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10대왕 연산군(재위 1494∼1506)
.................위리안치(圍籬安置).....................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 중 하나로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귀양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둔다.
탱자나무는 전라남도에 많았기 때문에,
대개 죄인들은 전라도 지역의 섬에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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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도형을 받은 자에게 노역시키는 것이 안치(安置).
조선시대 귀양간 곳에서 다시 거주의 제한을 받는 것.
대체로 귀양지 안에서는 구속받지 않았으나,
안치는 다시 그곳에서 거주제한을 받는 형벌.
왕족· 고관직자· 현직자 중죄인에게 적용된 형벌.
안치되는 곳은 절도· 본향· 주군· 사장· 자원처 등
또 죄에 따라 위리안치· 천극안치· 가극안치를 적용.
위리안치는 탱자나무 가시울타리에 가두는 형벌.
천극안치는 죄인 방앞에 이중 가시 울타리를 쳐서
햇빛을 거의 보지 못하도록 하여 가두는 형벌이며,
가극안치는 천극안치보다 더 가시울타리에 가둔다.
1506년 연산군은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된다.
1613년 광해군 5년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하였다.
1614년 이이첨 일파가 강화부사 정항을 시켜 영창대군 증살.
이때 영창대군의 나이 9세. 1615년 능창군을 교동에 위리안치.
1623년 광해군도 폐위된 후에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 이질과 폐세자빈 박씨 4인., 강화도 위리안치.
위리안치는 ‘가택연금형’으로 1464년 조선 세조 10년 11월 18일
안치 죄인인 종친 화의군 이영, 한남군 이어 등에 대한 ‘금방조건을
의금부에서 마련하였는데 이를 통해 그 형벌의 내용을 알아볼 수 있다.
- 담장 밖에 녹각성을 설치한다.
- 바깥문은 항상 자물쇠로 잠그고 조석 거리는 10일에 한차례씩 주며,
- 담안에 우물을 파서 자급하게 하고 외인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한다.
- 외인이 왕래 교통하거나 물품을 주는 자는 불충으로 간주해 처벌한다.
- 수령이 불시에 점검하여, 문지키는 자가 비리를 저지르면, 죄를 묻는다.
창경궁 선인문 앞 금천
창경궁 선인문 앞 회화나무.
선인문 앞뜰
1506년에 연산군(재위 1494∼1506)이
1623년에 광해군( 재위 1608~1623))이
반정에 의해 폐위되어 쫓겨 나온., 선인문.
1762년 장헌세자(莊憲世子)가
창경궁 선인문(宣仁門) 안뜰에서
영조의 친국을 받고 뒤주에 갇힌 곳.
조선왕조 519년 역사 상에서
가장 비극적인.,선인문(宣人門)
원래, 조선왕조 창경궁 내시 출입문.
창경궁 선인문
조선왕조 23人의 역대 왕들 중에서
성군으로 추앙 받는.,세종, 숙종, 정조.
세종대왕의 업적은 한글창제 및 합리적인 공평과세.
숙종은 근대화폐인 '상평통보' 발행으로 경제 활성화.
정조는 독과점방지법으로 상업을 부흥시켜 일자리 창출.
오늘날, '대통령중심제' 격으로
왕권강화 통치에 성공한 지도자들.
'조선 왕조 519년' 역사 상에서
가장 폭군으로 낙인 찍혔던 군주.
연산군은 왕권 강화에 실패한 지도자.
즉위 후 집권 초기에는 친정 체제를 구축하면서 의욕적으로
빈민구제. 자주국방, 경인운하 건설 계획 등 경제활성화 정책 등.
성군의 자질을 갖춘 지도자로서 평가받은 기록이 단편적으로 전한다.
원자로 태어나 성종이 39세에 승하하자 19세에 즉위.
조선 10대 왕으로 태조 이래 드물게 나타나는 적장자.
궐내는 막강한 인수대비가 대비전을 지키고 있고
조정에는 신진사류와 훈구대신들이 버티고 있었고
즉위년에는 성종의 상중이라 선정을 베풀며 지냈다.
연산군일기 1년 11월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무서워할 것은 백성 아닌가? 백성은 나라의 근본,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형벌을 삼가하고
민원이 있을까 염려되니, 이 뜻으로 팔도에 효유하라."
연산 2년 3월 - "박덕한 몸으로 대업을 이어받았으니,
마음이 항상 송구하여 마치 범의 꼬리를 밟는 듯하고,
봄 얼음을 건너는 듯하다. 또한, 재변이 자주 나타나니,
이는 다 형정(刑政)의 실수로 원망과 격분을 사게 된 소치.
밤이나 낮이나 염려에 쌓여 편안히 있을 수 없다.
무릇 중외(中外) 백사(百司)는 형옥(刑獄)을 살펴,
원통함과 억울함이 없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연산 2년 7월 대사헌 이육(李陸)의 상소에 대하여
임금 연산의 전교를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반드시 경에게 이기려고 하다면 진실로 그르지마는
경들 또한 반드시 나에게 이기려고만 하는 것도 그른 것이다."
간원들의 성화가 얼마나 극심했으면 임금이 이렇게 술회했을까?
즉위년에는 아버지 성종의 수륙재를
불교와 가까이 한다고 트집을 잡았고,
유점사, 낙산사에 소금을 공급 말라 공격.
선릉 주변에 견성사를 짓는 것에 딴지 걸었다.
연산군일기 2년 5월 6일.
왕도정치 왕권을 추구하는
연산의 생각이 표현된 실록.
"내가 즉위한지 겨우 1년, 매양 언로가 막힌다는데
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대간(臺諫) 역시 신자(臣子).
꼭 임금으로 하여금 그 말을 다 듣도록 하는 것이 옳은가?
그렇다면 권력이 위에 있지 않고 대각(臺閣)에 있는 것이다.
나라가 위태로울 장본은 권력이 아래로 옮겨지는데 있다 여긴다."
연산군일기는 재위기간 1494년 12월~1506년 9월까지
11년 10개월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루고 있다.
63권 46책. 인본(印本). 조선실록과 함께 국보 151호로 지정.
편찬은 연산군 사망 직후인 1506년(중종 1) 11월에 시작.
폐위된 왕의 사실 편찬이므로 일기수찬(日記修撰)이란 명목으로.
일기청이 설치되고, 대제학 김감(金勘)이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임명.
다음해 1월에 김감이 대신 암살 사건에 연루, 유배되어 편찬 작업이 일시 중단.
대제학 신용개(申用漑)가 감춘추관사가 되어 곧 편찬 재개.
3개월 후, 연산군 은총을 받은 인물은 배제하고 편찬관을 교체.
그리하여, 연산군일기는 중종반정 공신들이 주도한 승자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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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집권 후기에는 강력한 왕권정치 친정 구축에 집착.
왕이지만 조정 내에서 바람막이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지도자.
아울러, 생모인 폐비윤씨 사사 사건 이후, 척족 세력도 이미 몰락.
그 결과, 연산군의 국정운영 사사건건 신료들과 권신들이 반발.
더구나, 폐비윤씨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되면서부터 복수심에 불타
성총이 흐려져 폭정을 거듭하다가, 중종반정으로 권좌에서 쫓겨난다.
연산군은 재위 12년간 정치를 잘한 통치자는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중종반정 이후 조선의 왕권은 약해졌고 신권은 강해져
권신들이 왕을 갈아치우거나 독살하는 일까지도 벌어진다.
신권이 커진 기득권자는 권력유지를 위해 매관매직을 일삼고
백성들은 탐관오리들로 인하여 고초가 심해진 것 또한 사실이다.
중종반정은 민초와 상관 없는 왕권과 신권의 권력 다툼.
연산군은 신관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한 왕일 뿐이었다.
중종반정이 실패했다면 연산군을 성군으로 기록되었을듯.
중종반정이 일어났던 1506년 9월 2일 연산군은 강화도 유배.
9월 24일 폐세자, 창녕대군, 양평군 등은 반정공신에 의해 사사.
9월 21일 병으로 인해 연산군이 중종에게 양위했다는 시나리오 완성.
연산군은 조선의 상국인 명나라에서
쿠데타의 전모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반정군 시나리오에 의해 죽어야 할 존재.
연산군이 역질(疫疾)에 걸려 눈도 뜨지 못하고
물도 마실 수 없이 괴로워 한다는 보고를 받은 중종.
1506년 11월 7일. 의원을 보내라고 했으나 다음 날 8일
교동도에 유배된 "연산군이 6일 죽었다" - 12월 9일 기록 -
언제 장사지냈는지 기록에 있지 않으나
왕자의 예(3달)로 장사를 치르게 했으니
장례 후거나 아직 땅에 묻지 않았을 시기.
사위사(辭位使) 김응기와 승습사(承襲使) 임유겸을
명나라로 보낸 후인 12월 9일 혹여 중국 사신이 와서
폐주의 일을 물을 경우 대비하려는 논의가 벌어졌다.
공조 참의 유숭조가 중종에게 모범답안을 내놓는다.
"폐주가 교동에 내쫓겨 죽었으니, 만약 명 사신이 와서
그 이유를 묻는다면 미리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아뢴다.
연산군을 내쫓은 이유를 조작해야 한다는 것.
"지난날 총애를 받는 뭇 계집은 안에서 고혹하고,
아첨하는 자는 밖에서 비위를 맞춰 임금을 도(道)로써
인도하지 아니하여 종사(宗社)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연산군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중종에게 양위.
중종은 유배된 폐주에게 찬에 정성들여 몸을 봉양했고.
연산이 병으로 죽자 중종이 애통했다는 내용의 시나리오.
연산군이 유배된 방은 사방 열 자(3m).
가시 울타리로 둘러막혀 해를 볼 수 없고
음식 구멍만 뚫어 밥을 넣어준.,위리안치 유배.
'만약, 명 사신이 전왕(연산군)의 병 증세를 물으면
어릴 때부터 풍현증(風眩症)이 있었는데, 세자가 죽은 뒤
애통과 상심이 지나쳐서 전의 증세가 다시 도져 공연히 놀라고
혼미하고 현기증이 나며 방안에 깊이 거처하면서 창문도 열지 않는다.'
'만약, 세자의 증세를 물으면, 창진(瘡疹)으로 요사(夭死).
만약, 전왕의 소재를 묻는다면, 별궁에 있다고 대답을 한다.
만약, 전왕의 아들이 몇이냐 물으면, 어린 딸 하나가 있다.,대답.
연산군은 부인 신씨(1471~1537) 사이에
2남 1녀 자녀를 둘 만큼 금술 좋았다 전해온다.
연산군의 자녀는 후궁 소생 2남1녀 등 모두 7남1녀.
폐세자(10세)는 유배지 정선에서 사사 되었고
창녕대군(5세)는 유배지 황해도 수안에서 죽고
양평군은 제천에서, 서자 이돈수는 사약을 받았다.
폐세자 이황이 죽자 중종은 장례라도 후하게 치루려 했으나
중종반정 공신들은 '관곽이나 써주면 후한 것이라면서 묵살.
(중종실록 1506년 9월21일)
폐세자에게 아직 사약을 내리지 않았지만
이미 죽이기로 계획한 사실이 이 기록에서 드러났다.
이로부터 2일 후, 폐세자는 시나리오 대로 사약을 받고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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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조선왕조는 유림세력 지지기반을 등에 업고 출범.
오늘날, 내각중심제와 유사한 정치 체제가 국가의 기반.
연산군은 조정의 권신들에 의해 축출된 후, 독살 당한 것.
왕이라고 하더라도
지지기반 세력이 취약하면
국가 통치가 어려웠던.,조선왕조.
오늘날, 대통령중심제 정치체제 하에서
국회에서 의원 과반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정부가 하는 일들은 극히 제한을 받는 격이다.
오늘날, 민간 기업에 비유를 한다면
재벌 총수 2세가 경영권을 승계하려면
이사회, 주주총회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격.
하여, 오늘날 재벌 2세들은
기업 경영권 승계를 받기 위해서
경영수업 필수과목으로 역사를 공부.
연산군은
31세 한창 나이에
웅지를 다 펴지 못하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인해
창경궁 선인문을 통해 추방되어
강화 교동도 유배지에서 운명했다.
그리고 나서
그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멸실되고 만다.
.....................선인문(宣人門)...............
연산군은 사치와 방탕에 빠진 죄목으로 폐위.
평교자를 탄채, 나인과 내시 몇명 만 수행한 채
선인문을 빠져나와 강화 교동도 유배길을 떠났다.
인조 때 소현세자빈 강씨는 남편이 의문사를 당한 후,
인조가 수라에 독을 넣어 죽이려했다는 누명까지 씌워서
폐출시켜 서인 신분으로 선인문을 통해 궐밖으로 쫓겨났다.
숙종 때 인현왕후를 주술로 저주해 중전 복위를 노렸던 희빈 장씨.
이에 분노한 숙종이 끝내 사사 명을 내려 희빈 장씨 시신이 나갔다.
영조 때 창경궁 편전 문정전 앞에서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감금된 사도세자가 선인문 뒤로 옮겨진 이후에
8일간 굶주림과 한여름 더위 속에서 신음하다가 숨진 곳
선인문은 홍화문에서 이어진 궁장 동남쪽에 설치된 문.
성종 년간 창경궁 건립 당시 옛 이름은.,서린문(瑞燐門).
선인문은 궐내각사와 동궁권역이 소재하고 있어
궐내각사 업무 및 세자 교육 담당 부서 관원들은
이 문을 통해 금천교 건너 각자 담당 관사로 이동.
창경궁의 궐내각사 및 동궁 권역은 선인문 안쪽에 위치.
오위도총부, 정조 때 서적출간 활자를 주조하던 주자소.
왕과 왕족의 말과 가마 등 일체를 담당하던 내사복시 등.
동궁 권역에는 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시강원,
세자를 배종하고 시위하는 익위사 등이 있어
이에 관련된 관리들이 이 선인문을 통해 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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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12년 9월1일. 임사홍이 민중들의 발길에 죽었고
'연산군의 장인' 신수근과 연산군 총애를 받던 궁녀들의
가인(家人)들까지도 참수되자 옥새를 내놓았던.,연산군.
진성대군은 어머니 자순대비 재가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
연산군은 동궁(東宮)으로 밀려났다가
강화도 교동(喬桐) 유배지로 쫓겨나고,
부인 신씨는 폐비가 되어 정청궁(貞淸宮)으로,
폐세자된 황은 강원도 정선으로 각각 쫓겨났다.
진성대군 시절 신수근의 딸인 부인 신씨 덕으로 살아남아
보위에까지 오른 중종은 그 부인이 역신의 딸이라는 이유로
정식 중전 책봉을 하지 않은 채로 폐비시키고 새 중전을 맞이.
그 폐비 신씨가 죽을 때까지 중종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살다 간 자리엔 '치마바위'의 이야기가 남아 전하고 있다.
연산군 12년 9월 3일 (중종1년)폐위된 왕을 연산군으로 봉.
그해 9월 10일에 연산군 재위 때 자제 시집(自製詩集)을 소각.
연산군은 임사홍 등으로 하여금 어제시집 간행 도감을 설치했고,
도승지 강혼(姜渾) 등으로 하여금 시를 쓸 때마다 화답하게 하는 등.
시작에 관심이 많았는데 반정 후 그 기록들과 시들이 태워져 멸실된 것.
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서만
그의 시를 찾아낼 수 밖에 없다.
연산군 12년 11월 8일 교동에 위리안치된 연산군은
역질에 걸려 중종이 보낸 약을 복용하다가 운명했다.
중종은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장사지내게 하였고,
연산군 수발 시녀는 3년간, 방자들은 백일 간 상복.
중종 자신은 3일간 소선(素膳)을 들었고 경연을 정지.
중종반정 이후
그에 관련된 기록은
대부분 폭정에 관한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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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창경궁 춘당지는 연산군 때
서총대(瑞총臺) 앞 대지를 파다가
중종반정으로 중단되었던.,유적지.
그후 권농장(勸農場)의 논으로 사용.
그후 다시 연못으로 만들어진.,춘당지.
1505년(연산군 11)부터 1년 이상 걸려
수만 명 역군이 동원되어 조성된 서총대.
1506년 중종반정 후 완공을 보지 못하였다.
원래 계획에 의하면 100척 높이로 석축을 쌓아 대를 만들고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화려한 돌난간을 만들며 그 아래에는
수십길 깊이 못을 파고 배를 띄우려 그 옆에 정자를 지었다는 곳.
이곳은 성종 때 한 줄기에 아홉 가지가 달린 파가 돋아나
‘서총(瑞葱)’이라고 불렸던 곳인데, 연산군이 이를 기념하고
아울러, 유흥 연회장으로 삼기 위하여 서총대를 쌓았다는 곳.
이 공역은 수만 인원이 동원되고 1년 이상 지속된 대공사.
자금조달을 위한 부세(賦稅)였던 면포 독촉도 심하였기에
세금으로 거둔 '서총대포'는 악포(惡布)의 대명사가 되었다.
원래, 왕이 무관의 활 쏘는 것을 점검하던.,서총대.
연산군 재위 11년에 여진의 발호와 왜구의 침입 등
국방 불안에 대비하여 변경 축성사업을 강화 하였고,
군역을 늘리기 위해 공신 사유재산에 대한 조사를 실시.
국가사업에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서
부정축제 공신 사유재산을 환수하려한 연산군.
이에 반발하는 권신들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했던 연산군.
결국, '서총대포' 오명을 쓰게 된 것.
원래, 경관이 수려한 서총대 일대는 왕실 연회장.
무술시험장이 있어 무과의 과장이 되기도 하였다.
광해군 때 여러 차례 관무재(觀武才) 행사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무과시험은
인근에 있던 춘당대에서 주로 행하여
서총대 일대는 '춘당대시'로 불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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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 “각사(各司)의 노복(奴僕) 가운데
어리고 총명한 자를 골라 궐문 밖에서 번을 나누어 교대로 근무시키되,
이름은 ‘회동습역소(會童習役所)’라 하고, 이전(吏典)으로 통솔하게 하되
이름은 ‘훈동관(訓童官)’이라 하여, 잠자리, 베짱이, 귀뚜라미 등을 바치게 하라”
이런 것을 먹으면 정력이 강해진다고 권했던 어의들의 말.
그 때문에 거리에는 광주리를 든 노비나 아이들이 넘쳐났고
아이들은 메뚜기, 여치, 두꺼비, 뱀 등도 잡아왔다고 전해온다.
잠자리는 양기를 강하게 하고 음경을 따뜻하게 하고
정액이 저절로 흐르는 유정증(遺精證)을 그치게 한다.
교미 시간이 길고 교미한 채로 하늘을 날아다니기 때문.
하여, 잠자리는 날개와 발을 떼고 볶아서 약으로 사용.
푸른색이고 눈이 큰 고추잠자리가 효능이 좋다고 하였다.
베짱이는 양위(陽痿), 즉 발기부전을 치료하고
정(精)을 보충하며 성욕을 강화한다고 알려졌다.
뒷다리가 강하여 팔딱팔딱 잘 뛰기에 정력제 효과.
노루 생식시, 녹용, 그밖에도 날고기를 좋아해
흰말고기의 육회를 즐겨 먹었고, 백마의 생식기에
생강, 대추를 넣고 푹 고은 것을 먹었다고 전해온다.
또한 토종 잉어, 민물장어와 마늘을 고아 먹었다.
또 특별한 용봉탕(龍鳳湯)으로 땅강아지, 지렁이,
파리 유충을 먹여 키운 토종 오골계와 잉어에다가
연밥인 석련(石蓮), 황기(黃芪)를 넣어 푹 고와 복용.
어, 가오리, 광어 등도 먹었는데,
이들은 끈적끈적한 성질이 정력제.
연산군은 31세에 유배 두 달 만에 사망했는데,
정력제, 최음제 남용으로 성교가 과도하였기에
정기가 많이 손상되어 온갖 질병이 유발되기 때문.
석실비록(石室秘錄) -"춘약(春藥 : 최음제)을 즐기는 사람은
머리에 창(瘡)이 생기고 머리가 산처럼 무겁고, 다음 날에는
청자색으로 변하고, 3일째에 푸른 것이 상체로 와서 죽게 된다."
이것은 독기(毒氣)가 심장을 공격하기 때문이며
열성이 강한 춘약은 건조한 성질이 극에 달하므로
몸속의 진액을 말려 열기가 올라와 결국 죽는 증상.
천금방(千金方) - “특히, 나이 어린 사람과 노인은
더욱 더 육체적인 욕망에 빠져 결국 건강을 잃게 된다.
나이가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사람이 방중(房中)의 약을 복용하면
탐욕이 그치지 않는데다 약으로 힘을 두 배나 키워 방사를 일삼기에
반 년도 되지 않아 정수(精髓)가 고갈되어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단계심법(丹溪心法) - "색욕잠(色慾箴)에는 암둔한 사람이
정욕이 통하는 대로 성생활을 하고도 욕심을 더 채워보려고
성질이 건조하고 독이 있는 약을 보약으로 자주 지어 먹게 된다.
인간의 혈기란 한정되어 있기에 스스로 아껴써야 하지 않겠는가?
음양 관계로 태어난 인간의 몸은 음양 관계로 해를 보아 죽고 만다.
성생활은 부족하지도 과도하지도 않게 체력에 맞게 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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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사를 통해 조선 8도의 미녀들 중에서 선출된.,운평.
궐에 오기 전에 서빙고에서 얼음 수박으로 음기를 수련.
동빙고 바닥에 누워 얼음이 녹아 떨어지는 물로 단전 강화.
운평들이 허벅지를 조여 수박을 깨는 수련.
홍시, 호박 등 과일과 채소를 이용한 단련장.
연산군을 유혹하기 위한 노출 경연장.,옥수동.
원래, 옥처럼 깨끗한 우물이 있어
옥정수(玉井水)에서 유래된.,옥수동.
그리하여, '동빙고 서빙고' 얼음창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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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동~ 뚝섬' 중랑천에 놓인.,살곶이 다리.
조선시대 뚝섬 광나루., 표모탄(漂母灘)의 전설.
'빨래하는 표묘(漂母) 허벅지를 보고 신선이 추락.'
조선시대 풍류객들이 장어구이 나룻배를 띠우고
그 안에서 살며시 허벅지를 드러내며 장어 굽는 기녀들.
보양식, 동호의 수려한 풍광, 표묘탄의 전설을 즐긴 피서지.
조선시대 기녀들이 치마 속에 겹겹이 입던 고쟁이 속옷.
앉으면 벌어져 드러나 보이고 일어서면 가려진다는 속옷.
조선시대 표묘탄은 얼마나 많은 풍류객들 애간장을 태웠을까?
옥수동은 두뭇개,두맷개,두모주,두모포 등으로 불렸고
당시 옥처럼 맑고 깨끗하다는 옥정수(玉井水) 샘이 있었고
조선시대 9개 정자가 있었으나 옥수로 개통으로 매몰되었다.
'왕이 금표 안길을 따라
두모포(豆毛浦)에 놀이 가는데
이때 1000 궁녀가 따랐다.- 연산군일기 -
서울3호선 옥수동 전철역 3번 출구 왼쪽으로 가면
조그마한 쉼터가 있고 2백년 묵은 느티나무가 있다.
1911년 서빙고에서 왕십리에 이르는 한강변(漢江邊)이
경원선 철로 건설로 제방으로 변하기 전에 두모포 당산목.
조선시대 옥수동에서 생존해 있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나무.
국립중앙박물관 조선관에 소장된 고지도 한강나루에서
두모포는 어물, 목재, 고추, 마늘, 감자 등 농산물 집산지.
조선시대 동빙고가 있어 얼음을 나르는 배들이 모여들던 곳.
조선시대 콩, 옥수수 잡곡 등 농산물을 실은 황포돛배가
남한강 500리 뱃길 따라 광나루에 도착하는데는 열흘 이상.
강원도 북부 북한강과 강원도 남부 남한강이 합수되는 두물머리.
검단산과 예봉산 허리를 자른 후 협곡을 빚어낸
'두물머리 맨 후미' 두미강 협곡은 물살이 빠르고
여울목이 많아 물을 더욱 더 사납게 흐르게 하였기에
임업물을 실고 오던 뗏목들이 두미강을 지나기엔 힘든 일.
조선시대 뗏목에 줄을 묶어
끌어당겨야만 했던.,여울목.
아리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 쓰리랑
청강에 배 띄워라. 임 맞이 가잔다.
광나루 하진참은 쉬는 나루.
암사 구천 여울목은 묵어가는 뱃나루.
강원 아리랑을 부르며 시작한 뗏목 물길이
이곳에 이르면 기진맥진하여 사고가 잦았다.
그 영혼들을 위로하려 생긴 당집들은 무려 8개.
그리하여, 조선시대부터 팔당(八堂)이라 불렀고
조선시대 많은 문인들은 이곳 협곡의 풍광에 매료되어
이곳 여울목에 달빛이 산산히 부서지는 모습을 좋아했다.
그 여울목 달빛을 그들은 월탄(月灘)이라 불렀고
오늘날, 그 대표적 인물로는 역사 소설가 월탄 박종화.
두물머리 팔당 여울목을 거쳐 두모포(옥수동)에 이르는 물길.
옥수동은 아파트들이 들어서서 지형이 많이 변했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철로가 있는 강둑이 상당히 높았다.
옥수동 느티나무 밑둥을 보면 얼마큼 돋아졌는지 알 수 있다.
강변 풍림 근처 동빙고는 태조 5년(1396)년 설치되었고
연산군 때 현재의 용산구 동빙고동으로 옮겨졌다고 하며
이곳은 연산군이 천여 기생들과 풍류를 즐긴 곳이라 한다.
이 기록으로 보면, 연산군은 재위 동안에
한강변 동호 두모포를 즐겨 자주 찾았던듯.
중종 20년에는 인근에 독서당을 지어
과거에 통과한 사림들이 모여 토론하고
학문에 전념했던., 동호 두모포 독서당 터.
옥수동 그린아파트 정문., 표지석.
원래, 독서당 제도는 학문과 학자를 사랑한
세종이 사가독서제를 실시하면서 비롯되었다.
"지난번에는 집에서 독서 하도록 휴가를 주었더니
아무래도 독서에 전념하기가 어렵다고들 하더구나,
하여, 신숙주, 정인지 등은 진관사에 들어가 독서 하라."
신라 진덕왕 때 원효가 삼천사와 함께 창건한.,신혈사.
고려 현종이 어릴 때 왕태후의 암살 기도로부터 구해준 절.
신혈사 진관스님의 은혜에 보답하려 신혈사터에 세운 진관사.
신혈사는 고려 때 진관(津寬)이 혼자 수도하는 곳.
진관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지하굴을 파서
12세 대랑원군을 숨겨 자객으로부터 암살 화를 면한 곳.
그후 '고려~조선'시대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된.,진관사.
조선시대 왕실 주도의 대규모 수륙재를 주로 담당한 사찰.
조선시대 불암사, 삼막사, 승가사와 함께 한양 근교 4대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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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후궁 장녹수는 원래, 제안대군의 노비.
장녹수가 제안대군의 노비가 되게 되었던 이유는
대군저의 가노(家奴)와 혼인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평생,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살았던.,제안대군
성악(聲樂)을 즐기고 사죽관현(絲竹管絃)을 연주.
풍류에 심취하여 당질 연산군과 친분이 두터웠으나,
1506년 중종 반정 후에도 별다른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중종에게도 연산군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당숙부가 되므로
중종 20년(1525년) 향년 60세까지 일생 왕실 종친으로 존대 받았다.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이 왕위에 오를때
원래, 왕위에 오를 서열 1순위였던 제안대군.
서열 2순위였던 월산대군과 함께 존대 받았다.
제안대군 집에 가흥청(假興淸)을 두고
뇌영원(蕾英院)이라 부르게 했던.,연산군.
연산일기 11년(1505 6월 27일(경진) 3번째기사.
가흥청(假興淸)은 흥청(興淸)을 선발하기 전.,예비기생이다.
왕실이 필요에 따라 종친의 저택을 임시로 사용하는 것은 관례.
대군의 저택 수진방(壽進坊)은 현재 서울 종로구 수송동 53번지.
실록에 따르면 다른 종친의 저택보다 훨씬 규모가 컸고
흥청의 규모와 거리적 편리에 따른 관례 임을 알 수 있다.
연산 12년(1507), 이곳 주민을 내쫓고
정자를 세워 음행에 사용되었다는 정자.
중종 1년(1506), 정자는 대군에게 하사된다.
중종 11년(1516), 이 정자의 기둥이
임금의 색인 주홍빛으로 칠해졌다 하여
문제가 되어 왕명으로 주홍칠을 벗겨낸다.
중종11년(1516 년 11월 15일(임진) 4번째기사.
여자 음문은 더럽다 하여 죽을 때까지 남녀 관계를 몰라
성종은 예종이 후사가 없었음을 가슴 아프게 여겨 일찍이,
"제안대군에게 남녀 관계를 알게 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겠다."
한 궁녀가 자청하여 시험해 보기로 하고, 드디어
그 집에 가서 한밤중에 그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그의 음경을 더듬어 보니 바로 일어서고 빳빳하였다.
곧 몸을 굴려 서로 맞추었더니, 제안이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물을 가져오라 하여 자꾸 그것을 씻으면서
잇달아 "더럽다."고 부르짖었다는 일화가 기록 상 전한다.
일찍이 제안대군이 여자 5~6명을 데리고 문밖에서 산보.
한 여자 종이 도랑에서 오줌 누는 것을 제안대군이 보고는
"메추리 둥지 같구나." 이 말은 음모가 무성한 것을 이름이다.
혹자는 "제안이 실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종실의 맏아들로 어질고 덕이 있다고 소문나면
몸을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워 스스로 감춘 것이다."
"남녀 사이의 욕망은 타고난 것
인정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인데,
평생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은 것은
실지로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조선 중기 이후부터 봉작(封爵)을 받기 전에 사망한 대군.
왕자와 출가하기 전에 사망한 공주ㆍ옹주들을 합사(合祀).
제사 지내는 사우(祠宇)로 변모하여 수진궁으로 불렸던 곳.
조선시대 명례궁(明禮宮) 어의궁(於義宮)
용동궁(龍洞宮) 등과 함께 중요한 궁의 하나.
수진궁은 종로 수송동.,원래, 정도전의 사택 터.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이곳에 제용감(濟用監) 사복시(司僕寺) 등
관서와 대군의 저택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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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7대 왕 중에서 반정으로 축출된.,광해군과 연산군.
연산군은 광해군과 달리 폭군의 전형으로 낙인 찍힌 군주.
연산군의 폭정 기록 대부분 중종반정 이후 쓰여진 것 아닐까?
연산군은 자신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을 모두 불태웠단다.
연산군을 당연히 깍아내릴수 밖에 없는 입장에서 기록들.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했고,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된
모든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했다고 전한다.
조선은 건국 주축세력인 사대부의 여론정치를 추구했다.
이성계가 개국 초, 왕을 견제하는 언론기관 사간원을 세웠고
신료에 대한 탄핵, 당대의 정치·인사 문제 등 언론을 왕에 대한 직간.
그에 관한 폭정 기록을
사실로 받아 들이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연산군 재위 때에는 창덕궁 뒷담을 높이 쌓아
성균관 유생들이 궐을 내려다보지 못하게 하였고
한때, 성균관을 유연소로 삼아 음행을 일삼았다 한다.
사실, 세종 때 태평성대가 연산군 초까지 이어져,
조선왕실은 물론 민가까지 애경사, 사치풍조.,만연.
과거를 준비하는 성균관 유생들까지 오만하고 방자했다.
.......................성균관(成均館).........................
성균관(成均館)은 고려 충렬왕 때 국학(國學)에서 비롯.
1894년 갑오개혁까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성균'은 음악을 조율하는 것과 같이 어그러짐을 바로잡고,
지나치고 모자라는 것을 고르게 한다는 뜻.,주례 대사악 용어.
태종은 땅과 노비를 지급하고 친히 문묘에서 제사지내고
왕세자의 입학을 명령하니 그 후 이것은 상례가 되었으며
규모는 성종 때에 완성되었으며 개성과 한양에 설치하였다.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이 집단 행동으로 국정을 비판.
역대 제왕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았고 대제학(大提學) 이하
석학들이 깊이 관계하였고, 고관· 대학자가 거의 여기서 배출.
따라서, 재학 중인 유생들은 국정에 대한 비판자 역할,
이교(異敎)를 사도(邪道)라 하여 배척하는데 앞장섰고
국란 위기에도 앞장섰으나 때론 당파싸움에 이용되었다.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에게는
최우선 입학 자격이 있으며 정원 200명.
유소시에는 궐문 앞에 연좌하여 왕의 비답(批答)을 기다렸고
유소가 여의치 못할 때 식사거절 시위로 권당(捲堂)을 행하며
성균관을 비워버리는 공관(空館)이라는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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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사헌부를 동원해 사치와 나태해 있던
성균관을 규찰하여 유생들을 감원하며 억눌렀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된 제도들을 철폐.
집권초 연산군은 성종 말부터 지방수령들의 부패를 척결.
어사를 팔도에 보내어 퇴폐풍조를 일신, 국가 기강을 세웠다.
집권 초 연산군은 빈민구제, 자주국방 등 성군의 자질을 보였다.
그러나, 조정 대소신료들을 비롯
최측근까지도 그에게 반기를 들만큼
폭정을 행사하다가 권좌에서 쫓겨났다.
조정에서 왕권으로
신권을 억누르기에는
그의 뒷배경이 취약했다.
폐비윤씨 사사 사건으로 인해
척실 세력이 궤멸당한.,연산군.
왕도정치 확립의 꿈은 무리였다.
'폐비 윤씨 사사 사건' 문제를 자신의 사후에도
100년간 언급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던 성종.
이 유언은 지켜지지 않고 연산군에 의해 거론된다.
사림파에서 이때 성종의 유언을 지적하며
폐비윤씨의 추숭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던 것이
연산군 폭정의 원인이 되고 중종반정의 계기가 된다.
조선시대 초기 문물 제도는 성종 때 거의 완성되었고,
백성들은 건국 이후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했다.
그러나 태평성대는 성종의 치세 후기에 퇴폐 풍조를 조장.
성종은 낮과 밤의 색깔이 확연히 바뀌었던 왕.
낮에는 명석한 군주로 치우침 없이 선정을 베풀고
밤만 되면 여인의 치마폭을 찾아 궁궐 안팎을 넘나들며
욕정을 채우기 위한 남성으로 변하는 두 얼굴을 가진 군주.
어우동, 기생 소춘풍 등이
성종의 밤을 밝혔던 여인들.
어우동은 사대부 명문가문 출신으로
왕실 종친 남편에게 이혼당한 후 기녀가 된
왕족이자 시인, 서예가, 작가, 기생, 무희였다.
행실이 방탕하여 성종때 조정관료 사대부를 비롯
성균관 유생들, 천민 등 관계를 맺은 자들이 수십명.
왕족의 아내였다는 이유로 간통죄로 교수형을 당했다.
그보다 50년전 세종 때 검한성(서울시장)을 지낸 유구수.
그의 딸 유감동이 사대부 남성들 39명과 간통죄로 유배형.
음부에 대한 처벌이 세종 때보다 성종 때 훨씬 더 심화된 것.
................................유감동............................
유감동은 기녀로 생활했지만 공식 신분은 양반이었다.
39명 사대부와 간통을 벌여 풍속을 문란하게 한 유감동과
그의 간부들에게 벌을 내리는 것은 당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종이 직접 의금부에 와서 친국을 하였는데,
전직 영의정부터 노비까지 다양한 계층 인물들.
하여, 세종은 더이상 언급 말라며 장형만 가했다.
법률에 따르면 양반 부녀자와 간통한 남자는 극형.
그 사건에 국가 공신의 아들들까지 연루되어 있어 곤란.
조정 신료들 사이에서는 '죽이자'와 '봐주자'로 의견이 분분.
조정에서는 유감동의 음탕함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단정짓고
유감동과 관계한 남성들에게는 장형, 파직 정도 처벌을 내렸다.
유감동은 110대 장형 후, 변방의 관비로 보내져 겨우 목숨은 건졌다.
아버지 유귀수와 일족들 역시 끌려와
곤장을 맞고, 유귀수는 파직 당하였다.
사헌부는 유감동의 죄가 중한 만큼, 교수형을 주장.
세종은 변방으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1428년(세종 10년) 음력 4월 1일 유감동의 천역을 면제.
유감동은 먼 지방에 안치 하였으나
그 이후의 생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녀의 시와 작품은 음부의 작품이라 하여
모두 인멸되거나 실전되어 전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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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때 성 스캔들 주인공.,어우동.
그녀와 통정한 인물들 모두 사면되고,
그녀만 사형 당하여 동정여론이 일었다.
그녀는 수많은 시문과 작품을 남겼으나
음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소각 파괴되었고
유감동, 황진이, 이구지, 허난설헌, 등과 더불어
부도를 어긴 여성의 대명사로 매도되어 지탄받았다.
또한 희빈 장씨, 장녹수, 문정왕후 등과 함께
조선사회의 악녀의 한사람으로 비판받아오다가,
1910년(융희 4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복권되었다.
특히, 이구지(李仇之)는 조선 초 왕족.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의 8번째 서녀이다.
남편 사후 남편 종과 간통하여 사사당했다.
남편의 종 천례(天禮)와 간통하여 낳은 딸을 시집보냈는데
그 딸이 왕실 후손이라고 발설한 것이 알려져 왕명으로 사형.
양반이 여종에게서 얻은 자녀들은 중인이 되고,
왕족이 여종에게서 자녀를 얻었을 경우에는
천민으로 간주하지 않고 왕족으로 간주.
따라서 왕족이나 양반이 노비에게서 얻은 자녀는
법률 상 천인이 아니기에 천인과 결혼할 수 없다.
이구지는 딸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우리 아이는 왕실의 자손이다.'"라고
떠벌리고 다니다가 사헌부 감찰에 접수.
종과 간통해 얻은 딸을 시집보내는 과정에서
간통사실이 드러나 김종직 등의 탄핵을 받고
관아로 끌려가 추국당하면서 왕실까지 알려졌다.
원래, 종의 신분으로 알려진 천례가 갑자기 말을 타고
비단 옷을 걸치고 다닌 점 역시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되어
소문으로 확산되었기에 그가 14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양녕대군의 서녀와 결혼한 그 사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된 것이다.
성종은 종친을 소집하지 않고 천례를 의금부에 가두었다.
그러나 천례는 왕실여자와 간통죄를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천례는 지독한 고문을 받은후 결국 옥사하였다.
그러나 1475년(성종 6년)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이
그녀를 계속 탄핵하여 이구지는 1489년 3월 7일 왕명으로 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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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춘풍은 영흥 기생으로
선상기로 뽑혀 한양에 온후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명기였다.
성종의 후궁 자리도 거절할만큼
자유분방한 기생이었으나 성종 사후
머리를 깎고 비구니로 여생을 보내었다.

성종은 여색을 밝혀 여러 후궁을 두었는데
후궁들 사이의 갈등과 알력을 조정하지 못하였기에
훗날 연산군에 의한 학살 사건을 불러오는 빌미를 제공한다.
성종의 치세는 ‘문화의 황금기’라 불렸을 만큼
세종과 세조가 이룩해 놓은 치적들을 바탕으로
국방을 강화하고 빛나는 문화정책을 펴 나간 시기.
1479년(성종 10년)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1491년(성종 22년) 두만강 일대의 여진족 소굴을 소탕하고,
이듬해 함길도 여진족의 침략 등을 대비 북방 방비에 힘썼다.
성종은 3왕비와 8후궁에게서 아들 19과 딸 11을 낳았고
10대 왕 연산군과 11대왕 중종(진성대군)은 성종의 아들이다.
38세에 태평성대 난숙으로 퇴폐가 싹트고 뇌물이 성행할때 운명.
열아홉 나이에 보위에 오른 연산.
재위 12년 만에 중종반정으로 축출.
하루 아침에 귀양길에 올랐던.,연산군.
연산군의 마지막 행로.
창경궁에서 출발하여, 강화를 지나
교동도 적소로 들어가기까지 4박5일 일정.
군주에서 폐주가 되는 과정의 전모를 보여준다.
재위 때 폭정으로 인심을 잃었다고 전하는.,연산군.
'조의제문' 사건과 그의 생모 폐비 윤씨 문제로 빚어진
무오, 갑자 두 차례 사화에서 수많은 사림들이 죽어나갔다.
재위 때, 쇄골표풍 등 형벌 또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고
그를 꾸짖는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죽게 하고,
8도 흥청을 뽑아 주지육림 속에서 나날을 보냈다는 포악한 군주.
"사대부들이 흥청의 가마를 메게 했다."는 폭정.
"신분사회의 변화치고는 천지개벽의 수준이었다."
"사사된 폐비윤씨 생모를 무척 동경했다."는 연산군.
'할머니 인수대비를 비롯하여 아버지(성종)과
그당시 후궁들에 의하여 쫓겨난 생모 폐비윤씨.'
'그것이 곧 처용무를 변용한 야한 춤으로 나타났고,
기생의 등에 타거나 스스로 말이 되어 기생을 태우고
술래잡기 하는 등 주색 흥청망청을 일삼았다.'는 연산군.
연산군이 교감을 나누었던 기생은
장악원 소속 해금기.,광한선(廣寒仙),
재위 11년(1505년) 9월 가흥청 나인 월하매.
월하매는 노래와 해학이 뛰어난 궁궐 내 예비기생.
가흥청은 흥청이 되기 전 단계 기생이 몸 담은 처소.
연산군은 월하매가 병들자 내의원에서 거처하게 했다.
연산군은 자주 문병 했지만
이때에 이르러 월하매가 죽자,
여완(麗婉)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제문을 갖춰 제사를 지내주었으며
제문은 의녀를 시켜 읽게 하기도 했다.
월하매가 죽은 다음 날(9월16일)에
연산군은 슬픈 마음을 시(詩)로 토로.
'애달픔 지극하여
눈물 거두기 어렵고
슬픔 깊어 잠 못 이루네.
마음이 어지러워
애간장 끓어지는 듯하매
이로 해서 생명이 손상할 줄 알겠도다.'
연산군 8년, 27세에 제안대군 사노였던
장록수를 처음 만나 후궁으로 삼아 총애.
이때부터 궁녀 이외 다른 여성에게 눈떴다
연산군 9년, 28세에 광해선(廣寒仙)과 교감.
연산군11년, 30세에 가흥청 월하매와는 사별.
연산군이 예인으로서 각별히 예우했던.,월하매.
남편인 월산대군의 묘소를 다녀온 후
자살했다는 20년 이상 연상의 박씨부인.
연산군을 어릴 때부터 자식처럼 돌본 백모.
박씨부인에게 모정을 느낀 연산군은
국가재정으로 많은 쌀과 콩 등을 하사.
과연, 연산군이 술에 취해 이성을 잃고
큰어머니인 박씨부인을 범했던 것일까?
월산대군의 부인이자
아버지 성종의 형수이자
연산군에게는 큰어머니 박씨.
적개좌리공신인 박중선의 딸로,
박원종의 누나이기도 한.,박씨부인.
박원종은 연산군이 한때 신뢰했던 측근.
박원종의 큰누이 박씨부인은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에게 시집갔고,
또다른 누이 순천부부인은 윤여필에게 시집가 윤임과 장경왕후를 출산.
또다른 누이는 예종의 차남 제안대군의 계부인으로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박원종은 장경왕후의 외숙부로서 장경왕후를 지지.
장경왕후가 중전이 되는데 박원종의 힘이 크게 작용.
장경왕후는 중종반정 이후 1507년 왕비(계비)로 책봉.
1515년 2월 세자(인종)를 낳은 뒤 산후병으로 죽었다.
고모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부인에 의해 양육된 장경왕후.
장경왕후 시호는 장경이고. 능은 고양에 위치해 있는 희릉.
특히, 자식이 없었던 월산대군은 손아래 처남인
박원종을 친동생처럼 사랑하였는데 이러한 연유로
성종은 월산대군 사후 박원종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연산군 재위 때 동부승지 우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역임.
재정 긴축, 시무책(時務策) 등을 건의해 실현하기도 하였다.
그후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1500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좌천.
곧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우윤을 역임
1502년(연산군 8) 평성군(平城君)에 봉.
이어 강원도관찰사·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고
1506년 경기관찰사 때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
.................박원종................
월산대군과 제안대군의 처남이자
훗날, 윤임과 장경왕후의 외숙부이며
중종의 후궁 경빈 박씨의 양아버지이다.
박씨부인 자결 후, 연산군에게 앙심을 품고
유순정, 성희안 등을 포섭하여 중종반정을 기획.
1506년 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을 옹립한다.
중종 재위 때 그의 존재를 못마땅히 여기던 조광조 일파.
그를 공격하였으나 일단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도 하였다.
중종반정 일등공신이라 왕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박원종.
박원종은 외조카딸과 수양딸이 각각 왕비와 후궁이었기에
1509년 평성부원군 영의정으로 중종 재위때 훈구파를 결성.
말년에 많은 첩과 토지를 보유, 호사를 누리다가 44세에 병사.
중종반정 직후인 1506년 9월부터
이듬해 1507년 8월까지 중종을 섭정.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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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12년(1506) 9월 초하루 밤,
성희안과 박원종의 반정군은 경복궁을 에워싸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경복궁을 접수해, 거사를 성공.
이후 마무리 수순을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전한다.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저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후궁 전비(田非)·녹수·백견(白犬)을 그날로
군기시 앞에서 목을 베었다.”
군기시(무기제조창)
현재 프레스센터 자리.
폐위 당시 연산군의 나이는 31세였고,
자녀는 4남 2녀로, 폐세자 이황을 비롯,
장녹수의 딸인 영수옹주 등이었다.
아버지를 잘못 만난 죄밖에 없는
이들 앞에 참혹한 운명이 기다렸다.
폐세자와 세 왕자는
연산이 폐위된 직후
뿔뿔이 각처로 귀양.
9월 24일에 모두 사사.
연산의 장남인
황의 나이가 10살이었고,
나머지는 그보다 다 어렸다.
한 살짜리 아들도 사사되었다.
옥새를 빼앗기고 동궁에 연금 당했다.
그리고, 곧 이어 강화 교동에 위리안치.
밥만 담 구멍 안으로 넣어주는 형벌이다.
연산은 그날로 궁을 나서 귀양길에 올랐다.
궐 내전 문 앞으로 나와 땅에 엎드려 말했다.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도
108편이 집권 말, 3년 동안 쓴 작품.
그만큼 그의 심사도 파국으로 치달았음을 반증한다.
그가 남긴 시 중에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시도 있다.
바람 부는 강에 배 타고 건너길 좋아 마오.(莫好風江乘浪渡)
배 뒤집혀 위급할 때 그 누가 구해주리.(飜舟當急救人唯)
그날 오후에는 죄인의 몸으로 궐에서 쫓겨나는 신세였다.
그나마 언제 반정군의 칼날이 자기 목에 떨어질지 모를 일.
그의 얼굴은 백짓장이었다.
울부짖으며 발버둥쳤지만, 반정군은 허락하지 않았다.
해는 서쪽하늘에서 기울고 있었다.
강화도, 교동도 라면 한양에서 서쪽 끝.
뱃길 험한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야 한다.
폐주는 하룻밤도 궁에 머물 수 없다.
연산군은 어가가 아닌, 평교자를 탔다.
갓을 숙여 쓰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다투어 손가락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서쪽 이궁인 신촌의 연희궁에서 하룻밤 유숙했다.
연산군이 재위때 연회를 자주 열었던 장소이다.
양화나루에서 한강을 건넜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산이 즐겨 찾던 놀이터였다.
연산군으로서는 재위 때, 사연이 많던 양화나루.
서강을 건너 김포, 통진, 강화, 교동으로 이어진다.
미루어 짐작컨데 오늘날 48번 국도를 따라갔을 것이다.
이튿날 김포, 다음날 통진, 그 다음날 강화 유숙.
4박 5일 여정에서 통진 관아에서 유숙한 기록이 있다.
통진에서 유숙한 연산은 다시 길을 떠나
강화도가 보이는 염하강 나루에 닿았을 것.
오늘날, '구 강화대교'가 염하강 나루터 자리.
이름은 강이나 해협이다.
끝내 건너지 못했다는 해협.
이곳을 건너 다시 강화 관아에서 하룻밤 묵은 후
교동도로 건너가려면 창후리 선착장이 가장 빠른 길.
연산군의 평교는 창후리 포구에서 배를 탔을 것이다.
창후리 포구에서 그룻배를 탔다.
배가 뒤집힐 뻔했다는 기록.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를 일.
4박5일 여정은 뭍길, 물길 합해 80km, 2백리 길이었다.
교동 관아 뜰에 들어선 연산은 장졸들에게 둘러싸인 채.
땅에 엎드려 진땀을 흘리며 감히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이제 곧 죽임을 당하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처마 밑까지 바짝 쳐진 적거지에 갇히게 되었다.
해를 구경하기 힘든 감옥.
중종실록에 기록된 연산군의 모습.
말을 전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폐왕이 위리 안에 들어가자마자
시녀들이 모두 목놓아 울부짖으면서 호곡하였습니다. 신 등이 작별을 고하니,
폐왕이 말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하였다. 고맙고 고맙다’라고 하였습니다.” - 중종실록 -
교동도는 조선 초부터 왕족의 단골 유배지였다.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등이 교동도로 유배 당했다가 풀려나거나 사사되었다.
사나운 조류로 완전 격리가 가능하다는 점.
교동도 야트막한 화개산 기슭 유배지.
그야말로 산속 적막한.,위리안치 적거지.
한양 쪽 하늘은 뵈지도 않는 곳이다.
묏자리로 쓰기에도 적당하지 않은 곳.
여기서 연산은 회한의 말년을 보냈던 것.
연산이 숨진 절기는 겨울이다.
시녀들의 호곡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눈도 뜰 수 없는 역질에 걸려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숨지기 전 연산이 시중드는 시녀에게 한마디 말을 남겼다.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폐비 신씨의 탄원으로 경기도 양주로 이장.
연산보다 31년을 더 살다가 연산 묘 옆에 나란히 묻혔다.
그의 사후에 그의 곁에 남은 여인은 폐비 신씨 뿐.
그가 숨지기 전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신씨였다.
성종과 윤씨 사이의 적장자로 탄생
어린아이 때 부르는 이름은 융이었다
성종은 첫 중전 공혜왕후 한씨를 여윈 후
후궁들 중에서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맞이해
성종이 19 나이에 우여곡절 끝에 연산군을 얻었다.
성종은 보위에 오른 후 이해 봄까지
대왕대비 세조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
예종비 안순왕후 왕대비, 성종의 생모 인수대비.
3대비가 성종 재위때 정사에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인수대비 한씨는 세조의 세자빈으로서
다음 대의 중전이 될 막강한 자리에 있다가
세자가 죽고 그 아우 예종이 보위에 오르자
궐 밖으로 나가 두 아들을 왕의 재목으로 양육
인수대비는 예종이 승하하고
차남 자을산군이 보위에 오르자
다시 궁으로 들어와 어린 성종에게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477년 성종 8년(2세) 2월 21일.
연산군이 창진 병을 앓자 성종은
종묘사직 목멱산 등에 기도를 명.
여기에서도 원자 융의 병에 차도가 없자
이조판서 강희맹의 집에 피병을 보내었다.
강희맹의 집은 명문인 데다
그의 아내 안씨는 효와 덕으로
이미 널리 알려진 지혜로운 부인.
원자가 실꾸러미를 삼켜 목숨이 위험했을 때
안씨 부인이 원자를 구해낸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원자가 강희맹 정원 소나무 밑에서 놀곤 했는데
훗날 왕위에 오른 연산군이 그 소나무에 벼슬을 내렸다.
금띠를 소나무에 둘러 주고, 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말에서 내리게한 그 문의 이름을 "피마병문"이라 불렀다.
3월 14일. 중전 윤씨 친잠례 날,
윤씨즞 나인을 시켜 자신을 투기하고
성종의 총애를 받는 후궁을 제거하기 위해
비상(砒霜)과 방양서(方穰書)를 가져오게 했다.
비상을 바른 곶감과 굿하는 방법이 적힌
방양서를 중전 침실에서 발견한 성종이 격노.
이를 안 삼대비 역시 대노하여 윤씨는 폐출 위기.
3월 29일. 3대비와 성종은 중전 폐출을 명.
중전 윤씨는 수빈으로 강등되고 자수궁으로 쫓겨갈 위기
승지 임사홍 등의 도움으로 중전윤씨는 극적으로 복위된다.
그러나 이 날 이후 윤씨는 말만 중전일 뿐이지
성종과 삼대비로부터 철저히 따돌림을 받게 된다.
특히 성종은 아예 중전을 무시하고
생일날에도 연회를 열지 못하게 했으며
중전 윤씨가 원자도 만날 수 없도록 한다.
1479년 성종 10년 (4세)
6월 1일. 원자의 모후 윤씨의 생일이었는데,
연 3년째, 이때도 성종은 하례를 정지하게 했다.
그날 저녁에 성종이 시첩의 방에 있다는 말을 듣고
윤씨가 그방으로 들어가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낸 것.
6월 2일. 마침내 윤씨 폐위를 결정하고 사저로 내쳤다.
윤씨가 궁에 든지 6년이고 곤위에 오른지 4년이었다.
처음엔 윤씨 어머니 신(申)씨와 함께 사는 것만 허락
그뒤에 오라비 삼형제의 출입까지 허락하였다.
이 무렵 원자는 피병을 마치고 환궁하였다.
1480년 성종 11년 (5세) 11월 8일.
윤호 딸로 숙의였던 윤씨가 중전으로 정식 책봉된다.
이때 사저로 내쳐진 윤씨 일문은 복위 꿈을 버리지 않자
성종과 3대비는 여러 번 행실을 조심하라는 언문을 내린다.
이와 더불어 폐비 윤씨의 오라비 삼형제를 하옥시키기도 했다.
1482년 성종 13년 (7세)
8월 16일. 마침내 윤씨에게 사사를 명했다.
좌승지 이세좌, 내관 조진 등이 명을 받들었다.
사약이 비상이었고 윤씨 삼형제는 각각 외방에 유배.
신씨는 폐비를 건원릉 가는 길에 염장한 뒤
큰아들 구의 유배지 장흥(長興)으로 유배된다.
건원릉은 태조 이성계의 능침이기 때문이었다.
1483년 성종 14년 (8세) 2월 6일.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당대의 정승· 학자들이
세자 사부, 빈객(賓客)이 되어 세자의 학업을 돕는다.
1483년 성종 14년 (8세) 3월 30일.
세조비 정희왕후가 죽었다.
성종은 정희왕후 등 3대비를 모시려
창경궁을 새로 짓고, 연회도 자주 열었다.
훗날 연산군이 주색에 빠진 곳이 창경궁.
그가 어릴 때 연락(宴樂)을 자주보았던 곳.
창경궁은 훗날 연산군의 환락의 놀이터가 된다.
월산대군(月山大君)의 풍월정(風月亭)
'임사홍의 아들' 임숭재의 풍광 좋은 집,
제안대군의 집 등은 연산군의 잦은 연회지.
1487년 성종 18년 (12세)
3월 1일. 병조판서 신승선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았다.
그날 아침부터 비바람이 일어 모두 다 언짢게 여겼는데,
성종이 신승선의 집에 어서를 내려 이를 무마했다고 한다.
" 세상의 풍속은 혼인날에 비바람을 싫어하는 모양이나
대개 바람이 만물을 움직이게 하고 비가 만물을 윤택하게 하니
세상만물이 사는 것은 모두 바람과 비의 공덕이라." - 성종 -
성종이 어서를 내리고 나자
오후부터 비가 개어 무사히
혼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세자빈 신씨에게는 수근 수영 수겸 세 오라비.
아버지 신승선은 성종조에 영의정까지 오르고,
세 오라비는 연산조에 좌의정, 형조판서, 개성 유수.
그 세도가 도가 지나쳤기 때문에
연산군 축출 때 화를 입은 신씨 가문.
1489년 성종 20년(14세)
5월 20일. 7년간 방치한 폐비 윤씨의 묘.
속절에만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명하였고
백 년 뒤에도 묘비 명을 고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윤씨일가가 모두 유배 중이라,
속절이 되어도 제사 지내는 이가 없어
연산군 2년 무렵에 묘는 허물어질 형국.
1494년 성종 25년 (19세)
12월 24일. 성종이 승하.
12월 29일 연산군이 즉위.
조선 10대 왕이 되자마자 연산군은
성종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한 수륙재를 명.
불가 행사라 숭유 삼사(三司)에서 반대하였다.
연산군이 묵살하고 재를 강행
유림이 들고 일어났고 연산군은
이에 귀양형, 장형 등으로 맞섰다.
1495년 연산군 1년 (20세)
3월 16일. 성종의 묘지문(墓誌文)을 보고
생모가 죄를 짓고, 폐위되어 죽은 것을 안다.
4월 11일, 폐비· 사사· 묘비 등 사실을 모두 알게 된다.
9월 20일, 폐비윤씨 모친 신씨와 윤씨 삼형제를 풀어 주었다.
1496년 연산군 2년 (21세)
윤 3월 13일. 내시를 시켜 폐비 묘를 살펴 보게 하니
묘소가 무너진 채 여러 해를 수축하지 않아 장차 해골이
여우와 삵에게 먹힐 지경이라 천장(遷葬)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는 성종의 유교를 저버리는 일이라 하여
삼사의 관원·유림들의 반대 상소가 빗발친다.
1497년 연산군 3년 (22세)
4월 9일. 폐비의 묘가 이장되고 신주와 사당이 세워져
그 이름이 효사묘(孝思墓)·회묘(懷墓)로 붙여진 이날까지
반대 상소가 수없이 많았고 대간들의 미움을 받은 임사홍을
그 아들 임숭재와 가까웠던 까닭에 중용코자 했으나 유림이 반대.
12월 18일. 원자 황(惶)을 낳자,
사면· 복직령을 내려 임사홍을 복직.
이무렵 성종 때 탄핵을 받아 중책에 쓸 수 없도록 하명한
유자광도 모친상을 마치고 돌아와 충훈부(忠勳部)에 복직.
1498년 연산군 4년 (23세)
7월 11일. 이른바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시작이다.
성종실록 편찬시 성종 때 사관이던 김일손(金馹孫).
그의 사초에서 세조의 왕위 찬탈, 세조의 불륜 행각과
소릉(단종 어머니의 묘) 복구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는
사실이 기초되어 김일손이 붙잡혀와 피바람이 일기 시작.
당시에 검열된 몇 개의 사초에서 그와 비슷한 내용이 나오고
특히 영남학파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조義帝文)이
인용되어 김종직의 문하생들은 조종을 멸시한 대역죄로 몰리었다.
조의제문은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한(漢) 유방이 초(楚)의 회왕(懷王)을 친 것에 비유한 글.
유자광은 사적으로 김종직과 그 제자들에게 멸시받아온 처지
이극돈의 비밀까지 알고 있어 복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계기.
연산군은 유자광·윤필상 등으로부터 사초에 관한 모든 일을 듣고
이때를 신진사류의 기세를 꺾을 최적기로 여겨 일으켰던 무오사화.
7월 26일. 김종직 부관참시, 김일손·권오복·권경유 능지처사,
이목·강겸·허반 등의 주살에 이어 문제의 사초들을 모두 태우고
무오사화에 격분한 어린 유생 10여명까지 처형되는 것으로 일단락.
이에 반해 유자광· 윤필상 등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무오년에 신진사류가 화를 입었다고 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
사초가 발단되어 일어난 것이라 하여 무오사화(史禍)라고도 한다.
이때 사호의 여파로 유배길에 오른 임사홍의 둘째아들
임희재는 다음과 같은 시로써 연산군의 폭정을 비난하여
지은 시가 연산군에게 보여져 갑자사화 때 죽음을 당한다.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혔는지.
재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무오사화때 나타난 연산군의 광폭한 기질.
갖가지 고문과 형벌도 이때부터 다양화되어
홍길동 도적의 무리가 창궐한 연산군 6년을 거쳐
연산군 10년 갑자사화 때 이르러서는 극에 달하였다.
12월 23일. 인혜왕대비(예종비) 안순왕후 한씨가 승하했다.
1499년 연산군 5년 (24세)
1월. 원자 황이 천연두를 앓는다.
월산대군의 집에 피병을 간 듯하다.
2월. 무오사화 전후 특진관(特進官)으로서
연산군과 가까이 지내며 도총관(都總官)으로
병권을 흔들던 유자광이 뇌물사건으로 탄핵 퇴출.
3월에는
편찬 과정에서
사화를 일으킨
성종실록을 완성.
5월. 월산대군의 처 박씨에게 콩 50석 하사.
월산대군은 성종의 형인데 풍류를 좋아했다.
그집의 풍월정에서 연산군의 연회가 잦았다.
월산대군은 성종 19년(1488년), 연산군 13세 때 죽었고
그 처 박씨는 후사없이 혼자 있으면서 피병 온 원자를 간병.
이후, 연산군이 박씨를 위하는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여 준다.
재물을 내리고 박씨 동생 박원종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
대간들이 이를 끈질기게 반대 상소를 올리지만 듣지 않는다.
원자의 피병지가 월산대군의 집이었다는 사실 또한 주목거리.
연산군의 탐욕 생활이 이때부터 극성스러워진 듯하다.
임사홍의 아들 임숭재, 연산군에는 숙부가 되는 제안대군.
등이 연산군의 탐욕을 채워주는 일익을 담당했다고 전한다.
1500년 연산군 6년 (25세)
1월. 자순대비(慈順大妃)의 장자 진성대군이
신수근의 딸과 혼인하여 사저로 출합(出閤)했다.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에 의해 진성대군이 보호된 셈.
이해 문경 새재 부근에서 도적 홍길동(洪吉童)의 무리가 창궐.
6월 21일, 홍길동이 잡히지만, 이후 신화적인 인물로 기록된다.
1501년 연산군 7년 (26세)
연산군은 제안대군 사저의 가비(家婢)
장녹수를 궁에 받아들여 후궁으로 삼았다.
1502년 연산군 8년 (27세)
원자 황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때까지 황은 월산대군 사저에
피접생활을 하고 있다가 돌아온다.
1503년 연산군 9년 (28세)
연산군은 창덕궁 후원에서 자주 연회를 벌이고
궁궐 밖의 가까이 있는 집을 모두 허물게 하였고,
도성 밖 인가를 헐고 사냥터, 연회장으로 사용했다.
이때 없어졌던 고을이 양주, 파주, 고양(高陽) 등이다.
내시들이 바른 소리를 간하는 것이 듣기 싫어
목에 걸게 했다는 신언패(愼言牌)에 쓰인 글귀.
연산군 말년에는 중신들도 신언패를 찼다고 한다.
口是禍之門 입은 재화를 부르는 문
舌是斬身刀 혀는 목을 베이는 칼이다.
1504년 연산군 10년 (29세)
8도에서 이름난 기생들을 뽑아 궁에 두었고
중신들의 부인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그 중 미모가 빼어난 부인을 범하기도 했단다.
미인을 구하는 일은 임사홍 부자가 주로 담당.
그 때문에 대간들의 탄핵 상소에도 불구하고
임사홍 부자는 연산군의 측근에 있게 되었다.
3월 20일, 연산군이 임사홍 부자의 도움으로
폐비 윤씨의 생모 신씨를 만나 폐비 일을 안다.
폐비 사사에 관련된 모든 사람을 들추어 처벌하고,
이미 무오사화 때 귀양간 사람들까지 주살 당하고,
그 이전에 죽은 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 등도
폐비 사사 때 반대하지 않았다고 하여 부관참시 당한다.
갑자사화(甲子士禍) 공으로
임사홍은 병조판서가 되어
막강한 세도를 부린다.
1505년 연산군 11년 (30세)
4월 1일. 정2품 내시 김처선이
연산군의 추태를 보지 못하고 간하다가
어전에서 연산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1506년 연산군 12년· 중종 1년 (31세)
7월 1일. 월산대군 처 박씨가 죽었는데,
그 아우 박원종이 이무렵 거사를 결심한듯.
9월 1일. 성희안(成希顔)·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추대해 보위에 올리는 거사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민심이 이미 기울어 혁명 주체 세력들의 움직임은 막힘이 없었다.
임사홍이 이름도 없는 민중들의 발길에 죽었고
신수근 형제와 연산군에게 총애받던 궁녀들도 참수.
연산군도 옥새를 내놓았고,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추대.
뒤늦게 혁명 세력에 동조한 유순(柳洵)이 영의정.
좌의정은 거사때 인명 피해를 막는데 힘쓴 김수동.
중종반정 거사의 핵심세력 박원종이 우의정이 되었다.
이때 유자광은 거사 반정군 세력에 붙어
반정 1등공신이 되어 마지막 세도를 누렸다.
9월 3일. 폐위된 왕을 연산군(燕山君)으로 봉했다.
9월 10일. 중종은 연산군의 재위 시절에 만든
연산군의 자제 시집(自製詩集)을 불태우게 했다.
11월 8일.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된 연산군은
역질에 걸려 중종이 보낸 약을 복용하다가 6일 하직.
중종은 왕자군(王子君)의 예로 장사,
연산군을 수발했던 수행시녀는 3년간,
수행한 방자들에게 백일 간 상복을 입게 했고,
중종 자신은 3일동안 소선(素膳)을 들었고 경연을 정지.
강화 교동에서 장사를 치룬 연산군.
그의 묘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
<燕山君之墓>라고 새겨진 비면 뒤에는
<正德 八年 二月二十日葬>이라 씌어 있다.
정덕 8년이면 1513년이니까,
연산군이 죽은 지 7년만에 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