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문화원과 가락국으로
옛 장산국의 터전에 사는 우리는 장산국을 얼마나 알까? 장산국이 김해 가락국에서 유래된 사실로 보면 장산국의 해운대와 가락국(금관가야)의 김해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동안 해운대와 부산 지역에서 장산국을 더듬던 중 가락국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았다. 홀로 1차 김해박물관 탐방에 이어 운 좋게 ‘해운대문화원 문화원 교류사업’에 참여했다.
◇ 김해박물관 지하수장고
해운대문화원(원장 최수기) 일행을 태우고 출발한 버스가 김해로 달리는 중 많은 간식들이 제공되었다. 김해박물관에 도착하니 김해문화원 김우락 원장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가야의 유물을 관람하노라니 어느새 박물관은 아이들 단체관람객들로 가득했다. 고사리손으로 사진을 찍고 수첩에 기록하는 등 학습열이 대단했는데 개중에는 입으로 열심인 아이들이 있어 박물관이 들썩들썩했다. 박물관 아래 지하에는 큰 수장고가 마련돼 전쟁 등 유사시 서울중앙박물관의 유물들의 피난처 역할을 하게 된다는 설명도 있었다.
◇ 구지봉 차나무
박물관 바로 뒤편 구지봉으로 향하는 길은 따사로웠다. 구지봉의 온화한 기운 속에 고인돌 앞에서 구지봉에 얽힌 이야기도 들었는데 이는 곧 장산국의 기원이기도 했다. 이동하는 길옆에 차나무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활기찬 강영숙 해운대새마을금고 부녀회장이 그냥 지나갈 리 만무해 차 새순을 따느라 두 팔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미 장산에도 차나무가 잘 자라고 있는 것을 참조해 우리 대천공원에도 차나무를 조경수로 식재하면 어떨까?
◇ 허황옥 왕비 파사석탑
정진택 해운대문화원 사무국장의 인솔로 점심을 마친 후 찾은 허황옥 왕비릉에선 그녀가 들고 왔다는 파사석탑에 눈길이 절로 갔다. 오랜 세월 동안 깎여 탑이라기보다는 돌멩이를 쌓아놓은 모습이었다. 성난 파도를 잠재운 영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탑을 조금씩 떼어가는 바람에 이처럼 둥글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 수로왕릉에 대한 의문
인근에 위치한 수로왕릉으로 향했는데 1980년 초 방문했을 때에 비해 주변 모습이 달라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수로왕과 허황옥 왕비의 무덤이 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그 이유에는 다양한 설이 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수로왕(42년~199년)은 157세, 허황옥왕비(32년~189년)도 10년 전인 157세에 돌아가셨다. 48년에 국제결혼을 했으니 두 분 모두 140년 이상 부부로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140년을 허왕비와 함께 산 김수로왕은 죽어서 허왕비와 함께할 생각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돌아서 나오려는데 황구 전문위원이 한곳을 가리킨다. 제를 지낼 때 제관이 직접 제물의 신선도와 질을 살피고, 생명의 존엄을 기리는 의식을 치르는 성생대인데, 이곳을 거쳐 제물을 다른 곳으로 옮겨 잡는다.
◇ 대성동 고분군
대성동 고분군으로 가는 길은 황사에 가려 가물거렸다. 고분군 앞 허황옥 왕비가 의자에 앉아 있는데 앞에는 ‘차조(茶祖) 보주태후 허황옥상’이라 새겨져 있다. 차조라니…. 허황옥 왕비가 차와 무슨 관련이 있어 차의 조상할미로 만들어 놓은 것일까? 차라리 그녀가 가져온 가공된 옥구슬로 봐서 옥구슬 가공 기능보유자라면 수긍하겠다.
대성동 고분군은 수로왕릉에서 가까운 거리의 구릉지대다. 대성동박물관엔 고분의 발견 당시 상태를 부장품과 재현해두었는데 수많은 꺽쇠(덩이쇠)와 토기들이 무덤에 들어 있었다. 저 많은 항아리에 무엇을 담고자 했을까? 누구라서 저 많은 꺽쇠와 토기류를 무덤 속에 다 채울 수 있었을까?
◇ 봉황대 창고
봉황대에선 시간에 쫓겨 습지에 세워진 식량창고와 기타 병장기 창고 형태의 재현된 건물만 관람했다. 흥미로운 건 식량창고의 경우 쥐들이 기둥을 타고 창고로 침범하지 못하게 기둥과 창고 바닥 사이에 동그란 원형 나무판을 끼워 놓은 점이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가야 기마병이 늠름하게 배웅해 주었다.
해운대문화원에서는 이전부터 주민들을 상대로 다양한 문화탐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번 해운대문화원을 통한 김해 가락국 탐사는 장산국 연구에 유익한 시간이었다.
/ 예성탁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