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그림자
윤동주
황혼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
하루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향으로 돌려 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 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으젓한 양羊처럼
하루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손진은 시인)
윤동주의 아우 윤일주에게 여동생을 소개해 결혼시킨 백영白影 정병욱 선생이 호를 땄다는 윤동주의 '힌(흰) 그림자'.동경 입교대학 원고지에 1940년 4월 24일자에 쓰인 시. 왜 하필 '흰그림자'였을까요? 힌트는 "오래 마음 깊은 곳에/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거리모퉁이 어둠속으로/소리없이 시라지는 흰그림자"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윤동주는 항상 자기 속에 "수많은 나"와 그것을 걷혀나가는 과정을 시로 쎴지요. 검은 그림자가 걷혀나가고 진정한 자아, 혼의 모습까지 비치는 게 백영, 즉 흰 그림자지요. 좋은 시입니다. 사진판 윤동주 시 원고를 올립니다.
아 참, 윤동주 시의 최고 전문가인 가톨릭대학교 국문과 류양선 교수에게'흰 그림자' 시에 대한 제 견해를 말씀드렸더니 다른 부분은 동의한다고 하시고, 백영 즉 흰그림자를 백의민족으로 보신다는 견해를 내놓으시네요.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