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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듯하면서 지나고 나면 빠르다고 느낍니다. 그렇게 어느덧 하순을 향하고 있습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만 아직 반에 도착하려면 한참 가야 합니다. 그 사실은 희망이면서 또한 실망이기도 합니다. ‘이제 곧’ 하는 마음과 ‘아직도’ 하는 마음의 차이입니다. 기다릴 것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면서 또한 아픔입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낫습니다. 기다릴 것이 없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잃을 수 있게 만듭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고 그래서 기다립니다. 그것은 힘든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어수선하게 연말연시를 당했기에 사실 새해 희망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이제 좀 숨 좀 돌리며 희망이라도 생산해야 할 듯합니다.
겨울의 중간지대를 지나고 있지만 그다지 춥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춥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추우면 추운 것이지요. 그런 거 따질 일이 아닙니다. 아무튼 잘 견디며 이 겨울을 지나야 할 텐데 감기가 유행입니다. 게다가 요즘 감기가 좀 질깁니다. 안 걸리는 것이 백번 낫습니다. 조심해야지요. 몸이 처지면 만사 귀찮아집니다. 의욕이 떨어지지요. 시간이 가고 안가고는 둘째 치고 힘듭니다. 그러니 몸 관리 잘해야 합니다. 한 주 버티면 긴 휴일입니다.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않습니까? 저 같은 경우는 평일이 휴일이나 진배 없으니 그게 그겁니다만 그래도 괜스레 들떠집니다. ㅋㅋ
자 신나는 일주일이 기다립니다. 건강하게 행복하게 멋진 주말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 2025년 1월 18일 김종우 목사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마태복음 24 : 6 - 8)
<시빌 워: 분열의 시대>
사람이 모이면 질서가 필요해집니다.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 권력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생각과 욕망이 다르기 때문에 조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 ‘합의’지만 수가 많을수록 합의에 도달하기 어려워집니다. 그 때 획기적인 길이 있으니 힘으로 강제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문화가 발달하면서 물리적 힘만 힘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다투고 화합하는 가운데 인간적인 특성과 아울러 이성적인 판단과 공동체 의식 속에서 법과 관습을 통하여 조직이 운용되며 발전해갑니다. 그럼에도 늘 합의가 도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힘을 가지려고 또한 유지하려고 자기 편을 만듭니다. 결국 편 가르기를 합니다. 분열이 생깁니다.
앞에서 말했지만 여러 가지 도구들이 있지만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 중에 ‘힘’ 곧 물리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반대세력이 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싸움이 일어납니다. 개인 간의 싸움이 아니라 조직 간의 싸움이고 국가 간의 전쟁으로 발전합니다. 국가 간의 대규모 전쟁도 역사상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나라 안에서조차 분열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실 권력투쟁입니다. 서로 힘을 가지려고 다투는 것이지요. 힘을 가져야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고 더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념이 달라서 남북으로 분열되었지만 사실 권력투쟁이기도 합니다. 서로가 상대방을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옛날 이 조그만 땅 한반도 안에도 삼국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 후 신라부터 고려로 그리고 조선에 이르기까지 국호는 바뀌었어도 한 나라 한 민족으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20세기 일제로부터 해방과 동시에 이념전쟁에 휘말리어 남북으로 분열이 되었습니다. 사실 언어도 하나, 역사도 하나, 문화도 하나입니다. 나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다릅니다. 대의명분보다는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길이 다릅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백성의 욕구보다는 권력을 쥐려는 사람들의 욕심이 앞서 있습니다. 지금도 좌파다 우파다 하면서 외치고 서로 비난하며 자기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국민은 좌파 우파 따지지 않고 그저 평안한 삶을 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분열로 대치하여 싸울 때 가장 큰 피해를 누가 입겠습니까? 힘과 총을 든 권력자들이 아니라 일반 백성입니다. 저들은 자기 힘을 키우기 위해 수를 늘려갑니다. 그리고 동조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여 처단합니다. 일반 국민은 누가 권력을 가지든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배 고프지 않고 평안히 살게만 해주면 권력이야 누가 가지든 상관없습니다. 사실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하여 터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결국은 백성이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싸우는 것이 목적도 아니고 권력을 쥐고자 하는 것이 목적도 아닙니다. 길이 잘못되면 결국은 원하는 평안한 삶이 보장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총을 들이대며 이쪽이냐 저쪽이냐 묻습니다. 총을 들이댄 이 사람이 이쪽인지 저쪽인지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여차하면 즉살당합니다. 온몸이 떱니다.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냥 발사합니다. 바로 쓰러집니다. 옆에서 떨며 지켜보던 동료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온몸이 뻣뻣해집니다.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자신도 당할 것입니다. 나는 여기도 저기도 아니고 홍콩 출신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바로 총을 발사합니다. 금방 또 한 사람의 친구가 쓰러집니다. 다음으로 십대 소녀 ‘제시’에게로 총이 향합니다. ‘조엘’이 나서서 말립니다. 사정을 하려는데 총이 조엘을 향합니다. 말문이 막힙니다.
순간 ‘새미’가 자동차를 끌고 달려들어 총 든 자를 밀어버립니다. 그리고 동료들을 재촉하여 차를 타고 도망칩니다. 또 한 명 쓰러져 있던 자가 일어나 마구 총질합니다. 불행히도 새미가 운전하며 총탄을 맞아 결국은 주둔군에 도착하기 전 죽습니다. 그렇게 가까운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그래도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수도 워싱톤으로 항햡니다. 한창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을 반대하는 연방군이 대통령 집무실까지 접근하였습니다. 거의 점령하려는 참입니다.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 전에 인터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상황으로 이끌었는지, 어쩌려는 것인지 알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국민을 대하는 대통령의 생각이 무엇일까?
군인들보다도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간 기자들, 바로 군인들이 저항하는 경비들과 총격전을 하며 쳐들어옵니다. 기자들을 보호해주지만 힘이 다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제시를 돕던 유명 기자 ‘리’가 총격에 쓰러집니다. 제시는 일단 현장을 소상하게 계속 촬영합니다. 드디어 대통령이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선임 군인이 막아섭니다. 마지막 기회를 줍니다. 남길 말이 무엇인가? ‘제발 살려주시오.’ 그 즉시 총을 발사합니다. 군인들이 몰려와 대통령을 밟고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제시가 그 모든 광경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목숨을 걸고 현장을 담는 종군기자들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Civil War)를 보았습니다. 마치 현재 우리를 보는 듯했습니다.
일찍 와서 억울합니까?
우리 인생의 최고최대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인도의 한 왕자가 인간의 생로병사 문제를 안고 고민하다가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고행을 합니다. 6년에 걸친 고행 끝에 깨닫고 사람들에게 법을 가르칩니다. 왕자가 성자가 된 것입니다. 석가라는 부족 가운데서 성자가 되었다는 의미로 석가모니라는 칭호를 얻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자’라는 의미로 ‘붓다’ 곧 우리말로 부처가 된 것입니다.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한 마디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空)입니다. 똑같은 결과를 짊어지고 사는데 왜 그렇게 아귀다툼을 하고 사느냐, 그러지 말고 서로 돌보며 살자고 해서 ‘자비’를 주장했습니다. 심오한 진리라고 말하는데 간단하게 요약하면 그렇다 그겁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죽음을 해결해주는 종교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 기독교만이 죽음을 넘을 수 있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이야기하고 증명하고 소망으로 주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하나님 나라 곧 영원한 나라, 우리가 영생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신앙하고 있습니까? 바로 그것을 소망하며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여러 가지 일을 하셨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 모양 저 모양 이야기를 많이 해주신 것입니다. 그 전에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비로소 하나님 나라 천국에 대해서 소개가 된 것입니다. 구약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해준 곳은 없습니다. 물론 선지자가 하늘의 광경을 본 것에 대해서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가서 살 곳으로 소개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그곳의 모습이 어떠한지 잠깐 비쳐진 것뿐입니다. 예수님처럼 천국에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또는 누가 들어갈 수 있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준 선지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곧 율법은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잘 아는 대로 그림자의 색깔이 어떻습니까? 그림자 색깔은 하나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히 10 :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 그림자의 실체가 나타나야 비로소 색깔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셨습니까? 아버지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오늘도 그 가운데 하나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 20 : 1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천국이 뭐와 같다고 합니까? 잘 보십시오. ‘집 주인’과 같답니다. 천국을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만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한 번 보았습니다. 마 13 : 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그렇지요? 천국은 사람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구죠? 집 주인 또는 좋은 씨를 뿌린 사람,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천국입니다. 왜 그럴까요? 천국은 우리 아버지가 계신 곳입니다. 이 땅에 우리 하나님이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려고 할 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지요? 삼하 7 :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누가 거할 집이라고요?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을 뭐라고 말합니까? ‘성전.’ 그렇지요?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가리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표적을 구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헐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당신이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고 말씀하지요. 예수님이 무엇을 뜻하며 말씀하시는 건지 보겠습니다. 요 2 : 19 -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뭐라고 표현한 것입니까? 성전입니다. 누가 성전이라고요? 예수님이 성전입니다. 왜요? 성전에는 누가 계십니까? 하나님이 계십니다. 어느 날 제자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해주십니다. 요 14 : 8 - 10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예수님 안에 누가 계시다고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곧 성전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법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지금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좀 이상합니다. 집 주인이 밖에 나가서 일꾼을 부릅니다. 시간이 제각각입니다. 3시, 6시, 9시 그리고 11시에도 데려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유대인의 시간을 우리에게 맞추려면 6을 더하면 됩니다. 우리 시간으로 따지면 9시, 12시,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에도 부른 것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처음 어떻게 계약을 했는가, 그것입니다. 마 20 :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그 다음 나간 것이 3시이니 처음 부른 것은 그 전이겠지요. 아마도 처음 불려 들어간 사람들은 아침 9시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하루의 일이 끝났습니다. 주인이 명합니다. 8절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나중 온 자는 오후 5시에 들어왔으니 겨우 한두 시간 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품삯을 한 데나리온 받아 갑니다. 그러면 제일 일찍 들어와서 일한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아무튼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나 겨우 한두 시간 일한 사람이나 받은 것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입니다. 당연히 불평이 나옵니다. 10 - 12절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누구 잘못입니까? 주인 잘못입니까, 품군 잘못입니까? 주인이 말합니다. 13 - 14절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처음 어떻게 약속했습니까? 주인은 그 약속을 그대로 이행하였습니까, 못했습니까? 그대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불평하지요?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비교하면 불평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신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줄 아십니까? 천국 백성은 구태여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답니다. 일단 천국에나 들어가면 되지, 뭐 열심히 일할 필요 없다, 다 똑같아, 그렇게 말합니다. 하루 종일 일하나, 한 두 시간 일하나 그게 그거야. 그렇습니까? 그래서 교회를 다녀도 그렁저렁 다니려는 사람들 있습니다. 다 똑같답니다. 우리 하나님 그런 불공평한 하나님이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릅니다. 천국에 대한 말씀이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전부 알도록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좋은 것만 쏙 빼가지고 이거다, 우기면서 신앙하면 그게 바로 이단 삼단 나가는 겁니다. 그러지 맙시다. 미련하게 신앙하지 말고 슬기롭게 합시다. 똑같이 하나님 믿어도 나뉩니다. 우리 안에서 나뉘는 것입니다.
열 처녀 알지요? 잘 아는 대로 둘로 나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자가 있고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미스 미’와 ‘미스 슬’로 나뉘지요. 둘 다 등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 25 : 1 - 3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그래서 못 들어갑니다. 차이는 기름입니다. 그런데 이 기름이 들기름인지 참기름인지 아니면 먹는 기름인지 바르는 기름인지 알아야 할까요, 몰라도 될까요? 배웁시다. 영생도 단순히 믿기만 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요 17 :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러니 알아야지요. 그냥 ‘예수 천당’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앙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구원과 영생 곧 천국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생입니다. 시 133 :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복이 무엇이라고요? 영생입니다. 예수님도 누누이 약속하신 복이 바로 영생입니다. 우리 잘 아는 성구 있습니다. 요 3 :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을 왜 보내셨다고요? 영생을 얻으라고. 요 6 :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아들 곧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무엇을 주시려 합니까? 영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요 10 :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은 바로 영생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인들 가운데 과연 영생만을 위해서 교회 다니며 신앙하는 신자가 얼마나 됩니까? 꾸준히 교회를 다니며 단순히 영생만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더구나 영생이 당장 눈앞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오늘 당장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좀 더 나은 집에서 살고 싶고 좀 더 좋은 차를 가지고 싶어합니다. 여행도 다니고 싶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지내고 싶습니다. 좀 고상하다면 이 사람 저 사람 도우며 살고도 싶습니다. 그저 나 혼자 잘먹고 잘살기만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자면 더 벌어야지요. 어찌 하면, 무엇을 하면 좀 더 벌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복잡해집니다. 물론 최종 목표는 영생입니다. 이루어질 때까지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또 하나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생각해봅시다. 나는 나이 20에 처음 교회 나가게 되었습니다. 진작부터 예수님을 알고 믿었습니다. 구원과 영생의 확신을 가지고 즐겁게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세상에서 자기 할 것 다하고 자기 놀고 싶은 대로 다 놀다가 나이 80 다 되어서 겨우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함께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신경질 납니까? 우리 지난번에 들은 말씀 있지요? 유산 미리 받아서 창기와 다 먹어버린 동생이 거지꼴이 되어가지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동생을 위하여 잔치를 엽니다. 신경질 나지요?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시는지 이해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가면 영생의 길이 열립니다. 하늘의 복은 바로 영생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일찍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생 끝자락에 가서야 예수님을 믿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 이유를 잘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늦게서야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게 되었을까요? 누구 탓입니까? 보겠습니다. 마 20 : 6 - 7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는 자기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물론 전해주었는데 그 때는 깨닫지 못해서 물리쳤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예수님 말씀하신 것은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 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이지요. 누구 탓입니까? 주인 탓입니까, 우리 탓입니까? 신경질 낼 일입니까? 도리어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입을 닫고 있으면 듣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듣지를 못합니다. 언제 교회 나오겠습니까? 롬 10 : 14 - 15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들어야 할 사람이 들을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누가 전파하겠습니까? 먼저 부름 받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복은 영생입니다. 일찍 왔든 늦게 왔든 상관없습니다. 사실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동생이 세상에서 실컷 놀다가 다 늙어서 예수 믿게 되었다고 신경질 납니까? 천만다행이라고 기뻐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혹시 다른 집안 식구가 그랬다면 신경질 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맙시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우리 하나님도 의인 99명보다 죄인 하나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 늦게 와서 영생의 복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미안하고 죄송스럽습니까?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 이를 악물고 수고하지 않겠습니까? 한 시간 남은 그 일하는 시간에 몇 배 더 수고할 수도 있는 줄 압니다. 일찍 왔다고 빈둥대다가는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보겠습니다. 마 20 :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그러니 일찍 왔다고 한가하게 지내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 끝까지 충성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추가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다 똑같으면 신나게 놀다가 믿어도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일찍부터 열심히 일한 사람과 나중에 한 시간만 일한 사람과 형평성이 있어요, 없어요? 우리 하나님 그렇게 불공평한 분이 아닙니다. 영생의 복은 함께 누리지만 천국에서도 분명 많이 수고한 성도와 적게 수고한 성도 간의 차이는 있겠지요, 간단히 예를 들어서 사도 바울과 저와 똑같이 영생을 누린다면 말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저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서 영생의 복을 누려야 마땅합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당연히 그렇게 만드실 것입니다. 눅 19 : 15 - 19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보았지요? 똑같이 한 므나를 받았습니다. 영생의 복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복을 가지고 일한 내용은 다릅니다. 누구는 열 므나를 남기고 누구는 다섯 므나를 남겼습니다. 그렇다면 누리는 내용도 달라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시 62 : 12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우리가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욥 34 : 10 - 11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그렇지요? 공의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가 여기서 일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일하는 것에 소망이 있는 줄 압니다. 고전 15 :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아멘!
우리가 일하는데 단지 그 날 먹고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과 무엇인다 이루기를 바라면 일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목표를 가지고 살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일하는 동기가 다르고 일하는데 쏟는 힘이 달라집니다. 사람은 목표 지향적인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일반 동물들처럼 그날 그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창 1 :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우리의 목표가 있습니다. 생육, 번성, 충만, 정복 그리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다시 확인합니다. 하나님은 육(肉)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애 많이 낳고 번성하라는 뜻으로만 생각하면 하나님 백성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을 정복해야 하는지, 무엇을 다스려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 때문에 인생들이 자연을 정복하느라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을 훼손했다고 하나님 탓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니 엉뚱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은 육을, 이 땅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복하려면 싸워야 합니다. 무슨 싸움입니까? 엡 6 :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영적인 전쟁이고 처음 아담을 죄 가운데 빠뜨렸던 뱀과의 전쟁입니다. 즉 사단과의 전쟁이란 말입니다. 마지막 때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모세가 장막을 지었듯이 성전을 지어야 하고 예수님이 성전이 되셨듯이 우리가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사단과 싸워 정복하고 하나님 거하실 성전을 지어야 하고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도록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오셔서 통치하실 것입니다. 과연 바라던 천국 영생이 이루어집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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