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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에 대한 기본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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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안개님 (원불교 홈페이지-Won Buddhism)
-2006.08.22-
1. 종교사상적 배경
19세기 후반의 한국사는 변혁의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중국을 비롯하여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한반도에 대한 정치 경제적 침략을 막고 나라의 주권을 수호해야 했고 국내적으로는 한계에 이른 조선왕조의 봉건적 지배체제를 청산하고 근대적인 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나라의 주권수호와 근대개혁을 위한 다양한 변혁운동이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주권수호와 근대변혁운동은 실패하고 1910년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 시기 조선왕조 5백년의 지도이념이었던 성리학은 그 사상적 한계에 이르러 새로운 시대에 조응하는 새로운 사상을 필요로 하는 시기였다.
성리학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이미 18세기 실학사상과 북학사상으로 제기되었지만 19세기 체제의 보수 반동적 성격 때문에 서학을 빌미로 하는 진보세력에 대한 정치탄압에 의하여 좌절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척사위정사상, 개화사상, 동학사상이 대두되어 이 시기 변혁운동을 이끌어 가는 지도이념으로 자리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와 불교사상은 변혁운동의 지도이념으로는 발전하지 못하였으나 교육·의료사업을 통하여 왕실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데 치중하였다. 한편, 19세기 봉건체제의 모순 심화는 지배세력의 수탈의 강화로 농민들은 담세능력의 한계에 이르러 민중생활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조선후기 이래로 민중의 현세적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이상세계는 주로 미륵신앙이나 정감록 신앙으로 나타났다.
또한 <홍길동전>의 율도국이나 <허생전>의 변산 무인도 같은 맥락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민중생활의 고난과 민중적 이상향에 대한 희원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외세의 침략과 체제모순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동학사상(=地上仙境)이 그 해답을 제시한 것이었다.
동학은 최수운의 처형 이후 농민층에 확산되어 1894년 반봉건 반외세의 전국적인 농민전쟁의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외세에 의한 농민전쟁의 진압으로 동학은 국가로부터 반역자의 무리로 낙인 되고 말았다. 농민전쟁의 좌절 이후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에는 많은 신종교들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민족문제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오히려 식민지화 이후에는 종교의 보편적인 목적을 강조함으로써 민족문제를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되는데, 이는 불교와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교분리 (政敎分離)의 원칙이 바로 총독부 권력과의 타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 창립과 발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1916년 전라남도 영광군의 한 시골마을에서 26세의 청년 소태산이 인류구원의 목표 아래 새로운 종교인 원불교를 창시하면서 내걸었던 표어이다. 소태산은 인류의 현실을 인간이 물질주의에 매몰 되어 가는 상황으로 규정하고 인간정신의 자주성을 확립함으로써 바람직한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새로운 종교운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소태산은 그를 따르는 40여명의 사람들을 모아 저축조합을 결성하고 소비절약과 금주·단연, 공동노동을 통하여 자금을 모으고 이를 토대로 숯장사를 하는 등, 조합의 공동자금을 마련하였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조합원들과 함께 1년여의 기간에 걸쳐 마을 앞의 간석지에 제방을 쌓아 3만여 평의 농토를 개간하였다 (1919.3.).
간척사업의 과정은 주경야독을 통하여 소태산의 포부와 경륜을 제자들에게 교육하는 과정이었으며 원불교 교단의 조직화 과정이었다. 간척사업이 완공될 무렵, 전국은 3·1운동의 독립만세 시위로 들끓었고 만세시위는 영광읍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소태산은 이 와중에 아홉제자들에게 길룡리 주변의 산봉우리에 각각의 방위를 정해주고 인류의 정신개벽과 구원을 위한 기도를 하도록 명하여 혈인 (血印)의 이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태산의 이 같은 출발은 3년 만에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영광경찰서에 소환되어 1주일 동안이나 저축조합과 간척공사의 자금출처 등에 관한 조사를 받은 후 돌연 전북 부안 내변산의 실상사 인근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이곳에서 간간이 영광의 제자들과 연락을 하면서 자신의 포부와 경륜을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모색을 하게 되었다. 내변산에서 약 5년간의 생활은 승려들과의 교류를 통하여 불교의 현실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 ‘조선불교 혁신 론’을 저술하기도 하였으며 이 시기에 원불교 교리와 제도의 초안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각지로부터 찾아오는 사람들을 귀의시키면서 새로운 교단 조직의 필요성과 그 장소를 물색하기에 이르렀다. 1924년 봄, 소태산은 전북 익산군 북일면 신용리(현 익산시 신용동)에 3천 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불법연구회는 조선총독부의 소위 문화정치라는 슬로건 아래 정치단체를 제외한 사회단체 의 활동을 허용한 유화국면을 이용하여 종교단체로 등록함으로써 종교 활동을 합법적으로 보장받고자 한 것이었다.
익산에서의 활동은 역시 공동생활을 통한 소작 경영과 황무지 개간 등으로 생산에 힘쓰고 상조조합을 창설하여 근검절약에 의한 자금 저축에 노력 하였다. 당시의 생활은 영육쌍전의 이념아래 주경야독을 실천하였다. 또한 종래 영광의 조직을 불법연구회 영광지회로 신흥지회 등으로 복원하고 각지의 인연을 따라 지회를 설립해 나아갔다.
아울러 각지 회원의 증가에 따라 <월말통신>, <회 보> 등을 간행하였다. 이 시기 소태산은‘종교와 정치’, ‘강자로 약자 되는 법문’, ‘금강산과 그 주인’, ‘조선은 어변성룡이 되어가고 있다.’등의 법설을 통하여 조선의 식민지적 처지와 일본의 강압적인 통치를 비유하여 설명하고 장차 조선은 금강산으로 인하여 세계의 일등 문명국으로 성장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태산의 활동은 1920년대에는 당시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기도 하였으나 일본 경찰로부터의 감시가 강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불법연구회는 당시 교당 7개소에 약 5,800명의 교도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1936년 익산경찰서는 불법연구회 구내에 북일면 순사주재소를 설치하였다.
소태산과 불법연구회는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불법연구회의 모든 활동은 상주하는 경찰관 3인에 의하여 감시를 받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총독부 관리들이 불시에 방문하여 회계서류를 감사하는 등의 수모를 겪어야 했으나 이들에게 빌미를 줄만한 일은 없었다. 이 시기 <회보>에 게재되는 모든 글들은 인쇄 되기 전에 검열을 받아야 했고 심지어는 문장표현 하나하나를 문제 삼아 삭제나 정간이 되기도 하고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글을 강제로 실어야 했으며 결국 1940년에는 강제 폐간의 수난을 겪었다. 또한 1943년 소태산의 열반 이후에는 불법연구회의 황도불교화를 강제하였으나 이를 미루어 오던 중 일본의 패전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1945년 해방 당시 교단현황은 교당 25개소에 교도 8천여명 정도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불법연구회는 약 1년 동안 서울역과 부산역 그리고 전주와 이리역에서 전재 동포구호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건국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념과 제도적으로 중도주의를 지향하는 ‘건국론’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나 이념 대립의 심화와 분단국가 수립과정에서 그 입지를 잃고 말았다.
해방 후 교명을 원불교로 바꾼 교단은 분단체제 하에서 교단 내부적인 역량 강화에 주안점을 두고 교단의 3대 목표인 교화, 교육, 복지사업에 역량을 집결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해방 후 원 불교 활동의 특징은 교역자 양성을 위한 대학교육 기관의 설립, 원불교 교리에 바탕 한 국내외 종교 간의 대화와 교류사업의 추진, 다양한 복지사업 시설의 운영 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교조 박중빈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은 영광군 법성포에서 와탄천을 따라 4㎞정도 거슬러 올라간 산골마을인 백수면 길룡리의 영촌 마을에서 1891년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7~9세) 사물에 남다른 호기심을 가져 하늘, 구름, 바람 등에 관한 질문으로 부모와 주위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어른들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항시 의문을 가지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이를 해결 하고자 하는 의지를 놓지 않았다고 한다. 학력은 7살 무렵 한문서당에 6개월간 다닌 것 이 전부이며 마음속에 간직한 우주와 인간에 관한 해답을 얻기 위하여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12살 무렵부터는 산신을 만나기 위하여 1년여 동안 산에 올라가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중 고대소설에 나오는 도사 이야기를 듣고 도사를 만나기 위하여 백방으로 찾아다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산신과 도사를 만날 수 없게 되자 23세 무렵부터는 실의에 빠져 방안에 들어앉아 의식을 잊어버린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소태산은 가슴에는 적이 생기고 온몸에는 종기가 나고 수염과 머리가 길어서 이웃 사람들은 그를 폐인으로 취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상태에 있던 그는 26세 되던 1916년 4월 28일의 이른 새벽에 갑자기 정신이 상쾌해지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깨달음을 얻은 그는 그동안의 의문을 생각해보니 모두가 ‘한 생각을 넘지 않았다’고 하며 그 깨달음의 경지를 ‘萬有 (만유)가 한 體性 (체성)이며 萬法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보응의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라고 표현하였다.
소태산은 깨달음을 얻은 후 바로 사십 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드니 그 가운데 9인을 골라 교단 창립의 중심인물로 삼고 저축조합을 시작으로 원불교의 종교 활동을 전개해 오다가 1943년 6월1일 익산에서 54세를 일기로 열반하였다. 소태산은 20세에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고 장남은 원광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박길진이다.
대종사의 인품에 관해서는 소태산의 열반 후 종법사를 이어 받은 정산 송규(1900~1962)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오호라, 대종사는 일찍이 曠劫種聖 (광겁종성)으로 궁촌변지에 생장하시어 학문의 수습이 없었으나 대도를 자각하시었으며 板蕩 (판탕)한 시국을 당하였으나 사업을 주저하지 아니하시고 완강한 중생을 대할지라도 제도의 만능을 구비하시었으며, 기상은 泰山喬嶽 (태산교악)같으시나 春風和氣 (춘풍화기)의 자비가 겸전하시고 처사는 磊磊落落 (뇌뇌낙낙)하시거나 세세곡절의 진정을 통해 주시며 옛 법을 개조하시나 대의는 더욱 세우시고 시대의 병을 바루시나 완고에는 그치지 않게 하시며 만법을 하나에 총섭하시나 분별은 더욱 역역히 밝히시고 하나를 만법에 사용하시나 본체는 항상 여여히 들어내사 안으로 無上妙意(무상묘의)의 원리에 근거하시고 밖으로 사사물물의 지류까지 통하시어 일원대도의 바른 법을 시방삼세에 한없이 열으시었으니 이른바 百億化身(백억화신)의 如來(여래)시요 集群聖以大成(집군성이대성)이라.
4. 원불교의 사상
원불교는 명칭에서부터 불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불교의 한 종파 또는 새로운 종단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소태산의 깨달음에서 비롯된 원불교는 처음부터 불교 종단과는 별개로 독립된 교리체계와 교단조직을 운영해 왔다. 소태산이 깨달음을 얻은 이후, 여러 종교의 경전을 열람하였다. 그는 자신의 깨달은 바는 이미 과거 성현들이 깨달은 바 있었다고 하고, 모든 종교의 진리는 하나이지만 각 시대와 지역의 역사적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종교를 폈을 뿐이라고 하여 모든 종교의 교의가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여러 종교 가운데 불교의 진리가 가장 광대하고 대중을 교화하는데 적절함으로 자신의 연원을 석가모니불로 정한다고 하고 장차 불법을 중심으로 하는 새 시대의 새 종교를 창립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었다
1) 통종교 (統宗敎)를 지향하는 일원상 진리
소태산은 그의 깨달음의 경지를 일원상으로 표현하고 이는 모든 성현들이 이미 깨달았던 우주의 근원적 진리라고 하였다. 그 궁극적 진리는 형상으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나 글로써도 설명하기 어렵지만 가장 가깝게 설명하자면 일원상이라는 것이다. 소태산은 일원상에 관하여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원’이라 하였다. 따라서 원불교에서는 일원의 진리를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원불교의 신앙은 인격신앙이 아니라 진리 자체에 대한 신앙으로 설명된다. 또한 일원의 진리는 모든 성인이 깨달은 진리이며 세계의 모든 종교도 그 진리는 하나이며 그 목적 또한 같다고 하여 통종교적인 측면으로 설명된다(일원주의, 일원대도).
2) 상생과 조화의 은(恩) 사상
소태산은 인간과 만물의 생존 근거는 상호 은혜의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천지 우주 만물의 상생 조화의 소산이며 (천지은), 부모가 낳고 기르고 교육한 결과이자(부모은), 모든 주위 사람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동포은), 관습과 법률의 질서와 제도 속에서(법률은) 삶을 영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원불교에서는 인간의 삶은 천지, 부모, 동포, 법률 四恩의 산물로 규정한다. 따라서 참된 삶의 도리는 사은의 은혜에 보은하는 길이며 보은의 방법은 사은의 도리에 따르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우리사회를 이러한 보은의 사회관계로 개혁하기 위한 덕목으로 자력양성, 지자본위, 타자녀 교육, 공도자 숭배의 네 가지를 四要로 제시하고 이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3) 현세적 이상세계 - 물질개벽과 정신개벽
원불교 개교의 동기는 물질문명의 발달이 초래한 인간 정신의 쇠퇴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신개벽이 필요하고 인간 정신의 자주력을 세워야 물질문명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물질문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곧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고루 발전된 참 문명세계인 광대무량한 낙원을 이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발달이 인류에 가져다 준 긍정적인 부분과 그 결과로 초래된 물질주의와 인간소외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 정신개벽 의 구체적인 내용은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며 그 방법은 三學으로 제시 되었다. 삼학은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로써 마음의 안정을 위한 수양력과 일과 이치에 대한 궁구를 통한 연구, 정의와 불의에 대한 단호한 행동을 말한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는 행동과정을 원불교에서는 ‘마음공부’라고 부른다.
원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세계는 사후의 세계가 아니라 현세적인 이상세계이다. 모든 인류가 쌓아올린 물질문명의 성과를 모든 인간이 고르게 소유하고 상생과 조화의 풍요로운 삶이 보장되는 세상을 현세에서 이룩하는 것이 원불교의 광대무량한 낙원이다.
4) 후천개벽의 역사관
원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세계는 인간의 의지로 이룩해야 할 새로운 세계의 실현이다. 소태산은 이를 후천개벽의 새 세상이 열리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 개벽의 전환기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세상은 어두운 밤이 지나고 동방에 밝은 해가 솟으려 하는 때’라고 하였다. 후천개벽의 새 세상은 ‘어리고 어두운 시대를 마감하고 즐겁고 밝은 세상이 열리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집집마다 부처가 살고 모두가 미륵불이되는 시대라 하여 인간평등의 세상을 역설하였다. 또한 사회집단이나 국가간에 있어서도 서로 상생과 조화의 관계만이 인류역사의 진보와 발전을 견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개벽의 새 시대에는 ‘곳곳이 부처님(處處佛像)’이니 ‘일마다 불공하라(事事佛供)’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원불교의 인류 역사에 대한 태도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무한한 진보를 전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 조직과 제도 현황
1) 조직과 제도
원불교의 조직은 1924년 불법연구회에서 구체화되었으며 종법사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교단의 모든 권력의 핵심은 6년 임기의 선출직인 종법사와 수위단회(36 명)에 있다. 교단의 중요사항은 대부분 수위단회에서 결정된다. 교단행정은 일반행정을 담당하는 교정원과 각 지역대표자로 구성된 입법기구인 중앙교의회 그리고 교단의 각종 규찰을 담당하는 감찰원으로 권한이 분산되어 있다.
교정원 산하에 13개 교구가 있고 그 아래에 각 지역 교당이 소속되어 있으며 모든 인사권과 재정권은 교정원과 수위단회에 있고 교구의 주된 기능은 산하 기관과 교당의 관리에 있다. 원불교는 창립초기의 저축조합 운동이나 간척사업에서 보여주듯이 영육쌍전의 생활종교를 지향하여 교단 내의 교육, 의료, 복지시설과 산업기관의 육성에 노력해왔다. 그러나 각 지역교당과 각 기관의 설립은 교단의 지원 없이 자립의 기반 위에서 설립되며 운영 또한 독립적인 운영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원불교의 의례는 불교적이라기보다는 유교적이며 형식보다는 사실과 내용을 중시하고 절차를 시대에 맞게 간소화하였다.
<원불교예전>은 통례편, 가례편, 교례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통례는 인간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예의를 규정하고 가례는 가정에서 필요로 하는 출생, 결혼, 상장, 제례에 관한 제반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교례는 원불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교당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제반 의식과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원불교 교역자는 ‘교무’라 부르며 소태산의 경륜과 포부를 실현하기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이다. 교역자를 지원한 자는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나 영산원불교대학의 원불교학과 졸업하고 소정의 검정을 거쳐 원불교 대학원대학 2년 과정(석사)을 졸업함으로써 교역자 자격이 주어진다. 이 후 매년 일주일간의 보수교육을 받아야 한다.
교역자의 생활은 무보수이며 본인이 근무하는 교당이나 기관에서 일정한 용금(최소 생활비)만 지급된다. 한편 남여 교역자는 평등하며 결혼은 제도적으로는 허용되어 있으나 현재까지 여자 교역자 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 또한 사회집단이나 국가간에 있어서도 서로 상생과 조화의 관계만이 인류역사의 진보와 발전을 견인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개벽의 새 시대에는 ‘곳곳이 부처님(處處佛像)’이니 ‘일마다 불공하라(事事佛供)’고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원불교의 인류역사에 대한 태도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무한한 진보를 전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현황 (2004년 11월 30일 현재)
원불교의 행정기관은 대부분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에 있으며 교당과 기관은 전국에 산재해 있다. 교당과 기관의 숫자는 대략 다음과 같다.
⑴ 교구, 교당 원불교의 교화 조직은 교구와 교당으로 구분되며 전국 13개 교구에 503개 교당이 있다. 교당이나 기관에서 종사하고 있는 교역자의 총 수는 약 2천 여 명, 교도수는 약 100만 명이다.
⑵ 기관 원불교의 사업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여러 종류의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영육쌍전을 중시하여 각종 산업기관을 통하여 교단의 경제적인 자립을 도모하고 있으며 기관의 총 수는 각 부문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교육기관 : 원광대학교 등 8개 법인 17개소
훈련기관 : 중도훈련원 등 7개소
문화기관 : 원음방송 등 13개소
복지기관 : 원광복지관 등 13개 법인 92 개소
의료기관 : 보화당한의원 등 20개소
산업기관 : 원광제약 등 17개소 어린이집 등 기타 단체 290여 개소
⑶ 국외 교당 및 기관 국외 교단과 기관은 47개 교당과 14개 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지역별로는 미주(20/12), 유럽 (13/1), 중국(8/0), 일본(6/1) 등이며 미국에서 대학원과정의 교육기관과 국제훈련원, 원광의료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