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서울캠퍼스 한 가운데에는 정각원(正覺院)이 있다. 정각원 법당 건물은 원래 조선 광해군 12년(1620년)에 완공된 경희궁의 가장 오래된 전각 숭정전(崇政殿)이다. 1829년 큰 화재로 다른 전각들은 소실되었으나 숭정전만 피해를 면했고 1926년 일제가 현재 신라호텔 쪽에 있던 일본 사찰로 이전했다. 1976년 9월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져 법당으로 장엄된 뒤, 1977년 2월 정각원으로 개원했다. 궁궐에 있던 건물이 법당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정각원은 명실상부하게 ‘조계종립(曹溪宗立)’을 상징하는 곳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몇 년 전까지 정각원은 동국대에 있는 여러 건물 중 하나였을 뿐이다. 학생들 역시 그저 스님들에게 교양필수 수업을 듣는 곳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정각원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수, 직원, 학생들의 귀의처가 됨은 물론 일반 불자들의 정진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각종 법회가 열리고 교양프로그램들이 운영되고 있다. 과거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도심포교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정각원장 법타 스님이 있다.
|
|
|
▲ 동국대학교 정각원.
|
법타 스님을 만나기 위해 얼마 전 토요일 동국대 정각원을 찾았다. 주말이어서인지 캠퍼스는 한가로웠다. 오전 10시, 여느 사찰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불이 시작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자들이 정각원 법당을 가득 메웠다.
정각원이 살아 있다!
11시가 되자 토요법회가 시작됐다. 그런데 법회의 형식이 기존의 그것과는 다르다. 정각원은 지난 9월 7일부터 2014년 2월 22일까지 토요법회를 ‘불교대강좌’로 진행하고 있다. 법회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방적인 설법이 아닌 법회에 참여한 대중과 함께 소통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것. 내용도 경전 강의는 물론 담마토크, 건강 특강, 세대간의 소통 등을 주제로 다양화됐다. 이날의 법사는 행불선원장 월호 스님이다. 스님은 『신심명』을 2주간 강의한다. “至道無難(지도무난)이요, 唯嫌揀擇(유혐간택)이니 但莫憎愛(단막증애)하면 洞然明白(통연명백)이라.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월호 스님의 명쾌하고 유쾌한 법문은 1시간 넘게 이어졌다. 강의를 듣는 불자들 역시 거리낌 없이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물었고 스님은 막힘없이 답했다. 법회가 끝나고 학생식당에서 ‘색다른’ 점심공양을 함께 한 후 법타 스님과 다시 자리를 같이 했다.
|
|
|
▲ 법타스님. | “2009년 정각원장 소임을 맡은 이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도님들이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계속 고민해왔습니다. 그러다 일방적인 법문이 아니라 법사(法師)와 대중이 소통하는 미래지향적인 ‘토크콘서트’ 형식으로 불교대강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내용과 형식이 다양하다 보니 법회에 참석하는 불자들의 반응도 상당히 좋습니다.”
법타 스님은 “정각원이 진작부터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법회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며 “향후에도 새로운 콘텐츠들을 계속 발굴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법타 스님이 정각원장을 맡은 이후 그 변화의 내용들은 눈부시다. 1000명에 가까운 동국대 구성원들이 신도로 등록을 했고 또 동국대 밖의 일반 불자들의 신도등록 숫자도 1000여명에 이른다. 토요법회를 비롯한 각종 법회에는 200명이 넘는 불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재학생 법회, 중국인 학생과 기타 영어권 유학생을 위한 법회, 청년회 법회, 중구청 직원법회 등 각종 법회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고 조계종 포교원으로부터 공식 인가된 정각원 불교대학도 운영되고 있다. “동국대에는 1200명 가까운 중국인 유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따뜻하게 안아줘 훗날 자국으로 돌아가 훌륭한 포교사가 되도록 중국어 법회를 개설했는데 반응이 꽤 좋습니다. 매 법회마다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법회뿐만 아니라 동국대가 있는 서울 중구 지역에 회향하기 위해 정각원은 4개의 사회복지시설을 수탁운영하고 있다. ‘단우물 어린이집’, ‘보리수데이케어센터’, ‘신당5동 어린이집’, ‘중림종합사회복지관’ 등이 바로 그것이다. 법회가 진행되고 불자들의 참여가 늘어나면서 정각원 자체적으로 매년 5000만원 이상의 장학금을 학생들에게 지급하고 있다.
|
|
|
▲ 불자들로 가득한 정각원 토요법회 모습.
| 법당 한 채가 전부인 정각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일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고 보니 법타 스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어 보인다. 영천 은해사 주지 시절 불교계 최초의 수림장(樹林葬) 시설을 설치했고 또 불교계 최초로 남북교류사업과 평화통일운동을 펼쳐온 사람이 바로 법타 스님이다.
“숨만 쉬고 있는 남북관계 너무 안타까워”
“지금의 남북관계는 숨만 쉬고 있는 식물인간 상태와 다르지 않습니다.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남북이 자꾸 오고가고 머리를 맞대야 평화가 오고 통일의 기운을 만들 수 있는데 최근 몇 년을 보면 자꾸 뒷걸음질만 치고 있습니다.” 법타 스님은 ‘통일 얘기’가 나오자 한 숨부터 내쉬었다. 이명박 정부이후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남북관계가 답답했기 때문이다. 법타 스님이 ‘북한’과 ‘민족’에 관심을 갖게 된 인연은 우연치 않게 찾아 왔다.
“제가 1985년에 미국 LA 남가주대학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세계 수행자와 성직자들의 교육 현황을 연구하고 싶어 떠난 유학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지도교수님은 너무 범위가 방대하고 어려운 일이라며 북한불교와 남북관계를 연구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를 해 줬어요. 당시 학교 도서관에서 <노동신문>을 비롯한 여러 북한 자료를 보면서 놀랍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연구이기에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방북으로까지 이어졌다.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갔다. ‘현장’을 본 법타 스님은 “금생의 업(業)이자 사명이 바로 통일운동”이라는 생각을 굳히고 본격적인 연구와 활동을 시작했다. “미국 유학중 주로 기독교인 중심의 통일운동에 동참하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국가보안법 등 법률적으로도 많은 제약이 있었고 여러 가지로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경제적 여건과 부족한 인프라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2년 2월 12일 월주 큰스님을 모시고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이하 평불협)를 창립했습니다. 1989년 처음 평양을 방문할 때의 초심을 생각하며 부족하고 어려울 때 일수록 북한불교와의 교류가 필요하다는 역설적 논리에 근거한 평화통일운동을 시작했습니다.”
|
|
|
▲ 2003년 9월 묘향산 보현사에서 북한스님들에게 붉은 가사를 전달하는 법타 스님의 모습.
| 평불협은 당시 창립선언문을 통해 “민족의 평화적 공존 및 통일을 위한 남북한의 종교 및 전통 불교문화의 지속적 교류와 협력방안 등을 모색하고 실천함으로써 남북의 불교교류의 효율화와 활성화를 도모하고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며 아시아와 세계평화를 위해 우리 종교인과 불교인들이 힘을 합쳐 나가고자 한다.”고 설립 취지를 밝히기도 했다.
평불협은 창립 이후 북한 지역의 가뭄과 홍수, 대형사고 등이 있을 때마다 인도적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 정부, 민간단체, 후원회원 등의 지원을 받아 옷, 식용유, 자전거 등 갖가지 생필품을 전달했다. 통일부에 집계된 평불협의 북한지원물품 총액만 해도 50억원이 넘는다. 특히 ‘밥이 통일이요 평화’라는 생각으로 1997년 황해도 사리원과 2005년 평양에 금강국수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 국수공장에서 만들어진 국수는 매일 북한 주민 7700명의 끼니를 책임졌다. 그러나 지금은 평양과 사리원 공장 모두가 가동이 어려운 상황이다. “북한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전국의 불자님들의 정성을 모아 각종 물품을 보냈습니다. 그랬던 평불협이 이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북관계 경색의 책임이 어느 한 쪽에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잘 사는 우리가 저들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님은 그러면서 “애인(愛人), 애족(愛族), 애국(愛國)이 신심(信心)”이라고 강조했다. “불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심(信心)입니다. 정각원 법당에 걸려 있는 주련도 바로 신심에 관한 것입니다. 『화엄경』 ‘현수품(賢首品)’에 있는 내용인데, ‘신심은 도의 근본 공덕의 어머니, 일체 선한 법을 길러내며, 의심의 그물을 끊고 애정 벗어나, 열반의 위없는 도 열어 보이네(信爲道元功德母 長養一切諸善法 斷除疑網出愛流 開示涅槃無上道)’라고 합니다.
|
|
|
▲ 1999년 황해도 사리원 금강국수공장을 방문한 법타스님.
| 신심은 부처님 사랑입니다. 우리들의 경우를 보면 애인(愛人), 애족(愛族), 애국(愛國)이 신심입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불자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정각원과 불교통일운동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 스님의 스승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은 출가 스승〔恩師〕과 전법 스승〔法師〕 두 분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감옥에서 일타 스님의 편지를 받고 펑펑 운 사연 “저에게는 두 분의 스승이 계십니다. 저에게 출가 인연을 만들어 주신 스승으로 법주사 주지를 역임하신 추담(秋潭) 큰스님이 계시고 저에게 건당(建幢)을 허락해준 일타(日陀) 큰스님이 또 계십니다.”
법타 스님은 출가 인연과 두 스승을 만난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제 생일이 사월초파일입니다. 부처님과 생일이 똑같아요. 하하. 충청도 청주의 유교 양반 집안에서 자랐지만 어렸을 때부터 워낙 몸이 약해서 집안 어른들이 저에게 ‘너는 부처님한테 정성을 들여야겠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어머니께서는 절에 제 등을 달아주셨어요. 그러다 보니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옆집에 살던 분이 도서관에 근무를 했는데 그 분을 따라 도서관에 몇 번 다니다 홍묘법장이 해설한 『반야심경 강의』를 보게 됐습니다. 보통의 책과는 너무 달랐고 읽는 순간 전율을 느꼈습니다. 책을 보고 나서는 절이 어떤 곳인지 또 궁금해졌어요. 당시 청주 신용화사에 갔는데 학생법회가 한창이었습니다. 법회에 참석한 학생들이 너무 부럽게 느껴졌어요. 거기 있는 또래 학생에게 ‘어떻게 하면 법회에 참석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아무나 올 수 있다. 네가 오면 대환영이다’고 해요. 그래서 그때부터 학생법회에 미친 듯이 다녔습니다. 당시 청주에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새벽 4시가 되면 통행금지 해제 사이렌이 울립니다. 매일 새벽 3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준비를 했다가 4시가 되면 절에 가서 새벽예불을 하고 학교에 갈 정도였습니다.
|
|
|
▲ 일타스님 진영. | 그러다 중3때 법주사 수련회에 갔는데 당시 생각한 것이 ‘정신적 대통령이 되자. 수도 잘해서 스님이 되는 것이 그 길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법주사에서 추담 큰스님을 뵈었습니다. 큰스님께서 “중이 되려면 무식하면 안 된다. 고등학교 졸업장 가지고 오면 삭발해 주겠다.”고 하셔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출가를 결심한 스님에게 고등학교 3년은 너무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절에 다니며 불교 공부를 하고 수행을 했다.”고 한다. 스님은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바로 다음날 새벽에 법주사로 가서 출가했다. 1965년도 2월의 일이다. “추담 큰스님께서는 평소 공부 안하고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제자는 두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수행 안하면 밥도 먹을 자격이 없다고 강조하셨어요. 그런 스승 밑에 있다 보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하.”
일타 스님과의 인연은 출가 전 학생법회 때 초청법사로 온 스님의 법문을 처음 듣고 “홀딱 반하면서” 시작됐다. 출가 후에도 인연이 찾아 왔다. “1967년 봄 동국대 1학년 때였습니다. 강원도 화지리 도피안사 포교당에서 군종병을 하고 있던 혜인 스님이 개최한 보살계 수계법회에 성진 스님과 함께 큰스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거기서 큰스님의 온화한 모습과 청산유수 법문에 당시 법회에 참석한 대중들 모두가 환희심을 느꼈습니다. 함께 간 성진 스님이 건당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일타 큰스님의 법을 따르라’는 뜻으로 추담 큰스님께서 제 법명을 법타(法陀)라고 지어준 것 아닌가’라고 제 마음대로 해석하고는 저를 법제자로 받아달라고 간곡히 청을 드렸습니다. 하하”
일타 스님은 1974년 통도사에서 열린 고경 스님 재일법회 때 법타 스님에게 건당을 허락했다. “그때 큰스님께서는 직접 포은(包隱)이라는 법호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형(師兄)이 된 성진 스님의 법호 포운(包雲)과 발음이 비슷해 구별이 어려웠어요. 시간이 흘러 큰스님께 다시 다른 법호를 내려달라고 청을 드렸더니 저에게 새 법호를 주셨습니다. ‘법타는 남한과 북한을 다니며 통일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고, 그 일로 옥고도 치렀으니 부처님의 중도(中道) 사상으로 민족의 고통을 해결하고 남북평화통일과 민족화합을 성취시키라는 뜻으로 중화(中和)라고 하자’고 하시며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
|
|
▲ 해인사에서 함께 정진했던 스님들과 함께 한 모습. 왼쪽부터 일타, 법전, 성철, 혜암스님.
| 법타 스님은 앞서 밝혔듯이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통일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러다 1994년 공안정국 당시 당국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 씌워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그 때 감옥에 105일간 있었는데 일타 큰스님께서 200자 원고지 6장에 쓰신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네가 그렇게 민족을 위해 헌신하다 구속됐지만 나는 너를 믿는다. 큰일을 하려면 그에 따르는 마장(魔障)이 있는 법, 마침 나라에서 너에게 이제 그만 좀 쉬라고 명령했으니 나라에서 마련해준 국립선방(國立禪房)인줄 알고 열심히 참선정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큰스님의 편지로 김영삼 정권에 대한 분노의 마음은 삭히고 그 안에서 용맹정진과 다양한 독서를 하였습니다.”
일타 스님은 평소에도 법타 스님에게 “참선만 좀 하면 나무랄 데 없는데…”라며 선방에서의 정진을 당부했다고 한다. 법타 스님은 1998년 종단 사태로 은해사 주지를 그만두게 되자 일타 스님의 뜻을 받드는 좋은 기회로 삼아 은해사 운부암선원에서 8안거동안 정진했다.
|
|
|
▲ 일타스님의 제자들이 일가를 이루어 정진하고 있는 은해사 전경.
| 법타 스님은 일타 스님에 대해 “계정혜 삼학(三學)에 두루 밝은 삼장법사”라고 강조했다. “수행도 잘하셨고 문장에 뛰어난 분이 바로 큰스님이셨습니다. 또 성격이 부드럽고 언제나 자비가 넘치셨어요. 누가 찾아와도 반갑게 맞이해주는 분이 바로 일타 큰스님이셨습니다.”
법타 스님은 인터뷰 도중에도 전화가 오면 이면지에 메모를 했다. 낯선 모습을 조금 신기해하자(?) 스님이 한 마디 던진다. “제가 이렇게 사는 것은 다 큰스님의 일상을 보고 배운 것입니다. 생전에 큰스님께서는 그렇게 꼼꼼하고 종이 여백을 나눠 메모지로 쓸 정도로 검소하실 수가 없었어요.”
스님은 조계종 총무부장과 교구본사주지를 비롯한 다양한 소임을 맡기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한국불교의 미래에 대한 조언도 빠뜨리지 않았다. 스님은 “고착돼 있는 남북관계를 그래도 풀 수 있는 곳이 불교”라며 불교계의 적극적인 역할을 당부했다. 또 “보다 근본적인 쇄신을 통해 한국불교가 국민들에게 이익과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발밑을 잘 살펴보라는 조고각하(照顧脚下)의 마음이 필요한 때”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
|
|
▲ 법문을 하고 있는 일타스님.
| 법타 스님에게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다음 생에도 인연이 돼 일타 스님을 만난다면 다시 모실 수 있습니까?” “Of course! 물론입니다. 생전 저뿐만 아니라 우리 제자들을 너무도 아껴주셨던 큰스님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큰스님께서는 우리시대의 ‘명의(名醫)’였습니다. 중생들의 마음을 항상 살펴 주시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다음 생에는 더 잘 모셔야죠. 큰스님께서 당부하셨던 대로 수행과 포교도 더 열심히 하고요. 하하.”
일타 스님은
일타 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율사(律師)이자 선사(禪師)로 사부대중의 존경을 받았다.
일타 스님은 1929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4세에 양산 통도사 고경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정진을 시작했다. 스님의 가족 41명이 함께 출가한 것은 불교사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다.
1955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7일간 삼천배 기도를 올린 후 스님은 자신의 오른손 열두 마디를 태우는 연지공양을 단행했다. 연지공양으로 정진에 힘을 얻은 스님은 1955년 태백산 도솔암에서 동구불출(洞口不出), 장좌불와(長坐不臥), 오후불식(午後不食)하며 6년간 용맹정진했다. 스님은 이때 ‘頓忘一夜過 時空何所有 開門花笑來 光明滿天地(돈망일야과 시공하소유 개문화소래 광명만천지)’, 즉 ‘몰록 하룻밤을 잊고 지냈으니, 시간과 공간은 어디로 있는가? 문을 여니 꽃이 웃으며 다가오고, 광명이 천지에 가득 넘치는구나.’는 오도송을 읊었다. 스님은 이후 해인총림 율주와 해인사 주지, 조계종 전계대화상, 원로의원, 은해사 조실 등을 맡으며 후학들을 제접했다. 또 재가불자들을 대상으로 한 법문에도 적극 나섰으며 『생활 속의 기도법』, 『기도』, 『사미율의』, 『불교와 계율』 등 수많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일타 스님은 1999년 11월 29일 미국 하와이 와불산 금강굴에서 ‘一天白日露眞心 萬里淸風彈古琴 生死涅槃曾是夢 山高海闊不相侵(일천백일노진심 만리청풍탄고금 생사열반증시몽 산고해활불상침)’ 즉 ‘하늘에 밝은 해가 진심을 드러내니 만리의 맑은 바람 거문고를 타는구나. 생사와 열반이 일찍이 꿈이려니, 산은 높고 바다 넓어 방해롭지 않구나’는 열반송을 남기고 세수 71세, 법랍 58세로 열반에 들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