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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 되지 맙시다
시편 14:1~7
시편 14편은 다윗이 어떤 형편에서 쓴 것인지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아니합니다. 혹 어떤 사람은 다윗이 사울에게 어려움을 겪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그의 아들 압살롬이 그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지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지 추측에 불과합니다.
하여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유대인과 이방 사람들이 모두 죄 아래 있는 것과 모든 세상 사람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반적으로 우리 인간이 얼마나 타락했는가 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악한 세상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보세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였습니다. 전도서 7장 25절에 보면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 알고자 했다”고 하였습니다.
죄에 대한 지식은 어려운 지식이며 죄는 스스로 이것이 죄라고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이런 가면을 벗기고 그 본성을 찾아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병을 치료하려면 병의 원인과 그 종류 그리고 그 병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아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는 죄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큰 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죄를 범하고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어리석음을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큰 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면 그 밖의 모든 다른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을 큰 악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이것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의 값은 한 마디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큰 죄를 범하는데 이 죄는 하나님의 영화를 경멸합니다. 모든 죄의 밑바닥에는 실제적인 무신론의 요인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무신론자입니다.
여러분, 이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안 계시다고 해서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리석어서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니, 안 계시기를 바라는 데서 나온 생각입니다. 하나의 상상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까? 그 이유는 자신들의 잘못된 생활 때문입니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 없도다”고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본래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율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양심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은 우리가 죄를 범하면 괴로움을 줍니다. 고통스럽게 합니다. 양심이 우리를 책망합니다. 가책을 줍니다. 그러므로 이 가책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상상해 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심판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다면 반박당할 것이 두려워서 입 밖에 내지 못하고 그의 양심의 항의를 잠잠케 하고 그의 악한 길을 담대히 하기 위해 그것을 은밀히 마음에 속삭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9, 20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신앙의 기초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사람은 이성적으로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 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특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소위 종교성입니다. 어떤 짐승은 사람처럼 영리해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짐승에게는 종교성이 없습니다. 짐승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알 만하게’ 지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이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그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소위 사상가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이 없다”고 어리석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루를 살고 저녁에 자리에 눕게 되면 마음 가운데 무슨 생각이 납니까? 내가 어떤 것은 잘못했고 어떤 것은 바르게 했다는 생각이 납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양심이 하는 일입니다. 이 양심은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 때부터 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다음에 날이 서늘할 때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나타나시니까 아담과 하와가 슬그머니 숲 속으로 숨었습니다. 왜 숨었어요? 양심의 가책이 그를 숨게 하였습니다.
죄를 범하면 하나님이 두려워집니다. 왜요? 양심의 가책을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양심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하나님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시는 양심의 하나님이시요, 도덕적인 주재자인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속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을 알 만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특별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계시해 주셨습니다.시편 103편 7절에 “하나님께서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특별히 택해서 그 사람들 가운데서 선지자를 택하여 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를 계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 했습니다.
본래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품속에 계신 독생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얼굴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활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이 죄인된 우리 인간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를 통해서 구속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분명히 알 수 있으리만큼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핑계댈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소행이요, 사실 죄악이 자기의 눈을 가리워서 보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죄는 인간의 심각한 병입니다.
왜요? 죄는 하나님의 영화를 경멸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죄의 밑바닥에는 실제적인 무신론의 요인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의심할 수 없으나 그의 주권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판단이 아니고 그의 상상에 불과합니다. 그는 현재 아무것도 없다는 것으로써 그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패한 마음과 가증된 소행을 그나마 무마시키려면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는 그 양심의 항의를 잠잠케 하고 그의 악한 길을 담대히 하기 위해서 그것을 은밀히 그의 마음속으로 속삭일 뿐입니다.
죄인은 사실 어리석은 자입니다. 죄를 범하면서 “하나님이 어찌 알랴?” 하는 자처럼 어리석은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우리는 숨을 수 없습니다. 시편 139편의 말씀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 139:1-12).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숨을 수 없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모르게 무슨 일이라도 한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이 알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빠져서 내 심령의 눈이 아주 어두워지고 그의 양심이 아주 마비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죄는 인간의 성품을 타락시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십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 보세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가 하여 살펴보았더니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다 치우쳤다는 말입니다. 순서가 바꿔졌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찾아야 할 인간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찾는다는 말입니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합니다. 그래서 배로 하나님을 삼는 사람도 있다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제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짐승처럼 사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경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 육신만 먼저 생각하고 찾는 사람의 삶은 혼돈입니다. 짐승같이 삽니다. 문화시설 속에 살면서도 짐승처럼 삽니다. 그저 한 마디로 말해서 개처럼 삽니다. 거룩한 것을 속된 것으로 바꿔 버립니다. 우리가 찾는 순서가 바뀌게 될 때 이렇게 더러워집니다. 타락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 세상에 사는 인생을 살펴보았더니,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했더니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 인간의 비극이 있습니다. 다 치우쳤다는 말입니다. 다 함께 더러운 자가 되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의 생활이 어떻습니까?
로마서 1장 29절 이하를 보세요.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여기 21 가지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하에도 육체의 일을 말하면서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로마서 3장 10-18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 앞에 하나님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여기 이야기의 순서로 보아서 사람이 범하는 죄악된 생활을 모두 기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 맞습니까? 깨닫는 사람도 정말 없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치우쳤습니까?
그렇습니다. 왜요?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합니다. 오히려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다 치우쳤습니다. 마치 지남침의 방향 감각이 무디어진 것과 같습니다. 우리 심령의 지남침인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 나아가야겠는데, 그래야 지남침의 바늘이 바른 구실을 해서 방향을 바로 정하겠는데 세상의 것에 마음이 끌려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쓸모없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유가 변해서 먹을 수 없이 되는 것처럼 우리 인간의 마음이 부패해서 썩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불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본성은 다 한 가지로 쓸모없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도 찾지 아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것을 찾는 데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을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러지는 않았습니까? 실제적 무신론자는 아니었습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찾기 위해 나오셨습니까? 제가 듣는 대로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시는 분이 이 삼일 기도회에 나오시다가 주일에까지 나오시는 분이 많으시다고 합니다. 정말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칼뱅 선생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배우고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의 마음은 텅 빈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습니다.
전에 무디 선생이 어릴 때 해를 등에 지고 뛰었더니 아무리 빨리 뛰어도 그림자가 앞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뒤로 돌아 해를 앞으로 바라보며 뛰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림자가 뒤에 있고 자신이 앞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빛되신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그것을 등지면 언제나 어두움을 따르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이 세상을 향하여 살면서 모든 죄악을 행하며 진리에서 벗어나 더러워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길에서 탈선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마음조차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찾지 아니하고 다른 것을 겸해 찾습니다.
하나님보다 먼저 세상 것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찾노라고 하지만 열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계속 찾지 아니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을 찾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해야 할 때 회개하지 아니합니다.
윌리엄 피더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아이가 어릴 때 길을 가다가 10불 짜리 하나를 얻어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후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길을 걸을 때면 항상 땅을 내려다 보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결과 길에서 얻은 것이 단추 29,516개, 바늘 54,172개, 돈 24불을 더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얻은 것이 하나 있는 데 허리가 완전히 구부러지고 성품은 매우 인색해졌다고 합니다.”
땅만 내려다 보고 길에서 무엇을 찾느라고 한 사람의 결국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본문 4절 이하를 보십시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악을 행한다고요? 떡 먹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먹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잡아 구덩이에 던지고 난 후 앉아서 음식을 먹은 것과도 같습니다.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합니다.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으면서도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했습니다. 비 올 때 가뭄 끝에 오는 것으로, 많이 오니까 장마철로, 물이 많아지니까 홍수진 것으로, 언덕을 넘으니까 대홍수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물에 빠져 죽으면서도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했습니다. 이 얼마나 악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무지몽매한 일입니까?
더구나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만 보고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일수록, 권세 있는 사람일수록 두려워합니다. 점치러 오는 사람의 대부분이 돈 많은 재벌 회사 사장 부인, 장관 부인들이라고 합니다. 왜요? 두려워서 그럽니다. 믿음이 없으니 의지할 데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이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합니다.
5절에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위로합니다.
6절에 “여호와는 그들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7절에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구원하심이 하나님께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합니다. 이 세상은 악합니다. 어둡습니다. 타락했습니다. 점점 더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팔이 나타나시면 이 세계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죄와 사탄의 지배는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다시 오심은 모든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그리스도인의 기대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기뻐할 것이며 우리의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리석은 자 되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혜롭게 살아 최후의 승리를 바라보며 힘차게 사십시다.
가장 어리석은 자
성경 본문 : 시편 14: 1~7(1절) / 찬송 518장-신자 되기 원합니다.
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5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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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며 묵상하며:가장 어리석은 자(14:1·-7)
세상에는 박식한 자처럼 보여도 어리석은 자가 많습니다. 본시는 무신론적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무엇입니까?
무신론이 부패의 원인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무식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입니다(1절). 하나님을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행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을 착취하고 핍박하는 일을 서슴치 않습니다. 인간 사회가 부패하고 타락한 이유는 사회 제도나 법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서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절대자 하나님을 부인하고 세상적인 계산이나 이해타산에 따라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류의 모든 도덕적 부패가 하나님을 떠난 마음과 사상에서 나왔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자들의 삶은 부패하고 역겨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어리석은 것은 자기가 망하게 될 것을 모르고 교만하게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자의 삶을 보면서 정말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도덕적으로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불신자의 성경은 신자의 삶이라는 말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 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살펴보십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하나님을 찾는 인생들이 있는지를 살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제고집대로 자기주장대로 사는 인생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무신론자들이라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악행을 행하면서 양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절대자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세대와 함께 하십니다. 악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백성들은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만족함과 즐거움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불신자나 다름이 없는 자요, 어리석은 자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의 폐부와 생각까지 아시는 분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찾으시며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찾는 인생이 지혜로우며 최후의 승리자입니다.
일용할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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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가장 어리석은 사람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지혜가 필요하고 하나님을 믿는 일에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시편 53편에 보니까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을 없다하며 부정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컬럼버스가 미국의 신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 아메리카 대륙이 있는지조차도 사람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신대륙을 탐험하고 온 컬럼버스가 대서양 건너편에는 유럽보다도 몇 배가 더 큰 대륙이 있다는 것을 말해줘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우리 속에 임재하시고 역사를 이끌어가고 계시는데도 사람들이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그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도올 “김용욱”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는 고려대와 미국 하버드 대학에 가서 공부를 했는데 동양사상 연구에 깊이 심취하여 그 분야에 대가가 되었습니다.
E.B.S 방송과 여러 방송을 통해서 그는 탁월한 언변과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강의함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한 때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진보적인 성향의 신학공부를 했기에 신앙생활에 도움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유주의 신학을 통해서 습득한 신학지식을 통해서 기독교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무기를 삼았습니다. 애석하게도 도올은 천재적인 두뇌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동양사상에 대한 해밝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천재적 두뇌와 지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그의 궤변적 강의는 스스로를 어리석은 자로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19세기의 가장 천재적인 철학자로 알려진 프리드리히 니체(1884년-1900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신학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는 철학 논리를 펼쳐 유럽의 젊은이들에게 교회를 떠나게 했습니다. 어느 날 대낮임에도 그는 등불을 켜고 다니며 “왜 이렇게 세상이 어두울까” 외치고 다녔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세상이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100년에 한 번 나오기 어려운 천재적인 지식인이었지만 26세의 젊은 나이에 정신이 돌아버려 누이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그는 가장 탁월한 실존주의 철학세계를 열었던 천재적 지식인이었지만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 중에는 세상 사람들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요 세상 사람들이 평가할 때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 같으나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약 3:13절에서 야고보 선생은 사람들에게 반문합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
지혜는 머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되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말로나 글로 지혜로움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행동이 뒷받침 해 주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지혜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지혜로운 자라면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라고 야고보는 충고합니다.
지혜로운 자 같으나 행동이 뒷받침 되지 않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출처 :‘예수가 좋다오’에서 옮겨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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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며 적용하며
1. 어리석은 자가 어떤 자이며, 그들의 삶이 어떠합니까(1~3절)?
2. 어리석은 자의 최후와 의인의 최후가 어떻게 됩니까(4~7절)?
3.당신은 무신론자의 어리석음이 무엇이라 생각하며, 어떻게 하나님을 찾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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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하며 간구하며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저희들이 이 새벽에도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생각하며 십자가 앞에 섰습니다.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를 주님께서 대신 지셨는데
우리는 그 십자가를 베드로나 요한처럼 멀찌감치 서서 따라가며
고통을 당하시는 주님을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지신 주님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지도 못했고
구레네 사람 시몬처럼 그 십자가를 대신 지지도 못했습니다.
비겁하게 로마군병의 눈치만을 보며 겁먹은 얼굴로 주님 뒤를 따랐습니다.
주님 편의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할까봐 사람들 속에
숨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랐습니다.
연약하고 어리석은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사렛 예수는 패배하고 나만 무사하면 된다는 이기심에
사로잡힌 저희들입니다.
주여, 탐욕과 음욕으로 가득 채워진 우리의 이 불결한 마음을
성령의 불로 태워주시옵소서.
사랑의 주님,
주홍보다 더 붉은 죄를 지은 저희들입니다.
이 무거운 죄 짐을 이제는 주님 앞에 내려놓고
모든 죄를 회개하고 뉘우치게 하옵소서.
근심걱정 다 버리고 깨끗하고 성결 된 마음으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그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며
사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
이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죄 씻음 받은 성별된 삶을 살게 하소서.
무엇보다 우리 속에 가득 찬 위선과 오만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저희가 되게 하소서.
생각해보면 저희들은 주님 앞에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는 죄인입니다.
죄를 짓고 회개를 하고서도 또다시 죄를 짓는 어리석은 저희들입니다.
이 불쌍하고 나약한 저희들을 주여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진정으로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공개된 카페에서 옮겨 쓴 글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