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저녁
한가하기는 한데 할일을 없고
(실은 너무많은데 하기는 싫고)
몇일전부터
마음에 꽂히는 시한수를 물끄러미 생각하다가
다시한번 금계의 연보와
퇴계의 연보를 맞추어 보았다.
퇴계가 익히 매화를 사랑하였다는것은 이리저리 귀동냥으로 들었고
매화가 필-시기이면 1월_2월인데...(음력2월)
그 정황이 어떠하였을까...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금계가 퇴계를 찾아 나선길은 또 어떤 코스였을까-
옛날 양반의 행차처럼 아이머슴을 하나 앞세웠을까-
당나귀라도 타고 갔을까-
선생처럼 존경하는 사이인데
빈손은 아니였을꺼고...
무슨선물을 들고 갔을까-
무슨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그때 정황은 어떠했을까-...
금계 황준량선생은 1548년공조좌랑에 재직 중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한 뒤 1550년 복직을 한다.
3년시묘살이를 했다면 부모상일텐데 기록을 뒤져봐도 모친상인지 부친상인지 확실한것은 없다.
시묘살이를 하면서 스스로 사색한것들과 이런저런 학문적인것을 토론하고도 싶었을것이고
복직발령이 나서 상경하기전에 자주만나지못한 선생을 뵙고자 하였을것이다.
정월 보름전이라면 신년 하례라는 의미도 함께 곁들였으리라-
1550년이면 기록으로 금계선생께서1517년생이시니 서른셋...그러니 우리나이로는 서른넷쯔음이다.
그리고 퇴계선생은 1501년생이시니 마흔아홉 우리나이로는 쉰의 연세시다.
그즈음 퇴계는 지방직을 자원해서 전년에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그해-소백산등산을 하였고,소수서원사액현판을 받았다.)
퇴계는 몸이 좀 병약했던 탓인지 고향(예안- 현 안동시 예안면)으로 돌아가 학문에만 전염할것을 희망해 감사에게 사직서를 올리고,
사직서가 수리되지않은 상태에서 고향인 예안으로 돌아온다.
어쩌면 금계선생이 시묘살이를할때 위로차 한번쯔음 방문했을수도있었겠다.
기록에 보자면...1550년에 퇴계가 이詩"退溪草屋喜黃錦溪來訪"를 쓴것으로 되어있는데
기록을 자세히 보자면 정월이나 이월쯔음이 맞을듣싶다.
그런데 아직 매화가 피지않았다면 정월하순이 맞으리라-
그해2월에 "한서암이라는 초옥을 지어 이사를하다"(移草屋於溪西 名曰寒棲庵)라는 시를 짓는다.
아마도 이사전의 초옥으로 금계가 찾아갔을것이다.
정월에 퇴계는 임지를 허락없이 이탈하였다는(사직서가 수리되지않은상태에서 귀향함으로)
진사2등 교지를 삭탈당하는 행정상의 경고를 받게 된다.
이렁저렁경황들을 짚어 나가보자니
참- 짠-한 한편의 그림이 그려진다.
눈이 살짝내린 뜰을 바라보며
사랑채에서 중년의 선비 둘이 막걸리를 한잔하며 시를 논하고 학문을 논하는 풍경...
언젠가 보았던 김홍도의 그림한편이 언뜻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연배로 보자면 퇴계에게 금계는 조카정도뻘된다
일전에 읽었던 어떤책에 매월당(김시습)과 추강(남효온)의 연세차이도 한 열아홉정도가 났는데
그들의 편지글을 보자면 아랫사람이라도 예를 깍듯이 갖추어 안부를 전한걸 미루어보더라도
또 퇴계의 됨됨이나 훗날 금계선생이 돌아가시고 행장을 지으신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하더라도
학문을 같이 하는 선비로서 예를 다하여 대하는 했으리라 상상이 된다.
1550년(명종5) 풍기군수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 스승을 찾아온 제자 금계에 대해 퇴계는 시 한 수를 써서 반겼다.
溪上逢君叩所疑
濁료聊復爲君持
天公각恨梅花晩
故遣斯須雪滿枝
시냇가에서 님을 만나 의심난 것 토로하다
막걸리 한 사발을 그대 위해 마련했다네
조물주가 매화꽃 더디 피운 것을 아쉬워해
일부러 잠깐 동안 가지에 눈꽃 피게 했네
'퇴계 초옥으로 황금계가 찾아온 것을 반겨(退溪草屋喜黃錦溪來訪)'라는 퇴계의 작품이다.
금계는-1548년 공조좌랑에 재직 중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한 뒤 1550년 전적에 복직되고, 이어 호조좌랑으로 전직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으며, 《중종실록》·《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해 다시 병조좌랑으로 전직되었고,
퇴계는-1549년 49세 명종4년 己酉 4월에 소백산을 노닐고, 9월에 병으로 감사에 사직서를 올리다. 12월에 감사(監司)에게 글을 올려 관내(管內) 백운동(白雲洞) 서원의 편액(扁額)과 서적(書籍)을 청하였던 바, 조정에서 직접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리고,『사서(四書)』·『오경(五經)』·『성리대전(性理大典)』등의 책을 보내왔다. 서원의 흥성(興盛)이 여기서 비로소 시작되다. 사직서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감사의 허락도 없이 시골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詩 白雲洞書院示諸生. 答周景遊見寄 二首. 石崙寺效周景遊次紫極宮感秋詩韻. 紫蓋峯. 國望峯 三首. 答尙牧金季珍. 郡齋 有感小白山之遊 追次景遊用昌黎衡岳詩韻. 郡齋移竹. 浮石寺聚遠樓 鄭湖陰贈僧韻. 八月十五日夜陰. 十月十日夜 大雷雨. 十一日曉地震 三首. 池方寺瀑布 二首.
1550년 50세 명종5년 庚戌 정월에 임소(任所)를 함부로 버렸다는 이유로 고신(告身) 2등을 삭탈 당하다. 2월에 비로소 퇴계 서쪽에 자리를 잡아 '한서암(寒栖菴)'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니 각지에서 배움을 청하는 선비가 날로 늘어나다. 농암(聾巖) 이공(李公)을 분천(汾川)에 가 뵙다. 4월에 한서암 앞에 있는 광영당(光影塘) 연못을 파다. 8월에 형 좌윤공(左尹公) 해(瀣)의 부음(訃音)을 듣다.
詩 退溪草屋喜黃錦溪來訪. 移草屋於溪西 名曰寒棲庵. 三月三日 雨中 寓感 用丁未踏晴韻. 拜聾巖先生 先生令侍兒 歌東坡月飮杏花下詩 次其韻詩之 滉亦奉和 呈上. 退溪. 寒棲. 溪居雜興 二首. 寒棲雨後書事. 和陶集移居韻 二首 五月十八日. 和陶集飮酒 二十首. 七月七日作 閒許南仲遷謫. 偶讀宋潛溪靜室詩 次韻示兒子寯閔生應祺 二首.
1563년 63세 명종18년 癸亥 3월에 제자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부음을 듣고 매우 애석하게 여겨, 글을 지어 두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제사지내고 그의 행장을 짓다.
다음 글은 퇴계 선생이 그의 제자 금계 황준량 선생에 대해 지은 행장의 일부이다.
(선략) 나 황(滉)이 공(公)을 농암선생의 문하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어서부터 서로 함께 놀로 따르기를
가장 오래하며 친밀히 하였는데 우둔하여 들은 바가 없었던 나로서 공을 얻어서 깨우친 점이 많았다.
공이 물러 나서 돌아오면 실로 서로 내왕하며 옛날의 정을 다시 가꾸자는 언약(言約)이 있었으나 공은
항상 내가 늙고 병이 들어 몸을 보존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하였다. 그런데 어찌 오늘날 늙고 병든 자는
세상에 남아 있고 오히려 강건한 나이에 있던 공을 곡(哭)할 줄 알았으리요. 공의 언행은 기록할 것이
많으나 정중히 다 감히 기록하지 못하고 오직 그 큰 것만을 위와 같이 추려서 서술한다.(하략)
첫댓글 금계를 위해,매화가 더디 핀 것이 아쉬워 일부러 잠깐 동안 가지에 눈꽃을 피우게 했다는 멋스런 표현 좀 봐요, 맘에 든다 .얼마나 반갑고 情이 두텁웠으면 순간에 저런 표현을 할수 있었을꼬 ?부럽다.나도 멋있게 좀 태어나지......나이 차이도 저리 나는데, 하기사 나도 젊은 사람과 날마다 너무 잘도 논다.ㅎㅎㅎㅎㅎ~~~~~~~~~~그도 금계가 퇴계 집을 방문할때 무슨 선물을 가지고 갔을까 하는 연화님 표현 더 맘에 든다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