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명 가나가에 산페이[金江三兵, 또는 金江三兵衛].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한 사가번[佐賀藩]의 번주(藩主)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1598년(선조 31) '일본의 보물'로 삼고자 끌고 간 도공의 한 사람으로, 사가현[佐賀縣] 아리타[有田]에 살면서 1616년 뎅구다니[天狗谷]에서 가마를 설치하고 도자기를 구웠다.
그가 창시한 가마의 도자기는 아리타도기라 이름지어져, 아리타에서 12 km 정도 떨어진 이마리[伊萬里] 항구를 통하여 일본 전국으로 퍼짐으로써 이마리도기라는 별칭과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그에 의한 아리타도기의 창시는 일본 도자기사상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아리타 시민들은 그가 가마를 연 300주년인 1916년 비를 세우고, 1917년부터 거시적(擧市的)인 도조제(陶祖祭)를 열고 있다. 1990년에는 고향인 충남 공주시 반포면(反浦面)에 한일합동으로 기념비가 세워졌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시간은 그곳에서는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웅덩이의 물처럼 그 냥 「고여 있는 것」이었다.
간이역 같은 작은 역에 하루 몇 번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그뿐, 적 막하기 그지없는 그곳은 겹겹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이다. 폭설이라 도 만나면 꼼짝없이 갇혀 버릴 형국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에나 나옴직한 이 요새 같은 천연의 도요지에서, 고향 떠나 끌려온 조선 도공들은 야반도주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검은 기와지붕마다 푸르스름한 이끼 덮인 도자기 가게 거리를 걸으며 나는 시간의 숨결과 옛 조선 도공들의 호흡을 고스란히 느낀다.
그러면서 한편 쓸쓸하다.
왜 아리타 자기의 스승 나라인 한국에는 이런 「시간의 앙금」, 「세월의 숨결」을 찾을 수 없는가.
왜 강진, 여주, 이천은 오랜 도자기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급조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가.
왜 우리에게는 아리타가 없고 경덕진(중국의 유명한 도요지)이 없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으되 전통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리라.
대대로 천황의 어용식기와 다완을 공급해왔다는 유서 깊은 고란샤 가 있는 아리다야키의 성지 아리타.
인구 일만 삼사천에 도자기 가마만 이백여개에 이르고, 삼백여곳이 넘는 도포(도자기 가게) 중에는 13,14대를 이어온 도포가 예사로이 있는 곳.
이삼평가는 이곳에서 사백여년을 정신적 지주가 되어왔다.
도자기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임란 때 조선에 원정온 이곳 번주 니베시마 나오 시게에 의해 하카다 앞바다로 끌려온 한 조선 도공은 이곳에서 아리타 자기의 조상이 되고, 「신」으로 떠받들어진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가 발견했다는 백자광「이즈미야마 자석장」과 가마터「텐구 다니」는 물론, 그가 눕고 앉은 곳마다 모두 사적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고여 있는」 아리타에서 외부와의 통로는 기차와 전화뿐.
그나마 내가 묵은 이층짜리 장급 호텔에서는 서울과의 통화마저 용이하지 않았다.
국제전화는 송신소를 통해야 하는데 비오는 날이면 그 연결이 쉽지 않다는 것.
이럴 수가 있느냐니까 예순살쯤의 호텔주인 남자는 죄송하지만 그럴 수 있단다.
호텔 생긴 이래 국제전화를 신청 한 것은 손님이 두 번째 라는 것.
어이가 없었지만 이들은 짐짓 이런 격리와 불편 속에서 고스란히 아리다야끼의 전통을 지켜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삼평가는 그 명성이 무색하게 빈한의 냄새가 짙은 작은 집이었다.
현관문을 밀자 늙은부인이 마루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다.
벽에는 선대들의 사진과 붉은 바닥 푸른색 가문문장이며, 한국우표를 모은 액자가 걸려 있다.
작업장은 삐걱거리는 이층의 작은 다락에 있었다. 그곳에서 이삼평 13대 가네가에상은 시종 미안해 했다.
자신은 가문의 빛나는 전통을 충실히 이어오지 못했노라고.
『시대의 탓으로 돌리고 싶진 않지만….』 워낙 험한 세월을 살았단다.
그것은 이미 허다한 풍상이 지나간 그 얼굴이 말해주고 있었다.징용을 피해 국영 철도회사에 입사하였고 그 때문에 도자기 작업을 충실하게 하지 못해 죄스럽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그의 작품은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와 그의 아들이 만든 것들 속에는 조선백자의 그윽함과 순수함과 해맑음이 살아 있었다. 갈데 없는 조선 도공의 작품이었다.
그 점을 말하자 칠십노인은 얼굴이 빨개진다.
그리고 그의 늙은 아내 역시 내가 뭔가 질문을 하려하자 소녀처럼 얼굴이 빨개지며 남편의 등뒤로 숨는다.
별볼일 없어 보이는 작품마저 뼈를 깎는 고뇌 어쩌고 하며 과시하려드는 느끼한 예술가들이 득시글거리는 서울에서 온 나는 새삼 예술가의 이런 수줍음이 신선했다.
머무르고 있던 호텔 식당에서 마지막 저녁을 함께 나눌 때 노인은 수년 전 처음으로 한국에 왔을 때의 이야기를 했다.
그때 공주의 이삼평 비석을 찾아 한없이 울었다 한다.
고향 떠나와 이국에 뼈를 묻은 선조가 슬퍼서이기도 했고,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사는 자신의 신세가 슬퍼서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때 원없이 울고 나서 비로소 고국에 대한 한을 풀 수 있었노라고도 했다.
문득 「규슈 도자 문화관」의 요시나가 학예과장의 말이 떠올랐다.
이삼평과 수많은 조선도공들은 그들의 경이로운 신기술과 예술성으로「조선도공 보호구역」 안에서 대접을 받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조선인이었고 「섬」 처럼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고.
이즈미야마의수많은 무명도공비들이 그것을 얘기해주고 있다고.
이삼평 13대. 그 또한 「섬」이었다.
노인은 내가 서울에서 가져온 고추장을 너무도 맛있게 먹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왈칵 육친의 정이 솟구쳐올랐다.
조금 남은 고추장을 더 드시라고 건네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얼른 창 밖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아리타에서 돌아와 계룡산과 부여, 공주 일대를 둘러보았다.
완만한 능선과 부드럽게 그 능선을 돌아 흐르는 강.
동학사 가는 「박(씨) 정자」삼거리야산 중턱의 이삼평비에 이르러 동행한 일본인 미술가는 탯줄따라 자궁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꿈의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이 일대를 어디선가 본 듯했다.
아리타! 공주는 또 하나의 아리타였다.
그렇다. 태생지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이삼평의 비석이 서게 된 것은 바로 그의 혼이 시켜서 된 일이 아닐까.
뼈는 이역에 묻혀 이미 그곳의 흙이 되었지만 혼만은 이곳에 돌아와 깃들이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삼평 13대와 14대.
아리타에는 현재 이삼평 13대(가네가에 산페이·76)와 그의 아들인 14대(쇼헤이·35)가 함께 도예작업을 하고 있다.
살림집에 딸린 비좁은 작업장에서 조선자기의 혼을 이으려 노력하고 있다. ( 글-그림 김병종·서울대 미대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