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바스 지역(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중 루간스크주를 '해방'한 러시아군, 정확히 말하면, 러시아군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 민병대, 체첸전사, 의용군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승리의 기쁨도 잠시, 다음 공격 목표로 향하기 전에 전력을 추스리고 있다. 다음은 어디일까?
군사전문 매체 등 현지 언론에는 '루간스크 해방군'의 탱크가 어디로 향할 것인지, 미사일의 공격 표적이 어디인지 등에 관한 전망 기사가 늘어나고 있다. 어차피 전쟁 중의 세부 작전 계획은 비밀에 속하는 법. 현지 군사 전문가들의 머리를 빌어 러시아군의 진격 루트를 예측해 보자.
브즈글랴드(시각):돈바스 전투 승리이후 러시아군은 어디로 진격할 것인가?/얀덱스 캡처
(서방) 외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전쟁연구소(ISW)는 6일 일일 상황 보고서에서 러시아가 전쟁 133일 만에 처음으로 점령지 확대를 주장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일 브리핑을 통해 매일 새로운 영토 확장(러시아식 표현으로는 정착촌 населенный пункт 점령)를 주장해온 러시아 국방부가 지난 3일 리시찬스크를 완전히 포위한 뒤로는 이런 주장을 하지도, 지상군 움직임도 공개하지 않았다고 했다.
미국식 ISW 분석의 맹점은 이런 것이다. 예컨대 러시아군의 리시찬스크 (포위후) 점령은 국방부 대변인의 입(일일 브리핑)이 아니라,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의 푸틴 대통령 대면 보고를 통해 발표됐다. 국제우주정거장(ISS)에 있는 러시아 우주인들이 '리시찬스크 해방'을 환영하는 이벤트 사진이 현지 언론에 대서특필될 때, ISW는 (러시아 국방부 대변인이) 지상군 움직임도 발표하지 않았다고 분석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과 쇼이구 국방장관의 대면 회의/사진출처:크렘린.ru
리시찬스크 점령 이후 러시아 지상군의 움직임이 일단 멈춘 건 맞다. 군 최고 사령관인 푸틴 대통령이 쇼이구 장관으로부터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리시찬스크 해방군'(중앙 군단과 남부 군단)에게 휴식 시간을 주고 전력을 재정비하도록 명령했기 때문이다.
휴식이 끝나면, '리시찬스크 해방' 러시아군은 국경(우크라이나로서는 주경계선)을 넘어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으로 깊숙히 들어갈 것이라는 게 일치된 분석이다.
전제로 깔아야 할 것은 소련 시절부터 산업 지대가 몰려 있는 도네츠크주(DPR)는 공격 부대(러시아군)에게는 진격이 쉽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산업 시설의 각종 공장과 기계장비, 건물 등이 은폐·엄폐물로 활용되면 점령 속도가 느릴 수 밖에 없다. 이는 아조프스탈 등 제철및 야금 공장 등이 몰려 있는 마리우폴을 공략할 때 확인됐다.
또 우크라이나군이 지난 2014년 이후 DPR 민병대(군)와의 대치 지역에 견고한 방어 요새와 진지를 구축해둔 것도 러시아군의 진격을 더디게 만드는 요인이다.
우크라이나군의 방어 진지/사진출처:우크라이나 합참 페북
러시아 연합군이 '돈바스 해방'을 위해 기필코 돌파해야 하는 우크라이나군의 방어 라인은 슬라뱐스크와 크라마토르스크를 잇는 도네츠크주의 북서부 핵심 산업 지대다. 슬라뱐스크는 지난 2014년 돈바스 내전 발발 당시, 총성이 가장 먼저 울린 상징적인 곳이기도 하다. 친러 성향의 러시아계 주민들이 4월 12일 슬라뱐스크 시청을 점령하면서 돈바스 내전이 시작됐으나, 친러 무장세력은 우크라이나 정부군의 반격에 밀려 후퇴했었다.
인근의 크라마토르스크는 돈바스 사태이후 우크라이나 정부의 통제를 받는 도네츠크주의 주도 역할을 하는 도시다. 그래서 우크라이나가 두 도시를 러시아군에게 빼앗긴다면, 그 심적 타격은 무시할 수 없다. 거꾸로 러시아군에게는 '도네츠크를 해방한 것과 같은' 짜릿함을 느낄 것이다. 양측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가 또 슬라뱐스크-크라마토르스크에서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러시아의 '리시찬스크 해방군'도 이 곳으로 달려와, 지금까지 도네츠크주 일원에서 작전을 벌여온 러시아·DPR 연합군과 함께 슬라뱐스크-크라마토르스크 포위 공격에 나설 것으로 거의 확실시 된다. 러시아 국가두마(하원) CIS 문제 담당위원회의 빅토르 보돌라츠크 제1 부위원장은 '리시찬스크 점령' 이튿날인 4일 러시아·LPR 연합군이 도네츠크주 영토를 수복할 수 있도록 DPR군을 돕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의 목표가 돈바스 지역, 즉 루간스크주와 도네츠크주의 해방을 내세웠으니 당연한 후속 조치다.
브즈글랴드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선발 부대는 이미 국경(주 경계선)을 넘어 도네츠크주의 세베르스크 인근에 이르렀다. 수도 키예프(키이우)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내려온 또 다른 러시아군은 슬라뱐스크에서 7~10㎞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다고 한다. 슬라뱐스크-크라마토르스크 전선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는 셈이다.
올렉산드르 곤차렌코 크라마토르스크 시장은 7일 페이스북에 "도심이 미사일 공격을 당하고 있다"며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했고, 바딤 라익 슬라뱐스크 시장도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확인했다.
러시아군이 지난 3월 말 키예프와 수도권에서 병력을 뺀 뒤 2단계 작전 돌입 발표와 함께 돈바스 공략에 집중하면서 변경한 군사작전은 '대규모 폭격(혹은 공습) 후 지상군 진입'을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서방 외신은 이를 '러시아의 초토화 작전'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이게 군사작전의 기본일 지도 모른다. 미군 중심의 다국적군이 1, 2차 이라크 전쟁(1차는 '사막의 방패작전', 2차는 '이라크 해방작전')을 치를 때도, 이라크를 향해 무자비하게 폭격및 공습을 가한 후 지상군을 투입했다.
우크라이나군이 슬라뱐스크-크라마토르스크 사수를 위해 구축한 1차 방어선은 세베르스크-솔레다르 라인이다. 러시아 측은 우크라이나군이 지난 몇 주동안 세베르스크에서 솔레다르를 거쳐 바흐무트(2016년 우크라이나 정부에 의해 아르테모프스크로 개칭)로 연결되는 도로와 철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방어 진지를 구축한 것으로 보고 있다. 루간스크주의 세베로도네츠크와 리시찬스크 전투에서 철수한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여기에 합류하고, 모병된 새로운 병력도 이 방어선 구축에 투입된 것으로 전해졌다.
슬라뱐스크, 크라마토르스크 주변 지도. 표시된 곳은 크라마토르스크, 그 위쪽이 슬라뱐스크. 슬라뱐스크-크라마토르스크 오른쪽에는 세베르스크-솔레바르가 남북으로 나란히 있고, 또 그 오른쪽 위쪽에는 루간스크주의 세베로도네츠크와 리시찬스크가 나란히 위치해 있다/얀덱스 지도 캡처
세베르스크-솔레다르 전선에서 러시아군의 탱크를 붙잡아두는 방법으로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미국 등이 제공한 첨단 무기로 4~5개 여단을 편성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다는 게 우크라이나 측의 구상이다. 러시아 측은 '루간스크 해방'의 여세를 몰아 1차 방어선을 가능한 한 빨리 돌파하고, 다음 목표인 슬라뱐스크와 크라마토르스크를 장악할 계획이다.
이 곳에서 러-우크라이나 간에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승부가 펼쳐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지정학적 측면에서도 이해가 된다. 이 곳의 지형을 보면 슬라뱐스크-크라마토르스크 방어는 우크라이나군에게는 배수진이나 다름없다.
우선 소비예트 시절부터 구축된 '도네츠크 산업 지역'은 사실상 여기서 끝난다. 두 도시가 함락되면, 아브디프카 정도가 남는데, 이 도시의 운명은 우크라이나에게는 루간스크주의 마지막 저항지였던 '리시찬스크'나 다를 바 없다. 러시아군의 포위 공격에 금방 함락될 것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두 도시의 서쪽 방면으로는, 드네프르 강과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Dnepropetrovsk, 우크라이나 지명으로는 드네프로)에 이르기까지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진다는 점이다. 효과적인 방어 진지를 구축하기에 어려운 지형이다. 러시아 연합군이 슬라뱐스크=크라마토르스크 점령후 돈바스 지역을 벗어나 우크라이나 중부의 드네프로주(州)까지 내쳐 달릴 수 있다는 뜻이다.
초원 지대를 공략하는 러시아군 탱크 부대 훈련 모습/사진출처:러시아국방부
앞서 거론한 우크라이나군 1차 방어선의 마지막 도시, '바흐무트'가 함락될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후 자포로제주(州) 방향으로 대초원이 펼쳐진다. 역시 러시아군의 탱크가 돈바스 경계선을 넘어 자포로제주 북부 지역으로 내달릴 수 있다.
자포로제주의 남부, 즉 아조프해 연안 지역을 이미 러시아군에게 내준 우크라이나로서는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는 러시아군을 막기 위해 주도 자포로제에서 굴랴이폴에 이르는 전선에서 결사항전할 수 밖에 없다. 설사, 그렇더라도 남북으로 포위된 우크라이나군이 이 곳을 방어하기엔 버겁다.
현지 군사 전문가들은 슬라뱐스크-크라마토르스크와 바흐무트 방어선의 돌파는 '러시아의 DPR 해방'과 직결되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으로 본다. 군사전략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돈바스 지역에는 우크라이나 정규군의 4분의 3, 많게는 5분의 4까지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군사력이 무력화됐다는 뜻이다. 나아가 러시아는 북쪽과 남쪽, 서쪽 등 3면으로 더 진격할 수 있는 전략적 거점들을 확보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러시아가 내세운 우크라이나 특수 군사 작전의 중요한 목표는 돈바스 해방과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 탈나치화다. 이들 목표를 따로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러시아가 '돈바스 해방', 즉 돈바스의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하려면 돈바스 쪽으로 공격 가능한 배후 지역의 중화기들도 미리 제거하고, 비무장화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가 서방의 첨단 무기들을 받아 군사력을 재편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 일각에서 러시아군이 돈바스 점령으로 진격을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는 중요한 이유다.
우크라이나 반격의 주축 무기가 될 미국의 다연장 로켓 시스템 '하이마스' 발사 모습/사진출처:우크라이나 합참 페북
탈나치화도 마찬가지다. 신나치(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무장단체와 그 이념의 제거는 돈바스 지역으로 끝날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는 중앙 무대(키예프 등)의 탈나치화다.
러-우크라 간에 휴전이 이뤄지지 않고, 러시아가 돈바스를 넘어 공격을 계속할 경우, 다음 공략 목표는 앞서 거론한 드네프로도네츠크와 자포로제가 유력하다. 진격 루트를 변경할 필요도 없이 넓은 초원지대를 따라 달려나가면 되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또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돈바스 북쪽의 하르코프(하리키우)주(州)다. 우크라이나 제 2의 도시 하르코프가 주도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달 말 하리키우에 러시아의 재침공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러시아군이 수십대의 탱크를 앞세워 하르키우 전선을 향해 이동했다는 주장을 전하기도 했다.
하르키우는 러시아 국경에서 불과 50㎞ 떨어져 있다. 개전 초반의 점령 목표이기도 했다. 인구 구성을 보더라도, 돈바스 지역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흑해 연안의 오데사주와 함께 비교적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곳(44.5%)으로 분류된다. 점령후 러시아화가 쉽다는 뜻이다.
우크라이나의 주별 모국어(우크라이나어 혹은 러시아어) 분포 현황. 돈바스(루간스크주와 도네츠크주)와 크림반도 3곳이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많이 쓰는 곳(러시아계 주민이 많다는 뜻)이고, 초록색으로 표시된 하르코프, 자포로제, 오데사주(시계방향으로) 3곳이 우크라이나-러시아어 비중이 비슷하고, 나머지 넓은 황색 지역은 우크라이나어가 절대적으로 많은 곳이다./지도 출처:위키피디아
일부 전략가들은 러시아 측이 진짜 탐을 내는 곳으로는 니콜라예프(미콜라우)주와 오데사주를 꼽는다. 흑해로 나가는 해상로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현재 헤르손과 스카도프스크(이상 흑해), 마리우폴, 베르댠스크(이상 아조프해) 등 주요 항구 도시 4곳을 통제하고 있는데, 마지막 남은 항구가 니콜라예프(니콜라예프주 주도)와 오데사(오데사주 주도)다.
두 지역은 또 현재 러시아화가 상당히 진행된 헤르손에서 서진하면 장악 가능하다. 러시아 본토에서 돈바스, 아조프·흑해 연안지대를 거쳐 구소련의 몰다비아 내 러시아계 집단 거주지인 '트란스니스트리아'까지, 소위 '육로 연결'(트란스니스트리아 회랑)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나 다름없다. 특히 흑해의 최대 항구도시 오데사는 서방 무기 공급의 중심지이나, 러시아계 주민의 비중도 적지 않는 곳이다.
현지에서 나오는 낙관적인 시나리오는 2개월 내에 슬라뱐스크-크라마토르스크 전선을, 4개월 내에 드네프로패트로프스크와 자포로제, 니콜라예프 장악도 가능하다는 것. 오데사가 문제다.
헤르손주(州)와 자포로제주의 흑해 연안 지역을 장악한 러시아는 현재 러시아화에 부쩍 속도를 내고 있다. 모스크바 표준 시간대를 도입하고, 자동차 번호판과 휴대전화 지역번호을 러시아로 바꾸고, 주민들에게 러시아 여권을 제공한다. 또 루블화 사용 경제권이 계속 확대되는 상황에서 러시아 방송 수진 지역도 넓어지고 있다. 크림반도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땅'으로 변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크라이나군 텔레그램이 올린 전황 지도. 오른쪽 붉은색 지역이 러시아군 점령 혹은 통제지역이다/출처:텔레그램
궁극적으로는 러시아가 지난 2014년 합병한 크림반도와 엮어 크림자치공화국으로 만들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 경우, 흑해는 러시아 바다로, 우크라이는 내륙 국가로 정체성이 바뀔 판이다.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와의 협상이 늦어질 수록 합의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경고가 의미심장하다. 이 지역의 러시아화가 너무 많이 진척되면 자신도 포기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