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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문화역사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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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태종 무열왕릉
추경(승호) 추천 0 조회 60 15.06.27 14:43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경주시 서악동..

 

백제를 멸망시키고 자신의 이종사촌형인 의자왕와 일족이 당나라로 끌려 가게 만든 신라 태종무열왕..

개인적인 원한을 풀기위해 이민족을 끌여들여 수만은 동족을 죽음으로 몰거나 이국땅에 종으로  끌려가게

만든 업인지는 모르지만 백제가 망하고 1년뒤에  죽는다.. 그 전까지는 독자적인 왕호를  사용하다가

무열왕 부터는 중국식 왕호를 사용하게 된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고 중국식 연호를 사용한 것도

 무열왕 때부터 이지만 시호와 묘호를 받은 최초의 왕도 태종무열왕이다.

 

 왕릉 앞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중국식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문은 당대의 명필이자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직접 쓴것이라고 한다. 이 비석은 조선시대 까지만 해도 파손되었지만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 퇴계 이황선생인 경주 유생들이 그 비석을 깨뜨려다 벼루를 만들어 쓴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꾸짖었다 한다. 

지금은 비석은 흔적 조차 찾아볼 수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이수에는 6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받쳐 들고 있는 모습이고,중앙에는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

라는 글자가 양각되어 있다. 

 

거북이가 막 목을 빼고 움직이려는 듯한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고 4겹 육각형의 귀갑무늬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구름무늬 띠 장식이 날렵하고 산뜻하다. 

 

 

비각의 초석도 남아있다.

 

 

상석이 특이하게도 여러개의 돌들로 조립되어 있는 형태이다. 이 시기에도 주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나?

어쨌든 태종 무열왕릉 이전에 조성된 고분에서 상석이 있는 예는 없다.

 

 

왕릉 아랬부분에 괴석으로 된 호석과 이에 기댄 받침석을 둘렀다. 몇 단으로 쌓았는지는 모르지만

높이는 약4m 정도이고  받침석 일부가 돌출되어 있다.  묘제는 횡혈식석실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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