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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이이명선생의『매부』
그리고 봉천사묘정비
기사환국, 첫귀양길을 떠나다
숙종은 11세였던 1671년 동갑내기인 김만기의 딸을 왕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1674년 조선의 19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는 딸 둘을 두었지만 모두 요절하고 자신도 20세였던 1680년 10월 천연두에 걸려 죽은 비운의 왕비였다.
1681년 숙종의 계비가 된 민유중위 딸 인현왕후 역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장희빈의 아들 윤의 원자 책봉을 위해 폐위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왕비로 복위되었지만 1701년 8월 35세의 나이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1688년 10월 27일, 숙원 장씨는 숙종의 맏아들 윤(昀)을 낳았다. 임금으로 즉위한 지 15년 동안 왕자를 보지 못한 숙종은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되는 윤을 원자로 장씨를 희빈으로 봉하려고 했다.
서인들은 남인의 비호를 받고 있는 장희빈의 아들이 원자로 정해지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영의정 김수흥을 비롯한 노론측에서는 “중전의 나이가 스물여덟 살로 아직 젊은데 후궁의 소생을 낳은 지 두 달 만에 원자로 삼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숙종은 반대를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를 정하여 종묘사직에 고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삼는 결단을 내렸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두 번의 상소를 올려 격렬하게 반대했다.
“송나라 신종은 28세에 철종을 얻었으나 후궁의 소생이라 하여 번왕(藩王)에 책봉하였다가 적자가 없이 죽자 그때야 태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했사옵니다. 일을 너무 급박하게 처리하시면 아니되옵니다.”
이미 원자의 명호를 결정한 숙종은 가차없는 숙청을 단행했다. 송시열의 상소는 노론의 파멸을 불러오고야 말았다. 송시열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정읍에서 사사 당하고 말았다. 영의정 김수흥은 파직되었으며, 김만중, 김익훈, 김석주 등이 유배되거나 파직되었다.
이이명은 23세 때인 168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기용된 후 박사, 수찬, 응교, 헌납, 이조좌랑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다. 168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승정원의 승지가 되었다. 이이명은 송시열, 김석주(金錫胄) 등 노론 거물의 지원을 받으며 노론의 기수로 활동했다. 하지만 기사환국이라는 광풍은 31세의 젊은 이이명의 벼슬살이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 역시 경북의 동해안 바닷가 영해에 유배되고 말았던 것이다.
남해에서 장인 김만중을 그리워하며 매부를 짓다
이이명이 영해 땅에 3년 동안 머물고 있을 때 남해에 유배되었던 장인인 김만중이 병으로 타계하자 곧바로 남해로의 이배령이 내려왔다. 남해로 유배지를 옮긴 이이명은 장인이 귀양살이를 하던 집에 들러 옛날을 회상했다. 그리고 시들어가는 두 그루 매화나무를 자신의 거처에 옮겨 심고「매부」를 지어 장인의 뜻을 기렸다.
梅賦 壬申
凡物之有生氣者。皆似有性情知覺。若孝子哭而墓柏死。兄弟分而庭荊枯者是已。感應之理。不可誣也。西浦公謫舍。嘗種二梅樹。每歲開花結子。余自東邊移入島中。旅櫬已北歸。而二梅獨立荒庭。憔悴欲死。余撫遺躅而憐之。移植於所居堂前。藹然復蘇。枝葉已向茂矣。卉植百品。惟梅獨稟其幽貞皎潔之性。 公之好之也。正以其氣味之相近。而梅之不二公於存沒之際者。眞若士之爲知己。女之爲所天。其意有足悲者。作賦以頌之。
炎州地瘴。卉木滋兮。玉玦南遷。梅受知兮。托根敷榮。慰幽獨兮。氷心雪膚。炯相燭兮。窮荒萬里。兩美合兮。日斜孟夏。野鳥入兮。空園脩竹。倚荒籬兮。於悒無色。奄披離兮。嗟爾貞心。類服義兮。榮枯一節。廓其無媿兮。離騷詠物。非至公兮。廣平旣沒。孤山空兮。千春始遌。遽永謝兮。一念嬋媛。耿難化兮。王孫一去。曷月而歸兮。蠻風蜒雨。縱自芳菲兮。歲暮空谷。識者其誰兮。枯槁自矢。死無移兮。客自東來。醉過門兮。臨風三嗅。泣芳根兮。慚非玉潤。慕生平兮。雖無老成。尙典刑兮。願托晩契。如弟昆兮。悲吟楚些。與招魂兮。
매부 *1692년, 남해에 유배당하였던 때 지은 작품이다.
무릇 사물에는 생기라는 것이 있는데 대개 성정과 지각이 있는 것과 같다. 마치 효자가 곡을 하면 무덤의 잣나무가 죽고 형제가 떨어지면 뜰 앞의 가시나무가 마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감응의 이치는 업신여길 수가 없다. 서포공이 유배된 집에 일찍이 매화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해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다. 내가 동쪽 바닷가에서 옮겨와 섬 가운데 들어왔는데 (장인이) 이미 별세하여 북쪽으로 반장하니 두 그루 매화나무는 홀로 거친 뜰에 서서 말라 시들시들 죽어가고 있었다. 내가 공께서 남기신 자취를 어루만지며 가엽게 여겨 적소의 집 앞에 옮겨 심으니 우거져 다시 소생하여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온갖 꽃이 피어났다. 오직 매화는 그윽한 절개와 고결한 성품이라 공께서 좋아하셨다. 올바름으로 기미가 서로 가까우니 매화는 공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둘이 아닌 것이다. 참으로 선비가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하고 여인이 남편을 위하듯 그 뜻이 슬퍼할만 하니 부를 지어 기린다.
불타는 고을에 병은 나돌아도
풀과 나무는 잘 자라네.
옥에 티로 남쪽에 귀양가니
매화가 미리 알았네
뿌리 내리고 꽃을 피워
외로움을 달랬구나.
얼음 같은 마음과 눈 같은 살결
서로 비추어 밝히셨네
거칠고 외진 만리 땅에
두 아름다움이 만났구나.
사월에 해 질 무렵
산새가 날아드네.
빈 뜰에는 긴 대나무
거친 울타리에 기댔구나.
슬퍼서 빛을 잃어
우수수 떨어지네.
아, 깨끗한 마음이여
너도 의리에 따르구나.
영화와 고락에도 한결같은 절개여
텅 비어서 부끄러움 없구나.
굴원이 이소를 읊었지만
공에는 이르지 못했구나.
송경은 이미 죽고
고산은 비었구나.
천 번의 봄을 만났으나
갑자기 영원히 따나갔네.
한 마음으로 고이 끌려
떨칠 수가 없구나.
왕손이 한 번 떠나니
어느 때나 돌아올까.
되 바람 구진 비에도
예쁜 꽃은 피는구나.
한 해 저문 빈 골짜기
아는 사람 그 누구인지.
말라 죽고자 스스로 맹세하니
죽어도 마음 변하지 않네.
동쪽에서 온 나그네
취하여 문 앞을 지났더니.
바람결에 실려 온 향기
꽃다운 뿌리에 울었어라.
남의 사위가 아니라 부끄럽지만
한평생 동안 사모하였네.
비록 늙어 이룬 건 없지만
전범은 여전하셨지.
원컨대 늘그막에 맺은 정이야
형제와 같았다네.
슬프게 초사를 읊으며
이에 혼을 부르노라.
주)
*여츤(旅櫬); 반장(返葬), 곧 죽은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겨 매장하는 일.
*소천(所天); 하늘처럼 받들고 의지해야 할 대상. 여기서는 남편을 뜻함.
*이소(離騷); 전국시대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이 읊은 노래.
*광평(廣平); 광평군공(廣平郡公)의 봉호(封號)를 받은 당나라 문장가 송경(宋璟). 매화를 읊은 광평부(廣平賦)가 있다.
*고산(孤山); 송나라의 은자(隱者) 임포(林逋). 고산처사(孤山處士)라고도 한다. 그는 서호(西湖)의 고산에 띠로 엮은 집을 짓고 스무 해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매화를 가꾸고 학을 기르며 홀로 살았다.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으로 삼았다. ‘매처학자(梅妻鶴子)’라는 고사가 전한다.
*옥윤(玉潤); 남의 사위에 대한 미칭. 진나라 위개(衛玠)가 악광(樂廣)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당시에 “장인은 빙청(冰淸)이요 사위는 옥윤(玉潤)이라.”는 평판을 얻었던 고사에서 유래함. 진서晉書, 위개전衛玠傳.
*초사(楚些); 사(些)는 초사(楚辭)의 초혼편(招魂篇) 구절의 끝에 붙인 어조사(語助詞)로서 초혼의 주문(呪文)을 뜻한다.
56세를 일기로 소천한 장인의 혼을 기리는 애절한 정이 넘쳐나는 「매부」는 소재 이이명이 남해에서 남긴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이명은 남해로 유배지를 옮겨온 후 남변리 죽산마을에 자신이 기거할 집을 짓고 가장사(賈長沙) 가의(賈誼)의「붕부(鵬賦)」에 나오는 말을 취하여 ‘지감재(止坎齋)’라고 편액하였다. 그는 2년 동안 남해에 유배되어 있으면서 남해의 향사들에게 충신효제(忠信孝悌)의 길을 가르쳤다.
매화나무 두 그루를 옮겨 심었던 곳, 이이명의 적사는 현재 남해대학 기숙사 주변으로 추정된다. 옛날부터 봄이면 매화가 만발했던 곳이 바로 그곳이다. 이이명과 교유했던 남해의 선비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며 그가 살았던 곳에 매원을 조성했던 것은 아닐까? 그 아름드리 매화나무는 학교를 조성하면서 모두 베어버려 이제는 볼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갑술옥사로 재기용 그리고 신축옥사로 다시 남해로 유배오다
인현왕후 폐비를 후회하고 있던 숙종은 노론계의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을 중심으로 하는 폐비 민씨 복위운동의 손을 들어주었다. 김춘택 등 수십 명을 국문하던 민암과 판의금부사 유명현을 귀양보내고 영의정에 남구만, 좌의정에 박세채, 우의정에 윤지완을 기용하였다. 그리고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인현왕후를 6년만에 복위시켰다. 1694년 갑술옥사를 계기로 남인은 영원히 정권을 잡을 수 없었다.
이때 이이명도 풀려나와 호조참의로 재기용되었다. 하지만 1698년 대사간으로 재직할 때 형 이사명의 죄를 변호하다가 공주로 두 번째 유배되고 말았다. 이듬해 유배에서 풀린 후 1701년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1706년 우의정, 1708년 좌의정 등의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승지와 사간의 배석 없이 이루어진 1717년(숙종 43)의 정유독대는 사실상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경종]가 아닌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영조]으로 왕권을 교체하려는 숙종의 마음을 좌의정이었던 이이명에게 전달하는 자리였다.
독대 직후 야당이었던 소론의 영수 영중추부사 윤지완은 82세의 노구로 와병 중임에도 관을 들고 상경하여 독대를 격렬히 비난했다. 이이명은 숙종의 건강을 이유로 세자가 대리청정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대리청정을 하는 동안 세자의 자질을 빌미삼아 세자를 교체하고자 하는 의도로 받아들인 소론은 위기를 느꼈던 것이다.
세자는 부왕과 노론이 자신을 죽이기 위한 음모라는 사실을 직감했는지 훌륭하게 정무를 처리하여 노론에게 꼬투리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리고 3년 후 숙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경종은 병으로 정사를 제대로 돌보기 힘들었다. 노론은 숙종의 유명을 받들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 연잉군은 왕위를 탐하지 않는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왕세제 책봉을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론의 주장대로 경종 즉위 1년만인 1721년 연잉군은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노론은 또다시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왕세제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나섰다. 경종은 노론의 주장대로 비망기를 내려 대리청정을 허락했다. 우의정 조태구를 비롯한 소론은 대리청정을 취소하라는 간언과 상소를 올렸으며, 왕세제 연잉군도 네 번이나 대리청정 회수를 청하였다.
연잉군마저 대리청정의 회수를 청하자 노론의 중신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경종은 자신의 말을 쉽게 번복하기 어려워 병이 언제 나을지 모르니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하교를 다시 내렸다. 왕의 체면상 대리청정 명령을 회수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경종은 다시 노론측에서 대리청정 회수를 청한다면 모르는 척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노론측은 왕이 확고한 의지로 대리청정을 원한다고 믿고 그대로 따르고자 했다. 경종은 소론의 조태구를 불러 대리청정 파기를 지시했다. 조태구는 1717년 세자의 대리청정은 숙종이 연로하고 병이 중해 부득이 했지만 경종은 34세로 젊고 즉위한 지 1년밖에 안되니 대리청정은 부당하다고 극간했다. 김일경 역시 세제의 대리청정은 나라를 망칠 죄라는 신축소로 노론을 탄핵했다.
대리청정 요구에 이은 회수, 다시 대리청정은 준비하다 번복하는 등 갈팡지팡했던 노론에 대해 소론측은 역공을 시작했다. 그 결과 노론 4대신으로 불리는 이이명은 남해도로, 김창집은 거제도로, 이건명은 고흥 나로도로, 조태채는 진도로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1692년 남해로 유배지를 옮겨 와서 2년을 살다 1694년 갑술옥사로 재기용된 이이명은 남해에 첫발을 디딘지 29년 만에 다시 남해로 돌아왔다. 34세의 젊은 나이에 남해읍성 동쪽 죽산마을에 지감재를 지어 남해현의 향사들과 교유했던 이이명은 환갑이 지난 63세에 다시 돌아와 그 자리에 습감재를 지었다.
29년 전 이이명과 교유했던 남해의 향사는 물론 그의 학문과 인품을 아는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향사들에게 효제충신의 학문을 가르치면서 남해에서의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봉천 직강공사로 파괴되었지만 죽산마을 봉천 물가에 용왕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었다. 옛날 어느 정승이 이 마을에 귀양와서 자주 앉았다가 가곤 해서 정승바위로도 불린다. 이 바위는 소재 이이명의 적거지로 추정되는 남해대학 동쪽 끝자락 동미산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아마도 그 정승이 소재 이이명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임인옥사로 죽임을 당한 이이명의 사당 봉천사와 묘정비를 세우다
1722년 3월, 목호룡은 삼급수[칼, 독약, 폐출]로 경종을 시해하려는 역적들이 있다는 고변을 했다. 목호룡은 역모에 가담한 자로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 이사명의 아들 이희지,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 김만기의 손자 김민택, 김만중의 손자이자 이이명의 사위 김용택, 김춘택의 사위 이천기 등 노론 명가의 자제들을 지목했다. 자식들의 역모를 부모가 몰랐을 리가 없다는 이유로 유배된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상대세력을 뿌리를 뽑고자 했던 것이다.
목호룡은 서얼 출신으로 어려서 풍수술(風水術)을 배워 지사(地師)가 되었다. 처음에는 노론의 편에서 왕세제(王世弟 : 영조)를 옹호했으나, 신축옥사로 노론이 몰락하자 소론에 가담하게 되었다. 목호룡은 소론 강경파 김일경에게 매수되어 경종을 시해하려는 역모에 자신도 가담했다고 고변했던 것이다.
4월 17일, 이이명은 역모죄로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노량진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했다. 같은 날 김창집 역시 사형을 당했고, 이건명, 조태채도 사형을 면치 못했다. 임인옥사로 사형당한 이가 20여 명, 곤장을 맞다 죽은 이가 30여 명, 연루자로 교살된 이가 10여 명, 유배된 이가 100여 명을 넘었다. 그리고 집안의 몰락을 비관해 목숨을 끊은 부녀자도 9명이었다. 물론 이 고변이 모함이라는 사실이 1724년(영조 1) 밝혀져 목호룡은 김일경과 함께 체포되어 옥중에서 장살되었다. 그리고 죽은 후 당고개에 효수되었다.
목호룡의 고변으로 시작된 임인옥사의 판결문인「임인옥안」에는 연잉군이 역모의 수괴로 등재되었다. 처제 서덕수의 왕위 추대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택군의 추대를 거절하지 않았던 연잉군은 선왕의 유일한 혈육이었기에 무사할 수 있었으며, 2년 후 경종이 병사하자 왕위에 올랐다.
이이명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남해와 이웃 진양의 향사들은 그의 죽음을 어버이를 잃은 이상으로 슬퍼했다고 전한다. 1800년(정조 24) 한양 노량진 사충당에 봉안된 영정을 가져와 습감재와 2~3리 떨어진 죽산마을 봉천 상류에 봉천사를 세웠다. 그리고 28년 후 비문을 지어 묘정비를 세웠다. 비문은 김조순이 짓고 글은 김난순이 썼다.
봉천사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봉천사묘정비는 남해공용터미널 맞은편 봉강산 자락에 옮겨져 있다가 2011년 남해유배문학관으로 이전되었다. 봉천사묘정비는 군보호문화재 3호로 높이 높이 260cm, 폭 83cm, 두께 32.5cm의 규모다.
2012. 9. 김상철 남해유배문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