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 장석주
아주 깊이 아파본 사람마냥
바닷물은 과묵하다
사랑은 증오보다 조금 더 아픈 것이다
현무암보다 오래된 물의 육체를 물고늘어지는
저 땡볕을 보아라
바다가 말없이 품고 있던 것을
토해낸다
햇빛이 키우는 것은 단 하나다
한 방울의 물마저 탈수한 끝에 생긴
저 단단한 물의 흰 뼈들
저 벌판에 낭자한 물의 흰 피들
염전이 익히고 있는 물의 석류를 보며
비로소 고백한다, 증오가
사랑보다 조금 더 아픈 것이었음을
아주 오래 깊이 아파본 사람이
염전 옆을 천천히 지나간다
어쩌면 그는 증오보다 사랑을 키워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시집<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들녘. 2002
가협시편 / 장석주
지금도 해질녘이면
어디론가 숨고 싶어져.
시골다방 같은 데,
지평선이 보이는 딸기밭 같은 데,
그런 덴 없겠지?
이젠 없겠지?
장석주시집<붉디 붉은 호랑이>애지.2005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 장석주
땅거미 내릴 무렵 광대한 저수지 건너편 외딴
함석 지붕 집
굴뚝에서 빠져나온 연기가
흩어진다
단순하고,
느리게,
고요히,
오, 저것이야!
아직 내가 살아 보지 못한 느림!
애인 / 장석주
누가 지금
문밖에서 울고 있는가.
인적 뜸한 산언덕 외로운 묘비처럼
누가 지금
쓸쓸히 돌아서서 울고 있는가.
그대 꿈은
처음 만난 남자와
오누이처럼 늙어 한 세상 동행하는 것
작고 소박한 꿈이었는데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세상의 길들은 끝이 없어
한번 엇갈리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것
메마른 바위를 스쳐간
그대 고운 바람결
그대 울며 어디를 가고 있는가.
내 빈 가슴에 한 등 타오르는 추억만 걸어놓고
슬픈 날들과 기쁜 때를 지나서
어느 먼 산마을 보랏빛 저녁
외롭고 황홀한 불빛으로 켜지는가.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 장석주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더 자주 미소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보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상처받는 일과 나쁜 소문,
꿈이 깨어지는 것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벼랑 끝에 서서 파도가 가장 높이 솟아오를 때
바다에 온몸을 던지리라
12월 / 장석주
해진 뒤 너른 벌판,
하늘엔 기러기 몇 점.
처마 밑
알록달록한 거미에게
먼 지방에 간 사람의 안부를 묻다.
[좋은생각] 2005.12.
내 핏속의 야생 호랑이 / 장석주
폐 깊숙이 차가운 공기를 빨아들인다
내 핏 속에
야생의 호랑이는 살아 있다
나 도무지 살뜰하지 못해
나쁜 음식과 잘못된 습관으로
소년과 숨가뿐 청춘 시절을 지나왔다
게으름과 잡식에도 불구하고 호랑이는 살아 있다
내 핏속의 호랑이는
가끔은 영감과 상상을 낳는다
거친 수풀을 헤치고
심연의 하늘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며
야생 호랑이는
검은 돛배보다 튼튼한 두 다리로 달린다
몸은 고이 모셔두고 건사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일에 아낌없이 쓰는 것
야생 호랑이는
곤핍한 마흔 줄의 아침에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으니
그가 비겁한 짐승을 쓰러뜨려 살을 찢을 때
진동하는 향긋한 피 냄시를 맡고
나는 표효를 한다
장석주 시집<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세계사.2001
단감 / 장석주
단감 마른 꼭지는
단감의 배꼽이다
단감 꼭지 떨어진 자리는
수 만 봄이 머물고
왈칵, 우주가 쏟아져 들어온 흔적,
배꼽은 돌아갈 길을 잠근다.
퇴로가 없다.
이 길은 금계랍 덧칠한 어매의 젖보다
쓰고
멀고 험하다.
상처가 본디 꽃이 진
자리인 것을,
대추 한 알 /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다른 사람의 말과 다른 사람의 따뜻한 손을 바깥으로 내다 버리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당신과 나는 무릇 동근(同根)이다. 우리는 서로 상입(相入)하여 있다. 나와 다른 것을 묵살하지 말아다오. 서로의 이마를 짚어다오. 신열을 식혀다오. 지금 내 가슴이 뛰는 소리는 당신의 무서리와 땡볕과 초승달이 빚어낸 것이다. 나 홀로 만든 것이라고 큰소리로 장담하지 말아다오. (문태준 시인)
푸른 옷을 입고 그를 방문했던 날의 기억 / 장석주
나뭇가지가 하오 네시의 태양이 목걸이처럼 걸어주는
그림자를 공터에 드리우고 있다
그림자는 길게 늘어난다
푸른 옷을 입고 그 집의 문으로 간다
문은 닫혀 있다
희디흰 잠이라도 자는 것인가
나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러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기어코 나는
그곳에 간 것이다
하지만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듯
굳게 닫혀 있다
굳게 닫힌 문에서
이 세상이 나를 거부하고 있다, 고 생각하니
고통스러웠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공터에 기이하게 늘어나 있는
하오의 나무 그림자를 본다
그림자에서 내가 본 것은 죽음
나는 오싹해진다
그때 멀리 천둥이 울고
흐득흐득 빗발이 땅에 떨어진다
풀들이 긴 머릿채를 땅에 끌며
젖는다
내 푸른 옷도 금방 젖는다
그를 다시는 만나지는 못하리라
내가 생의 모든 비밀을 탕진해버렸음을 알았다
생후 구개월된 아이를 위해 슈퍼마켓에서 분유 두 통을 사고
나는 집으로 돌아온다
이미 내 푸른 옷은
흠씬 젖어 있다
장석주 시집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문학과지성사.1996.
난 괜찮아 / 장석주
새벽이 되어도 넌 잠들지 못한다
밤나무 숲의 하늘 위로
일찍 잠 깬 새들이 이슬을 털며 날아간다
네가 잠들지 못한 것
네 안에서 화석이 되어버린 그 기억 때문이다
누구도 비밀의 무게를
함께 나누지는 못한다는 걸 알지만
내가 아무 위로도 되지 못한다는 게 괴로웠다
저녁이 되면 너는 씩씩하게
울혈된 목청으로 떨림이 많은 노래를 하거나
나무 아래에서 그늘 밑의 이끼들아, 라고
시작되는 긴 편지를 쓰곤 했다
네 자리는 지금 비어 있다
네가 떠난 그 자리엔
천 년을 마르지 않을 강물이 흐른다
청과일처럼 싱싱한 보름달을 안고 강물이 흐른다
어두운 길에 소나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는데도
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읽던 책들이 뒹굴고 있는
빈자리가 내게 속삭인다
난 괜찮아
정말 괜찮아
시집<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 장석주
너무 멀리 와버리고 말았구나
그대와 나
돌아 갈 길 가늠하지 않고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구나
구두는 낡고, 차는 끊겨버렸다
그대 옷자락에 빗방울이 달라붙는데
나는 무책임하게 바라본다, 그대 눈동자만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길을
그대 눈동자 속에 새겨진 별의 궤도를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들
이제 와서 어쩌랴
우리 인생은 너무 무겁지 않았던가
그 무거움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고단하게 날개를 퍼덕였던가
더 이상 묻지 말자
우리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가를
묻지 말고 가자
멀리 왔다면
더 멀리 한없이 가버리자
시집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사. 1998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 장석주
희망은 절망이 깊어 더 이상 절망할 필요가 없을 때
온다.
연체료가 붙어서 날아드는 체납이자 독촉장처럼
절망은
물빠진 뻘밭 위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 감은 눈 앞에
환히 떠오르는 현실의 확실성으로
온다.
절망은 어둑한 방에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고
서랍을 열어 서랍 속의 잡동사니를 뒤집어 털어내듯이
한없이 비운 머릿속으로
다시 잘 알 수 없는 아버지와 두 사람의 냉냉한 침묵과
옛날의 病에 대한 희미한 기억처럼
희미하고 불투명하게 와서
빈 머릿속에 불을 켠다.
실업의 아버지가 지키는 썰렁한 소매가게
빈약한 물건들을
건방지게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백열전구처럼.
핏줄을 열어, 피를 쏟고
빈 핏줄에 도는 박하향처럼 환한
현기증으로,
환멸로,
굶은 저녁 밥냄새로,
뭉크 畵集의 움직임 없는 여자처럼
카프카의 K처럼
와서,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주인을
달래서, 살고 싶게 만드는
절망은
追憶 / 장석주
성냥匣 속에는
성냥개비들이 조용히 누워있고,
여러 날 지루하게 내리다 그친 눈 속에는
산등성이 아파트 불빛들이
빠끔하게 눈을 뜬다.
술 취한 저녁
세상은 어슴프레해지고
발화를 두려워하는 성냥개비처럼
우울한 아이들은 잠들어 있다
(未知를 바라봄)
저녁은 굶고
어떤 섬에서
남모르게 잠들고 싶다.
쑥 / 장석주
움트는 것, 해토된 땅의 가랑이를 밀며, 가장 먼저 나오는 것,
나와서 솟는 것, 솟으며 일어서는 것, 시퍼렇게 잎을 내밀어
땅을 덮는 것, 함부로 밟지 마라, 다시, 일어선다, 함부로 뜯지 마라,
하얀 손아, 진액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다시, 솟는다, 수천의
저녁들은 지나간다, 울음을 속으로 삼키며, 어느 땅에서도,
쑥, 쑥, 솟구치는 것, 솟구쳐 뻗는 것, 뻗어서 흔들리는 것,
고요히 흔들릴 때조차 굳건한 것, 내일을 기다려 본 적이 없는 것,
나약하면서도, 꿋꿋하게, 죽음을 무찌르며, 나아가는 것,
오 무적인 이것, 땅이 키운 극렬분자여.
이것,
이것,
나약한 것들의 피를 보고야 마는 붉은 여단,
피도 눈물도 없이 휩쓸고 가는 적군파.
장석주 시집 <붉디 붉은 호랑이> (애지.2005) 중
노래가 채 되지 못한 노래 2 / 장석주
네게도 고뇌가 있는가,
차 몰고 가다가 느닷없이
강변도로 철책을 들이받고 난폭하게
강물 속으로 곤두박질하고 싶지는 않은지.
잠깐 동안의 소란,
잠깐 동안의 파문,
잠깐 동안의 어리둥절,
몰려들던 사람들 돌아가고 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죽음과도 같은 고요,
고요 속에서 생각하느니.
자립 능력 없는 어린 자식들 누가 거둘까,
돈 꿔줬던 고마운 사람들 채무는 누가 갚을까.
아직도 내 어딘가에 고뇌가 있느냐고 물었던
친구여,
누군들 아픔 없이 산 자가
어디 있으랴.
네 질문은
심심한 날의 스쳐 지나가는 우문이었다.
한순간의 뜻없는 하품과,
한순간의 자기 혐오와,
반복되는 나날의 피로한 일상들을,
뿌리깊은 회의를,
물어뜯고 놔주지 않는다, 한 마리 괴로운 배암은.
장석주 시집 <완전주의자의 꿈>
달 / 장석주
애초에 질척이는 길을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아직도 사춘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검은 그림자들이 우쭐우쭐 춤추는
그 길을 지나야만 했다
들 한가운데를 뻗어나간 음험하고 황량한 길
움푹 패인 수레바퀴자국마다
살얼음이 끼었다
만월(滿月)의 달이 뜬다
달이 환한 길을
저 혼자 가고 있다
장석주 시집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사. 1998
봄 밤 / 장석주
저녁은 늙은 어머니처럼 천천히 온다
빗방울 몇 개 후두둑거리다 서둘러 그치고
담장 아래 노란 개나리꽃 덤불이 등 켠 듯 환하다
마음에 응달이 그렇게도 많았던가,
부치지 못한 편지가 들어 있는 호주머니 속에
손 넣은 채 서성거리며 그 꽃 오래 바라본다
혼자 보낸 그 많은 날들의 저녁
누구의 이름도 제대로 불러보지 못한 입술
지병처럼 품고 살아온 이름들이 별로 떠오른다
가슴 덥히며 차오르는 내 안의 기쁨
오, 젖은 빵처럼 오래 희망이 없었구나
빈 병 속에 갇혀 우는 바람, 바람, 바람 소리......
달을 가린 회색 구름들이 가득한 하늘 아래
잎 피우지 못한 나무들이
고요한 죽음을 안고 서 있다
시집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사. 1998
섬 / 장석주
먼지가 되어 먼지의 꿈을 꾸며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내가 다시 일어난다면
수천 개의 일요일이 한꺼번에 오리라
친구들은 하나도 없고
내가 걸었던 길이며 집들 남김없이 사라져버린 뒤
나 길 잃고
길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게 되리
나를 감싸는 허탈과 슬픔의 이유를
누구에게도 묻지 않으리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새들은
내게 잊혀진 섬의 소식을 실어 나른다
난 한 번도 나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
새들은 나를 무서운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생선 내장에 썩는 악취로 진동하는 도시를 버리고
여름 태양이 바다 한가운데 피워낸
돌의 장미, 발 밑에
수많은 청어들을 기르는 섬으로 가리라
달빛 속에 잠든 해안을 거닐며
배고프면 해안을 뜯어먹고 벌거벗은 채 잠든다
심심하면 물 속을 헤엄치며 청어들과 놀고
몇 번 하품도 하고
마침내 내가 먹고 버린 청어가시들과 함께
실종되리라
푸른 달빛에 바래진
화석 되리라
우체부 / 장석주
에덴동산에서 처음으로 이브가 금지된 과일을 따내렸을 때
우체부는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될
하나의 불가피한 직업이 되고 말았다
우체부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선량함과 상관없이
감금된 모든 새들을 공중에 풀어놓았다가 밤이면 거둬들이는 하느님과
이웃하며 산다
6월에 만난 소녀와 사랑에 빠져 온몸으로 기쁨이었지
오, 나는 노래!
나는 불꽃!
(기억하는가, 그녀의 손에 들려졌던 시든 꽃을!)
8월에는 그만 소녀에게 버림받고
내 심장은 불타버렸지
우체부는 의기소침해 있는 나를 위로하며
아직도 인생의 깊이를 헤아리지 못하는
내 손에
검은 빵을 쥐어주고 갔지
시집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사. 1998
실패한 인생엔 상자가 없다 / 장석주
이 저녁 누군가 문설주에 기대
울고 있다면
내 탓이라고 알아다오
이 세상 어느것 한 가지라도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이 아침 감꽃이 마당에 함부로 떨어져
나뒹굴고 있는 것은
내 탓이다.
나의 후덕함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처음 만나는 새들에게
어깨를 툭 치고 스쳐가는 바람에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상냥한 미소를 짓지 못했던 것은
아아 이 아침
인생의 쓰디쓴 실패를 자인해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가졌던 상자들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상자마다 피어나는 꽃들
상자마다 가득했던 별들
상자마다 가르릉거리는 새끼고양이들
......
그러나, 이제 내겐 상자가 없다
장석주 시집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사. 1998
상처 / 장석주
함박눈 내리는 밤은
담요처럼 더욱 두터운 어둠.
차마 토해내지 못한 죄 몇 개가
뒤늦게 늑골 밑에서 괴로운 가시처럼 아프고,
온 천지엔 무책임하게 아름다운 폭설.
아스라한 길 끝에 눈길을 주고
모래내에서 신촌까지
명륜동에서 미아리까지
밤을 막막히 걸어본 적 있지,
누적된 생활의 피로가 무거운 어깨에
견장처럼 반짝이는 올해의 끝눈
널 만나지 못하고 지난 세월은 큰 슬픔이었다.
널 제철 잊고 잠시 피었다 진 꽃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휴식이 빛나는 곳에선
따뜻한 등의 빛을 가슴에 안는다
그래도 어제 불던 바람 한 올
오늘 허공에서 자취 찾는 심사
가슴에 쥐어박히는 후회의 한 자락 때문에
막막히 걸어본 적 있지
막막하다, 지워지지 않는 그 사람,
막막하다,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난 그리움,
막막하다, 보상없는 이 삶의 쓰라린 상처.
오솔길 / 장석주
골짜기로 내려가는 좁은 길에 서 있다
인생의 많은 망설임들로
잎새들은 서걱거리고
해는 지평선 너머로 넘어진다
수만 번도 더 왔던 낯선 너무나 낯선
황금빛 저녁
바람이 지나간 뒤 세상이 고요해지면
나도 고요해지리라
종일 햇볕에 깨끗하고 하얗게 말린
내 뼈도 고요해지리라
저기, 저기
정말 조그만 빗방울들이
기적처럼
네 흰 발목을 적시며 온다, 오솔길 위에
아아, 이제 흐르는 물 위에
우리들의 집을 지어도 좋다
시집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사.1998
햇빛사냥 / 장석주
애인은 겨울벌판을 헤매이고
지쳐서 바다보다 깊은 잠을 허락했다.
어두운 삼십 주야를 暴雪이 내리고
하늘은 悲劇的으로 기울어졌다.
다시 일어나다오,뿌리 깊은 눈썹의
어지러운 꿈을 버리고,暴雪에 덮여
오, 전신을 하얗게 지우며 사라지는 길 위로
돌아와다오, 밤눈 내리는 세상은
너무나도 오래 되어서 무너질 것 같다.
우리가 어둠 속에 집을 세우고
心臟으로 그 집을 밝힌다 해도
무섭게 우는 피는 달랠 수 없다.
가자 애인이여, 햇빛사냥을
일어나 보이지 않는 덫들을 찢으며
죽음보다 깊은 강을 건너서 가자.
모든 싸움의 끝인 벌판으로.
시집 <햇빛사냥> 청하.1986
빈 집 / 장석주
내게 모든 책임을
물어다오
누군가 내다버린 개숫물이 얼어붙은 길바닥에서
운 나쁘게 나뒹굴었다면
공기는 노랗고 축축하고 따뜻하다
현관에는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들이 널려 있고
집은 밭은기침을 하곤 가르릉거린다
창문 아래로 노란 달이 뚝뚝 지고 있다
나는 다리 난간을 붙잡고 물을 보고 있다
노랗게 번쩍이면서 흘러가는 물
이상하게 춥고 밝은
12월의 저녁이다
시집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사. 1998
사랑에 실패한 이를 위로하는 시 / 장석주
오늘보다 내일이 나으리라
내일보다 모레가 더 나으리라
오늘 사랑에 실패했다면
내일엔 그 상처가 아물리라
모레가 되면
새로운 사랑이 생기리라
그러므로 죽지마라
사랑 때문이라면 결코 죽지 마라
시집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사. 1998
딸기 / 장석주
비애로 단단해진 너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들의
목록 속에 있다
초록 줄기에 알알이 맺혀 있는 너는
별들의 계보에 속해 있다
그러나 붉은 것은 꽤 오래가지 않는가
섹스 후 동물은 왜 슬픈가
차마 꽉 깨물어 터뜨리지 못한 채
혀 위에 올리고 굴리는
이 정체불명의 비애가 날 울린다
시집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사. 1998
순하디 순한 저녁 / 장석주
고해성사를 막 끝낸 편안한 음색으로 저녁이 내린다 저희들끼리 소란스럽던 물오리들은 없다 순하디 순한 저녁이다 당신은 울혈이 잡히지 않은 목청으로 내게 누구예요? 라고 묻는다 당신도 이제는 여기에 없다 어느덧 어두워진 물은 내 곁에 와 발목에 찰랑이며 복사뼈를 장난스럽게 톡톡 친다 물은 고요하게 저물어서 내게 묻고 싶은 것이다 당신 누구예요, 라고 목울대에 울컥 하고 자욱하게 번지는 겨운 슬픔에 내 몸이 기우뚱한다 화재로 전소되기 직전의 건물처럼 나는 위태롭게 물가에 서 있다
종일 네가 그리웠어,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끝내 말하지 못한다
저녁이 그림자를 차곡차곡 개어
내 호주머니에 넣어줄 때
어떤 완강한 슬픔이 내 척추를 비튼다
나는 저 물 속에 상어가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누구냐고?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