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자작
천지 가는 길목 소천지에서 본 찰나입니다.
소천지의 물살이 백두산을 타고온 바람에 물비늘을 일으킵니다.
물비늘처럼 비늘을 벗고 있는 것은 자작나무일 테죠?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너가 자작이지?
하고 말이지요. 혹시 자작이 아닐까봐, 조심스러워 그냥 자작이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자작나무 때문에 신열을 앓던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자작나무 껍질에 사랑편지를 쓰면 사랑이 이뤄진대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톨스토이와 토스토에프스키가 자작나무 숲을 거닐며 사유에 잠겼기 때문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작나무 숲을 찾아 설악산이며 점봉산이며 길없는 산속을 떠돌았지요.
여지껏 그가 남한 땅에서 자생하는 자작을 찾았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문학을 전공했던 그를 이제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자작을 찾으려면 백두산을 가고, 러시아를 가면 될 터인데
그가 왜 남한 땅에서 자작을 찾으려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때로 현실에 없는 것을 찾아 무모하게 인생을 거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미련하다고 말하지 않으렵니다.
자기가 믿는 것을 현실 속에서 꼭 구현해내고야 말겠다는 사람들이 세상을 숱하게 바꿔왔으니까요.
갑자기 바람에 밀려가는 소천지의 물살을 보고,
오래도록 보고 싶었던 자작을 보고서,
잊혀졌던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그 친구 지금도 어느 산속을 헤매고 있을 겁니다.
20 기도
높은 곳에 오르면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하늘 아래, 내 혼자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그 혼자를 하늘이 지켜보고 있을 것 같으니까요.
저도 저렇게 두손 모아 기도를 수없이 드렸지요.
치솟아 오른 백두산 봉우리 능선을 거닐면서 찰나처럼 기도를 드렸지요.
그러고 보니 사람만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조만간 바람과 세월에 무너져 없어져버릴, 치솟은 저 흙더미도 두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땅 위에서, 기도하는 사람, 모두다 세월 앞에 지워져버릴 것이겠지만,
기도하는 순간만큼은 천지 물처럼 정갈해집니다.
이제 삶을 시작하는 천지물처럼, 어디로든 흘러가게 해주십시오.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잊혀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잃지 않고 흘러가게 해주십시오.
21 모놀다운
백두산을 찾아간다고 갔는데, 고구려를 보러간다고 갔는데,
지나고 보니 모놀사람들만 만나고 온 것 같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로 여행하는 일입니다.
버스에 앉아 잠시 잠깐 서로의 인생을 교차시켰던 모놀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말없이 먼 거리에서 그렇지만 마치 물봉지에 담긴 금붕어처럼 함께 출렁대며 이동했던 사람들로 생각나구요. 저 백두산 천지에서 날뛰었던 사총사의 모습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모여서 뛰노는 것이 가장 모놀다운 모습이겠지요.
인생이 저처럼 기쁘고, 철없고, 유쾌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요.
자주 모여 놀다보면, 철없이 기쁜 날들이 또 생겨나겠지요.
모놀 식구들, 열심히 모여 놀기를 기원합니다.
(출연/ 모노, 긴발가락, 대흐미소다, 헬리오)
22 자전거살처럼
백두산이니 백편의 이야기를 보태고 싶지만, 이제 그만 하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본 순간들, 보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보았던 순간들을, 사진으로나마, 후기를 통해서나마 다시 되돌아보아 즐거웠습니다. 읽어봐 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짧지만 곡진한 얘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백두산 가던 길에 있었던 일들은, 저 어둔 중국 밤거리의 자전거살처럼 희미해져 갈 것입니다.
내가 언제 백두산을 갔던가 싶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잊혀질 겁니다.
빨리 잊어야 또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습니다. 더욱이 백두산은 너무로 강렬해서 빨리 잊고 싶습니다. 너무 강렬한 빛을 보고 나면, 눈이 부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니까요.
좀더 투박하고, 아주 평범하고,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는 이 땅의 풍물 속으로 다시 들어가 볼까 합니다. 언제까지 떠돌아야 하는 것인지, 제 자신에게 묻다가 이런 답에 이릅니다.
그래 이승에서는 떠돌이로 살다가 가지.
다음 생에는 백두산 상봉의 바위처럼 꿈적 안하고 살더라도 지겹지 않게.
첫댓글 '이제 삶을 시작하는 천지물처럼, 어디로든 흘러가게 해주십시오.' 같은 하늘을 우산처럼 쓰고 살면서도 차이가 많이 나는것 같아요. 저는 청계천을 거닐며 '도랑물처럼도 좋으니 흘러흘러 살게 해달라고' 마음의 조각배를 띄웠는데, 허 작가님은 그 꼭대기에 가셔서 큰소망을 띄우셨으니. 여운같은 답사기 아끼며 읽을게요
^^* 게사판 창을 닫지 못하고 오래 머무릅니다. 마음으로 쓰는 글은 쓴 사람이나 읽는사람이나 같이 눈물이 나지요.. 다음생으로 넘어가는 찰나..푸른 밤길을 따라, 다시한번 천지에 올라 잠시라도 바람으로 머물다 가려합니다. 덕분에 아련한 감동으로 설레이며 꿈을 꾸게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정기를 받고 돌아온 일상...기쁘고 슬프고 재밌고 화나고...여전히 똑같은 나날인 듯 싶지만 마음 속에는 활력을 품고 있습니다 ㅎㅎ 허작가님의 마지막글을 읽고 있자니 괜시리 '잘 가거라. 너무 짧은 우리 여름날들의 눈부신 빛이여!' 라고 노래했던 보들레르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 싶네요^^
어쩌다가 모놀에 중독이 되어 가지고는..... 행복을 주고 감동을 주는 글 잘 읽었습니다. 서점에 가서 만나 보고 싶습니다. 늦게 만난 인연 같은 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가슴이 찡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허작가님..지금 뒷북치는기분이네요. 새롭게 다시읽고..자작나무를 찾아 헤메는 친구분에게 꼭~한군데 권해드릴곳이 있습니다. 충주에있는 자작나무숲입니다. 물론 자생은아니고 인공림입니다만..헤매지말고 충주로 가라고전해주세요~천천히 읽어내려가니 너무 글이 아기자기하고 꼭~제마음을 얘기하는것같네요. 정말좋네요
아침일찍 일과시작전에 읽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새힘이 나는것 같군요. 민족의 영산 백두산 이번 여름에는 꼭 다녀오겠읍니다. 잘 읽었습니다.
잘 보았습니다..백두산..저도 가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