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아들에게 ‘꺼지지 않는 빛’이 돼 준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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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10월 3일 청주교구장에 착좌한 후 청주 수동성당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어머니 이복순 여사와 함께한 정진석 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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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추기경 어머니 이복순 여사의 영결식. |
어머니는 신학교에 입학한 진석이 사제가 되고 훗날 주교가 되었을 때도 오롯이 자신의 일을 하셨다. 젊은 날의 어머니가 그러하셨듯이 말년까지 생계를 위해 부평에서 삯바느질을 쉬지 않으셨다.
그리고 틈틈이 연령회원으로 봉사하며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염을 하고 기도했다. 선교에도 열심이어서 집을 드나드는 장사꾼들에게도 점심을 차려 주고 교리를 가르쳐 주어 세례를 받게 할 정도였다.
사제가 된 아들의 생활이 궁금하지 않은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제의 삶에 사사로운 가족의 일은 방해가 될 수 있다며 아들이 사제품을 받은 이후부터는 단 한 번도 아들에게 “보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혹여 홀어머니를 둔 외아들이 사제의 길을 걷는 데 다른 생각을 하게 될까 노심초사하신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아들이 주교님인데 왜 그렇게 힘들게 혼자 사세요?” 하면 그냥 빙그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주교가 된 직후 정진석 주교는 어머니에게 특별히 감사의 선물을 전하고 싶었다.
“엄마! 혹시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엄마가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들어드리고 싶어요.”
어머니는 잠시 생각을 하다 수줍게 한마디를 꺼냈다.
“다른 건 필요 없어요. 그저 주교님이 사진 한 장 같이 찍어 주시면 좋겠네요.”
처음으로 아들 주교 옆에서 포즈를 취한 어머니는 마치 그 옛날 꿈 많던 소녀로 돌아간 듯했다. 사제수품 이후 어머니와 함께 제대로 찍은 사진 하나 없었음을 알게 된 정진석 주교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는 이날의 사진 한 장을 보물처럼 아끼며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당신의 머리맡에 두고 지내셨다.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 어머니는 노환으로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게 되었다. 급기야 혼자서 거동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제는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때가 되었던 것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워낙 싫어하셨던 어머니가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게 되니 얼마나 속상하셨을지 정진석 주교는 미루어 짐작되었다.
더욱 속상했던 것은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조금이라도 폐가 될까 봐 노심초사하셨다.
정진석 주교는 어머니를 설득했다.
“어머니! 사람이 나이 들어 병들고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평생 남을 위해 봉사하고 특별히 노년에는 연령회 봉사를 하시면서 노환이나 선종하는 분들을 가족처럼 사랑으로 돌보셨잖아요?
이제는 어머니가 조금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시면 됩니다. 다른 이가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애덕입니다.”
그제야 어머니는 1994년 부평의 살림을 정리하고 비슷한 처지의 분들이 많은 음성 꽃동네로 이사했다. 노환 중에도 어머니는 어떻게 아셨는지 “죽어서도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며 사후 안구 기증 의사를 밝혔다.
정 주교는 어머니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머니는 선종 사흘 전에도 정 주교에게 자신의 기증 의지를 다시 확인시켜주셨다.
그즈음 정진석 주교는 어머니의 상태가 나빠지셨음을 알고 어머니 곁을 지켰다. 선종 하루 전, 어머니는 정 주교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주교님! 난 내일 갑니다.”
정 주교가 놀라 어머니께 물었다.
“가긴 어딜 가세요?”
“어디긴 어디겠어요. 거기지요….”
1996년 6월 6일 오전 8시쯤 아침을 드신 어머니는 ‘잘 먹었으니 조금 쉬겠다’면서 잠을 청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말처럼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편안하게 주무시는 모습으로 정 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생전 안구 기증 의사를 밝히신 만큼 꽃동네에서 바로 적출 수술에 들어갔다.
어머니는 그렇게 로마 시대 두 눈을 잃고 순교한 성녀 루치아의 삶을 따라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보물인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고, 두 눈마저 기증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무조건 나의 편이 되어 주셨고, 아들을 위해 평생 기도해 주시던 기도 대장 어머니를 이젠 영영 안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자식에게도 어머니는 나무의 뿌리와 같은 존재였다.
그 어머니를 이제는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다는 것이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정진석 주교는 속으로 꾹 눈물을 삼키며 속으로 ‘엄마! 엄마!’ 하고 되뇌었다.
의사의 사망선고 직후 어머니의 안구 적출 수술이 시작되었다. 정진석 주교는 주변의 만류에도 어머니의 수술을 곁에서 끝까지 지켜보았다.
이 세상에서 어머니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남에게 나누며 사셨던 어머니께서 마지막 남은 몸조차 아낌없이 주고 떠나는 모습을 마음에 새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남기고 간 두 눈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빛을 줄 것이라는 생각은 정진석 주교의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마친 후 정진석 주교는 어머니의 유산을 모두 정리해 충북 증평군 증평읍 초중리에 땅을 사고 이를 청주교구에 기증했다.
그리고 이곳에 초중성당을 건립했다. 본당의 수호 성녀는 어머니의 세례명을 따 ‘성녀 루치아’를 모셨다. 그러나 정작 정 주교 본인은 훗날 추기경에 서임된 봄에야 이곳을 방문했다.
“어머니께서 살아 계신다면 무엇을 해 드리고 싶으십니까?”
2006년 추기경 서임이 발표된 직후, 발표장에 온 취재기자가 불쑥 질문했다. 정진석 추기경은 그만 마음이 아득해졌다. 그의 마음은 이미 소녀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계실 어머니께로 달려가고 있었다.
“절을 하고 싶어. 끝없이 많이….”
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