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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사회적 합의’, ‘정치적 중립성’ 등 이유로 광고 불승인
광고관리규정 개정하라는 인권위 권고도 거슬러
“인권에 중립은 없다” 성토의 자리 열려
서울교통공사(아래 공사)의 반인권적 행태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 장애인 지하철 시위를 상대로 여론전을 펼친 정황이 담긴 문건이 밝혀지기도 한 공사는,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와 관련된 지하철 광고 게시를 불허해 논란을 빚어왔다.
공사는 ‘사회적 합의’가 안 된 사안에 대해서는 광고를 허용할 수 없다는 내부규정을 두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아래 인권위)는 해당 규정을 개정할 것을 권고했으나, 공사는 인권위 권고를 거슬렀다. ‘정치적 중립성’을 이유로 세월호참사 관련 광고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에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아래 무지개행동), 416 해외연대 등 인권단체들은 30일 오전 11시 서울시 성동구 공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사에 광고관리규정을 개정할 것을 촉구했다.
- 엄연한 존재에 대해 ‘사회적 합의’ 운운하는 공사
서울교통공사의 광고관리규정 별표 제1호 서식의 체크리스트 평가표 일부. 사진 국가인권위원회 결정문 캡처
공사의 광고관리규정 별표 제1호 서식의 체크리스트 평가표는 의견 광고에 대해 공사가 점검해야 할 사항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중 문제가 된 게 ‘의견이 대립하여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라는 항목이다.
해당 항목은 성소수자 관련 광고 게시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해 8월, 변희수 하사의 복직과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아래 공대위)는 “대한민국을 위한 헌신, 차별할 수 없습니다―변희수 하사 복직 소송, 역사와 시민이 지켜보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담긴 광고 게시를 신청했으나, 공사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고 변희수 하사의 복직 소송 승소를 기원하는 광고. 광고 오른편에는 군복을 입은 변 하사의 모습이 보이고, 왼편에는 “대한민국을 위한 헌신, 차별할 수 없습니다―변희수 하사 복직 소송, 역사와 시민이 지켜보고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사진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공사는 불승인 사유를 정확히 설명하지 않다가, 인권위 조사 과정에서 “(광고 게재 시) 소송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 공사의 중립성 훼손 가능성이 있으며, 성 이념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성소수자 차별을 반대하는 광고를 사회적으로 합의가 안 됐다는 이유로 반려했다고 실토한 것이다.
김형남 공대위 활동가는 당시를 회상하며 “공사의 이름으로 걸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공사에 광고 걸었다고 홍보해달라 한 것도 아닌데 무슨 중립성을 해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면서 “사회적 합의가 다 된 내용을 왜 돈 들여 광고하겠나”라고 말했다. 김 활동가는 “지하철은 모두의 공간인 만큼 모두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곳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서울교통공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사람들. 현수막에는 "인권에 중립은 없다! 서울교통공사는 광고관리규정 개정하라!"고 적혀 있다. 사진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한편 인권위는 지난해 10월 ‘사회적 합의’ 항목을 개정할 것을 공사에 권고했다. 인권위는 이 항목이 자의적으로 해석돼 사회적 소수자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여지가 있다고 봤다.
인권위 권고 3달 뒤인 지난 1월, 공사는 지적받은 항목을 삭제하는 대신 ‘소송 등 분쟁과 관련 있는 사안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가’, ‘공사의 중립성 및 공공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가’ 항목을 신설하는 식으로 개정 중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인권위는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우려가 여전하다”면서 ‘권고 불수용’으로 판단한다고 23일 공표했다. 이후 공사는 광고관리규정을 인권위 권고대로 다시 개정하겠다고 밝혔지만, 활동가들은 권고가 제대로 이행될지는 미지수라고 입을 모았다.
이호림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은 “그동안 공사가 보여준 태도에 비춰볼 때 우려와 불신이 앞선다”면서 “공사는 허울뿐인 선언이 아닌 실제 행동으로 인권과 공공성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책임을 다하라”고 촉구했다.
- 최근에는 세월호 광고 거부… 인권 광고 불허의 오랜 역사
이호림 집행위원의 우려는 그간 공사의 행보에서 비롯됐다. 공사는 인권위 권고 이후인 지난 2월, 416 해외연대가 신청한 세월호참사 8주기 추모 광고 게시를 불허했다. ‘공사의 정치적 중립성’을 해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해당 광고에는 “얘들아 잘 지내니?―지금도 알고 싶습니다, 왜 구하지 않았는지. 진실을 밝히는 일, 살아있는 우리의 몫입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이 광고는 4월 16일을 2주 앞둔 현재도 여전히 게시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참사 8주기 추모 광고. 광고 왼편에는 팽목항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있는 단원고 학생들이 보이고, 오른편에는 “얘들아 잘 지내니?―지금도 알고 싶습니다, 왜 구하지 않았는지. 진실을 밝히는 일, 살아있는 우리의 몫입니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사진 416연대
416 해외연대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입장문을 통해 “진상규명을 요청하고 기억을 함께하자는 광고는 인권 광고인 동시에 공익 광고”라며 “‘정치적’인 것을 불허한다는 공사의 심의규정은 인권침해”라고 비판했다.
공사의 인권 광고 불허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2018년, 숙명여자대학교 학생들이 여성에 대한 편견을 해소하고 불법촬영에 반대하는 광고를 지하철에 게시하려 하자, 공사는 ‘양성평등 광고는 민원이 많이 들어온다’는 답변을 내놨다.
2020년에는 무지개행동이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을 맞아 “성소수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담긴 광고 게시를 신청했으나 공사는 이 역시 반려했다. 해당 광고는 인권위 진정과 공사의 재심의를 거치고서야 지하철역에 걸릴 수 있었다.
“공사의 광고 게시 불허는 단순히 사회적 소수자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 아닙니다. 불허된 광고의 뒤에는 이 사회의 차별적이고 부정의한 구조가 있었습니다. 비장애인 중심, 선주민 중심, 비성소수자 중심, 남성 중심의 제도와 인식으로 인해 이미 차별의 피해를 겪고 있는 이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낸 것입니다. 때문에 (공사의 광고 게시 불허는) 표현의 자유 침해일 뿐만 아니라 차별의 구조에 동참한 것입니다. 공사의 중립은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 권리,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할 권리, 애도할 권리를 묵살한 토대 위에 선 것입니다.” (지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인권을 말할 때 중립성을 얘기하는 것은 기만”이라며 “공사는 인권의 문제를 ‘분쟁적 사안’이라며 회피할 것이 아니라, 인권보호와 인권침해 예방의 편에 분명히 서서 공공기관으로서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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