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장씨(仁同張氏) 옥산고택은 시조(始祖)인 고려 초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 상장군(神虎衛 上將軍)을 역임한
장금용(張金用)의 유허지로, 고려 초에 창건한 후 천여 년 동안
종손이 대대로 세거하고 있는 유서깊은 대종가(大宗家) 고택이다.
인동장씨 옥산고택(대종가)
이 종택은 조선 초기까지 여러 번 중수를 거치며 세거하여 왔으나
1592年(선조 25) 임진왜란 때 병화로 건물이 전부 소실되었다가
1631년(인조 9) 20대 종손 극명당 장내범(張乃範)이 다시 중건하였다.
대문채
이 후에도 몇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이후
2000년 대동보의 헌성금으로 대대적인 중건을 하여 현재에 이른다.
대지가 488평, 건물이 110평(27칸)으로 가묘(家廟,사당)도 복원했다.
한 집에서 천여 년 동안 종손이 계속 살아온 것은 매우 자랑스런 일이다.
사랑채와 옥산고택
인동장씨는 시조 이래 후손들이 옥산(인동)에 세거하면서
지명에 따라 본관을 옥산(玉山)으로 하였으며, 옥산의 행정구역 명칭이
인동으로 변경됨에 따라 지금은 본관을 인동(仁同)으로 쓰고 있다.
일부 후손은 역사적인 이름을 연유로 옥산을 본관으로 쓰기도 한다.
사랑채
인동장씨는 옥산고택에서 본향 5파(중리,남산,황산,진가,진평)로,
다시 25개 여파로 분파되어 있으며, 현재 인구는 67만 여명으로
장(張)씨 중 3분의 2를, 전체인구의 12위에 이르는 대성을 이루고 있다.
옥산고택 안채 입구
사랑채 측면
가묘(家廟,사당) 신문(神門,내삼문)
가묘(사당)쪽에서 보는 안채 측면
고택을 둘러보고 대문으로 나온다
파노라마로 본 옥산고택 전면
옥산사와 옥계서원 입구
옥산문(玉山門)
문이 잠겨있어 담 너머로 둘러보는 퇴휴당 건물
옥산사와 옥계서원은 대지 9,865㎡(2,984평), 연건평 903㎡(273평),
건물 13동과 부속시설로 숭의묘, 강당, 시조 유허비, 옥산기지비,
인동장씨 사적비 등이 있으며, 2011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왼쪽 건물이 옥산사(玉山祠,사당)
옥산사는 인동장씨 시조(始祖)인 고려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역임한 장금용(張金用)과
인동장씨 선조 10위(位, 2세~11세)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바로 보이는 건물은 모현재(慕賢齋)
앞의 건물은 퇴휴당(退休堂)
옥계서원(玉溪書院)
옥계서원은 고려 충신 장안세(張安世)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자
위패를 봉안하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왼쪽 : 고려 삼중대광 신호위상장군 옥산 장공 유허비
(高麗 三重大匡 神虎衛上將軍 玉山 張公 遺墟碑)
오른쪽 : 옥산기지비(玉山基址碑)
첫댓글 🏯 한 집에서 천 여 년 동안 종손이
대대로 세거하는 유서깊은 대종가
(大宗家) 고택임을 처음 알게 되었
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몇 가문 없는
인동(仁同) 장(張)씨 가문의 자랑
입니다.
예, 천년을 한자리에 이어져 왔다는것은 대단한 일이지요.
건강하세요.
사랑채 대청이
아주 넓은것으로 기억합니다
옥산사는 이건 하면서 오르기에 너무 가파르다는 느낌을 받았읍니다
예 저도 옥산사에 대하여 그렇게 느꼈는데요.
요즘은 토목기술도 좋은데 재실이나 서원등은 앞쪽에 낮게 배치하고
사당은 뒤에 조금 높게 배치하는 등 2~3단 정도로 경사를 두었으면 더 좋았을것 같았습니다.
정 그것이 어려웠다면 지금이라도 휳체어라도 올라갈수 있는 길을 따로
마련하는것이 좋을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