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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재클럽(Y-Club) 원문보기 글쓴이: 햇살
장유사(長遊寺) |
소재 :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면
장유사에는 그 이름처럼 작은 암자가 하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웅장한 절집들이 나타나 있고
산에서 내려다보는 산자락은 시원하기 그지없다.
![]() 장유사에 들어서서 계단을 오르면 장유화상 사리탑, 비석 등이 있다. 팔각사리탑은 가락국 수로왕의 처남인 장유 화상(허보옥)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석조물로서, 가락국 제8대 절지왕(451년~492년)이 재위 중이던 장유암 재건당시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 1500여 년의 오랜 세월 속에 여러 번의 전란으로 암자와 관계유물들은 거의 소실되고 사리탑만이 있었고 현존하는 사리탑은 그 제작 수법으로 추정해 보면 고려 말의 작품으로 보인다. 가락국의 8대 절지왕이 장유사를 중건한 뒤 1400여 년이 지나는동안 여러 번의 방화 때 불타는 재난을 겪었지만 사리탑만은 남아 있다.
1935년에 장유사를 중수할 때 사리탑을 두르는 석란간과 비석을 세웠다. 탑 높이 224cm로 연화대를 상징하는 팔각기단위에 세워져 있다. 가락국사 장유 화상 기적비는 1915년에 주지인 선포담이 세웠다. ![]() ![]() 경상남도 김해시 불모산(佛母山•長遊山)에 있는 절. 가락국(駕洛國) 질지왕이 동왕 2년(452)에 시조비 허왕후(許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후사(王后寺)를 세웠음. 5백년 뒤 그 자리에 창건된 절이 장유사임. 이 때 장유사에는 3백결의 전지(田地)가 있었는데, 왕후사가 이 안에 있었으므로, 이를 장사(莊舍)로 사용하였음. 한편 가락국 수로왕 7년(48)에 인도 아유타국(阿隃陀國)의 태자이자 승려인 장유(長遊)가 허왕후를 따라 이 곳에 와서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음. 경내에는 장유화상사리탑(長遊和尙舍利塔)이 현존하는데, 이 탑은 임진왜란 때 왜구들에 의해 훼손되었다가 복원되었음. 절의 입구에 왕후사 터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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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토기 불교 茶문화 살아숨쉬다
절이름 長遊寺 ․ 지명 차밭골 茶戶里등 곳곳에 남아 입증
가야제국(伽倻諸國)이 멸망한지도 1천4백여년이 지났다. 설화로 살아숨쉬는 신비의 나라, 우리 나라 고대국가 시대때 신라 고구려 백제와 함께 4국시대를 열어가며 한반도 남부지방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가야.
가야는 당시 동북아문화의 젖줄이었으나 그 기록이 왜곡 말살되고 신비의 배일에 가려져 있다가 이제야 1천수백년의 긴장을 깨고 그 본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경북의 함창에서부터 성산 고령을 거쳐 함안 고성 김해에 이르기까지 7백리에 달라는 낙동강 유역과 서쪽으로는 지리산을 경계로 하는 영역으로 출발한 6가야의 5백년 역사현장마다 옛 가야인의 체취가 배어있지 않은 곳이 없다.
가야인들이 남긴 유적 유물이 옛 가야땅 곳곳에 지천으로 널려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가야의 유적 유물이 대량으로 발굴되면서 잊혀진 신비왕국 가야역사가 차츰 복원되고 있다. 따라서 가야는 이러한 유적 유물로 인해 「영원한 가야」로 우리 역사가 우뚝 서고 있다.
가야역사가 오늘까지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은 우리 생활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자리한 佛敎와 茶, 土器, 그리고 伽倻琴등 한국의 정서로 상징되는 가야문화 때문이다. 따라서 이 네가지가 「가야문화의 4選」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가야문화 가운데 불교와 차는 한국 최초의 전래설에도 불구하고 정설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토기와 가야금 또한 발상지에서조차 대접이 소홀하다.
가야문화가 역사적 기록이 미미한데다 현대인과 함께 할 수 있는 생활속의 문화로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가야문화는 우리 조상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서 가야역사 재조명과 더불어 길이 보존하고 가꿔야 할 문화다.
가야문화 가운데 불교는 가락국의 개국 초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했다. 가락국의 옛 땅 김해에는 가야 불교 전래설을 뒷받침하는 유적 유물들이 곳곳에 널려있다. 수로왕비 許왕후의 母國 印度 아유타에서만 볼 수 있는 불교의 상징인 코끼리상과 신어(神魚)문양, 파사석탑(婆娑石塔), 그리고 절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고구려 제10대 소수림왕(小獸林) 2년(서기372) 6월 진(秦)나라의 순도(順道)와 아도(阿道)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와 초문사(肖門寺), 이불란사(伊弗蘭寺)등을 창건하고 설법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와 사찰기록, 김해지방에 전해오는 사찰기록 등을 통합하면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印度 아유타국 공주인 許黃玉인 오빠인 장유화상(長游和尙) 許黃玉과 함께 불탑인 파사석탑(婆娑石塔)등을 가지고 가락국 시조대왕 수로왕에게 시집올때인 서기 48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종래 불교 전래설보다 3백24년이 앞선 것이다.
김해지방에는 가락고찰(駕洛古刹)이라 이름붙인 사찰이 많다. 신령스런 물고기가 살았다는 김해의 진산(鎭山)인 신어산(神魚山)에는 은하사(銀河寺)와 동림사(東林寺)가, 許왕후가 가야에 도착해 첫날밤을 보낸 명월산(明月山)에는 흥국사(興國寺)가 들어서 옛 가야국의 불교 전래설을 뒷받침하며 가락고찰의 맥을 잇고 있다.
그 외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불모산의 장유사(長游寺),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지리산에 있는 칠불사(七佛寺)등이 가야 불교와 연관이 깊은 사찰이다.
그러나 오늘날 가야불교가 그 존재를 외면당하고 있는 것은 바로 불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야불교가 지금은 한국 최초전래설에도 불구하고 부흥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가락국이 한국불교의 최초 전래지로 제자리를 되찾을 것으로 보인다.
가락국의 古都 김해는 한국의 정신문화를 대표하는 차(茶)문화의 발상지다. 한국인의 기호음료로서 한국 전통차의 효시를 이룬 가야의 차 문화가 언제 맥이 끊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차나무는 발견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 차가 전래된 것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흥덕왕 3년(서기828)에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金大廉)이 차의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뒤부터 우리나라에 차가 생겼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許왕후가 인도에서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혼수품 중에 차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가야문화는 차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가 서기 48년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가야차는 지리산 전래설보다 7백80년이나 앞선 것이다.
가야의 차나무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김해 시내를 굽어보고 있는 분성산과 그 아래 동상동 대성동 구산동 등 산자락에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로와 택지개발등으로 불도저에 밀리고 포클레인에 뿌리째 파헤쳐져지는 등 수난을 당해 좀처럼 찾아 볼 수가 없다.
예부터 차밭골이라 불리는 김해시 동상동 407의 1일대 분성산 계곡에는 현재 고목형태의 야생차나무 10여 그루만이 겨우 가야차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 차나무가 許왕후와 관련이 있다면 김해지방은 우리나라 최초의 차전래지로서 차문화를 태동시킨 고장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차문화를 반영하듯 김해시와 인근 지방에는 차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김해시 동상동에는 차밭골, 진례면에는 차나무가 많이 나는 골짜기라는 다곡(茶谷)이 있고, 창원시 동읍의 다호리(茶戶里), 김해시의 다전로(茶田路)등의 지명으로 보아 가야차와 연관이 있는 곳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최초의 차전래지로서 옛 가락국의 古都 김해에는 지금 차의 향기가 멎은지 오래다. 차를 제조할 차나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차 문화의 맥이 끊긴 이유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김해시가 가야의 차문화를 되살리자는 부흥운동이 일고 있어 멀지 않아 옛가야 차의 향기가 다시 피어오를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가야금(伽倻琴)은 가야인들의 서정과 문화생활을 엿 볼 수 있는 문화다. 고조선 시대의 북(踣 )과 중국의 쟁(爭)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가야금은 우리나라 전통악기 60여종 가운데 거문고 비파와 함께 삼현(三絃)으로 불리는 가장 오래된 현악기다.
이러한 가야금은 가야 5백년 역사가 대부분 설화에 의존한 사실(史實)들인데 비해 가야의 확실한 흔적을 말해주는 민족악기로서 1천5백여년의 오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가야금은 대가야국 성열현(省熱懸) 출신의 우륵(于勒)이 가실왕의 명을 받아 만들고 가야금곡 12곡을 지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오늘날 우륵은 거문고를 만든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옥보고(玉寶高)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으로 꼽힌다.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고 또 연주한 긴 여음은 지금도 한국전통음악으로서 세월을 뛰어넘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가야문화 가운데 토기는 가야의 대명사로 불릴만큼 가야인의 생활상과 시대 변천과정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한 유물이다. 따라서 옛 가야지역 고분등에서 출토되는 토기야말로 가야인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유물로 자리하고 있다.
가야토기는 아름다운 장식과 모양, 그리고 실용성에서 당시의 생활상을 읽을 수 있다. 또 배, 수레 등 생활용구가 아닌 장식용 토기등에서 당시의 운송수단 등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가야토기는 가야인의 뛰어난 공예수준 뿐만 아니라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유물로 자리하고 있다. 고고학에서는 토기를 인간의 활동에서 생긴 화석(化石)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김해를 중심으로 많은 도예인들이 가야 토기의 제작기술이나 기종 형태 문양 등을 통하여 가야문화와 역사를 복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김해에는 지금 경남 부산일대에서 발굴 수집된 문화재를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하고 있다
한편 김해시는 가야유적지의 보호와 관광코스 개발을 위해 1999년부터 2005년까지 1300억을 투입하는 국비지원사업을 시행하여 김해시 구산동 구지봉에서 김해시 전하동을 잇는 2.4㎞에 문화의거리 , 대성동고분정비와 전시관건립,수릉원복원,대성동유적정비등 많은 유적복원 정비해 놓고 있다.
앞으로 가야사2단계 사업이 완료되면 이미 정비를 마친 유적과 김수로왕릉 許왕후릉등과 더불어 가락고도의 면모가 어느 정도 갖춰질 것으로 보인다.
본 자료는 경남신문이 창간 50주년을 맞아 96년 1월1일부터 매주 수요일에 연재해온 기획취재「잊혀진 왕국 伽倻」를 스크랩하여 작성한 자료임을 알려드립니다.
*Y-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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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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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 ()()() 09.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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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맞습니다 이렇게 가락국 (김해의 옛이름)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화와 역사를 가졌지만 ,,한 불자로서 재일 안타까운게 불교 유래가 최초임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침체되어, 종교부지까지 타종교에 신도와 뺏기고 있는 현실입니다 ,,,자세한글 올려주신 솔바람님께 김해의 한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관세음보살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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