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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심금을 울리는 한편의 생명비가
김혁의 장편소설《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를 론함
최삼룡
김혁소설가의 두번째 장편소설《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연변문학" 2003년~ 2005년)는 우선 전형적인 비애소설이다.
요즘 문학계에서는 그리 강조하지 않지만 소설학에는 오래전부터『비애소설』이라는 쟝르가 있었다. 한자로 쓰면『悲哀小說』영어로는『tragedy』인생의 불행과 비참을 제재로 하여 독자들에게 비애감을 맛보게 하려는 소설을『비애소설』이라고 하였다.
박신애라는 이름의 주인공, 초생달의 눈과 매력적인 덧이의 임자 20세의 그녀는 고향 공주촌을 떠나 국자가에 진출한 후 몇년간 자기의 꿈을 실현하려고 아글타글하다가 나중에 한국으로 밀입국하는 도적배에서 마지막 생명의 비곡을 울리고 짧고도 고된 삶에 종지부를 찍는다.
혹자는 이러한 이야기는 중국조선족이라고 불리우는 이 민족공동체 내부에 요즘 들어 항다반사(恒茶飯事)여서 뭐 그리 놀랄 바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예사로운 일이라고 해도 한편의 소설, 아니 한편의 장편소설로 씌여졌을 때는 신변에서 이따금씩 들리는 골목소식과는 틀리는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창조주체에 의하여 창조된 한편의 문학작품이기 때문이다.
다음 김혁씨의《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이 장편소설은 전형적인「저층서사」소설이다.
저층서사(底層敍事)란 새 세기에 진입한 이래 중국사회에 이미 표면화된 민생문제에 대한 관조를 나타내면서 빈부차이, 새로운 도시빈민층, 도시에 진출한 농민공 등 밑바닥인 생을 영위하는 계층의 궁핍한 삶과 정신실존을 사실주의방법으로 표현하는 작품들을 통털어 이르는 말이다. 저층서사소설에서는 아직까지도 도시에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분망한 소외된 계층을 주요 묘술대상으로 삼고 이 부류 사람들의 처지를 우리 시대의 대사로 대할 것을 주장하며 그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내면서 이를 통하여 시대의 일부 삐뚤어진 가치관념을 비판하고 아울러 개체생명의 독립과 존엄을 고양하고있다.
여기서도 혹자는 저층의 삶의 현장을 조명한 작품은 우리 문단에도 이미 적잖이 창출되였다고 하면서 뭐 대단한것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부의 장편소설로서 우리 시대의 믿바닥인생을 영위하다 비명에 죽어가는 한 처녀의 짧고도 슲은 인생을 다룬 작품은 김혁씨의《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가 우리 문단에 첫 작품인줄 안다.
그러므로 김혁씨의《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라는 이 비애소설 내지 저층서사소설에 어떻게 접근하겠는가? 이 소설에 창조된 비극적 인물 박신애의 형상에 체현된 문화적내포는 어떠한가? 이 비애소설 혹은 저층서사 구경 어떻게 씌여졌는가? 김혁씨는 어째서 이 비애소설을 썼는가? 등등 문제에 대한 우리의 진지한 해답이 요청된다.
1.《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이 장편소설에 접근하는 몇가지 전제
박신애라는 녀자는 공주촌이라는 농촌으로부터 국자가라는 도시에 들어온 사람이다.
이로부터 우리의 뇌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것은 요즘 우리 민족사회에 박신애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다.
북경 어느 조선족학자의 통계에 근거하면 개혁개방 30년래 할빈으로부터 대련까지 동북의 철도연선 크고 작은 도시에 진출한 농민신분의 조선족인구가 40만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통계에 근거하면 북경에 진출한 조선족이 10만이 되고 산동반도에 진출한 조선족이 20만이 넘고 산동반도밖의 동남부연해도시에 진출한 조선족이 10만이 넘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설과는 관계가 없지만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이 20만이 넘는다고 한다.(이 통계는 말그대로 불완전한 통계이다. 특히 이 통계에 중국에 진출한 한국인이 포함되였을 수 있다.ㅡ필자 주)
그러므로 우리가 박신애라는 이 인물에 접근할 때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것은 박신애는 현대화건설의 물결 속에서 도시에 진출한 100만 조선족의 일원, 하나의 생명개체라는것이다. 다시말하면 박신애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가 주는 제일 크고 제일 주요한 정보는 농촌을 떠나 도시에 진출한 조선족농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데 대한 정보이다.
물론 김혁씨의《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이전에도 이 제재를 취급한 문학작품이 있었으며 개중에는 성공적인 작품도 있었다. 그러나《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와 같이 장편소설의 쟝르로 이 제재를 취급한 작품은 없었으며《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처럼 예술문학적으로 성숙한 작품은 많지 않다고 말해야 할것이다.
다음, 박신애는 농촌으로부터 도시에 진출한 20세의 녀성이다.
여기서 주제어는 녀성인데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녀성주의 혹은 녀권주의 문제가 제기된다.
영어로「feminism」즉 페미니즘은 중국에서 처음에는「녀권주의」로 번역되다가 다시「녀성주의」로 번역되는 개념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녀성의 사회적, 정치적, 법률적 권리의 확장을 제창하는 주의 혹은 운동이다.
주지하다싶이 오래동안 전통문화에서 녀성은 주체로 되지 못하였으며 주류담론에서 남성과 녀성의 권리는 사실상에서 불평등하였으며 남성은 초자연적인 지위에 처하여있고 녀성은 여전히 남성의 한부분으로밖에 되지 못하였다. 이른바 페미니즘이란 남권의 압박에서 녀성의 해방을 주장하는 리론이며 운동이다.
문학창작에서 페미니즘은 남성중심의 의식형태에 대한 청산이며「녀성서사」의 발굴과 제창이며 남성문학과 다른 특색이 있는 녀성문학의 건설이다
페미니즘은 지난 세기 80년대로부터 중국문학계에 수용되기 시작하여 녀성의 독립자주와 물질, 정신상의 철저한 해방을 요구하는 녀성들의 시점에서 남권주의중심의 문학과 문화에 대하여 엄격한 해부와 비판을 진행함으로써 주국의 문학창작과 문학비평의 발전에 홀시할수 없는 공헌을 기여하고있다.
물론 성별로 보면 김혁씨의 작품활동을 「녀성사작」에 귀납할 수 없지만《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이 장편소설은 박신애라는 녀자의 비극적 운명을 반영하고있다는 면에서는 이 소설에 접근하는데 있어서 일부 페미니즘적시각이 요청되는것이 사실이다.
그 다음, 박신애는 도시에 진출하여 성공한 인물이 아니고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비극적인물이라는데 대하여 충분한 주의를 돌려야 한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이 작품을 한번 읽어본 이들은 누구나 알겠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 박신애가 국자가에 첫발을 들여놓아서부터 죽을 때까지 만나는 모든 사람 중에서 신애를 진심으로 도와주는 사람은 거의 하나도 없으며,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아울러 신애의 인생은 십분 비참한 인생이며 신애는 철저하게 비극적인 인물이다. 소설학에 근거하면 박신애는 계속 하강선을 그으며 발전하는 운명선에서 죽음으로 내달리는 인물이다.
어찌 보면《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이 한부의 장편소설은 신애의 꿈이 어떻게 박살나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수 있으며 혹은 박신애라는 이 한떨기 생명의 꽃이 어떻게 시들어가고 죽어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이 소설에 접근함에 있어서 비극에 대한 리해는 필수적이라 하겠다.
2.《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의 주인공 박신애라는 녀자
우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박신애라는 이 녀자 참으로 운명이 기막히게 불행한 녀자이다.
원체 신애는 어려서 어머니가 그녀에 대한 부양을 포기하는 바람에 다병하고 유약한 이모의 손아래에서 자랐다.
이모에게서 듣기로는 어머니가 신애를 낳고 죽었다고 하지만, 기실 어머니는 처녀의 몸으로 신애를 밴 신애를 낳던 참에 집에 버린 채 야밤도주를 해버렸던 것이다.
결국, 신애는 일찍 남편을 잃고 네살 되는 아들을 키워가는 이모네 집에 얹혀서 엄마, 엄마라는 말 대신 이모, 이모 하면서 자랐다.
그러다가 갖 스무살이 되는 해 겨울, 인구의 대이동이라고 불리우는 농민의 도시에로의 진출에 밀려 신애는 국자가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 박신애라는 국자가에 들어올 때 이 시골녀인의 꿈은 구경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도시에 들어와 공부를 하여 무슨 교원이 되거나 학자가 되려는 꿈이 있고,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 큰 부자가 되려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문학예술의 꿈을 실현하려 도시에 들어오지만 신애의 꿈은 너무나 소박하였다. 눈물이 날 정도로 소박하였다.
광천수차기사 인철이와 같이 처음으로 교회당에 갔을 때 하는 신애의 기도에서 우리는 그의 꿈이 무엇인가를 보아낼수 있다.
나더러 돈을 많이 벌게 해주옵소서. 김밥집 마담만큼은 못 되여도 나중에 그 절반만큼이라도 돈이 있게 해주옵소서. 앓지 말게 해주옵소서. 이제 귀찮은 감기 그만 하게 해주옵소서. 고향계신 호준오빠랑 이모랑 동생이랑 몰래 떠나 버린 나를 나쁜년이라 욕하지 말게 해석해 주옵소서. 아무쪼록 그들이 무사하게 지내게 해주옵소서. 하루빨리 나도 경자처럼 시내물이 들게 해주옵소서. 그리고… 그리고 나에게도 다른 시내애들처럼 삐삐 호출기가 있게 해주옵소서 아멘!
사실, 김밥집마담에게 돈이 얼마나 있는지는 딱히 모르겠지만 상식으로 추측해도 그리 많지 않을것이라는것이 뻔한데, 신애는 그 절반만큼이라도 벌게 하여달라고 기도하며 국자가에 들어온 후 지금까지 아직 경자를 만나 보지 못하였지만 전에 환고향한 경자를 본 인상으로 경자만큼 도시에 물들게 하여달라고 기도한다.
이렇게 소박한 꿈을 안고 국자가에 들어온 박신애는 임시 먹고 잘 수 있는 일자리를 찾기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특히 국자가의 지정학적 위치의 우월성으로 녀자, 특히 젊은 녀자들이 임시로 입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는 그리 힘들지 않는 도시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인생의 길에서 자기의 꿈을 이룩하려면 의식주문제의 해결뿐아니라 필연적으로 앞에 놓이는「생물사슬」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례를 들면 최저한도의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하여야 할 뿐만아니라 영원히 독신으로 살 수는 없고 결혼하여야 하고 자식을 낳아 독립인으로 키워야 하고 병이 나면 치료를 받아야 하고 혼자가 아닌 한 가정이 거주할 집을 마련하여야 한다.
분명한 바, 신애에게도 인생의 길에서 반드시「생물사슬」을 하나하나 풀어나가야 한다는데 대한 정신적준비는 없었던것이다. 이를 우리는 국자가에 온 박신애의 모든 언행으로 증명할 수 있다.
국자가에 진출한 그가 제일 처음 발을 붙인곳은「오씨네 김밥집」이다. 같이 일하는 장아주머니도 좋았고 주인마담도 괜찮았고 여기서 성격이 쾌활한 광천수차기사 양인철과도 사귀고 같은 성씨의 털보아저씨 운수회사 박기사도 알게 되였다.
그러다가 김밥집이 파가이주를 당하게 되고 신애는 그 박기사의 소개로 운수회사에 차장으로 취직하게 된다.
간호사와 더불어 버스차장은 원래 박신애가 아주 선망하던 직업이였다.
과연, 운수회사는 신애에게 새로운 생활을 약속하는것 같았고 신애의 꿈을 실현하는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는것 같았다.
김밥, 김국, 오징어볶음, 두부볶음, 철판소고기구이, 조기구이, 오이무침, 버섯무침…하고 료리메뉴를 외우기보다 더 품위있고 운치있는 노릇이라 신애는 느껴졌다. 음식점에서 접시나 나르던 시골애가 차장이 되어 도시를 거침없이 누비며 달린다는것은 그녀로 말하면 중요한 전환이기도 했다. 매양 출입문곁의 차장좌석에 앉아 창밖으로 스쳐가는 도시의 풍경을 새로 나온 그림책 보듯 흥미에 절어 지켜보며 신애는 가슴 들먹히 괴여오르는 만족감을 주체할길 없어했다. 그리고 신애는 시시때때 그 어떤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봄의 훈향 속에 담담한 휘발유냄새에 섞여 신애만 맡을 수 있는 그 내음은 시골처녀 스스로가 만들어내고 감득할 수 있는 희망의 냄새였다.
그리하여 집채처럼 큰 버스를 신애는 신명을 바쳐 닦으면서 이렇게 큰 버스, 이렇게 멋진 버스, 도시의 네거리를 보란 듯이 누비는 버스의 차장은 바로 나다! 라는 흥분에 버거움을 잊었고 맡겨지는 모든 일에서 남보다 열성을 보이며 점심에 운수회사 공공식당에서 밥을 먹는다는 그 자체에 대하여 무한한 행복감에 잠기기도 하며 푸른 제복과 두리모자를 감추어가지고 나와 버스차장 제복차림으로 사진을 찍어 이모에게 붙여보냈던것이다.
아직 세속에 물들지 않은 단순한 시골처녀 신애는 운수회사의 버스차장이 되는것으로 자기의 꿈이 이룩된다는 착각의 늪에 빠져들어갔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골처녀, 소박한 꿈의 소유자 박신애의 무의식에 깊숙히 간직된 소망을 잘 생각해볼것이 요청된다.
사실, 변강의 시골농촌에서 스무살까지 향소재지를 중심으로 행동반경이 10리를 벗어나본 적이 몇번 없는 그녀, 작품에서 딱히 밝혀진것은 아니지만 중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농촌처녀 신애에게도 농촌을 벗어나고 농업에서 해탈되고 농민이란 신분을 버리고 시민이 되려는 세기적인 숙망이 저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앙금처럼 깔려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가장 심각한 의미에서 박신애의 꿈이였을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신애의 이러한 소망을 여지없이 박살내였다.
「왕제」라는 1호차장 그녀의 권세앞에서 신애는 끝내 운수회사에서의 모든 희망을 포기하여야 하였다. 그녀는 이 운수회사의 차장 중에서 왕질을 하는 녀자였는데 신애에게 한자(漢字)에서 죽음의 의미의「死」와 통하는「4」호선로 버스를 맡기고 목욕탕에서 남의 머리감는 비누도 빼앗아 쓰고 자기의 청소주번날에도 신애에게 강제로 소제를 시키고 신애에게 오는 표창신도 자기것으로 만들어 표양을 받는다.
다시 박기사의 도움으로 장거리차의 차장으로 자리를 바꾼다.
신애보다 1년 먼저 도시에 들어온 경자는 버스회사에서 신애의 곤혹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아직 시내 이곳저곳에 발이 익지 못한 촌바우, 눈에 띄는 변변한 옷도 없는 촌바우, 좋은 음식 먹어 못본 촌바우, 그런 촌바우에 존경심이 갈 사람이 있어? 업신보고 깔보기 마련이지. 나라도 그래. 먹기 좋은 떡부터 먹어치워야지. 이는 과정이다. 억울해도 참아야 돼. 네 눈에 먹기 좋은 다른 떡이 보일 때까지. 문제는 언제까지 남에게 만만한 떡으로 보이는가 하는거지."
경자가 신애의 현실상황을 놓고 장황설로 풀고있는 떡의 론리는 바로 권세자들앞에서 먹기 좋은 떡으로 되는 신애의 처지에 대한 가장 비근한 해석이지만 이에 대하여 신애는 납득되지 않았다. 신애로서는 아직 중국에서 권력의 힘이 얼마나 센가에 대하여 알 수 없었던것이다. 자그마한 운수회사의 차장 중의 우두머리도 이렇게 세력을 부리는데 진짜 권력을 잡은 권세자들의 세도야말로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런데 어느날, 사람 좋은 박기사가 술에 흠뻑 취하여 신애를「기사의 집」에 불러내서 자기의 녀편네에 대한 불만을 하소연한다. 신애는 별수 없이 온밤 내내 술을 마시는 박기사와 응부하는데 갑자기 박기사의 마누라와 그가 휘동한 한떼의 녀성들이 들이닥쳐 신애를 사정없이 구타하고 몸에 구정물까지 쏟아버리고 머리까지 마구 잘라버린다.
이 사건은 버스회사에서 박기사와 신애사이의 "염문"으로 확대포장되여 사람들의 화제로 된다. 치욕을 받은 신애는 억울한 심정으로 버스회사를 떠난다.
그후, 경자의 하숙집에서 신애는 어느 여름날 4호버스안에서 도적을 발견하고 소리쳐 도난에서 면하게 했던 그 미남 ㅡ 윤승원이라고 부르는 신사를 만나게 된다.「늑대」표양복을 입은 이 남자는 박신애와 버스안에서 맺은 인연이 있는 외에 또 그 출중한 미모와 스타일로 언녕 박신애가 마음 속으로 반해버린 남자였다.
신애는 기꺼이 그 남자가 경영하는「유리구두」라는 자호를 건 신발쇼핑몰에 판매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오래잖아 둘이는 애인관계를 맺게 되고 신애는 처녀의 정조를 윤승원에게 바치고 윤승원은 신애에게 유리구두 놀음감과 진짜 고급구두를 선물하고 또 신애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세방집을 잡아준다. 순진한 신애는 이 모든것을 진정한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결혼할 꿈으로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신애의 가슴에는 무지개가 솟고 신애의 육신은 행복감에 전률하고 신애의 심신 속에서 희망의 나무는 창공을 향해 소리치며 자라나는것 같았다. 더욱이는 새로운 일에 적응하며 가슴에 얹었던 무거운 돌덩이를 신애는 치워냈다. 따라서 회복기의 환자같은 어렴풋한 희망을 신애는 느끼고있었다. 손님이 없을 때면 비현실적으로 맑게 닦아진 쇼핑몰의 대형유리창앞에서 신애는 번화한 네거리를 꿈꾸는 기분으로 내다보군 했다. 신명을 걸고 새로운 꿈을 열심히 도화지에 옮기고있는 신애였다.
그뒤, 승원이가 신애의 세집으로 찾아오는 차수가 뜸해지지만 신애는 그의 본색에 대하여 낌새를 차리지 못한다. 신애는 달가이 승원이가 손가는대로 집어든 빨래가 되였던것이다.
승원에게 형체없이 후줄근하게 주물리고 탈리면서 신애는 그냥 승원에게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있다.
그맘때쯤 벌써 윤승원의 옆에는 새 녀자가 붙어다녔고 게다가 빚에 쫒기는 윤승원이는 어느날 갑자기 잠적하고말았다.
드디여 신애는 임신된것을 알게 되고 신애의 꿈은 여지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경자의 말처럼 사실상에서 윤승원이도「늑대」표 양복차림의 한마리의 늑대와 같은 남자였고 아이스크림처럼 변해버리기 쉬운「요즘남자」에 불과했던것을 박신애가 아직 간파하지 못했을뿐이다.
경자의 반복적이고 강력한 권고를 받아들여 신애는 윤성운의 아이를 락태하고 그 와중에 뜻밖으로 부산과의사를 통하여 그렇게도 보고싶었던 친어머니를 찾게 된다. 신애의 어머니는 이 국자가에서 비교적 잘 나가는 미용원을 경영하고있었던것이다.
그러나 친어머니는 하루동안 딸과 함께 지내면서 자기의 신세에 대하여 말해주고 두툼한 돈봉투를 건네주면서 아직 자기의 과거를 모르는 남편을 위하여 신애에게 제발 다시 나타나지 말아달라고 한다.
친어머니를 찾았으나 하루동안의 엄마였을뿐이다. 그러나 박신에에게는 자기에게 등을 돌려버린 친어머니를 돌려버릴 힘이 없었다.
그후, 당초에는 사내들 비위 맞춰 노래 불러주고 술 붓고 담배 붙여주고 그런 짓 난 안해, 못해, 때려죽인대두 못해하던 신애도 다른 길이 없이 끝내 혜옥이라는 가명을 달고 노래방으로 들어간다.
어느 날, 시인의 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느라 노래방에 모인 시인들 속에서 신애는 국자가의 저명한 시인 안경준을 알게 된다. 노래를 잘 부르는 신애에게 안경준은 홀딱 반하고 신애 또한 말주변이 좋은 안병준에게서 금방 윤성훈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받았으며 시인의 랑만에 젖어든다.
청빈한 문인인 경준이는 리혼하고 아홉살 난 딸애까지 가진 기혼남이지만 신애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드디여 결혼하기에 이른다. 그후, 그들은 대학가에 헌책가게를 꾸린다. 그러나 아홉살 난 딸애는 시종 신애에게 마음을 주지 않아 신애는 또 예상하지 못했던 정신상의 고통에 빠지게 된다. 딸아이를 사이두고 안경준과 신애의 갈등이 커지고 안경준은 술만 마시면 신애를 구타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신애는 삐뚤어지는 가정을 지키려고 온갖 애를 쓴다. 날로 멀어져가는 안경준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신애는 천성적인 덧이, 어쩌면 신애의 매력의 주요한 인소의 하나인 덧이까지 뽑아버린다. 그리고 아직 컴퓨터를 갖추지 못한 경준이를 생각하여 자존심도 버리고 친어머니와 사정하여 돈을 얻어 경준에게 컴퓨터를 사다주고 지금까지 국자가의 저명한 시인으로서 시집 한권도 출판하지 못했다는것을 안 신애는 또 친어머니를 찾아가 출판비를 얻어 안경준의 첫 시집을 출판하게 한다.
그 시집 출판기념회에 당연하게 자기가 안경준의 곁에 앉아서 축하할것이라고 공상했던 신애는 기념회에 참가할 자격도 없었고 집에서 텔레비의 뉴스프로를 통하여 안경준의 옆에 다른 녀자가 앉아있는것을 보게 된다.
인제 둘사이의 사랑은 끝이 났다.
녀자의 정조를 바친 윤승원이와도 헤여졌고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안경준과의 관계도 파탄났다.
이제 신애가 가야할 길은 어느쪽으로 뻗었는가?
그후, 신애는 어느 찜질방에 들어가 국자가에 발을 들여놓고 처음 하였던 김밥말이를 다시 하기도 한다.
거기서 몇년 만에 윤승원을 다시 만난 신애는 다시 그에 대한 사랑의 불길을 태우지만 이모가 죽은 다음 신애를 따라 국자가에 들어와 빚받이회사에 취직한 사촌동생 즉 이모의 아들「림꺽정」이라는 별호의 림호가 한번은 빚쟁이ㅡ오만한 업주를 구타하여 중태에 빠지게 했는데, 그가 바로 윤승원이다. 신애는 자처해 식물인이 된 윤승원의 병수발을 열심히 하지만 병세는 호전되질 않고 치료비는 자꾸만 들어가고 진퇴량난에 빠진 신애는 한국에 로무수출로 나가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드디여 섭외혼인으로 한국에 시집가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하여 한국의 신랑감이 친히 국자가에 들어와서 신애를 만나보고 한국에 데려갈 수속을 하고 신애는 또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상상밖으로 그의 고향친구이고 국자가에 들어온 이 몇년 간 신애의 믿음직한 길잡이, 보호인으로 되였던 경자가 중도에서 여러가지 조건이 우월한 신애의 신랑감이 될 그 사람을 채여간다.
곤궁에 빠진 신애, 앞길이 묘연한 신애는 나중에 밀입국을 해서라도 한국에 나가 돈을 벌리라고 작심한다.
그러나 신애는 한국으로 밀입국하는 배에서 한 구의 시체로 되고만다.
이렇게 한떨기의 아름다운 꽃은 졌고 한 생명의 비창교향곡은 끝났다.
여기서 우리는 이 앞에서 제시한 장편소설《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에 접근함에 있어서의 몇가지 전제를 잘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신애는 공주촌이라는 농촌에서 국자가라는 도시에 진출한 사람이라는라는 것, 신애는 녀자라는 점, 그리고 신애는 비극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상의 분석을 통하여 우리는 박신애는 결국, 국자가에 들어온후「생물사슬」에 제기되는 소유의 문제를 하나도 풀지 못하고 발악하다가 끝내 그 문제도 철저히 해결하지 못하고 이 사회의 믿바닥인생을 영위하면서 낡은 것을 버리려고 하나 철저히 버리지 못하고, 새것을 찾으려 하나 그것을 찾지 못하고, 비빔밥인생을 살다가 비명에 저 세상사람으로 된 비극적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박신애의 주변의 인물들을 고찰해보면 광천수차 사기 양인철, 운수회사의 버스 사기 박털보, 김밥집 마담, 장아주머니, 고향친구 경자, 그다음 신애보다 후에 국자가에 들어온 효준, 림호, 그리고 상인 윤성원, 시인 안경준 등을 하나하나 분석해보면 신애와 마찬가지로 운명적으로 불행한 사람들이 다수이고 진정으로 신애를 사랑하는 사람, 도와주려는 사람은 소수임을 쉽게 보아낼수 있다.
이러루한 점들을 고려하면 우리는 박신애는 일정한 의미에서 상징적인물이라고 결론할 수 있겠다.
다음 박신애는 역시 변하는 인물이다.
박신애는 국자가라는 이 도시가 처음에는 낯설기만 하였다. 여기서 보고 듣고 체험한 모든 것이 어색하고 민망하고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박신애는 처음에는 자기도 무엇을 바꾸어야겠는데 자기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다음에는 무언가를 바꾸기보다 무언가에 적응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래에서「명동노래방」에 있을 때, 박신애의 한차례 내심활동을 보기로 하자.
'그만 때려치우고 나올가보다… 하고 몇번이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밥도 해주고 잠자리도 배치해주는 그 간단한 조건앞에서 망설이군 했다. 추위가 깊어지는 이 겨울 어디 가서 일자리를 구하기도 세방집을 구하기도 어려운 일이였다. 그 보다도 몇 시간만 질끈 참아주면 앞가슴에 찔러주는 팁, 단 며칠밤에 자기가 한달동안 김밥을 말고 장거리선을 뛰고 신발을 판매한 액수의 돈이 들어온다는 유혹은 사실 물리치기 힘들었다. 신애가 여태껏 몰랐고 분석할수 없는 또 다른 세계가 이곳에서 진행되고있었다. 그 아리송하고 지겨운 느낌속에서 분명 새 생활에 대한 부푼 기대 같은것이 은근히 신애의 망설이는 마음을 꼬드기고있었다.
……낡은 트렁크 밑에 깊숙이 감춰둔 돈쌈지가 점점 두둑해져갔고 따라서 권태롭고 애절하던 빛으로 그득하던 신애, 아니 혜옥이의 눈동자에 차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제 신애는 시계추처럼 부지런을 떨며 돌아치기 시작했다.
애초에는 "소양강처녀"라는 노래 한수밖에 몰랐으나 이제는 신곡, 애창곡은 물론 중국노래 일본노래도 몇수씩 제법 넘겼다. 바람이 가득 찬 풍선처럼 목소리도 탄력있고 언변도 매끄러웠다. 명주실같은 목소리를 내며 사내들의 시선을 자기쪽으로 당길줄도 알았고 사내들의 목을 그러안고 술을 권하기도 했다. 연거퍼 몇잔씩 굽을 내고는 마이크를 두손으로 움켜잡고 한곡조 넘기기도 했고 빠른 곡조에 맞춰 생머리를 휘저으며 춤을 추기도 했다.
대번에 사내들의 취향을 보아낼줄도 알았다. 사람들의 갖가지 옷차림을 분류해보면 그저 몇가지 류행 패턴(樣式)의 라렬에 불과하듯 노래방에 오는 손님도 그저 그 몇가지 부류뿐이였다. 좀 점잖아 뵈는 이들을 위해서는 "바위섬", "당신의 의미", "영영" 등 템포가 느리고 무거운 발라드쪽으로 불러주면 되였고 좀 어려보이고 개성이 튀는 이들을 위해서는 "포기하지 마", "사랑을 할거야", "뭐니" 등 절주 빠르고 가사가 염세적인 신곡쪽으로 불러주면 되였다. 그리고 신애의 18번은 "화장을 지우고"였다.
애초에 음향기를 통해 튀여나와 방안의 공기를 젓는 자기의 목소리를 듣다가 어둠 속에 신애는 목이 메였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친인에게서 소박맞을 때 같아서는 세상이 춥고 암담해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이렇게 또 살아지는게 삶이였다.
욕망은 녀자들로 하여금 짙은 화장을 하게 하고 위험한 교태를 떨게 하고 꽃처럼 어여쁨을 시급히 내보이게 하고 드디여 몸을 던지게 한다. 세수비누 하나를 사도 지방산 싸구려쪽으로 골라쥐던 신애가 치장에 여느때보다 열성을 보였다. 휴일만 되면 경자를 닥달질하여 쇼핑을 나가군 했고 비싼 외제도 서슴없이 골라쥐곤 했다.
입에 바르면 은싸래기를 뿌린듯 빛이 나는 외제 립스틱도 샀고 털목도리가 달린 화사한 빨간색 모직코트도 사입었다. 신애가 입고 왔던 그 털이 비죽비죽 나오는 오리털 방한복은 경자가 닭알 바꾸는 장사와 닭알 다섯개를 주고 바꾸어버렸다. 그런 경자를 말리지 않았다. 이제 뭔가 바꿀 때가 되였다는 생각이 신애의 늦은 더듬이에도 잡혀들었다. 그저 저녁에 경자가 부친 닭알전에 수저를 대지 못했을 뿐.'
좀 길지만 이상 인용문은 박신애의 성격의 변화를 정확히 리해하는데 아주 주요한 대목이다. 그 김밥을 선물로 들고 친구의 생일파티에 찾아가고 앞으로 많이 도와달라면서 앵두와 호도를 사들고 차장들앞에 수줍게 나타나던「앵두처녀」박신애는 점차 세월의 저 쪽으로 사라지는것이다.
보는바와 같이 신애의 성격도 변하고있는것이다. 무언가를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또 무언가에 적응하여야겠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다싶이 바꾼다는것은 전형적인 시장언어이다. 물론 작품에서 바꾼다는 말은 어떤것을 주고 다른것을 받다는 의미로 쓰인것이 아니라 본디의 내용이나 상태를 다른것으로 고치다라는 의미로 씌였으나 무엇으로써 무엇을 바꾼다는것은 생활상식이며 역시 시장의 철의 규칙이다.
결국, 그녀도 자기의 내심에서도 무엇으로써 무엇을 바꾸어야 하였으며 최종에는 자기의 무엇으로써 살아가는데 수요되는 돈을 바꿔내려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수 없게 되고 시장의 철의 규칙에 적응하여야겠다는 생각에 이르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그런데 그가 소유하고있는것이란 결국 저 공주촌에서 빈궁하게 살면서도 고스란히 간직해왔던 전통미덕이고 그에게 있는것이란 젊은 녀자로서의 힘과 육신밖에 없었던것이다.
그런데 그 전통미덕이란게 돈을 바꾸어내는데는 별로 쓸모가 없고 그것을 버리고 새로운 가치관념을 세워야 하였던것이다.
각박한 언사인지 모르겠는데 결국 신애도 사회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을수 없었으며 시장경제의 원칙에 적응하고 따라서 생존을 위하여 마음속에 귀중하다고 간수하던것들을 버리지 않을수 없었으며 자기의 청춘을 남자들, 늑대같은 남자들에게 팔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세파 속에서 변해가는 신애였다. 농경문화의 때벗이랄가, 아니면 현대문화에 대한 적응이라고 할가, 아니면 만성 타락이라고 할가.
3. 박신애라는 녀자가 머물렀던 자리
박신애라는 녀자는 세상에 태여나서 30세도 살지 못하고 비극의 인생을 끝마치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이 땅에 태여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그녀, 그녀가 머물렀던 자리를 고찰해보는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앞에서 한번 말한것 같은데 신애가 국자가에 진출하기전에 활동반경은 향소재지를 중심으로 10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박신애는 나서 20년동안 공주촌이라는 이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고향 공주촌은 박신애가 머물렀던 첫번 째 자리라고 생각할수 있다.
그런데 이 공주촌이라고 불리우는 박신애의 고향은 연변이라는 이 변강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조선족의 농촌마을이다.
박신애가『오씨네 김밥집』에 있을 때 한번은 그보다 몇년 먼저 국자가에 온 경자의 생일기념파티에 참가한적이 있는데 거기서 박신애의 감각과 체험을 쓴 한단락의 글은 아주 생동하며 인상이 깊다. 고향친구의 생일기념파티에 신애는 신애답게 김밥을 가지고 갔다.
"이게 뭐야?" 모두들의 눈이 휘둥그래 졌다.
"김밥…" 신애는 기여드는 소리로 말했다.
"김밥?" 모두들이 합창이나 하듯 말하며 다시 의뭉에 쳐들린 눈매가 신애에게 집중광처럼 몰부어졌다. 통천하 다 돌아다니며 봐두 이런 생일선물은 처음 본다. 아이구 웃겨! 분명 이런 눈길들이였다.
"내 친구가 김밥집에서 일하거든. 신애야 오늘 선물중에서 네 선물 제일 고맙다." 경자가 바삐 해석하며 신애의 궁핍을 풀어주었다.
허나 다음 순간, 김밥을 입에 넣어보던 친구들이 하나둘 감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우와 맛있다. 죽이네. 맛있다고 칭찬이 자자했다. 잠간새에 도시락이 밑굽이 났다. 모두가 이렇게 즐기는줄 알았더라면 더 담아올걸 그랬다고 신애는 생각했다. 그리고 모두들 자기가 한 음식을 맛나게 먹어들 주자 저으기 기뻤고 어줍던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허나 그런 자그만 안위도 얼마 못가고 말았다. 맥주가 올라왔고 친구들이 술잔을 들기 시작했다. 안주도 단조롭게 마른 물고기와 옥수수튀우기를 놓고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내사람들 말로는 옥수수튀우기도 다르게 불렀다. 뭐, 팝콘이라나? 팝콘을 으적으적 씹어대며 계집애들이 술을 남자들처럼 억벽으로 마셨다. 술 못하고 음료만 기울이는 신애는 당연 그들의 권주돌림에서 빠졌다.
그리고 모두들은 신애를 망각한채 저희들끼리 술잔을 기울이며 와짝 떠들어가며
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남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화장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시체옷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서양음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화제의 소용돌이 속에서 밀려난 신애는 들척지근한 살구씨 음료를 마시며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마을 소꿉친구들이 벌리던 화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그들은 경자네 마당에 모여앉아 호도를 까며 웃고 떠들며
마을에서 샛길을 닦는다는 얘기를 했다.
산옥이네 집 굴암퇘지가 새끼네마리를 낳은 얘기를 했다.
장과부의 음식솜씨가 알뜰하다는 얘기를 했다.
최털보네 과수가 우박을 맞던 얘기를 했다
촌 뒤산에 묻혀진 발해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것은 경자 친구네 김밥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경자네 친구들의 화제에 대한 신애의 생각이다.
박신애의 고향 공주촌에서 사람들의 화제와 국자가에서 경자 친구네들의 화제는 많이 틀린다.
남자, 화장품, 시체옷, 서양음식에 대한 이야기와 샛길을 닦는다는 이야기와 굴암퇘지가 새 끼를 네마리 낳은데 대한 이야기, 장과부의 음식솜씨에 대한 이야기, 최털보네 과수원이 우박을 맞은 이야기, 뒤산에 뭍혀진 발해공주에 대한 이야기는 그 내용과 질이 다르다. 하나는 시민들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농민들의 이야기이고 하나는 도시생활의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농촌생활에 대한 이야기다.
이 량자의 차이는 사실상에서 박신애가 머물렀던 두 자리의 구별점이다.
드디여 신애는 임신하게 되고 그로부터 신애의 꿈은 허물어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문제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경자네 친구들의 화제는 금방 도시에 진출한 사람들의 화제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현대인의 화제가 아니라는것이다. 가정과 사회, 현재와 과거와 미래에 대한 현대인의 화제는 끝없이 다양하고 풍부하지만 경자네 친구들의 화제는 고작 자신들의 의식주에 국한되여있다.
둘째, 신애의 기억에 있는 고향사람들의 화제는 진짜 농민들의 화제이다. 도시사람들의 기억에서 벌써 사라졌고 금방 도시에 진출한 경자네 친구들도 바야흐로 망각하고있는 그런 농경문화에 대한 이야기다.
셋째, 박신애는 이상 두가지 화제중에서 어느 화제에 더 관심이 있는것인가? 이것은 아주 흥미있는 문제이며 역시 아주 주요한 문제이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경자의 생일파티에 참가할 때쯤까지 박신애의 고향의 화제에 대하여 더 관심하였다. 그러나 그의 성격도 점차잠차 시장경제에 적응하는 쪽으로 경도되기도 하지만 고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있음을 쉽게 보아낼수 있다. 이것은 신애가 머물었던 첫번째 자리에 대한 미련이 얼마나 심각하였던가에 대한 예술적인 확인으로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박신애는 과도기인물이며 중간인물이며 이중적인 인물이며 역시 희극적이기도 하며 비극적인 인물이다.
박신애는 국자가생활 중에서 가장 긴장한 대목 즉 가장 바쁠 때나 슬플 때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향에 대한 회상에 잠기군 한다.
그날 새벽 국자가 철도역에 금방 내렸을 때 넓은 역전광장을 보면서 고향의 탈곡장을 생각하고『오씨네 김밥집』에서 아주머니를 대할 때 고향에 계신 이모를 생각하고 거리에서 앵두장사를 보면 고향의 앵두를 생각하고 국자가의 광천수를 두고 고향의 약수를 생각하고 광천수차 기사 인철이를 보면서 고향에 있는 효준이를 생각하고 국자가의 성탄절밤에 고향의 교회를 생각하고 운수회사 목욕탕에서 고향의 버들방천에서 등멱 감던 일을 생각하고 처음 샴프로 머리를 감으면서 고향에서 초물로 머리를 감던 일을 생각하는것 등.
고향의 자연이며 고향의 친인들이며 고향에 있었던 생활의 세절들과 고향에서 하나하나 간수해온 귀중한것에 대하여 회상하는 박신애의 심정은 그렇듯 진지하다. 즉 자기가 20년 머물러있은 자리에 대한 미련은 끈끈하다.
그러나 신애의 마음은 단순하지 않다.
이러한 회상에는 신애의 향수가 짙게 깔려있을뿐만아니라 바로 공주촌과 국자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신애의 정신실존을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예측할수 없는 속도로 황폐해가는 고향에 대한 경이(驚異)와 고향에 있는 이모와 사랑하는 효준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담겨져있다.
그가 운수회사에 차장으로 있을 때 한번은 효준이 찾아온다.
찾아와서 신애에게 여기가 집보다 좋냐?,이제 농촌서 살기가 지겨워졌느냐? ,남자들한테 그걸 팔겠냐?,여기 봐둔 남자라두 있냐? 등 날카로운 질문을 들이대는데 신애는 모두 아니라고 돌이질을 하면서도 끝내 함께 귀향하지는 효준의 간절한 청원은 거절한다.
그리고 그녀가 머물렀던 첫번 째자리의 가장 주요한 특점은 요즘들어 날로 심각한 황폐상을 과시하고있다는 점이다.
고향의 황폐상을 나타내는 문자는 이 텍스트에 얼마든지 많지만 우리는 신애가 윤승원와 사이가 좋을 때 흇시의 상계 친구들과 신발쇼핑몰의 점원들과 고향 공주촌에 소풍갔을 때 신애에가는 이모의 한마디 말을 들어보자.
"이젠 우물도 없고 용두레도 없다. 우물이 싸악 가버렸어. 귀신 뼈똥 쌀 일이지. 사람들이 가니 물도 뒤따라 가버리데. 그래 묻어버렸다. 물맛 좋은 동네였는데… 걔는 지금두 총각으루 있다. 촌에 녀자라곤 다 네 고모처럼 물귀신 같은 할망구들이지. 겨우 하나 있다는건 산옥이뿐이고. 체네들이 고양이 뿔보다 귀한 세월이지. 지금 걔 별명은 <우물집 애> 아니구 <우물집 로총각>이다. 불쌍한 애지."
생각해보면 결국 이러한 황폐 속에서 낡은 자리를 떠나 새로운 자리를 찾아 신애도 국자가에 들어왔던것이 아닌가.
박신애가 머물렀던 두번째 자리는 국자가(局子街)이다.
국자가란 곧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 연길시의 구명이다. 인구 40만의 소도시, 그리고 신애가 들어가 춤아가씨로 있은 「명동노래방」이 위치한 국자가는 지금의 연변대학부속의원 동쪽에 북대촌까지 북으로 뻗은 거리를 국자가라고 한다. 옛날 국자가로 불리우던 연길은 반세기동안 연변의 수부로뿐만아니라 200만이 넘는 중국조선족의 문화중심으로 이미지를 굳힌 국내외에서 약간 명성이 있는 도시다.
김혁씨가 장춘이나 심양이 아니고 국자가를 주인공의 활동무대로 선정한데는 그럴만한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이 장편소설의 갈피마다에는 이 도시에 대한 묘사가 수두룩한데 우리는 국자가에 위치한 영동노래방을 찾아가는 신애를 쓰면서 한 국자가에 대한 한단락의 묘사를 보기로 하자.
이 도시는 어쩌면 서울의 어느 뒤안길을 그대로 옮겨놓은 축소판 같다. 다방, 노래방, 술집, 사우나들이 곳곳에서 성업을 이루고있었다. 변강의 오지라 하지만 사람들의 옷차림들이 세련되여보이고 집만 나서면 택시를 부르고 밤이면 유흥업소들마다 만원이다. 한집 건너씩 유흥장들이 거리쪽을 향해 아부라도 하듯이 입을 벌리고 일렬횡대로 쭉 늘어서있다. 네온싸인이 분만해오르는 도시의 창공에는 허(虛)를 감춘 기운이 있다. 사회 전환기의 여느 도시들이면 너나가 그러하듯이 새것과 낡은것, 동방적인것과 서방적인것이 짬뽕처럼 뒤섞여 사람들이 아직은 개화가 덜된 맛 망울을 나름대로 만족시켜주고있다.
아무튼 국자가는 박신애가 머물렀던 두번째 자리고 마지막 자리다.
박신애에게 있어서 국자가는 새로운 곳이고 낯설은 땅이고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심신을 바쳐 발악하는 시장이고 또한 마지막까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자리이며 죽을 때까지 그 정체와 본질을 모르고 죽은 도시이다.
신애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였다. 이 시가지에 온후로 신애는 꿈을 잘 꾸었다. 고향에 있을 땐 꿈도 없었다. 밭일에 곤죽이 되여 초저녁에 누우면 동여가도 모르게 잠들군 했고 이모의 성마른 푸념질에 깨면 어느새 동창이 훤히 밝아있었다. 기차로 향소재지까지 대여 가서 향에서 또 차를 갈아타고 황토길로 한시간 푼 가야하는 막치기동네, 뒤산에 묻힌 발해공주의 정기를 받아서였던지 한때는 인물고운 녀자들만 산출해 내였던 동네, 그러다 출국바람 도시진출바람이 불어쳐 성한 놈은 다 떠나버리고 불썽 사나운 사람들만 남은 동네, 밭은 묵고 학교는 페교가 되고 총각들은 장가가지 못해 때 이르게 늙어가고… 쑥밭이 되어버린 동네에 이제 꿈도 없는것이였다. 그러던 신애가 이 도시에 들어서면서부터 좋은 꿈을 자주 꾸었고 또 꿈 개근생이 되어버린것이였다.
고향에 있을 땐 신애에게는 꿈도 없었다. 일에 지쳐 꿈도 제대로 꿀수 없었으며 더구나
최근 몇년래 황폐기를 겪는 고향사람들의 꿈이 산산이 부셔졌다. 이런 의미에서 신애의 꿈에 대한 회상은 어떤 상징적의의가 있다. 메말라가는 고향에서 청춘의 꿈마저 사라져간다는 말로 된다.
바꾸어 말하면 국자가라는 이 두번째 자리에서 신애는 다시 재생의 꿈을 펼치기 시작하는것이다.
그러나 이 도시는 박신애에게 있어서 너무나 낯설기만 하고 이 도시에서 매일과 같이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대하여 불가사이하고 모든것이 막연하기만 하고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영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자가에서 신애의 가장 행복한 단계였다고 말할수 있는 윤성원이와의 생활의 초기에도 신애의 마음은 허전하고 답답하고 쓸쓸하고 외로웠다.
온몸의 솜구멍을 일시에 틀어막는듯한 적막을 못이겨 신애는 주방의 창을 열었다. 주방쪽에서 본 풍경은 응접실쪽으로 보는 번화한 거리의 풍경과 사뭇 다르다. 그쪽에는 아직도 연탄을 때는 집들이 대어(大魚)의 몸체에 붙은 흡반어처럼 호화아빠트사이에 찡겨있었다. 옥상에 볼품없이 솟아있는 굴뚝들이 초라하니 보인다. 어찌 보면 이것이 바로 과도기(過渡期) 이 시가지의 진 모습이였다. 그속에는 본토적인것과 외래적인것이 섞여있었고 조화가 깨여진 알고도 모를 잡다한 생활이 있었다.
(내가 설 곳은 원체 저기인데…)
이런 생각을 그 굴뚝들이 게워내는 화끈해나는 한숨 같은 어지러운 연기를 보면서 신애는 여러번 했었다.
……추워보이는 하늘에는 누가 잃어버린 눈섭같이 애잔한 달이 떠있다. 일교차가 심한 계절, 길주변의 나무들은 바람에 뭇매를 맞고있었다. 몸이 으스스 떨려났지만 신애는 창을 닫을 념을 안했다. 싸늘해진 계절의 냄새를 페부 깊이 들이마셨다. 어느 집에선가의 텔레비죤에서 자정 뉴스소리가 확 퍼져나왔다. 그리고 거리쪽 어디선가 구원을 바라는자의 절규같은 앰블랜스(救護車)의 사이렌소리가 들려왔다. 답답하고 울적하고 쓸쓸하고 외로웠다. 진득한 한숨을 쉬고나서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신애의 눈에 맑은 습기가 가득 들어차있었다.
이것은 윤성원이 잡아준 세집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하는 신애의 심리묘사이다.
이러한 쓸쓸함을 잊는 방법은 일밖에 없었다.신애는 질려자빠지도록 일을 하는것만이 뼈속 까지 파고드는 절망감과 소외감을 잊게 하는 약이였다.
그러나 신애는 운명의 멍에를 벗어날수 없었다. 신애가 머물렀던 첫번째 자리를 버리고 찾아온 두번째 자리에서 신애와 거의 비슷한 사람들의 처지에 대하여 작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땅을 내놓고 도회지로 출두하는 농군들의 밑천은 단 체력 하나뿐, 녀인들은 서비스업종에 들어섰고 사내들은 즉각 일에 착수하고 효험을 볼수 있는 업종으로 삼륜차부를 택했다. 허나 매일같이 한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땀으로 바꿔온 것이란 허드레 돈 몇장뿐이였다. 가난보다 참기 어려운것은 덤으로 얹혀지는 수모였다. 천차만별의 신분들이 운집하고 있는 도회지에서 삼륜차부나 음식업소에서 일하는 그들은 밑바닥삶을 살고있는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야유로 통하고 있는것이였다. 하여 도회지에 나서는 첫보조로 너 나가 삼륜차부나 복무원업종을 택했다면 빨리 저력을 쌓고 그 허드레업종에서 솟는것이 또한 너 나의 꿈이였다.
촌뜨기나 삼륜차부라는 불미의 딱지를 떼는 지름길이 또 하나 있었다. 허나 그것은 농군들로 말하면 너나가 몰려들면서도 쉽지 않은 길, 로무송출을 나가는 길이였다. 그길로 가려면 로무업자 송출단위들에 옹근 3만원 각수는 내야 했다. 3만원은 그들로 말하면 천문단위의 거금이 아닐수 없었다. 허나 어금니를 짓물고 3, 4년만 버텨내고 나면 때국이 진한 천민의 태깔을 벗을수 있고 돌아와서 광이 나게 살수 있다는 묘연한 희망에 모두들은 변리 돈을 맡으면서라도 그 험난한 행선지에 발길을 들여놓는것이였다.
작자가 쓴것처럼 드디여 신애도 한국으로 나가는 길을 택하게 되고 결국은 자기가 머물렀던 두번째 자리를 떠나게 되고 도적배를 타고 한국으로 가는 도중에 한구의 시체로 되고만다.
이처럼 그녀가 머물렀던 두 자리, 그녀는 그 첫번째 자리에서는 더 머무르기 싢어 떠났고 그 두번째 자리는 뿌리를 내릴수 없어 떠나게 된다.
물론 첫번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행복한 삶을 창조해나가는 사람도 있고 두번째 자리에서 철저한 변신에 성공하여 시민으로서의 사회신분을 획득하는 사람도 있고 효준이처럼 두번째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신애처럼 두번째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한국 등 외국으로의 출국을 도모하다가 비명에 죽는 사람도 있고 끝내 외국에 가서 돈을 벌어 귀국하여 광이 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확실히 개혁개방후 중국사람의 삶이 길도 여러 갈래로 뻗었으며 삶의 양상도 다양해지였다. 박신애의 삶은 그중 한가지 부류 사람들의 삶의 양상일뿐이다.
4. 읽는이들이 생각해보아야 할 몇가지 문제
김혁씨가《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에서 창조한 박신애 이 인물형상의 내포는 복잡하며 박신애라는 녀자의 삶의 양상이 우리에게 주는 계시 또한 심각하다.
첫째, 이 인물을 통하여 작자는 박신애처럼 믿바닥인생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삶이 현장을 림리하게 조명하고있으며 그들에게 무한한 동정의 마음을 보내주고있다.
개혁개방 30년래 우리 나라의 경제는 고속도로 발전하고 총체상에서 중국사람들의 삶의 질이 크게 세인을 놀래울 정도로 제고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또 일찍 사람들이 에측하지 못했던 많은 사회문제들이 생성된것은 사실이다. 그 하나의 문제가 바로 빈부차이의 확대와 도시와 농촌의 경제생활수준과 문화생할수준 차이의 확대, 새로운 도시빈민층의 생성, 도시에 진출한 농민들의 사회적보장문제의 미해결 등 문제이다.
게다가 중국조선족이라고 불리우는 이 민족공동체는 천성적으로 자체의 문제가 수두룩한데 새로운 력사시기에 들어서면서 그것들이 총발로되는 양상을 보여주고있다. 조선족 농촌인구의 대량 도시진출과 조선족인구의 대량 해외진출에 의하여 연변을 중심으로 하는 집거지구의 조선족의 인구는 급속히 축소되고있으며 그 결과로 이미 조선족 민족사회는 문화적으로 해체되고있으며 급속히 동화되는 조짐을 보이고있으며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믿바닥인생을 영위하는 조선족인구가 다른 어느 민족보다 많아지고있다는 절규도 어렵잖게 들을수 있다.
김혁작가가 이 소설에서 하고있는것이 바로 조선족인구중에 밑바닥인생을 영위하는 그 부류의 조선족들에 대한 이야기다.
참으로 눈물이 없이는 들어낼수 없는 신애, 효준, 경자, 인철 등의 몸과 마음이 모두 여지없이 짓밟히는 이야기는 이 작품으로 하여금 우리 문단에서 성공적인 비애소설 혹은 저층서사소설이라고 평가하게 한다.
둘째, 박신애와 그녀의 주변 인물들의 비극적 운명은 우리에게 우리 민족의 전문화와 정신기질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만들어주고있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이 장편소설에 창조된 박신애는 분명히 믿바닥인생을 영위하는 저층인물이며 비극적인물이다.
그러면 그 비극의 장본인은 누구인가? 다시 말하면 박신애는 우리 사회의 피해자인가? 피해자라면 가해자는 누구인가?
이 문제는 박신애의 비극의 성격과 련관된다. 즉 박신애의 비극이 시대적비극인가, 아니면 개인적비극인가? 하는 이 문제와 관계된다.
이 문제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여서 풀기가 쉬운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여기서 문제를 제기하는 필자도 문제의 풀이에 파악이 없다. 그러나 일단 문제가 제기되였으니 아무튼 힘 자라는데까지 풀어보기로 한다.
첫째, 분명한것은 박신애의 비극은 시대적비극이 아니라는것이다. 우리 시대는 비극적시대가 아니다. 대약진, 총로선, 인민공사 세폭의 붉은기가 휘날리던 1960년대초에 누가 굶어죽었다면 그것은 시대적비극일것이지만 박신애의 비극은 들끓고 분발하고 상승하는 시대에도 어쩔수 없이 생기는 비극일뿐이다.
둘째. 박신애의 비극은 생명개체의 비극이라고 말하는것이 옳을것 같다. 매 생명개체들앞에 인생의 길이 여러 갈래로 뻗은 다양화시대에 박신애가 선택한 인생길은 철저하게 개체적이다. 그가 공주촌을 떠나지 않았어도 혹은 그가 효준이가 이끄는대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선택했더라면 비극은 없지 않았을까?
셋째, 더구나 심각하게 생각해볼것은 만약 박신애의 도시진출이 맹목적이 아니고 도시에 진출하기전 정신상의 준비가 보다 충족하였더라면 그의 운명이 이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것이 아닌가. 또는 박신애가 머물렀던 두번째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생명은 유지할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박신애의 비극은 개체의 비극이면서 또한 민족적인 비극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지난 세기 상반엽 항일투쟁중에서 세인을 놀래우는 생명의 저력을 과시하였고 사회주의건설시기에 들어와서도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에서 선진민족의 위상을 부상시켰던 중국조선족은 개혁개방의 새로운 력사시기에 진입한 이래 주관적 객관적 여러가지 여건에 의하여 민족사회내부에서 수다한 문제를 생성시키고있으며 이미 부상시켰던 선진민족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지는 양상을 보여주고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박신애의 비극을 민족적인 비극이라고 보는데는 일리가 있지 않을까? 잘 모르겠다.
생존과 발전을 위하여 피흘리는 모지름을 겪는 조선족들의 요즘 삶에 확실하게 어떤 문제가 생긴것 같은데 구경 무슨 문제인가? 를 찾아내는데 이 텍스트는 하나의 참조계를 제공해주는것 같다.
넷째, 비극적인물 박신애는 피해자이기도 한것 같은데 그렇다면 가해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박신애라는 이 녀피해자의 가해자는 남자이다.
여기에서「feminism」즉 페미니즘 녀성주의 혹은 녀권주의 문제가 제기된다.
작자가 남자인것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본격적인 녀성서사소설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어느 측면에서도 이 텍스트를 녀성서사소설이라고 보는것은 무리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한데 사랑을 미끼로 순진한 박신애의 정조를 유린하고 오래잖아 배반해버리는 그「유리구두」신발쇼핑몰의 윤성운, 결혼까지 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그녀를 끝까지 보호하기는커녕 마구 구타까지 하고 순진한 그녀의 감정을 마음대로 짓밟는 시인 안경준 이 두 사람은 박신애의 비극에서 일정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운것 같으며 완전히 자유로울수는 없는것 같다.
이 소설에서 창조된 윤승원과 안경준 두 남자의 형상에는 확실히 남권주의를 비판하는 창조주체의 동기가 모름지기 침투되여있는것 같다.
이상 몇 가지는 읽는이들이 이 작품에 접근하면서 한번 잘 생각해볼 문제인것 같다.
5. 창작방법과 서사책략
한부의 비애소설, 저층서사라고 할수 있는 장편소설《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는 창작방법과 서사책략에서 모두 창조주체의 문학적인 저력을 충분히 과시하고있으며 날로성숙되여가고있는 작가 김혁의 문학적 기량과 재간을 충분하게 과시하고있다.
창작방법으로 놓고 말하면 저층서사는 어쩔수 없이 사실주의방법을 쫓을 수밖에 없게 된다.
생활에 대한 진실한 반영하는 거울의 미학을 숭상하지 않는다면 또는 랑만주의나 황탄파 등 모더니즘으로는 밑바닥인생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제대로 조명할수 없을것이다.
하기에《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이 소설의 창작에서 김혁은 주로 사실주의 방법에 쫓았다.
그녀가 머물렀던 두 자리에 대한 진실하고 치밀한 묘사와 거기서 신애가 만났던 다양한 성격의 인물들에 대한 묘사, 그리고 모든 인물들의 행동, 언어, 표정들과 사건들의 세부에 대한 풋풋한 묘술은 이 작품의 사실주의적 품격을 충분히 과시하는바 이에 대하여서는 읽는이들이 어려잖게 보아낼수 있을것이므로 더 펼치지 않겠다.
이 작품의 다른 한 매력은 작품의 갈피갈피에서 어느 한점 허술한데를 찾아보기 힘들게 염글고 세련되고 우아하게 다듬은 언어와 문체에 있다.
수십만자의 언어를 이렇게 일매지게 탁마시키는 작업의 성공은 김혁의 문학적저력을 충분히 과시하고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꼼꼼하게 읽어보면 이 작품에는 비사실주의적, 모더니즘의 영향이 적잖이 묻어있다는것을 쉽게 발견할수가 있다.
그 하나가 바로 의식의흐름 방법이다.
30여만자에 달하는 이 장편소설은 제3인칭서술시각으로 씌여졌다.많은 사람들이 제3인칭소설에서 의식의 흐름방법이 어떻게 통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수 있는데 김혁은 이 소설에서 그것을 해냈다.
여기서 우리는 비록 이 장편소설에서 제3인칭 전지전능의 서술시각을 택했지만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 심지어는 삶의 구석구석 세부까지 모조리 주인공 박신애의 감각에 따라 서술되고 박신애의 체험과 심리에 따라 펼쳐지고있다는것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게 된다. 전편 작품에서 마지막 김정혁기자가 박신애의 시체를 확인하는것과 에필로구에서 작자가 새로운 박신애부류의 인물을 스케취하는외 박신애가 피부로 부딪친 사건에 대한 묘술은 더 말할것도 없고 기타 인물들의 언어, 행동, 심리 모두가 박신애의 오관(五官)과 회억을 통하여 묘술되고있다.
어찌 보면 박신애가 국자가에 발을 들여놓아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일직선으로 서술한 이 장편은 구조적으로 단순하기도 하고 따분하기까지 한것 같다. 그러나 텍스트를 읽어가는 독서현장에서 읽는이들은 시종 긴장을 풀지 못하며 단조로움을 느끼지 않는데 그 비결이 다른데 있는것이 아니라 바로 의식의 흐름의 방법을 재치있게 접목한 결과라고 할수 있겠다.
비록 1인칭시각으로 펼쳐지지 않고 화자의의 입으로 전달되지만 전편 텍스트에 관통되고있는 주인공 박신애의 내심독백이나 자유련상이 의식류소설 내지 1인칭시각으로 씌여진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까지 산생시킬 정도이다.
다른 하나, 이 장편소설은 사실주의 방법에 쫓으면서 또 조각내기(碎片)와 나란히 붙이기(拼貼) 등 수법을 재치있게 리용하고있다.
"어허! 약국이라도 차리려남? 이렇게 많은 호도를 까선 뭐하게요?"
누군가의 우선한 목소리에 신애는 호도를 까다말고 머리를 들었다. 경준이의 친구 "도시석간"지의 김정혁기자가 어느새 들어와 매대앞에 서있었다.
"오랜만이네요. 김기자님! 어떻게 오셨어요?"
"네. 학교에 교수님 한분 찾아왔다가 들렸습니다."
김 기자가 호도 살을 한 점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그러다 다시 한번 물었다.
"난데 없이 호도는 왜요?"
"탈모에 좋다고 해서요."
"경준이땜에요? 하기야 그 친구 이마가 많이 올라간 축이죠. 하지만 날 따를려면 아직 멀었는데 헌데 나에겐 왜 시시때때 호도도 까주고 정도 발라주는 사람은 없을가요?"
김기자가 홀라당 벗겨져 올라간 머리를 쓸며 롱담을 했다. 신애가 소리없이 웃었다. 머리를 수굿하고 그냥 일손을 다그쳤다. 탕! 탕! 호도 까는 소리가 책방의 적요를 흔들었다. 신애의 침체된 기분을 보아낸 김 기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엷어졌다. 빈 호도껍질을 들여다 보며 혼자 말처럼 중얼거렸다.
"요거 참 묘하게 생겼네. 꼭 미궁같죠 요거."
신애는 여전히 소리 없이 웃을뿐 이였다. 후벼 낸 호도살이 담겨있는 도시락을 김기자앞에 내밀었다. 잡수라고 턱짓해 보였다. 호도 좋아해요?
"인생이 그래요. 미궁이죠. 가도 가도 끝없는 미궁. 가도 가도 알수 없는 미궁."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던 김기자의 어투가 진지해졌다.
"호도살 파듯이 어렵지요?"
"뭐가요?"
신애가 일순 얼떠름해지며 되물었다.
"우리 그 시인친구 상대하기가 말이애요."
김기자가 손바닥에 호도를 공 굴리며 말주머니를 열었다.
보는바와 같이 이것은 오랜만에 신애네 헌책가게에 들린 김기자와 박신애의 대화 한단락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할것은 바로 김기자와 박신애의 담화와 나란히 붙어있는것은 호도에 대한 묘술이라는점이다.
세심한 독자들은 주의했겠지만 호도는 이 텍스트 여러 대목에서 조각났다.
신애가 국자가에 도착한 첫날 경자를 찾느라 온종일 헤매다가 배고파 먹고싶은것이 바로 호도과자였다. 이렇게 된것은 그의 고향 공주촌에 호도가 많이 났고 그것을 사간 과자공장업주가 가져다준것이 바로 호도과자였고 이것은 또 신애가 처음 먹어본 제일 맛있는 과자였던것과 련계된다.
그후, 김밥집에서 사귄 광천수차 기사 양인철이 한번은 신애 너 먹고싶은것을 사준다고 할 때도 바로 호도과자를 먹고싶다고 대답하며 차장들에게 앞으로 많이 도와달라면서 차장들에게 사들고 간것도 바로 앵두와 호도과자였다. 여기서 호도는 고향을 금방 떠나온 신애의 짙은 향수와 공주촌에서 궁핍했던 생활을 나타내고 아울러 아직 농촌티를 벗지 못한 신애의는 때묻지 않은 심성을 나타내는 상관물로 창조되였다.
그밖에도 윤승원과 처음으로 성애를 치르고나서 신애는 호도껍질처럼 단단하던 보호본능에 스스로 균렬이 가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며 또 꿈에도 자주 호도를 까는 자신을 보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 인용문에서의 호도는 조각나서 또 다른 양상으로 둘의 대화에 나란히 붙어있다. 여기서 호도는 약재의 일종이며 안해인 신애가 남편 경준에게 바치는 사랑의 마음을 나타내는 상관물로 되며 또 경준이와 상대하기 어려운, 아니 경준이를 진정 리해하려고 애쓰는 신애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창조되였다.
이와 같이 한 사물의 형상을 조각내기와 성질이 서로 다르거나 상반되는 사물 나란이 붙이기는 물론 모더니즘과 포스터모더니즘의 전용물이 아니지만 사실주의문학에서보다 모더니즘과 포스터모더니즘문학에서 많이 쓰는 방법인것만은 사실이다.
작자는 신애가 농촌에서 입고온 오리털이 삐죽삐죽 내미는 낡은 나일론 방한복에 대하여서도 여러번 조각내기를 하고있다. 오리털을 내미는 낡은 나일론방한복은 처음에는 신애의 농촌에서 궁핍한 생활을 나타내는 표상이기도 하고 또 국자가를 찾아온 효준에게서 날카로은 질문을 받을 때 자꾸만 내미는 오리컬을 뽑을 때는 신애의 초조하고 불안한 심태를 나타내는 상관물이기도 하며 그 오리털이 내미는 나일론 방한복을 달걀 다섯개에 팔아버릴 때는 바야흐로 변화되는 신애의 의식을 나타내는 상관물로 창조되기도 하였다.
며칠 후, 골목길에서 보니 닭알 바꾸는 그 중국아낙네가 신애에게서 바꾼 오리털 방한복을 입고 아빠트광장을 돌며 닭알을 바꾸고있었다. 오리털이 삐죽삐죽 나온 그 옷이 아낙에게 어쩐지 어울려보였고 왜서였던지 신애는 푹 실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하나를 깨달았다. 돈만 있으면 이제 더는 털이 삐죽삐죽 나오는 한산한 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것, 그런 옷을 입은 남에게 웃음을 던질수도 있다는 것.
여기에는 신애의 무의식이 발로되고있는데 그것은 즉 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의식이며 아울러 자기의 신분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다. 즉 자기는 도시의 권귀나 시민들에 비하여 초라하지만 그 자기의 오리털이 삐죽삐죽 내민 방한복을 사입은 그 아낙네보다는 한층 우위라는 생각이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에서 이 방한복에 대한 묘술은 가장 대표적인 조각내기방법의 례로 볼수 있다.
신애와 윤승원의 관계가 시작되면서부터 정확하게 말하면 윤승원이네 상계인사들과 신발쇼핑몰 직원들과 함께 고향 공주촌에 소풍갔을 적에 잡아준 신애는 자기와 같은「신애」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왕골로 엮은 들가방에 넣어가지고 왔다.
작자는 이때로부터 윤승원이와 헤여질 때까지 줄곧 신애와 윤승원의 생활에 대한 묘술과 고양이에 대한 묘술을 나란이붙이기를 하고있다.
우선 고양이「신애」는 신애가 국자가에 오기전 공주촌에 있을 때부터 신애와 인연이 생겼다.
궁색한 자기 집에 얹혀있는 조카 신애가 저으기 미웠던 이모는 신애를 고양이 같다고 하며 고양이 같다고 하면서 고양이 이름도 신애이름을 따서 불렀다. 그리고 이모는 고양이를 죽도록 싫어했단다. 이모가 고양이를 때리고 박고 차고할 때 신애가 고양이를 품에 안고 우는 아이처럼 불상히 만져주곤 하였단다.
여기서 고양이는 바로 불운했던 고향에서의 신애와 동격적인 상징물이다.
신애와 윤승원의 사랑의 밀실ㅡ 세집에 온 고양이를 윤승원이가 또 싫어하였다.
고양이의 이름이 신애인것도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고양이가 더럽다고 생각하였고 때로는 발로 걷어차기도 한다.
고양이도 역시 신애의 비참한 신세를 나타내는 상관물로 창조되였다.
이윽고 윤승원이가 신애를 싫어하기 시작하고 세집으로 찾아오는 차수가 줄어들 무렵부터 집에 그녀를 반길 사람은(※ 원문이 이렇게 되였음) 고양이밖에 없었다. 드디여 승원이가 보이지 않자 고양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신애는 국자가의 구석구석 역전광장, 음식점, 뻐스대합실, 슈퍼마켓, 국도를 벗어나 황토길을 건너 농가를 찾아 헤매였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여기서 고양이는 신애의 분신이며 신애의 사라진 사랑의 상징이다.
우리는 고양에에 대한 묘사에서 김혁작가가 조각내기와 나란이 붙이기 방법을 아주 숙려되게 쓰고있음을 보아낼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에필로그 또한 나란이 붙이기방법의 성공적인 실험이라고 평가할수 있다. 보는바와 같이 에필로그에서 작자는 텍스트에 있는 인물들의 운명에 대하여서 더 언급한것이 아니라 몇년전 어느 겨울날 아침 박신애가 내리던 국자가역에 다른 한 농촌 처녀애가 내리는것으로 하였다.
박신애가 덧니와 초생달의 눈으로 매력적이였다면 이 처녀애는 눈밑에 있는 눈물태짐과 까만 눈이 매력적이며 박신애는 오리털이 삐죽삐죽 내미는 낡은 나일론 방한복차림에 낡은 트렁크를 들었다면 이 처녀애는 류달리 색상이 화려한 복식에 바퀴 달린 트렁크를 끈다. 그때 박신애는 전화로 사람을 찾는데 실패했다면 이 처녀는 성공하여 전화로 누구인가와 대화를 나누고 사람과 차가 법석이는 거리 우중충한 빌딩숲속으로 사라진다.
이제 이 처녀의 운명은 박신애와 좀 다를수 있을까?
6. 한계를 극복하여 나갈 김혁작가의 미래를 확신한다
장편소설《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는 김혁작가의 문학적인 한계도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구조상에서 이 소설은 너무나 간단하다. 시공간상에서 보다 확장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인물도 몇 사람 더 등장시키고 보다 신분이 높은 도시의 권귀나 표준적인 중산계급등을 등장시켰으면 저층서사소설로서 내용을 보다 충실히 할수 있었고 작품의 내용도 보다 풍부히 할수 있었겠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것이 아쉽다.
인물관계의 설정에서도 조선족사회의 믿바닥인생을 영위하는 신애와 그녀의 주변인물들외의 한족(漢族)에 대하여서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있다. 한국인에 대하여서도 단 한사람 신애에게로 결혼하려 온 그 남자 한분외에는 거의 건드리지 않고있다. 그렇기때문에 국자가사람들의 삶의 현장이 너무나 간단화되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면「생물사슬」에 련계되는 많은 문제들, 저 마슬로의 욕구층차리론에 근거하면 생명보존의 층차로부터 자아실현의 층차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 심각하고 수다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장편소설《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에서 인물들은 한결같이 생명보존의 층차에서 허덕이는 사람들뿐이다. 그 김정혁이라는 기자를 제외하고는. 그러나 아무리 밑바닥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여러 계층, 여러 성격, 여러 운명, 여러 수준, 심지어는 여러 국적의 인간들이 좌층우돌하는 소용돌이속에서 복잡한 양상을 펼쳐보이면서 살기마련인데 그것들을 총체적으로 전면적으로 다채롭게 조명하지 못하였다. 이로 하여 이 작품은 장편소설로서, 사실주의소설로서, 저층서사소설로서는 그 광도, 심도와 력도가 모자람을 느끼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비판의식의 결핍에 대하여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비애소설로서는 눈물이 없이는 읽어내려갈수 없을 정도의 문학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할수 있지만 저층서사소설로서는 아직 모자람이 많다. 의식주를 해결하는 층차에서 허덕이는 신애 등 인물들에 대한 동정심은 제대로 표현했는데 이들에 대한 정부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 혹은 아직도 적잖은 부패자들, 류망들, 가지각색의 악인들에 대한 비판과 거의 보편적인 많은 사람들의 삐 뚤어진 가치관념에 대한 비판의 력도가 약하다.
그러나 장편소설《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은 성공적인 작품이고 소설가 김혁씨의 무궁한 문학적저력을 충분히 과시하고있다고 당당하게 말할수 있다.
이제 김혁씨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장편의 탄생을 기대하는 마음을 전하면서 펜을 놓는바이다.
출처: ("장백산" 2013년 2월호)
첫댓글 휴일날을 잘 보내셨는지요 오늘저녁시간은 태풍의 간접영양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는 저녁시간에 컴퓨터에서 좋은글을.
읽으면서 머물다 가네요 내일부터 가을 장마비 대비하시고 즐거운 저녁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