는 행동의 연속을 바라다본다.
우리는 항상 그의 돌을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포스는 신들을 부인하고 바윗돌을 들어 올리는 성실을 가르친다. 이 바위의 부스러기 하나, 어둠에 가득 찬 산의 광물빛 하나가 오직 그에게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고투, 그 자체가 그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포스를 마음 속에 그려볼 필요가 있다.
"도라지" 2000년 1월호 김혁특집,
"연변문학" 2005년 5월호 "김혁특집" 中에서
첫댓글 휴일날을 잘 보내셨는지요 오늘저녁시간은 태풍의 간접영양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는 저녁시간에 컴퓨터에서 좋은글을.
읽으면서 머물다 가네요 내일부터 가을 장마비 대비하시고 즐거운 저녁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