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 8. 29~1910. 8. 29
친일파 세력이 일본과 결탁해 국정을 농단하여 백성은 의지할 곳 없던 1910년 벽두. 대한매일신보(2월 5일자)는 서울로부터 천여리나 떨어진 평북 용천(龍川)의 소요를 보도한다.
"본월 2일에 평안북도 용천군 양시(楊市)에서 여러 인민들이 재무서 관리에 대하여 장시세(場市稅)를 반대하는데, 용암포 경찰서와 일본 헌병대가 합력하여 인민을 해산하고 인민 중 6~7명을 체포한지라. 그 이튼날 오후 면민 600명이 회동하여 경찰서를 습격코자 하였다."
이보다 며칠 전 인근 순천에서는 더욱 심각한 일이 있었는데, 자세한 내막은 다음과 같다.
"지난 19일 순천군 장시세를 관리하는 조명준이 장시에 나가 인민을 강제로 독촉함이 성화인지라 인민들이 일제히 모여 질문하되 '이 세를 어떤 관청의 명령으로 거두느냐' 한즉, 조씨가 '재무서장 일인 야택(野澤)의 지시라' 함에, 인민들이 '그러면 야택에게 묻겠다' 하고 조씨와 함께 재무서로 가서 야택과 주고받다가 야택이 별안간 총을 쏘아 인민을 위협하는지라, 인민들이 더욱 분격하여 돌팔매를 던지니 일인들이 총을 쏘아 삼십분 동안이나 큰 전쟁이 되었다."(2월 3일자)
이 일로 일본인 7명이 죽고 재무서가 불탔으며, 한국인 중에 죽은 사람이 10명, 상한 사람이 십여명 되었다. 곧 평양에서 헌병대와 경찰이 파송되어 한인 96명이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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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터(1903년경 동대문 밖 시장풍경)
두 사건의 발단은 1909년 10월경 신설된 시장세(市場稅)였다. 그것은 요즘으로 치면 영업세로, 거래액의 1%를 세금으로 물려 '백일세(百一稅)'로도 불렸다. 그런데 어엿한 가게를 열어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이리저리 떠도는 장돌뱅이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하니, 상인 입장에서는 이 장에서도 내고 저 장에서도 내야 할 판이었다. 당시 신문은 "세를 낼 수 없어 애걸하는 저 백성이 무슨 죄가 많아 저렇게 혹독한 화를 당하는고"라고 한탄했다.
그런데 사태의 본질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었다. 비록 서울이라고는 가보지 못한 무지렁이라 할지라도 수년 전부터 일본인들이 이 땅을 유린하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서북은 특히 반일감정이 드높았던 곳이다. 민중사상가 함석헌 옹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 바로 그 무렵의 용천이었다. 인근 태천군 상인들은 일인의 하수인이 된 시장관리자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한국 사람아 너희 직분을 사직하라. 만일 죽고 싶으면 관리자 됨이 무방하나 관리자의 부모 처자된 자도 이것을 깊이 생각하라."(2월 20일자)
순천·용천에서 일어난 일은 선천·안주·박천·영변·신의주·벽천 등 평안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보은 등 남쪽 지방에서도 상인들이 뭉쳤다. 장터(1903년경 동대문 밖 시장풍경)는 원래 그런 곳이었다. 그곳은 장돌뱅이의 애환과 푸성귀 파는 아낙의 고달픈 인생살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람을 타고 오는 소문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이었고, 민중의 소리가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곳이었다. 꼭 9년 후 장터는 경제적 저항에서 정치적 저항의 진원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