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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渤海)가 ‘수백(數百) 리(里)’에 걸쳐 가로(橫)로 놓여있다.
2024년 11월 09일
○ 「“발해(渤海)=발해(浡海)=발해(勃海)”는 “조선사(朝鮮史)”에서 가장 중요(重要)한 핵심(核心) 지리적(地理的), 위치적(位置的) 단어(單語)요, 지명(地名)이다.」
➥ 사실(事實), 「발해(渤海)=발해(浡海)=발해(勃海)」에 대해서는, 우리 카페[Cafe]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논의(論議)되고, 그 주장(主張)을 논거(論據)와 함께 수차(數次) 게재(揭載)된 바 있어 새로운 것은 없으나, 많은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직접(直接) 듣고 본 사실(事實)은, 그 어떤 기록(記錄)보다 신뢰(信賴)할 수 있으며, 시대적(時代的)인 면(面)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重要)한 사료(史料)다.
즉(卽),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서(西)쪽, 하북성(河北省) 남(南)쪽에 있는 바다(海)는 21세기(世紀) 오늘의 발해(渤海)는 될 수 있으나, 「20세기(世紀) 이전(以前)의 “발해(渤海)”는 될 수 없다」라는 점이다.
➨ 예부터 전해오는 : 「해동(海東)은, 발해(渤海)의 동(東)쪽을 말하며, 곧 우리나라【東韓 : 東國 : 朝鮮】를 일컫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우리나라’라는 말이 “한반도(韓半島) 조선(朝鮮)”이라는 말은 : 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인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 ‘매국사학자(賣國史學者)’들의 헛소리일 뿐이다.」 “이놈들의 말”이 왜 “헛소리”인지를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예부터 전해오기를 : 「해동(海東)은 조선(朝鮮)을 일컫는 말」이라고 하였고, 21세가 오늘날의 각종(各種) 사전(辭典)에서도 「해동(海東)은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인데, 발해(渤海)의 동(東)쪽에 있는 나라란 뜻이다」라고 말한다.
“명(明)나라 동월(董越)은, 조선부(朝鮮賦)”에서 말하기를 : 「그 나라는 동(東)쪽과 남(南)쪽 모두는 바다에 닿는다【其 國 東, 南 皆 際 海】」라고 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발해(渤海)는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발해(渤海)가 아니다」라는 가장 강력(强力)한 증거(證據)다. 「동월(董越)이 말한 조선(朝鮮) 땅은, 동(東)쪽과 남(南)쪽만이 바다일 뿐, 서(西)쪽은 바다가 아니었다」라는 것이니, 「그 땅【조선: 朝鮮】은, 바로 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당연(當然)하게도, 천지간(天地間)의 이치(理致)로 봐도 : 「오늘날의 발해(渤海)는 1,900년대 이후(以後)의 것이다.」라는 것을 확인(確認)시켜준다.
“Naver 한자사전(漢字辭典)”을 찾아봐도 : 해동(海東) : 「‘발해(渤海)의 동쪽(東-)’이라는 뜻으로, 예전에 ‘우리나라’를 이르던 말」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 위에서 말하는 “해동(海東)의 설명(說明) 기준(基準)에 따르면 :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大韓民國)까지】의 영토(領土)”는,
(1) 「21세기(世紀) 발해(渤海)를 기준(基準)」 : 동(東)쪽인 「“요동반도(遼東半島)인 요녕성(遼寧省)+길림성(吉林省)+한반도(韓半島)”는, “해동(海東) 땅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영토(領土)다”」
(2) 「청해성(靑海省) 청해(靑海) 북(北)쪽 하서회랑(河西回廊)에 있었던 천리(千里)에 걸쳐있었던 “발해(渤海)”」를 기준(基準) 하면 : 그 동(東)쪽인 「감숙성(甘肅省) 및 그 동(東)쪽 중원대륙(中原大陸)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영토(領土)다」
(3) 「신강성(新疆省) 포창해(蒲昌海)인 “발해(渤海)”」를 기준(基準) : 그 동(東)쪽인 「포창해(蒲昌海) 동안(東岸)으로부터 백룡퇴(白龍堆)+돈황(燉煌)+중원대륙(中原大陸)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영토(領土)다」
(4)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발하슈호[Lake Balkhash] 또는 자이산호[Lake Zaisan]를 “발해(渤海)”」를 기준(基準) : 「그 동(東)쪽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카스피해[Caspia, 海 : 리해(裏海)] 동안(東岸) + 아랄해[Aral, 海] 동(東)쪽 땅+신강성(新疆省)+중원대륙(中原大陸)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영토(領土)다」
(5) 「북사(北史)의 발해(渤海)인 “지중해(地中海)=흑해(黑海)”」를 기준(基準) : 지중해(地中海), 흑해(黑海)의 동안(東岸) 땅인 「캅카스산맥【깝까즈 山脈, 러시아어: Кавка́зские го́ры, 또는 코카서스산맥【Caucasus Mt‘】과 카스피해【Caspia, 海 : 리해(裏海)】, 아랄해【Aral, 海’】및 신강성(新疆省), 중원대륙(中原大陸)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영토(領土)다.」
➨➨ 알기 쉽게 말해 : 「지중해(地中海) 동안(東岸)으로부터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신강성(新疆省), 중원대륙(中原大陸), 한반도(韓半島), 열도(列島)까지를 포함(包含)한 전(全) 아세아(亞細亞) 땅 모두가 조선왕조(朝鮮王朝) 영토(領土)다」라는 것이다.
위에 열거(列擧)한 “(1)+(2)+(3)+(4)+(5)”의 것에서 “(1)”은【발해(渤海)】, AD 1,900년대(年代)로부터 2,000년대(年代)에 100년(年) 사이에 만들어진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의 영토팽창정책(領土膨脹政策) 일환(一環)으로 만들어진 실증사학(實證史學)이라는 명분(名分)으로 만들어진 서세(西勢)와 일제(日帝)를 중심(中心)으로 만들어진 허구(虛構)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조작(造作)으로 만들어진 말 그대로 “조작품(造作品)”이다.
➨➨ 역사서(歷史書) 그중에서도 정사(正史)라고 일컫고 있는 “북사(北史)의 발해(渤海)”는, 「지중해(地中海)와 흑해(黑海)」다. 더 말한다면 「서발해(西渤海)는 지중해(地中海)요, 동발해(東渤海)는 흑해(黑海)다」
그렇다면 “북사(北史)”를 부정(否定)할 수 있는 고증(考證)은 있는가? 한 마디로 “없다”
◆ 그럼 이러한 사실(史實)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연행기록(燕行記錄) 등으로 그 해설(解說)을 고증(考證)할 수 있을까? 물론(勿論)이다. 자신(自信) 있게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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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력(西曆) 1,831년(年)의 연행기(燕行記)를 보자.
즉(卽)「수사록(隨槎錄)」은, “서력(西曆) 1,831년 연행사신(燕行使臣)”의 타각군관(打角軍官) 자격(資格)으로 참여(參與)한「한필교(韓弼敎) [1,807(純祖, 7)~1,878(高宗, 15)]」의 연행(燕行) 기록(記錄)이다.
※ 「수사록(隨槎錄) 권6 / 반형총화 하(班荊叢話下), 수사록(隨槎錄) 뒤에 적다」 : [원문(原文) 이미지: 출처(出處) 고전번역원DB]
(6) 「수사록(隨槎錄) 권 6 / 반형총화 하(班荊叢話下) “수사록(隨槎錄) 뒤에 적다”」 :
〈25세에 처음 사행단의 행차를 따라 ➊ “서(西)쪽으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을 지나 연경(燕京)과 계주(薊州)를 경유하여 순천(順天)에 도착하였으니, ➋ 그동안 산(山)으로 말하면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높음을 보았고”, ➌ 물로 말하면 “발해(渤海)의 넓음을 굽어보았다”〉라고 하였다.
위의 ‘본문(本文) 내용(內容) 모두를 이해(理解)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하나하나 그 연유(緣由)를 따져보자.
➊ 「서(西)쪽으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을 지나 연경(燕京)과 계주(薊州)를 경유(經由)하여 순천(順天)에 도착하였으니」 :
한반도(韓半島)의 「한성(漢城)=한양(漢陽)=한성부(漢城府)=왕성(王城)」에서 “서(西)”쪽은 “인천(仁川)”쪽으로 그곳에는 강화도(江華島)와 서해(西海)에 막혀 있어, 서(西)쪽으로 갈 수 없다.
그렇다면 “압록강(鴨綠江)”은 서(西)쪽에 있나? 북(北)쪽에 있나? 저자(著者)는 말하기를 : 「서(西)쪽으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요동(遼東)으로 가고, 다시 심양(瀋陽)을 지나고… …하였다」
저자(著者)【연행(燕行) 여정(旅程)을 기록(記錄)한 연행사신(燕行使臣)을 말한다.】인“서력(西曆) 1,831년 연행사신(燕行使臣)”의 타각군관(打角軍官) 자격(資格)으로 참여(參與)한 한필교(韓弼敎)【1,807(純祖, 7)~1,878(高宗, 15)】는, “서(西)쪽에 있는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요동(遼東)으로 갔다”라고 기록(記錄)으로 전해주고 있다.
➥「당시(當時)의 조선(朝鮮)은 한반도(韓半島) 땅에 없었으며, 연경(燕京) 또한 오늘날의 ‘북경(北京)=북평(北平)’이 아니었다」라는 뜻이다.
「한필교(韓弼敎, 1,807~1,878)」의 기록(記錄)을 엎어버릴 만한 고증(考證)이 있는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➋ 「산(山)으로 말하면 의무려산(醫巫閭山)의 높음을 보았고」 : 이 말은 당시(當時) 한필교(韓弼敎, 1807~1878)가 보았던 의무려산(醫巫閭山)은, 한필교(韓弼敎, 1807~1878)가 살던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높은 산(山)과 여러 개의 산맥(山脈)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수사록(隨槎錄) 권 4, 풍속통고(風俗通考) 산천(山川)」조(條)의 「의무려산(醫巫閭山)」에 대하여 설명(說明)하기를 : 〈책문으로부터 연산관(連山關)에 이르기까지는 높은 산과 험준한 재(嶺)가 많고, 냉정(冷井)에서 10여 리를 지나면 점점 산줄기로부터 벗어나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데, 1천여 리 동안 사방으로 한 점의 산도 없이 하늘가에서 땅 끝까지가 툭 트여서 거리낄 곳이 없었다. 일판문(一板門)을 나서면 말 머리에 하나둘씩 산이 보이면서 일만 봉우리가 북쪽으로 내닫고 있으니, 바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이다〉라고 하였다.
➨ 즉(卽) “의무려산(醫巫閭山)”은, 한필교(韓弼敎, 1807~1878)가 살았던 땅의 그 어떤 산(山)보다도 높고 산세(山勢)가 험준(險峻)했음을 직접적(直接的)으로 표현(表現)해주고 있다. 반도(半島) 땅에는 의무려산(醫巫閭山)보다 더 높고 험준(險峻)한 산(山)들이 수두룩하다.
해발고도(海拔高度) 866m 높이【醫巫閭山東北 - 西南走向, 長45 公里에 불과(不過)한 산(山)이다.】의 산(山)을 보고 “일만(一萬) 봉우리가 북(北)쪽으로 내닫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곧 오늘날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아닌 4,000∼5,000m의 큰 산(山)인 의무려산(醫巫閭山)과 여러 산(山)과 큰 산맥(山脈)을 보고 놀랐다는 뜻이다.
➨ 즉(卽)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해발고도(海拔高度) 866m 높이【醫巫閭山東北 - 西南走向, 長45 公里에 불과(不過)한 산(山)이다.】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➌ 「물로 말하면 발해(渤海)의 넓음을 굽어보았다.」라고 하였는데, 더하여 『수사록(隨槎錄) 권4 풍속통고(風俗通考) 산천(山川)』조(條)에서 말하기를 :
「탑산(塔山)으로부터 남(南)쪽에는 발해(渤海)가 하늘 끝 수백(數百) 리에 걸쳐 가로로 잇닿아 있고, 곧장 노하(潞河)로 통해 있다.」라고 하였다.
「물로 말하면 발해(渤海)의 넓음을 굽어보았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곧 그 어떤 물보다 컸음을 의미(意味)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
발해(渤海)가 반도(半島) 동해(東海)보다 더 크냐?
발해(渤海)가 반도(半島) 남해(南海)보다 더 크냐?
발해(渤海)가 반도(半島) 서해(西海)보다 더 크냐?
그러나 한필교(韓弼敎, 1807~1878)는 : 바다(海)가 아닌 내륙해(內陸海)가 동서(東西) 즉(卽) 횡(橫)으로 수백(數百) 리(里)에 뻗쳐있는 것을 놀란 것인데, 또한 이 발해(渤海)는 로하(潞河)와 연결(連結)되어 있었음을 보았다고 하였다. 곧 내륙(內陸)에 있던 큰 호수(湖水)를 본 것이다.
➨➨➨ 한필교(韓弼敎, 1807~1878)가 말하는, 수백(數百) 리에 걸쳐 가로【횡(橫) : 동서(東西)】로 뻗쳐있는 내륙호(內陸湖)는 어디에 있는 어떤 호수(湖水)를 말하는 것일까?
① 포창해(蒲昌海)【羅布泊 : 羅布淖爾, 鹽澤、泑澤、牢蘭海、洛普池、輔日海、臨海、洛普池、羅布池】가 있다.
② 자이산호【Zaisan, 湖 : 齋桑泊】가 있다.
③ 발하슈호【Balkhash, 湖 : 巴勒哈什泊, 得嶷海, 夷播海 : 巴爾喀什】가 있다.
④ 흑해(黑海)가 있다.
위의 예(例) “①∼④” 가운데에 이때 가장 강력(强力)한 발해(渤海) 후보(候補)는 “ ③”의 “발하슈호【Balkhash, 湖】”라고 할 수 있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은 곧 천산(天山)인 기련산(祁連山)을 말하는 것이다. 【AD 1,831년(年) 경(頃)의 발해(渤海)를 말하는 것이다.】
이곳으로부터 수백(數百) 리(里) 떨어진 곳에 “제비 연(燕)”자(字)로 시작되는 「연경(燕京)」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적(時代的)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가 동진(東進)하면서 주요(主要) 지명(地名)인 “발해(渤海), 평양(平壤)”등(等)은 함께 이동(移動)되었다」라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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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사록(隨槎錄) 4 / 風俗通考 山川 004」[출처(出處) : 고전번역원DB]
※ 「수사록(隨槎錄) 4 風俗通考 山川 005」: [출처(出處) : 고전번역원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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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수사록(隨槎錄) 권3 유상수필(遊賞隨筆) 하(下) 홍화점(紅花店)【한필교(韓弼敎) 1,807(純祖, 7)~1,878(高宗, 15) : AD 1,831年 연행기록(燕行記錄)】
수사록(隨槎錄) 본문(本文) ㈠ / 〈산해관(山海關) : 산해관(山海關)은 옛날의 유관(楡關)이다. 성곽은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대략 4,000리가 되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몽염(蒙恬)이 지은 것으로, 각산(角山)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서쪽으로는 홍무【洪武 명 태조(太祖)의 연호, 1368~1398】 병진년(1,376) 서달(徐達)에게 명하여 증축하였다고 한다. 봉우리마다 돈대(墩臺)가 있고, 평지로 들어서면 5겹으로 성을 쌓았으며, ➨➨➨ 앞으로 요동 벌판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창해(滄海)를 끼고 있다. 성의 모양새는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넓은데, 위쪽은 6마리 말이 달릴 수 있는 넓이이다. 동쪽을 향해서 관문이 4중으로 나 있는데, 모두 철갑을 두른 아치형으로 되어 있으며 서로 떨어진 거리가 1리쯤 된다. 첫 번째 관문은 옹성(甕城)으로 누대가 없으며 동쪽ㆍ남쪽ㆍ북쪽으로 문이 뚫려 있는데, 문미에 “위진화이(威鎭華夷)”라고 새겨져 있다. 두 번째 관문은 4층 누각인데, 편액에 “산해관(山海關)”이라고 쓰여 있다. 세 번째 관문은 3중 처마로 된 누각인데, 서쪽 문미에 큰 글씨로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고 쓰여 있다. 어떤 이는 그것이 이사(李斯)의 글씨라고 한다.〉
➊ ➨➨➨ 앞으로 요동 벌판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창해(滄海)를 끼고 있다. : 「요동(遼東)은 요수(遼水) 동(東)쪽 땅」을 말하는 것으로 :
「오늘날의 산해관(山海關)에서 요동(遼東) 땅까지는 최소한 900리(里) - 1 천리(千里)가 떨어져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무슨 재주로 “요동(遼東) 벌판을 바라보고 있을 수가 있을까?”」
「오른쪽은 ‘창해(滄海)’를 끼고 있다」라고 하였다. 「창해(滄海)가 발해(渤海)인가?」 또 앞으로 요동(遼東)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 오른쪽은 창해(滄海)가 되는가? 요동(遼東)과 산해관(山海關) 등지(等地)에는 ‘발해(渤海)’는 있어도 ‘창해(滄海)’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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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海 內 西 經 [本文] : 〈河 水 出 東 北 隅, 以 行 其 北, 西 南 又 入 渤 海, 又 出 海 外, 即 西 而 北, 入 禹 所 導 積 石 山. : 하수(河水)【하(河) : 황하(黃河)】가 동북(東北) 모퉁이에서, 북(北)쪽으로 가다가, 서남(西南)으로 또 “발해(渤海)”로 들어가는데, 또 해외(海外)로 나간다. 곧 서(西)쪽, 북(北)쪽으로 가다가, 우(禹)가 통하게 한 적석산(積石山)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8)- 1) 산해경(山海經)의 해외북경(海外北經) 본문(本文) : 〈海 外 北 經 : 禹 所 積 石 之 山 1 在 其 東 , 河 水 所 入 2 。〉의 주석(註釋)에서도 위의 해내서경(海內西經) 편을 인용(引用)하여 설명(說明)하고 있다.
즉(卽), 「海內西經云:河水出東北隅, 以行其北, 西南又入勃海, 又出海外, 即西而北, 入禹所導積石山.」 라고 말이다. 덧붙여 “당(唐)의 재상(宰相)이었던 두우(杜佑)가 심혈을 기울여 편찬했다는 그 유명(有名)한 통전(通典)”을 보면 :
(9) 杜佑 通典 : 朝 鮮, 晉 張 華 曰 : 朝 鮮 有 泉 水 、 洌 水 、 汕 水 , 三 水 合 為 洌 水 , 疑 樂 浪 、 朝 鮮 取 名 於 此 也 。汕 , 所 晏 反 。 周 封 殷 之 太 師 之 國 。 太 師 教 以 禮 義 、田 蠶 , 作 八 條 之 教 , 無 門 戶 之 閉 , 而 人 不 為 盜 。中 略. 〈❶ 武 帝 元 封 三 年, 遣 樓 船 將 軍 楊 僕 從 齊 浮 渤 海, 兵 五 萬, 左 將 軍 荀 彘 出 遼 東, 討 之 。 :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BC 108年이다】에,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어, 제(齊)를 따라 '발해(渤海)'를 건너가게 하였는데,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遼東)을 나가 쳤다〉라고 하였는데,
➋ 위 본문(本文)의 “발해(渤海)”는 : 〈현재(現在)의 하북성(河北省) 남(南)쪽 바다가 아니다.〉라는 점이다. 이는,
➌ 통전(通典) 주군전(州郡傳) 안서부(安西部) 편의 풍속(風俗) 조를 보면 :〈雍州之地, 厥田上上, 鄠杜之饒, 號稱陸海, 中略. 議曰:按水經云 : 崑崙墟在西北, 去嵩高五萬里, 地之中也. 其高萬一千里, 河水出其東北陬, 屈從其東南流, 入於渤海. : 의왈(議曰) : 수경(水經)에서 이르기를 : 곤륜(崑崙)의 언덕은 서북(西北)에 있는데, 높이는 5만 리(萬里)로 높고, 가운데 땅이다. 그 높이는 ‘1만(萬) 1 천리(千里)’인데, ‘하수(河水)’가 동북(東北) 모퉁이에서 나와, 굴곡(屈曲)을 따라 그 동남(東南)쪽으로 흘러, 발해(渤海)에 들어간다〉라고 하였는데, 아래 ➍를 보면 :
➍ 산해경(山海經) : 〈河水出東北隅, 以行其北, 西南又入渤海, 又出海外, 即西而北, 入禹所導積石山. : 하수(河水)가 동북(東北) 모퉁이에서 나와, 그 북(北)쪽으로 흐르다가, 서남(西南)쪽 또 발해(渤海)로 들어가는데, 또 나와 해외(海外)로, 즉 서(西)쪽, 북(北)쪽으로 흘러 우(禹)가 적석산(積石山)으로 통하게 한 곳으로 간다〉라고 하였다.
➎ 그렇다면 : 이 시기(時期)【수경주(水經注)를 주석(註釋)한 때를 말한다】의「발해(渤海)」는 : 「하수(河水)가 우(禹)임금이 치산치수(治山治水)를 이루어 놓은 적석산(積石山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으니, 「발해(渤海)는 적석산(積石山) 이전(以前)의 상류(上流) 측(側)에 있다.」라는 것으로 밖에 이해(理解)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게 역사(歷史)다」
이 기록(記錄)이 본래(本來)의 “발해(渤海)”【조선사(朝鮮史)에서 말하는 본래(本來)의 발해(渤海)는 더 서(西)쪽에 있었다는 것이 필자(筆者)의 주장(主張)이다.】와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오늘날의 발해(渤海)에서 “1 만리(萬里) 먼 서(西)쪽에 있었다.”」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또 아래의 “➏”의 기록(記錄)을 보자.
➏ 또 다른 「산해경(山海經)」의 기록(記錄)을 보면 : 〈開明南有樹鳥, 六首 ; 蛟, 蝮, 蛇, 蜼,豹, 鳥秩樹, 于表池樹木, 誦鳥, 隼鳥[7], 視肉. 【註釋 : [7] 郭璞云:鵰也. 穆天子傳 卷二曰 : 爰有白隼鳥, 青鵰. 音竹筍之筍. 中略. 河 水 出 昆 侖 東 北 陬, 貫 渤 海 入 禹 所 導 積 石 山. : 하수(河水)가 곤륜(昆侖) 동북(東北) 모퉁이에서 나와, 발해(渤海)를 꿰뚫고【貫 : 꿰다. 통과(通過)하다】, 우(禹)가 통하게 한 적석산(積石山)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또 아래의 “➐” 「회남자(淮南子) 지형훈(墬形訓)」에서 말하기를 :
➐ 「회남자전(淮南子傳) 지형훈(墬形訓)」에서 이르기를 : 〈河 水 出 昆 侖 東 北 陬, 貫 渤 海, 入 禹 所 導 積 石 山 : 하수(河水)가 곤륜(昆侖) 동북(東北) 모퉁이에서 나와, 발해(渤海)를 꿰뚫고【貫 : 꿰다. 통과(通過)하다】, 우(禹)가 통하게 한 적석산(積石山)으로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 위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발해(渤海)」는 : 「하수(河水)가 흐르다가 큰 호수(湖水)를 만들어 하수(河水)가 잠시 머무르는 대택(大澤) 곧 내륙해(內陸海)를 말한다.」
➑ 첫 번째는 가능(可能)한 곳은 : 「포창해(蒲昌海)=염택(鹽澤)」이다.
➒ 두 번째 가능(可能)한 곳은 :「돈황(燉煌)으로부터 그 동(東)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하서회랑(河西回廊)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옛 하수(河水)가 모여 주위(周) ‘1 천리(千里)’에 달했다는 내륙해(內陸海)를 말한다.】라는 내륙해(內陸海)다.」【지금(只今)은 그 흔적(痕迹)만 남아있을 뿐, 일천(一千) 리(里)에 달했다는 내륙해(內陸海)는 사라지고 없다】
➓ 〈하수(河水)는, 곤륜산(崑崙山) 동북(東北) 한 모퉁이에서 발원(發源)하여 흐르다가 ➨「포창해(蒲昌海)=염택(鹽澤)」 또는 ➨「돈황(燉煌)으로부터 동서(東西) 수백(數百) 리(里)【둘레가 일천(一千) 리(里)에 달했다고 전해진다】에 걸쳐 펼쳐져 있던 내륙해(內陸海)」를 관통(貫通)하여 “우(禹)” 임금이 치수(治水)를 위해 뚫어 놓은 적석산(積石山)의 물길로 들어간다」라는 것인데,
위 「산해경(山海經) 주석(註釋)에서, 수경주(水經注) 주석(註釋)에서, 회남자(淮南子) 본문(本文)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이 하수(河水)의 전체적(全體的)인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 그래서 「옛 고전(古典)에 “하수(河水)와 갈석(碣石)”」이 함께 언급(言及)되어 있는 것이다. 곧 “하수(河水)와 갈석(碣石)과 발해(渤海)”는 ‘한 묶음’으로 「하수(河水)가 모여들어 “발해(渤海)”를 이루고, 그곳에 갈석(碣石)이 있었다」라는 것으로 이해(理解)하면 : 옛 고전(古典)에서 말씀하시는 것들을 모조리 소화(消化)시킬 수 있으며, 백번(百番), 천번(千番) 이해(理解)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卽), 위에서 언급(言及)하고 설명(說明)한 「산해경(山海經), 수경주(水經注), 회남자(淮南子)」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발해(渤海)」를 뒤엎어 버릴 수 있는 고전(古典) 기록(記錄)은, 현재(現在)까지 발견(發見)되지 않았다. 곧 “없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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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後漢書 卷七 孝桓帝紀 第七 :
〈永康元年 : 八月, 六州大水, 勃海海溢 : 영강(永康) 원년(元年)【永康 元年 “靈帝[劉宏, 156-189]”은, AD 167年이다】8월에, 여섯 주(州)에 큰물이 내려 발해(渤海)가 넘쳤다〉라고 하였다.
위 구절(句節)에서 포인트(Point)는 “해일(海溢)”이란 단어(單語)의 해석(解釋)이다.
➊ 21세기(世紀) 오늘날의 “해일(海溢)”이라는 단어(單語)는 : 「네이버 한자사전(漢字辭典) : 해저(深海)의 지각변동(地殼變動)이나 해상(海上)의 기상변화(氣象變化)에 의하여 갑자기 바닷물이 크게 일어서 육지(陸地)로 넘쳐 들어오는 것. 또는 그런 현상(現象)」이라고 설명(說明)한다. 곧 ‘쓰나미’를 생각하면 이해(理解)가 쉽다.
「쓰나미」는 일본어에서 유래한 용어로, ‘나루터(津)의 파도(波)’라는 의미다. 원래 일본어에서 ‘쓰나미’란 용어 자체는 지진해일만이 아닌 태풍이나 다른 원인으로 생긴 해일도 전부 통칭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1,960년 이후 칠레지진부터 “쓰나미”는 오늘날의 의로 쓰여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출처(出處) : 나무위키 : 쓰나미]
➋ 「오늘날의 발해(渤海) 주변(周邊)의 요녕성(遼寧省), 하북성(河北省), 산동성(山東省) 등지(等地)에 있었던 여섯 개의 주(州)에서 큰물이 내렸다고 해서 황해(黃海)의 일부(一部)인 “발해(渤海)”가 넘칠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問題)인데,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자연(自然)의 이치(理致)다.
➥「육지(陸地)의 몇 고을에서 큰물이 내려 홍수(洪水)가 나고, 그 물이 하천(河川)으로 모여들어 바다(海)로 제때 흐르지 못해 하천(河川)이 넘쳤다」라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지만, 비가 많이 와서 바다(海)가 넘쳤다는 말은 “충격적(衝擊的)이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하고,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야기다”
➌ 〈永康元年 : 八月, 六州大水, 勃海海溢 : 영강(永康) 원년(元年)【永康 元年“靈帝(劉宏, 156-189)”은, AD 167年이다】8월에, 여섯 주(州)에 큰물이 내려 발해(渤海)가 넘쳐다〉라는 말은,
「발해(渤海)는, 바다(海)가 아닌 내륙호(內陸湖)」로, 「발해(渤海)를 둘러싸고 있는 여섯 개 주(州)에 큰물이 내리니, 로하(潞河)를 통해 엄청난 물이 흘러들어오니 발해(渤海)가 넘쳤다」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한필교(韓弼敎, 1,807~1,878)가 직접(直接) 본 발해(渤海)는, 로하(潞河)와 통(通)해 있다고 하였다】
(8) 방호(方壺) : 「바다 가운데 있다는 신선이 사는 산 이름. 일명 방장(方丈)이라고도 하고, 발해(勃海) 동쪽에 큰 구렁이 있으며, 그 가운데 다섯 산이 있는데 그 셋째를 ‘방호’라 부른다.」 그러나 “오늘의 발해(渤海)에는 이러한 것들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9) 新增東國輿地勝覽, 京都 上 : 〈古朝鮮馬韓之域。: 고조선(古朝鮮)은 마한(馬韓)의 지역이다. 北鎭華山有龍盤虎踞之勢,南以漢江爲襟帶,左控關嶺,右環渤海。: 북(北)으로 화산(華山)을 진산(鎭山)으로 삼아, 동(東)과 서(西)는 용이 서리고 범이 쭈그리고 앉은 형세이고, 남(南)쪽은 한강(漢江)으로써 요해처(要害處)를 삼았으며, 멀리 좌(左)【동(東)】측에는 대관령이 있고 우(右)【서(西)】측에는 발해(渤海)가 둘러싸고 있다. 其形勝甲於東方,誠山河百二之地也。: 그 형세의 훌륭함이 동방(東方)의 으뜸으로서, 진실로 산하(山河) 중에, 백이(百二)의 땅이다〉라고 하였다.
➊ 이 기록(記錄)은 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에 비춰보면 :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한 기록이 되어버린다.
즉(卽), 벌써 눈치를 챈 분이 계시겠지만 :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 「마한(馬韓)은 충청도(忠淸道) 일부(一部)와 전라도(全羅道) 땅이라고 해설(解說)하고 있는데, 그럼 수도(首都) “서울”이 충청도(忠淸道) 땅인가? 전라도(全羅道) 땅인가? 허면 ‘경기도(京畿道) 땅’이라는 것은 뭔 말인가?」
이래서 오늘날의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강단사학(講壇史學)을 지칭(指稱)하여 “사학(死學)”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무덤(墓地)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➋ 수도(首都) “서울”의 서(西)【우(右)】쪽에는 발해(渤海)는 없고, 서해(西海)는 있다. 이래서 강단(講壇)을 뜻해 “사학(死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9)- 1) 또 “동월(董越)은 조선부(朝鮮賦)에서 읊기를” : [新增] 大明董越, 朝鮮賦:〈眷彼東國,朝家外藩。西限鴨江,東接桑暾。天池殆其南戶,靺鞨爲其北門。: 명(明)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 살펴보건대, 저 동국(東國)은 조가(朝家)의 바깥 울타리로, 서(西)쪽은 압록강(鴨綠江)이 한계(限界)가 되고, 동(東)쪽은 상돈(桑暾)에 닿았으며, 천지(天池)는 거의 그 남(南)쪽 문이 되고, 말갈(靺鞨)은 그 북(北)쪽 문이 되었다. 【其國東, 南皆際海, 西北爲建州, 正北爲毛憐, 海西. : 그 나라는 동(東)쪽과 남(南)쪽이 모두 바다에 닿아있고, 서북(西北)쪽은 건주(建州)이고, 정북(正北) 쪽은 모련(毛憐) 해서(海西)이다. 】〉라고 하였다. 【이 부분(部分)은 국도(國都)인 경도(京都) 편에서 상세(詳細)하게 다룰 예정(豫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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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연행일기(燕行日記) / [서(書)] : 송원(松園 김이도(金履度))에게 올리는 글 : 燕之形勝膏腴。自周,漢以來。非與他州等。且其俗悲歌慷慨。椎埋擊刺。崇信義重然諾。亦渤碣之間一都會也。故士之抱負者。多願遊焉。: 연 땅은 형세 좋고 기름져 주(周)ㆍ한(漢) 이래로 다른 주(州)들과는 다르며, 또 그 풍속이 비가강개(悲歌慷慨)하고 추매격자(椎埋擊刺)하되 신의(信義)를 숭상하고 승낙한 일을 실천하기를 귀중히 여겼으며, 또 발해(勃海)ㆍ갈석(碣石) 사이의 한 도회(都會)인 까닭에 포부가 큰 선비가 흔히 여기에 여행하기를 바랐습니다.
위의 글을 보면 : 「연(燕)의 땅은,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의 도회(都會)인 까닭에」라고 하였으니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도회(都會)가 있다”라는 것인데, 오늘날의 발해(渤海)와 갈석(碣石)은 바닷가에 서로 마주 붙어있기 때문에 「사이(間)의 땅이 없다.」이건 말 그대로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이야기일 뿐이다.
(11) 「연갈(燕碣)」 : 옛날 연(燕)나라 지역인 「요동(遼東)과 발해(勃海) 인근의 갈석산(碣石山)」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그 지역을 통과하는 거센 물줄기를 가리킨다. 진 시황(秦始皇)이 순수(巡狩)하다가 갈석산(碣石山) 입구의 바위에다 자기의 공을 새긴 다음에, 옛 제후(諸侯)의 성곽(城郭)을 허물고 제방(堤防)을 터서 통하게 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라고 하였는데,
「‘하수(河水)•발해(渤海)•갈석산(碣石山)’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關係)다」라는 것을 입증(立證)하는 중요(重要)한 기록(記錄)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발해(渤海)”는 “하수(河水)와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
「곧 하수(河水)가 모여 발해(渤海)를 이루고 그곳 물가에 갈석산(碣石山)이 있었다」라는 이야기다.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남(南)쪽 바다(海), 요녕성(遼寧省)의 서(西)쪽 바다(海)를 “발해(渤海)”라고 부른다.」이건 「“20세기(世紀) 이후(以後)”의 “발해(渤海)”일 뿐이다.」
◉ 〈우리가 지금 추구(推究)하고 있는 “조선사(朝鮮史) 및 발해(渤海)”는 「20세기(世紀) 이전(以前) 것이다.」 곧 「‘서세(西勢)=서구(西寇)’와 ‘일제(日帝)’의 손이 타지 않은, 본래(本來)의 조선사(朝鮮史)의 실체(實體)를 밝히려는 것이다.」〉
◆ 큰 그림으로 : 「동구라파(東歐羅巴)+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신강(新疆)+중원대륙(中原大陸)」의 땅이 바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영역(領域)이다. 「이는 19세기(世紀) 이전(以前)까지도 그대로 유지(維持)되고 있었다.」
「왜(倭)와 청(淸)」은, 조선(朝鮮)의 영역(領域) 내(內)에서 “중앙조정(中央朝廷)=중조(中朝)”에 ‘반기(叛旗)=반기(反旗)’를 든 무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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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을 보면서 그 원전(原典) 기록(記錄)을 어떻게 번역(飜譯)하고 어떻게 해설(解說)하느냐? 하는 문제(問題)는, “사관(史觀)”과 직결(直決)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境遇)를 보면 :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이 학계(學界)를 움켜쥐고 앉아 다른 주장(主張)을 배척(排斥)하고 매장(埋葬)시켜 나는 새싹까지 모조리 잘라버리기 때문에 “이놈들이 말하는 식민(植民) 조선사(朝鮮史)” 외(外)의 “본래(本來)의 조선사(朝鮮史)”는 강제(强制) 매장(埋葬)되어 지하창고(地下倉庫)에 처박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
이놈들이 바로 매국사학자(賣國史學者)들이요, 이들의 후배(後輩)요, 제자(弟子)들로,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강단(講壇)을 주름잡고 있으며, 오직 한글 해설서(解說書)를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있는 “놈”들이다. “이놈”들이 식민주의자(植民主義者),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 친일분자(親日分子), 매국노(賣國奴) 등으로 우리 사회(社會)에서 배척(排斥)당하자 “이름을 바꾸어 0 000”라고 하지만, 그 검은 속이 어떻게 변(變)할 수 있겠는가!
“이놈”들이 누군지, “이놈”들이 무엇을 하던 자(者)들인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이러한 국가이익(國家利益)을 해(害)치는 반국가세력(反國家勢力)을 우대(優待)하고, 등용(登庸)하는 “놈(䎛)”이 있으면, 이런 “놈”을 수괴(首魁) 또는 괴수(魁首)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렇게 반국가세력(反國家勢力)을 우대(優待)하고 등용(登庸)하는 수괴(首魁)나 괴수(魁首)가 우리 사회(社會)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국민(國民)에게 주어진 의무(義務)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24년 11월 09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다음 편에서는 :
*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반도 서울(京都)에 대한 신증동국여지승람편을 보면서, 과연 오늘날의 반도 땅 서울을 말하는 것인지를 심층적으로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 항상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 역사 곧 지나간 역사는 지형지세(자연환경)를 떠난 인간의 삶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친일분자들이 언제나 인용하며 이용해먹고, 재탕을 해대는 '명 동월'의 '조선부'에서는 : 말하기를 : "조선은 동쪽과 남쪽은 바다로 한계한다"고 하였으니, 西(서)쪽은 뭍으로 육지 곧 대륙이었다는 뜻이니 곧 오늘날의 중원대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 그러나 이놈들은 교묘하게 미사려구로 "반도 땅"이라고 거짓말을 밥먹든 해댑니다.
이 자들을 우리들은 "식민사학자, 친일사대주의자, 부역매국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감사합니다.
문무선생님 감사합니다
발해 명칭을 시대 별로 명확히 밝혀주셔서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며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현재의 북경에 위치한 자금성도 위조가 되었지만.....
자금성(紫金城)은 자금이라는 지명이 동반되어야 된다고 본다면.....
중국 남경에 자금산(紫金山)이라는 지명이 바이두 지도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남경의 고궁이 자금성(경복궁)이면 선조의 몽진과 왜군(해군)의 진격 동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것 같습니다
남경이 한양이라 생각은 하지는 않으며 강화에 위치한 조정(明)마져 폐허가 되어
다고 확고하게 인지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남경의 고성(古城=자금성)과 사천 성도(成都)으로의 파천이 맞는지
많이 궁금합니다..... 선생님의 고견 듣고 싶습니다
항상 건강 하시길 기원합니다
*안녕하세요, "대진'님!
우선 관심과 성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 '지금 진행중인 여러 건'이 마무리가 된다면 : 남경(南京)과 관계되는, 또는 사천의 성도(成都)로의 파천같은 여러 의문점에 대한 "고전(古典)을 중심으로, 기회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 요즘같은 때, "조선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대진"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시절 분명 오리라 믿습니다.
댁내 늘 평안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