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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한강의 기적과 김현옥 서울 시장
김현옥 前서울시장. 그는 원조 불도저 시장으로써 근 현대 서울특별시 개발사를 놓고 볼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흔히 서울특별시의 3대 관선 시장으로 박정희 통치기간의 김현옥, 양택식, 구자춘을 꼽는다. 박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박정희의 '조국근대화' 작업을 앞장서 추진했던 인물이다. 부산시장에서 서울시장으로 발탁되면서 부산시청 직원을 40명 대거 끌고 서울시에 입성해 종횡무진 마음 놓고 누비고 다녔다. 이에 혹자는 무데뽀의 대명사로 그를 말하기도 한다.
한강 개발 이전에는 한강변에 모래사장이 있었고, 여름이면 물놀이도 했었다. 그는 한강을 정비하고, 홍수예방을 겸하여 한강변에 강변도로를 만들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 특수부대 일당이 북악산 언저리까지 침투 했던 사건이 일어났고(1.21사태), 김신조 일당의 서울 침입사건 이틀 후에 미국의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납치되는 사건이 또 일어나자 한반도는 초긴장 상태였다(향토예비군이 그 해 4월1일에 창설되었다).
남산터널 제1호선에 이어 제2호선이 착공하였다. 터널과 서울 지하철 건설은 전시엔 시민들 대피 방공호의 역할을 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개발한 것이다. 북악스카이웨이 또한 청와대의 안전한 보호를 위해 김신조 일당의 서울 침투 한 달 후에 만든 것이었다. 세종로와 명동에 지하도를,종묘 앞 필동 간 소개도로에 세운상가를 건립하고, 여의도에 제방을 구축해 여의도의 현재 모습을 갖추게 하였다.
강변북로를 건설하고, 국내 최초의 고가도로인 아현 고가 도로와 서울역 고가도로를 건설하였고 삼청터널과 사직터널도 개설하였으며, 복개된 청계천 위에는 청계고가도로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그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 동안 240억 원을 투입해 2천동 10만호의 아파트를 산비탈과 고지대에 있는 무허가 불량주택을 모두 헐고 짓는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1969년의 경우 서울시 총예산(416억원)의 12.4%에 해당하는 51억원을 시민아파트 건설에 썼다. 그는 이처럼 '밀어붙이기'식으로 이루어진 개발을 통해 수도서울은 무서운 속도로 변화되어 나갔다.
그가 추진한 각종 개발은 서울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놓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돌격!' 이라는 구호가 새겨진 헬멧을 쓰고 건설현장을 누비고 다녔던 그는 서울시장 부임 2년째 되는 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서울이 65년도를 100%로 했을 때 올해 목표가 1,100%, 즉 11배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그는 "40년에 걸쳐 할 수 있는 일을 4년 동안에 해 치웠다"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무리하게 추진된 김현옥式 '돌격 건설'은 1970년 4월 8일 그가 세운 와우 아파트가 무너지면서 끝이 나고 만다.
그의 서울 개발에 관한 평가는 서울 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바꾼 인물이라는 긍정적 의미의 평가와 정 반대로 군대형 막무가내 식 무데뽀 의미가 상존하고 있다. 그는 직접 쓴 한 수필에서 "후세에 '푸른 유산'을 남겨 주겠다."고 썼다. 살기 좋은 도시 서울을 후대에 남겨주고자 했던 김현옥. 그는 과연 그의 표현처럼 '푸른 유산'을 후세에 남겼다 할 것인가? 그는 그가 어릴 적 그렇게 하고 싶었다던 선생님을 훗날 다 늙어서 하게도 된다. 내무부장관 출신이 저 멀리 기장군에 장안 중학교교장선생님을 한다하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시장 대신에 처음부터 선생님을 하였으면 차라리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나는 한다.
그런데 건설의 화신이자 불도저 시장이란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지하철 사업은 계획만 세워놓고 실제 삽은 뜨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하도 공사를 많이 벌여놓다 보니 서울시 재정이 파탄 직전이었다. 재정담당자가 공무원들 월급을 못 줄 위기에 처해 국무총리실에 지급보증을 걸어놓고 시금고를 맡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직원들 월급을 주고 다시 메꿔 놓고를 반복했다고 하며, 이 부채는 여의도 개발 후 양택식 시장이 여의도 땅을 팔아서 겨우 숨통을 틔워놓게도 된다. 그리고 여기서 10억 원을 끌어와 지하철 1호선 삽을 뜰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서울 동대문구 전농1동 602∼624번지. 흔히 '청량리 588'로 불리는 이곳은 부산 '완월동', 대구 '자갈마당'과 함께 전국 3대 집창촌의 하나로 꼽혔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이 일대에서는 관능적인 옷차림을 한 수백 명의 여성이 대형 유리문을 열고 뭇 남성들을 유혹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창 호황을 누릴 때는 골목 곳곳에서 성매매 여성과 실랑이하다가 성 매수 남성의 옷에서 지폐가 빠져나오기도 하고 취객들이 흘리는 동전도 적지 않아 새벽에 그 돈만 잘 긁어모아도 집을 한 채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폭격 맞은 전쟁터처럼 폐허로 변했다. 공터마다 둘러쳐 놓은 황갈색 가림막에는 붉은색과 검은색 페인트로 '성매매를 한 사람은 징역 1년 벌금 300만 원', '성매매는 불법, 신고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일부 남은 건물에도 커다란 가위표가 그려져 있거나 깨진 유리창과 거울 조각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다. 아직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는 몇몇 업소도 불을 켜놓고 영업하는 시늉만 낼 뿐 호객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곳곳에 달린 CCTV와 섬뜩한 내용의 경고문을 무시한 채 업소를 들어설 배짱 좋은 남성도 있을 리 만무해 보인다.
1961년 당시 윤락행위방지법이 제정됐으나 선언적 의미에 그쳤고, 이듬해 정부가 기지촌 32곳과 성매매 집결지 104곳을 특정 지역으로 선정해 공창 아닌 공창을 인정한 꼴이 됐다. 박정희 정권은 기지촌의 성매매와 일본인 기생관광이 외화벌이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사실상 묵인했다. 서울 종로3가(종삼)와 양동 등지의 일부 사창가를 없애긴 했으나 이는 도심 재개발 차원이었다. '불도저'로 불린 김현옥 서울시장이 1966년 세운상가 건설을 밀어붙일 때 종삼의 한 성매매 여성에게 옷깃을 잡히며 성매매를 권유받았다가 이 일대의 사창가를 모두 없애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시절 양동도 빼놓을 수는 없다. <달동네에 검은 장갑이라고 불리우는 여인(김보연)이 비밀을 가진 태섭(안성기)과 재혼하여 살았다. 여인은 숨어 지내는 태섭 때문에 혼자서 악착 같이 생활을 꾸리지만 비뚤어진 아들로 인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어느 날 그녀의 전남편 주석(김희라)이 찾아오자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고 하는 남편과 태섭의 갈등이 커진다. 이 때, 동네에 미망인이 나타나면서 태섭의 과거가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하는데 그는 과거에 살인을 하고 숨어 지내고 있었다. 공소 시효가 얼마남지 않은 태섭의 죄를 묻어두는 여인 때문에 태섭은 새 사람이 되는데...>바로 ‘꼬방 동네 사람들’이라는 영화 내용이다. 이 영화는 이철용(필명 이동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배창호 감독의 1982년 영화로 남산 밑에 양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로 그 양동에서 집단으로 이주 당한 사람들이 또 어디로 향한 줄 아는가.
혹시 ‘삼양동 정육점’이라는 영화를 봤는지 모르겠다. 그 느낌과 꼬방동네 사람들의 영화는 아주 닮아 있다. 삼양동은 1949년 미아리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될 당시 구청장들이 모여 “삼각산의 양지 바른 남쪽 동네”라는 뜻으로 행정동명을 제정하였다는데 삼양동 지역은 1960년대를 전후해서 서울의 도시재개발 사업으로 철거를 당한 후암동, 신설동 주민들이나 남창동, 양동(陽洞)에서 화재로 집을 잃은 화재민, 장마 때 한강의 범람으로 집을 잃은 이촌동 수재민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곳이다. 영화는 그 시대를 대변하는 경우가 종종 많다. 그 무렵 나온 소설 양귀자의 장편 소설 원미동 사람들은 부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진때 뭍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무렵은 흔했다. 왜 하필 삼양동 정육점이란 이름을 붙인 영화인가 했던 기억이 지금에선 새롭기 그지없다.
그가 추진한 시민아파트 건설. 모두 400여개의 시민아파트를 집중적으로 지었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금화시민아파트였다. 지금 독립문 부근, 금화터널이 뚫린 금화산(105미터) 중턱에 19채가 들어선 것이 최초의 시민아파트다. 1968년의 일이다. 그런데 왜 하필 독립문 네거리 금화산 이었을까? 그는 미친듯이 온 서울을 파헤치고 다니는 것 못잖게 자기 업적을 홍보하는데 집착한 시장이었다. 가장 집착한 사업은 도로 개설과 정비로, 박정희 대통령이 오가는 길목에 공사를 벌이고 현장에 나가 지휘하면서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는지 알리는데 모든 것을 걸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첫 시민아파트를 이 산 중턱에 세웠을 때 당연히 서울시 간부들은 "너무 높은 곳에 지으면 시민들이 불편하다"고 말렸다. 그러자 김 시장은 버럭 소리질렀다고 한다. "그래야 각하가 보실 것 아냐, 이 XX들아!"라고. 군 출신 시장이어서 시청 공무원들을 졸개 다루듯 욕설을 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시절이었다. 실제 지금의 새로 지은 청와대 이전 청와대 건물에선 바로 이 금화산 중턱의 시민아파트가 보였다고 한다. 김현옥은 실제 신이 날만 했었을 것이다. 금화시민아파트의 완공에 천하의 박정희 대통령이 몸소 등장하였다 하니.
그러면 다른 아파트들은 또 왜 저렇게 높이 지었단 말인가. 한때 남산의 풍치를 정면으로 가려 욕만 바가지로 먹고 폭파된 남산 외인아파트가 절로 떠오른다. 주택공사가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시공력을 보여주자고 그 높은 곳에 미관을 해치며 지었던 것이 바로 회현 아파트와 남산 외인아파트였다. 그런 발상을 서슴지 않았던 시대였다. 군사독재라는 것은 참 말도 안되는 풍경과 습속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런데, 1970년 4월8일 서울시민의 와우아파트 5층의 제 15동이 붕괴되어 많은 사상자를 낸 사고가 터졌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은 당시 와우아파트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파트는 하필이면 아침 6시30분께에 무너졌다. 그 시각은 주민들 거의가 막 잠에서 깨어나거나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였다. 두어시간만 늦게 무너졌더라도 어른들이 일 나가고 아이들이 학교를 갔을 테니 인명 피해는 훨씬 줄었을 것이다. 그런데 14가구 사람들은 한순간에 날벼락을 맞아 참혹하게 부서진 콘크리트더미 속에 파묻혀 버린 거였다. (…) 조사단의 긴급진단에 따르면 서울 시내 시민아파트의 3분의 1정도가 날림공사로 붕괴위험이 있다는 거였다. 공사가 그처럼 날림이 된 원인은 다 짐작했던 대로 무계획적인 성급한 사업 추진에다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겹쳐져 있었다. 시멘트 배합상태가 정상의 2분의 1밖에 안 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인데, 예정된 기일 안에 아파트를 준공시키려고 얼음이 얼어붙는 강추위 속에서도 시멘트 작업을 몰아붙였던 것이다. 공무원들이 잇따라 쇠고랑을 차는 모습이 신문마다 실리면서 그 사건은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구청장이나 그 밑의 과장 정도만 쇠고랑을 찰 뿐 정작 시정의 총책임자인 시장은 자리를 물러나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아무튼 그는 아파트 붕괴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는데, 그 후 1971년 내무부 장관으로 복귀하여 1973년까지 있었다. 그 후 공직을 떠나 조용히 지내다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리기도 한 그인데 그에게는 한강의 기적과 빈민 항쟁이란 양면의 칼날 같은 어구가 같이 따라붙는다. 그가 재임 시절 추진한 영동 1,2지구 구획정리사업은 지금의 강남을 말한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 그는 불행의 씨앗 광주 대단지 사건 (1971년 8월 10일)을 촉발하기도 한다. 김현옥 서울시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당시 판자촌 해결하는 방안을 이렇게 보고 했다(사회와 사상 1989년 7월호 p.75로부터)
<김현옥 : "각하, 철거만으로는 서울에서 판자촌을 소탕하기 어렵습니다."
박정희 : "그래서?“
김현옥 : "판자촌 빈민들을 서울 외곽의 경기도로 이전시키는 게 어떨까 합니다.“
이때 김현옥은 조선시대의 비화를 들려줍니다.
김현옥 : "조선시대 어느 임금이 북한산에 올라 시내를 굽어보니 탄식하기를.. 저 많은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먹고살아갈까 걱정을 했는데, 이때 신하가 말하기를 사람들은 원래 10만 명만 모아놓으면 저희들끼리 알아서 뜯어먹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박정희 : "음..“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정책은 그대로 실현되었으니, 서울시는 69년 5월부터 청계천 일대를 비롯한 서울 곳곳의 판자촌을 대거 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김현옥 : "68년부터 70년까지 경기도 광주군(현 성남)에 35만 명의 서울시 빈민들을 수용하는 대규모 택지를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광주대단지가 생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