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일행은 14번 국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통영 미륵도에서 출발하여 고성-창원-진해-김해-사상-구포다리를 거쳐서 부산역에 도착하는 300여 리의 긴 여정이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렬종대로 아무도 먼저 말을 하는 친구가 없다.
비포장 도로 위로 짐을 가득 실은 트럭이 뿌연 먼지를 휘날리며 지나갔다. 손으로
입을 막아 보지만 메케한 먼지가 땀이 범벅된 얼굴에 내려앉는다.
가로수인 미루나무 이파리는 미동도 없다. 귀가 따갑도록 매미의 울음소리가 굉음을 쏟아내며 정적을 깨트리는 8월 초순의 하오이다.
내리쬐는 뙤약볕은 숨을 컥컥 막히게 했지만 아랑곳없이 묵묵히 앞만 보고 길을 걷고 있을 뿐이었다. 통영시와 고성군의 경계지역 쯤 도착했을까?
고개 마루에 검문초소가 보였다. 눈치를 살살 보며 맞은편으로 해서 통과하는 중에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전투경찰 아저씨가 손짓으로 불렀다. 길을 걷다가 고추 몇 개와 늙은 오이 서리한 일 밖에 없는데 왜 부를까? 생뚱한 마음으로 다가갔다. 그때 초소 안에서 사복을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입가의 야릇한 미소를 띠며 어디서 왔으며 행선지를 물었다. 눈초리가 매서웠다. 모두 신분증을 보자고 했다. 신분증이라 학생증을 꺼내 주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안에 있는 것 다 꺼내 보아라고 했다. 우린 학생신분이고 지금 부산으로 가는 길이고 최종 목적지는 부산이다. 지금 무전여행 중인데 왜 그러냐고 따졌다. 전투경찰이 총구로 배를 툭툭 치며서 ‘까라면 까지 왜 말이 많으냐’면서 화를 벌컥 내었다.
투덜대며 잡동사니 살림살이 물건을 다 꺼내 펼쳤다.
사복을 입은 사내가 “햐, 이넘들 봐라, 영창감이네 이거...”
좋은 먹이감을 본 짐승 같은 똥폼으로 침을 삼켰다.
A형 군용텐트와 판초우의를 집어 들고는 우리를 번갈아 보면서 어디서 훔쳤느냐고 눈을 부라렸다. 민간인이 군수물품 소지하거나 사용하는 것 일제 단속기간에 잘 걸렸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시에는 사제용 텐트는 비싸고 시중에 잘 판매하지 않아 거의가 군용텐트를 구해서 검은색으로 염색하여 갖고 다녔다. 학생증과 텐트를 압수하고 영창에 보낸다고 엄포를 놓았다. 또 학교에 연락하여 정학을 묵도록 하겠다며 전투경찰에게 본부에 연락해서 호송차를 보내라고 지시를 하는 듯 했다.
뙤약볕 아래서 호송차가 올 때까지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정말 그렇게 큰 잘못 한 게 맞는가? 간첩도 아니고, 전과자도 아닌데...,의문도 생기고 겁도 났다. 무엇보다 텐트와 판초 우의를 빼앗기며 3-4일을 어떻게 야영을 하며 또한 부산까지 어떻게 걸어간단 말인가? 더욱이 동네 선배인데 애걸복걸 빌린 물건인데 여기서 빼앗기며 말도 안되지...,불안과 초조, 그리고 난관에 빠졌다. 둘 중에 그래도 좀 순해 보이는 전투경찰에게 사정을 해봤다. ‘아저씨도 집에 가면 우리 같은 동생이 있잖는가요?’ ‘부산까지 걸어가야 되는데 텐트를 빼앗기며 이 벌판 어디서 노숙을 한단 말인가요?’등등 가슴을 아프게 하는 설득력이 먹혀들었는지 “저 보안대 중사님에게 사정을 이야기 한번 해 볼께”라며 초소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다 나오더니만 “야, 너거들 비상금 가지고 있는 거 얼마 있느냐”고 물었다. 비상금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 할 수 없지 뭐 본인도 모르겠다고 했다. 이제는 둘이서 합세하여 당장에 군부대로 끌고 갈 태세였다. 귀향 첫날부터 재수 옴 붙었네. 지난 3일간은 해방된 마음으로 꿈결 속에 보냈는데 무슨 변고란 말인가! 한쪽 구석으로 가서 비상대책회의를 했다. 이바구 해봤자 암담했다. 젊은 혈기에 한판 붙을까, 우린 다섯이고 저들은 둘인데, 죽든지 살든지! 아니지, 이건 아니지 참자. 결론은 텐트와 판초를 빼앗기며 안되니까 각자가 꼬불쳐 놓은 비상금 다 털자고 했다. 잡혀가는 것 보다는 비상금을 미끼로 쓰자고 했다. 거금 860원이 나왔다(천 원짜리 지폐가 나오기 전이었다). 우린 서로가 얼마가 있는지도 모르고 비상금은 각자가 알아서 준비했다. 두어 시간이나 시달리다 드디어 해결되었다. 그들은 우리의 전 재산을 인 마이포켓하고선 마지못해 큰 선심을 쓴 듯 우리를 풀어 주었다. 대신에 지나가는 직행버스를 잡아 다음 면소재지까지 십 몇 킬로를 무임승차로 태워주었다.
모두가 마음이 무거웠다. 과연 부산까지 아니 집에까지 무사히 귀향 할 수 있을까?
어깨에 진 배낭이 점점 더 무게를 가하는 듯 발걸음이 무거웠다. 귀향 길 첫날의 야영은 고성군 외곽을 벗어나서 어느 동네 어귀 느티나무아래 평상에 짐을 풀고는 마을 이장댁을 찾았다. 무전여행 중인데 느티나무 아래 쉼터에 하루 밤 텐트를 쳐도 되는지와 식수를 좀 달라고 하니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는 백발의 이장님은 흔쾌히 그러하라면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다. 펌프 물을 마음대로 쓰고 등물도 하라면서 애처롭게 바라다보았다. 이장댁 할머니가 된장과 애호박, 풋고추등 반찬거리를 함지박에 이고 와서는 신기한 듯 텐트 안을 구경했다.
낮의 고통과는 정반대로 따뜻한 시골 인정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 새벽 6시 기상, 대충 아침밥을 해먹고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국도 이정표를 따라 걷고 걸었다. 가다가 다리 아프면 가로수 그늘 밑에 쉬었다가
다시 걷고, 지름길도 모르고 그냥 제일 쉽고 편한 코스가 국도를 따라 가는 것이었다. 창원시를 10킬로 못 미쳐 쯤에 비를 만났다. 비를 다 맞으면서 걸었다. 날이
어두워지는데 동네가 보이지 않았다. 몇 킬로를 더 가자, 겨우 불빛이 보여 찾아갔다. 왜냐하면 식수도 좀 구하고 가능하면 동네어귀 공터나 비어 있는 마을의 초당방이 있으면 하루 밤 유숙하기 위해서였다. 더운 날, 길을 걷다 보며 제일 힘든 것이 생수를 구하는 것이었다. 도랑물을 그냥 먹을 수도 없고, 가게에서 사마실 돈도 물론 없었다. 물통에 받아 비상식수도로 들고 다녔는데 금방 동이 나서 동네를 지나칠 때마다 공동우물이나 손으로 젓는 펌프수도가 있으면 사정해서 얻어 쓰곤 했다. 마을 이장댁을 물어 찾아갔다. 이장은 출타 중이고 아들이 있었다. 비 맞은 거지꼴로 사정을 이야기 하니 다 듣지도 않고 대번에 거절했다. ‘동네 다 베린다’며 나가달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먹을 식수를 좀 얻어 동네입구 다리 밑에서 텐트를 치도 못하고 비박을 했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빗소리와 개구리 울음소리가 합창으로 들려왔다. 젖은 옷으로 인해 잠이 올 리도 없는데 그놈의 모기까지 덤벼들었다. 모두가 몇 방 씩 물려 벅벅 긁어대느라 밤새 잠 못 잤다. 새벽 동이트기 전에 라면을 끓어먹고 다시 출발했다. 길가다 양파나 고구마 수확을 하는 농가가 있으며 잠시 거들어 주고 새참도 얻어먹기도 했다.
창원에서 진해로 넘어 가는 길이었다. 꼬박 이틀이나 걸었으니 슬슬 체력이 딸리기 시작했다. 길 옆 고구마 밭이나 포도 서리도 이제 시들하고, 하루 종일 먼지 마시는 것도 한도가 있지. 한두 명, 신세타령이 나왔다.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느냐며 불평불만도 나왔다. 각자가 분담한 일, 즉 식사를 하고 난 뒤 식기 닦는 것도 서로 미루기도 했다. 군기가 좀 빠지고 사기가 떨어질 조짐이 보였다.
갖고 간 쌀과 된장, 라면도 바닥을 보이는 것 같았다. 아직 갈 길은 반 정도 밖에 못 왔는데..., 슬슬 불안이 다가왔다. 갑자기 꾀가 하나 생각났다. 기차도 공짜로 탔으니 버스라고 공짜로 타지 말라는 법이 없잖아. “야, 모두들 내가 하는 대로 따라만 해라, 아무 소리 말고. 내가 버스를 공짜로 태워 줄께”라며 친구들을 꼬드겼다. 느슨한 분위기도 반전할 겸해서. 길을 가다 배낭을 모두 내려놓고 편히 쉬어라고 하고선 지나가는 직행버스를 기다렸다. 마침 직행 버스 한 대가 먼지를 폴폴 날리면서 다가왔다. 앞으로 나가서 당당하게 두 손을 들어 차를 세웠다. 졸음기가 잔뜩 묻은 차장 아가씨가 허허벌판에 웬 손님인가 싶어 차문을 열어 주었다. 모두들 호기롭게 우르르 차에 올라타서 배낭을 내려놓고 좌석에 앉아 내 얼굴만 쳐다봤다. 난 모른 척 바깥을 구경하고 있었다. 곱상하게 생긴 내가 차비를 다 낼 듯 제스추어를 하면서 돈이 많은 척 시치미를 뚝 뗐다. 한 30분 쯤 달려오다 이제서야 잠이 깬 듯 빵떡모자를 쓴 차장아가씨가 돈가방을 달랑 매고 차비를 받으러 오는 것 같았다. 냉큼 일어나서 앞으로 다가가면서,
“저어, 누나! 사실은 저희들은 지금 무전여행 중인데..., 차비는 없꾸, 다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쪼끔만 태워주소...,” 갖은 미소와 애교를 부렸다.
그 이야기를 듣던 차장아가씨가 갑자기 소리를 팩 내질렀다.
“운전수아저씨! 차, 스토뿌! 스토뿌 하소!” 영문을 모르던 운전수가 아저씨 차를 끽 세우고선 웬일이냐며 뒤를 돌아다 봤다. 친구들은 죄인인양 모두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화가 난 아가씨는 배낭을 밖으로 홱 내던졌다. ‘처음부터 사정을 이야기했으면 태워 줄 수도 있었는데, 실컨 있다가 중간에 와서 이야기 한다’면서 의리없고 버르장머리가 없는 종내기들은 고생을 해도 싸다면서 배낭을 모조리 길바닥에 핑개쳤다. 우린 더 이상 할 말 없어 쭐래쭐래 내렸다. 처음부터 이야기 했다간 공짜로 차 태워 준다는 보장을 할 수가 있나. 차에서 내린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호탕하게 낄낄 웃어 제꼈다. 대신 몇 십 킬로 걷는 것을 벌었다. 버스를 공짜로 타긴 탔으니까 말이다.
힘을 비축했으니 또 다시 걸었다. 부산으로, 부산 쪽으로 향하는 해바라기 마냥 황토길 300여 리 길을 걸었다.
부산역 까지 가도 별 뾰족한 수도 없지만 좌우지간 부산까지만 가면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4박 5일 동안 걷고 또 걸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기 까지 할 정도로 심장의 피가 광풍노도와 같이 끓어오르던 시절이었다. 누가 말했던가? 젊은 날의 고생은 사서 한다고 했지.
추억은 때론 황금보다 값진 보물이라고.
여행 중의 고생은 지나고 난 뒤에는 추억이 되어 아름답다고 했지...,
힘들고 지쳐도 가장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친구들과의 우정과 고생을 함께 한
젊은 날의 아련한 추억인 1972년도의 여름, 고교 1학년 때의 이야기이다.
(끝)
後記
7박 8일 동안 무전여행을 갔다 왔더니 내 밥벌이가 날아갔다.
당시 난 입주 가정교사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부잣집 중학생 아이의 공부를 돌봐 주고 있었는데, 1주일 간 학교에서 단체로 체력단련대회에 간다고 구라를 치고 떠났었다.
그 집에 마침 한 친구가 나를 만나러 왔다가 중학생 부모 마나님에게 ‘학교에서 단체로 간 사실이 없는데요!’라고 고자질해서 들통이 났던 모양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씩씩하게 잘 댕겨 왔노라고 사모님에게 고하고 내 방에 가니 짐이 없었다. 내 짐 보따리(책)가 대문 옆 헛간에 내팽개쳐 있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짤렸다. 미련 없이 10개월 동안 기숙했던 그 부잣집을 나왔다. 무언가 후련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뙤약볕이 그날따라 정수리를 더 강하게 때렸다. 띵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