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분의 결혼 이야기를 하자면, 먼저 외할아버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외할아버지는 국내에서 알아주던 절 짓는 대목장이셨다.
어릴 때 기억으로는, 가끔 우리집에 오시면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이, 집안 곳곳의 문을 여닫는 일이셨다.
문이 조금이라도 삐걱거리면, 나무 망치로 몇 번 두드리면 문은 금새 부드럽게 열렸다.
다음은, 내가 가지고 놀던 연을 날리던 물레와 앉은뱅이 썰매를 외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었는데, 아이들이 전부 부러워 할 정도로 예술품이었다.
크기도 컸지만, 대패로 매끈하게 표면을 다듬었고, 거기다가 황토를 바르고 기름칠 까지 해서 아무도 나를 따라올 아이들이 없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술 드시러 성남동 술집에 가실 때는 꼭 나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항상 내가 좋아하는 콩나물 안주를 시켜서 나는 외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콩나물을 먹던 기억이 있다.
막걸리를 좋아하셔서 동네 양조장에서 막걸리 심부름을 나에게 시키면, 돌아올 때 나는 막걸리 주전자에 입을 대고 훌쩍 거리면서 마셨다.
아마, 그렇게 먹어서 내가 지금도 막걸리를 좋아하는 것 같다.
외할아버지는 주로 절을 지으셨는데, 오대산 월정사가 625 때 불타서 그것을 복원하러 가셨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그곳에서 만났다.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하고 산림청에 취직을 해서 월대산에 도벌꾼을 잡으러 다니는 사법경찰 책임자를 하셨다.
어릴 때 아버지의 젊은 시절의 흑백사진을 보며, 아버지가 아기 곰을 키우는 모습도 있었다.
그곳에서 외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한 솥 밥을 먹었다.
두 분다 집을 떠나 산 속에서 생활 하시면서, 낮에는 한 분은 산에 올라가서 도벌꾼들을 잡아들이고, 한 분은 절을 짓다가 저녁이 되면 같이 식사를 하고 막걸리를 마셨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두 분다 옥계가 고향이셨다.
외할아버지는 옥계면 천남리 였고, 아버지는 옥계면 낙풍리 였다.
월정사에서 강릉까지 오자면, 하루가 꼬박 걸렸는데, 아버지 산림청 차로 외할아버지를 강릉까지 모셔드리곤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외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유심히 관찰 하였고, 맏딸인 어머니를 아버지에게 말했나 보았다.
두 분이 막걸리를 매일 먹었다고 한다.
남자 둘이 산 속에서 일년 이상 같이 있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의 적극적인 노력 끝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결혼을 했다.
외가 쪽은 외할아버지의 예술적 유전자가 있어서인지, 어머니도 중학교 때 화가를 꿈꾸었다고 한다.
외가의 유전자가 내 여동생 둘과 내 첫 째 딸에게 고스란히 전달 된 것 같다.
여동생 중 큰놈은 우리나라 최초로 프랑스 보석 디자인 대회에 나가서 대상을 받고 9시 뉴스에 나올 정도였고, 작은 놈은 서양화가로서 뉴욕에서 활동 중이다.
나의 큰 딸은, 연극영화과를 나와 영화판에 얼씬 거리다가, 그만두고 작은 고모를 따라서 미국 가서 보석 디자인과 화가를 하고 있다.
작은 딸은 유일하게 언니와 고모들과 다르게 일본에서 간호사를 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가 잘 전달은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를 닮아 고집불통의 마초가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가 선생을 안하고 장사를 하면서 스쿠버다이빙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것을 무척 싫어 하셨다.
돈을 버는 장사꾼들을 몹시도 혐오 하셨던 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나와 겨우 화해가 되었다.
나는 아무래도 아버지의 유전자를 제대로 전달 받지 못한 것 같다.
어머니의 유전자도 약간 섞인 것도 같다.
고등학교 때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니까 미술 선생이 미술실로 오라고 한 것을 내가 가지 않았다.
혹시, 그때 미술실로 갔으면 나도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 중에 수중 사진가 이성우가 있다. 친구를 위해 일본의 수중 사진 이론을 한국어로 번역하다가, 수중 사진을 대충 이해 하고 수중 사진대회에 나가서 대상을 받은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술이라면 예술일 수도 있는 글을 쓰고 있으니, 유전자 전달은 어느 정도 완성된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