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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시대 최후의 혁명가-한원식 선생님
나눔문화 평화나눔 아카데미 강의 중 하나입니다 이윤구라는 회원분이 기록한 것을 옮겨왔습니다. 고맙다는 것은 고루고루 맞이한다. 하늘이 같이한다는 것이라네요. 우리 시대 최후의 혁명가 1. 농부(?) 혹은 사상가, 수도사 한원식 선생님(이하 ‘선생님’이라 합니다)을 농부로 소개받았는데 강의 중 만난 선생님은 농부가 아닌 사상가에 더 가까웠다. 농부라는 직업으로 인해 강의내용보다는 마음씨 좋은 분과의 편안한 만남을 기대했다. 그리고 덤으로 자연농법에 대한 정보를 기대했다. 그래서 솔직히 평소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강의에 참석했다. 그런데 이번 강의는 이런 나의 기대와 예상을 완전히 비켜갔다. 강의는 1부와 2부의 강의로 진행됐다. 1부 강의는 공식적으로 예정된 시간에 맞춰 진행되었고 2부 강의는 뒤풀이에서 이어졌다. 1부에서는 사상가와 한글학자의 모습을, 2부에서는 농사꾼과 수도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부 강의는 기록을 토대로 정리를 해서 그나마 선생님 사상의 진의를 덜 왜곡했다. 2부는 뒤풀이인줄 알고 참석했다가 기록을 하지 못했다. 아둔한 기억을 더듬어 최대한 선생님 사상의 진의를 왜곡하지 않고자 애를 썼다^^. 2. 우리말 뜻풀이에 담긴 사상의 진수 선생님은 강의 시작을 동요로 여셨다. 노래를 부르신 후 그 노래에 대해 풀이를 해주셨다. 바닷물이 바위에 부딪쳐서 파도가 되는 이유는 하늘로 가서 구름이 되고 싶어서다. 구름이 비가 되는 이유는 동네로 가고 싶어서다. 비가 냇가로 가는 이유는 동무를 만나러 가고 싶어서다. 동요에서 이런 의미를 끌어 내심으로써 평범한 농부가 아님을 예고하셨다. 선생님은 강의 중 우리말에 대한 뜻풀이를 많이 해주셨다. 그 뜻풀이 하나하나에는 선생님이 삶으로 직접 터득하신 사상이 녹아 있었다. 우리말 하나하나에 담긴 사상은 두고두고 음미를 해야 할 만큼 깊었다. 이 뜻풀이는 국어학자처럼 책이나 연구 혹은 누군가의 강의를 통해 깨달은 것이 아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그 의미를 생각하다 깨달으신 것이다. 강의는 “가르치기”보다는 “나눈다”는 것이다. 고맙다는 “고루고루 맞이한다”는 뜻이다. 이는 또한 “하늘이 같이 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늘은 풍요롭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사합니다”보다 그 뜻이 훨씬 더 깊다. 3. 나눔과 생명 나누면 생명이 된다. 나눔이 생명을 펼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눔은 막힘이 없는 삶이다. 뒤풀이 시간을 포함한 4시간 동안의 만남을 통해 선생님 자신이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막힘 없는 삶을 사셨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농사꾼은 삶이 트이지만 농업인은 삶이 막힌다. 농업인은 돈을 쫓기 때문이다. 이 시대 농부가 모두 농업인으로 갔기에 “농심”이 라면 공장에 가 있는 것이다. 이 촌철살인과 같은 한 마디에 청중들 모두 박장대소를 했다. 선생님은 중간중간 이런 표현으로 강의장을 순식간에 웃음바다로 만드셨다. 선생님은 진정 단순하고 단아하고 단단하신 분이셨다. 그리고 담백하고 솔직하며 꾸밈이 없고 자유롭고 해맑으신 분이셨다. “참”은 사실이고 “거짓”은 꾸민 것이다. 우리는 여름에 밥을 상온에 놔두면 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자연농법으로 지은 쌀은 여름에 쉬지 않는다. 자연농법으로 지은 쌀에는 버섯종균이라는 새로운 생명이 생겨나 생명의 전환(transformation)이 일어 난다. 달걀 역시 오래 돼도 상하지 않는다. 치즈처럼 발효된다. 참된 것은 생명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거짓된 것 즉 꾸민 것은 금새 생명을 잃고 다른 생명까지 잃게 만든다. 4. 온전함을 누림 선생님은 오늘날 종교가 생명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일갈하셨다. 기독교, 불교, 카톨릭 등 제도화된 종교는 중세시대 면죄부를 파는 것처럼 구원을 마케팅하고 있을 뿐이다. 특별히 기독교는 아무런 내용 없는 예수로 포장된 구원이라는 상품을 세일즈하고 있다. 이 땅의 삶을 불교는 고뇌로, 기독교는 미완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선생님이 이해하는 이 땅은 온전한 곳이다. 왜냐하면 잔치 밖에는 벌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제일 많이 한 것은 먹고 마시는 잔치였다. 천국은 이웃과 함께 하는 잔치이자 서로에 대한 섬김과 즐거운 노동이 있는 곳이다. “복 받으십시오”는 꾸민 말이다. “복 누리라”가 참된 말이다. 천국이 이미 이 땅에 와 있기 때문이다. 천국은 지구 밖 다른 외계행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바르면 바르지 못한 것이 나에게 달라붙지 못한다. 자급자족은 잘못된 언어조합이다. “자급”은 뭔가를 이룬다는 것이고 “자족”은 절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앎의 의미 가르침이 아니고 만남이 돼야 한다. 말씀을 들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나누러 가는 것이다. 내 안에 이미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목사님들 상대로 강의하신 적이 있는데 목사님들이 믿음의 뜻을 모른다고 하셨다. 믿음은 “앎”이다. 앎은 행동으로 반드시 나오게 돼 있다. 구약에서 안다(know)는 ‘야다’다. 이 ‘야다’는 헬라적인 인식론적 앎이 아니라 인격적, 경험적 앓을 의미한다. 부부 사이에 육체적으로 친밀하게 아는 것이 앎이다. 앎이 있게 되면 바로 행동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9할 이상은 사실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잡다한 정보를 축적하고 있을 뿐이다. 6. 털어버림(자본주의 떼어먹기) 선생님이 생명의 본질을 알게 된 것은 34살 무렵니다. 그 이후 31년간 저절로 길이 열리는 삶을 사셨다. 진리로 사는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밥”은 받들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사고 파는 대상이 될 수 없다. 생명을 만드는 지구(땅)은 내 것이 아니 모두의 것이다. 부동산 둥기부에 내 소유로 표시된 땅은 실은 허상이다. 100평 타워팰리스에 살면서 그 땅만을 자기의 땅으로 생각하는 부자들이 어쩌면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다. 선생님처럼 지구를 내 소유로 삼은 사람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하고 가난한가! 땅을 사고 파는 것은 어머니, 아버지를 사고 파는 것이다. 선생님이 자연농법을 하기 전 아파트 한 채 정도에 상당하는 빚이 있었다. 선생님은 이 빚을 해결하는 숨겨둔 비법을 알려 주셨다. 떼먹는 것이다!! 주판을 하다가 잘못되면 주판알을 하나하나 털어 버리지 않고 “통째로” 털어 버린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즉각 전부 털어버려야 한다. 빚을 떼먹는 것은 자본주의를 털어버리는 것이다. 자본을 무력화시키는 확실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놀이는 같이 어울리는 것이며 혼자서도 가는 것이다. 소외나 힘든 것이 없다. 어린 시절 늦게까지 동무들과 뛰놀다 보면 저녁 먹는 것도 잊어버리곤 했던 기억들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이 놀이를 게임으로 바꿔 놓았다. 아이들은 공부할 이유가 없다. 아이들은 놀아야 하고 농사나 일은 부모가 하는 것이다. 선생님이 자녀들이 학교에 입학하면서 당부한 것은 공부, 숙제, 저금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저금은 아이들이 동무랑 나눠먹는데 써야 할 것을 나를 위해 모으는 것이라 특별히 반대하셨다. 자본주의는 제로섬 게임이다. 내가 부자가 되면 누군가는 가난하게 되고 불행해 진다. 7. 정신과 물질 정신으로 물질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물질은 정신을 변화시킨다. 자본론의 얘기가 아니라 선생님이 농사를 지으시면서 깨들은 것이다. 정신은 마음이고 “마음”은 “맞이한다”는 뜻이다. 영감을 받아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생각을 받아(맞이해) 시를 쓰는 것이다. 포이에르 바하도 먹는 것이 그 사람의 본질을 결정한다고 했다(man is what he eats). 한국의 기독교는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비롯된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정신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이원론에 갇혀 있다. 그러나 진실은 반대다. 부활 후에 우리 모두는 새로운 “육신”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기적은 없다. 이 땅에서는 오직 사실로만 간다. 이 땅에는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는다. 오직 꾸민 것만 새로이 나타난다. 말에는 꾸밈의 말과 사실의 말, 통하는 말과 뜻의 말이 있다. 무소유는 꾸민 말이다. 자족이 진정한 말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모두 잘못된 표현이다. 왜냐면 “아름답다”는 가득하다(한 아름)에서 나온 것이다. 작은 것도 아름답다, 꽃도 아름답다가 바른 말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가 아니라 “원수가 없어라”가 바른 표현이다. 쓸데 없음이 계속 쓸데 없는 것을 만든다. 물질이 정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현대의학은 꾸민 것이다. 꾸민 것은 미신이다. 병은 빛을 가린 것이다. 병원이 없는 삶이 될 때 온전한 나눔의 삶으로 갈 수 있다. 의학의 문제에서 해방될 때 온전한 나눔이 가능한 것이다. 성서에서 예수의 옷자락을 스친 이가 병이 나았다. 그러나 정확히는 앎(믿음)이 병을 낫게 한 것이다. 우리 몸에는 병이 있을 수 없다. 우리 몸에는 “앓이(알아차리다)”가 있을 뿐이다. 나음의 전제는 사랑이다. “사랑”은 살린다는 의미다. 아픔이 생명을 살리는 길로 인도한다. 성서에서 병을 나은 이에게 가서 다시 범죄치 말라고 한다. 병이 생긴 이유를 말한 것이다. 여기서 범죄는 잘못된 삶 자체이다. 아픔은 살리는 통로가 막힌 것이다. 아픔은 우리를 살리려고 통로를 여는 것이다. 의, 식, 주가 아니라 식, 주, 의가 바른 순서다. 8. '저버림'과 '온전함' 태양은 압력이다. 우주의 압력이 모여 빛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온전하다는 영원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원 속에 사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하다 왜냐면 영원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말 속담에 3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 표현이 있다. 여기서 버릇은 기억력 즉 사고를 뜻한다. 봉사는 쓰임의 의미를 갖는다. 밥 짓는 일이 우주 모든 생명의 원리라고 하셨다. 온전하게 쓰이느냐 온전하게 쓰이지 못하느냐가 문제다. 너무 많이 먹는 것은 오히려 몸의 효율을 줄인다. 나눔이 몸 속에서 줄어들게 된다. 흰쌀은 나눔을 방해하여 공동체를 방해한다. 왜냐하면 흰쌀은 이미 쓰임을 저버렸기 때문에 제대로 된 나눔의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현미는 우리말로 통쌀이다. 통쌀은 물에 담그면 싹이 나온다. 저버린 삶에 길들여진 스스로를 되돌아 봐야 한다. 구체적으로 통쌀과 아침 안 먹기를 해야 한다. 아침을 먹지 않으면 배변이 잘 된다. 예방주사는 면역을 높여 준다. 면역이란 경험해서 미리 연습시키는 것이다. 우리 몸은 숨이 이뤄져야 한다. 숨은 당기고, 변화시켜, 내보내는 것이다. 아침을 먹으면 어제 먹은 것이 나가는 역할을 방해한다. 운동은 먹을 게 생기지 않는 것이고 일은 먹을 게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일은 싫증이 나지 않는다. 일이 싫어지는 이유는 어제 먹은 게 남아 있어서다. 아침 안 먹고 일하면 처음에는 어지럽지만 영양부족이 생기지는 않는다. 아침을 먹으면 독이 나가지 않는다. 독이 쌓여 앓이가 생긴다. 아침을 먹지 않아야 독이 빠져 나간다. 장은 시궁창이다. 어지러운 이유는 장에 독이 가득 차서 가스가 올라오기 때문이다. 영양학적으로 1일 2,400kcal 섭취를 권장한다. 그러나 몸의 효율은 1,000kcal일 때가 최적이다. 소비가 절반으로 줄면 자연스레 나눔이 절로 이루어 지게 된다! 저버리지 않음이 중요하다. 밥을 모심을 나를 모심이고 온전히 나를 떠받드는 것이다. 나를 잘 떠받들어야 나눔이 일어난다. 하루 두 끼 통쌀로 40분 이상 씹어 먹어야 한다. 위가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체하는 것이지 빨리 먹어서 체하는 것이 아니다. 버릇을 잘 들여야 한다. 선생님에게는 돈,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게 하나 있다. 바로 멧돼지다. 이 녀석 때문에 다섯 가마를 수확할 수 있는 논에서 올해 한 가마밖에는 수확할 수 없게 되었다. 철망을 쳐도 이를 뚫고 들어오는 통에 탱자나무로 된 울타리를 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선생님이 멧돼지를 잡으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러면 전남 순천에 가서 멧돼지 고기를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강의 끝에는 직접 지은 시조를 한 수 읊으셨다. “빛 받아 내 몸 되니 빛 된 내 몸…” 시조를 받아 적기에 내 손이 너무 느리고 기억하기에 내 머리는 너무 아둔하다. [질의응답] 질문한 분의 표현 중 “깨달음”은 “터득”이 맞고 “말씀”은 “말의 쓰임을 당하다”는 뜻이다. 1. 숨통의 열림과 즉각 실천 자연농법을 하시게 된 계기는? 선생님은 초등학교만 나오셨고 몸이 안 좋아서 8년만에 졸업을 하셨다. 이후 초등학교 학력으로 인해 18살 때 서울에 상경하여 차에 물건을 옮겨 싣는 일을 하셨다. 이 조차도 몸이 약해서 계속 하지 못하고 4년쯤 후에 다시 고향인 공주로 내려 오셨다. 그 때부터 농사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농사를 하게 되셨다. 조금 윤색해서 과거를 포장할 수 있는데 너무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다. 농사를 배우는데 당시 어느 한 분이 “점진적인”으로 농약을 줄이자는 얘기를 하셨다. 선생님은 농약이 나쁜 것이면 아예 “전면적으로” 농약을 거부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하셔서 아예 농약을 쓰지 않는 자연농법을 하게 되셨다. 그러다가 30세쯤 되던 해에 배추밭에 물이 차는 일이 생겼다. 그런데 밭을 간 배추는 모두 죽고 밭을 갈지 않은 배추는 산 것을 보고 “자연농법의 숨통”이 열리게 된다. 이후 배추 값이 폭락해서 제 값을 못 받고 아드님이 뇌염에 걸린 것이 계기가 되어 “삶의 숨통”이 열리게 된다. 선생님은 “즉각 실천”이라는 말을 강조하셨다. 자연농법을 하면서 안 되는 경험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안 되는 것을 당연히 여기게 됐다. 안 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몸에 터득하셨다. 2. 우리말 터득 비결 국어학자보다 우리말에 밝은 이해를 갖게 된 비결은? 선생님은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에 있는 동화책을 자연스레 접하게 됐다. 농사일을 하면서는 책을 읽을 시간이 전혀 없다. 우리말의 의미는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새가 운다”에서 울림을, “말씀”에서 말의 씨를, “사람”에서 살리다를 깨닫는 식이다. “꿈”은 꾸며졌다는 의미이므로 “좋은 바람을 가져라”가 옳다. 선생님은 책을 보고 연구해서 무언가를 배운 것이 아니다. 우리말 풀이는 철저히 삶으로 터득하신 것이다. 3. 피부관리 비결 피부가 생각보다 하얀데 특별한 비결은? 세 끼를 먹으면 피부가 타고 두 끼를 먹으면 타지 않는다. 밥 잘 먹고 잘 싸고 일 잘하고 잘 자면 “마음의 평화 모심”이 잘 된다. 정말 시종일관 선생님은 평화 그 자체였다. 선생님은 돈벌이를 전혀 하지 않는다. 집에 있는 모든 것이 선생님을 편하게 해준다. 일을 극진함으로 하신다. 멧돼지 쫓는 일까지도. “제일 많이 나누려면 제일 많이 일해야 한다”는 말로 제1부 강의를 마치셨다. 일은 놀이라고 하셨다. 선생님이 강의하는 동안 댁에서 장모님과 아내가 더 많이 일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셨다. [뒤풀이] 뒤풀이는 또 하나의 강의였다. 2시간이 넘는 강의였는데 기록을 하지 못한 관계로 많은 부분들이 생략될 수밖에 없었다. 2부 강의에서 선생님의 일상을 중심으로 그 속에서 터득한 사상의 고갱이를 전해 주셨다. 자신의 아둔한 기억력으로 인해 강의를 전부 다 옮기지 못하게 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1. 밥 모심(반숙 방법)과 발효 통쌀을 3시간 동안 물에 불린다. 물에 불린 통쌀 등을 압력 밥솥에 넣고 물을 통쌀과 같은 높이만큼 넣는다. 압력솥의 추가 1번 흔들릴 때 전원을 끈다. 1분 30초를 기다렸다가 솥에 있는 밥을 다른 그릇에 옮겨 담는다. 1분 30초 후면 물이 통쌀에 거의 스며들어 먹기 좋은 반숙이 된다. 반숙을 먹는 것을 일주일 정도만 하면 각종 곡물 특유의 씹히는 이 그대로 전해져 이에 중독이 된다. 과일에서 효소를 얻기 위해서 백설탕을 넣는 게 좋다. 백설탕이 흑설탕보다 과일 등에서 영양분을 뺏어 오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효소를 얻는데 보통 3년 걸리는데 이 방법을 쓰면 3개월 정도면 충분하다. 발효를 통해 포도당을 얻을 수 있다. 2. 꾸밈의 말과 사실의 말 잠에는 들잠과 날잠이 있다. 선생님은 구들방에서 주무시는데 구들방이 몸에 좋은 이유는 원적외선이 나와서가 아니다. 온도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불을 땔 때는 온도가 올라갔다가 불이 식으면서 온도가 내려가는 이치가 자연스럽게 잠이 들고 깨는 리듬과 일치한다. 도자기를 구울 때 목욕재개를 하는 이유는 혼을 담기 위해서가 아니다. 도자기를 굽기 위해서는 온도에 민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이 바짝 깨어 있어야 하므로 목욕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생님은 “꾸밈의 말”이 아닌 “사실의 말”을 자주 해주셨다. 강의를 정리하면서 나를 많이 돌아보게 된다. 나 역시 남을 의식해서 꾸밈의 말을 많이 쓰고 있기 때문이다. 10시에 잠자리에 들면 새벽 3시까지가 들잠의 시간이고 약 2시간 정도가 날잠의 시간이다. 이 날잠을 잘 자야 하루를 힘차게 생활할 수 있다. 새벽불공, 새벽기도는 이런 면에서 이치에 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새벽공양을 드리는 스님 중 몸이 건강한 분이 별로 없다. 3. 죽음 선생님은 두 분의 자녀를 두고 계신듯하다. 아드님과 따님. 얘기 도중 따님이 올해 5월 19일 죽었다는 얘기를 하셨다. 따님의 죽음을 얘기하면서 선생님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으셨다. 선생님은 강의 내내 시종일관 해맑고 힘이 넘치셨다. 그 비결은 숨통과 나눔의 생활을 터득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따님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따님의 죽음에 대해 너무나 담담하셨다. 따님이 병 중에 있을 때는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 때문에 부모 된 심정에서 무척 가슴이 아프셨다. 따님이 죽은 후 선생님 댁 감나무 밑에 묻으셨다. 나중에 감이 되라고. 글로 옮기기가 너무나 조심스런 내용인데 선생님의 얘기를 통해서 어느새 죽음이 아름다움이 되어 버렸다. 내가 이해하던 죽음은 생에 갑작스레 임하는 비정상정인 폭력이다. 선생님이 따님의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들으면서 죽음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죽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를 잘해야 한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 두 끼 통쌀 식사(자족과 절제), 숨통(죄 짓지 않는 올바른 삶의 태도)으로 대표되는 자기절제를 생활화해야 한다. 고려장은 산 사람을 생매장하는 야만적인 악습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고려장은 힘을 다 쓰고 죽음을 앞둔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죽음 자리를 준비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음을 평안하게 맞는 방법은 곡기를 끊는 것이다. 곡기를 끊으면 의식을 잃으면서 감각만 존재하기에 고통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평소 단식을 통해 훈련되어 있으며 곡기를 끊기가 훨씬 더 수월해 진다. 모세도 느보산에서 순장을 당했고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했다. 4. 앓이 병은 “앓이”다. 앓이를 하는 이유는 막힌 숨통을 트여 주기 위함이다. 모든 병의 원인은 독이 쌓인 데서 비롯된다. 지나치게 기름진 식사, 과식은 몸에서 제대로 변화(피와 살)되지 못하고 위에 쌓이게 된다. 쌓인 것은 얼마 후 썩게 되고 이 썩은 것이 독이 되어 각자의 몸에 제일 약한 부위에 질병으로 나타나게 된다. 독을 제거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두 끼 통쌀 식사와 단식이다. 단식을 자주하면 나중에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다. 죽음은 탄생과 거꾸로 간다. 의식이 잠들고 느낌만 존재한다. 죽을 때 식사를 끊으면 의식이 없어져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한 상태로 평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선생님이 여러 암환자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실제로 겪으신 것이다. 5. 곁눈질 선생님에게 농사는 힘든 노동이 아닌 재미있는 일이다. 간혹 사람과의 만남에서 힘든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처하는 비법은 곁눈질이다. 즉 상대를 정면으로 마주 대하는 것이 아니라 곁눈질로 상대를 품는 것이다. 선생님은 본인과 다른 생각과 삶을 사는 사람을 결코 부정하지 않으셨다. 그런 면에서 선생님은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6. 단식과 치유 장모님이 일흔이 넘어서 앉은뱅이 병에 걸리셨다. 선생님이 장모님을 전남 순천으로 모셔와 5일간 단식을 시키셨다. 단식 중에는 물만 드셨다. 이후 일어나 걸으실 정도가 되셨다. 한 달 정도 두 끼 통쌀 식사를 하신 후 몸이 거의 완쾌되어 지금은 선생님의 농사를 거들어 주고 계신다. 최근에 아는 분이 보내 준 뿔 달린 동물이 여든이 넘으신 장모님을 뿔로 받아 허리가 90도 이상 굽게 되셨다. 15일 정도 하루에 꿀물 2잔만을 드시면서 단식하신 후 지금은 2,400평이나 되는 밭을 혼자 매실 정도가 되셨다. 어르신들이 여름에 장시간 햇빛에 노출되면 일사병에 걸리게 된다. 이는 몸에서 땀을 통해 열을 배출하는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두 끼 통쌀 식사를 하면 어르신이라도 일사병에 걸리지 않는다. 몸의 효율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암과 같은 중병에 걸린 경우 단식과 통쌀 식사를 한다고 무조건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몸이 이미 죽음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죽는 것이고 삶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사는 것이다. 누가 먼저 가느냐의 순서의 차이일 뿐 누구나 최종적으로 가야 할 자리이다. 7. 순환농법 선생님은 3,000평 규모의 논밭을 경작하고 계신다. 이 가운데 600평이 논이고 2,400평이 밭이다. 밭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종류가 너무 많아 재배하지 않는 곡물을 알아 보는 편이 낫다. 선생님은 전혀 퇴비를 사용하지 않고 땅에 맞춰 곡물을 재배한다. 일반적으로 작물 재배에 맞추기 위해 비료나 퇴비를 주어 땅을 변화시키는데 선생님은 반대다. 땅이 산성인 경우 땅에 맞는 작물인 팥과 같은 것을 재배하신다. 시간이 지나면 토양에 변화가 생기고 이에 맞춰 농작물을 계속 바꿔가며 재배하신다. 순환농법을 하신다. 8. 육식 육식은 혈관을 확장해 주는 역할을 한다. 단 지나친 육식은 혈관확장으로 인해 고혈압 등의 병을 일으킨다. 육식은 채식을 주로 하는 사람에게 채식의 효율성을 높여주므로 이를 할 필요가 있다. 육식은 예전에 잔치나 생일에만 육식을 했듯이 몇 회 정도로 충분하다. 고기 400kg을 얻기 위해 들어가는 곡식은 1,200kg이다. 그러므로 지나친 육식은 나눔에 방해가 된다. 두 끼 통쌀 식사로 채식을 할 때는 짜게 먹는 게 좋다. 숨통, 두 끼 통쌀 식사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초지일관 나오는 통에 여러 번 박장대소를 했다. 선생님의 답변은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했다. 듣는 사람의 실천이 문제였다. 9. 돈으로부터 해방된 삶 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불안을 넘어 공포를 느낀다. 이 막연한 공포가 자살 등 숱한 사회문제를 낳는다. 선생님은 젊은 시절에 오늘날 아파트 한 채 정도 되는 1,400만 원 정도의 빚을 지게 되셨다. 돈을 빌려 준 사람들이 몰려 와서 멱살을 잡고 하는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이미 돈을 쫓는 삶을 포기하셨기에 담담히 그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오히려 돈을 쫓는 그들을 측은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품게 되셨다. 돈을 빌려 준 사람들이 선생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정신이 나간 줄 알고 돈 받기를 포기하셨다. 선생님은 고향에서 쫓겨나서 지금 계시는 순천으로 내려오셨다. 순천에 거주하고 계신 집은 선생님 소유가 아닌 누군가가 14년째 버려 둔 집이다. 집에서 쓰는 물건들 또한 돈을 주고 구입한 것이 아니다. 남이 버린 것을 가져다가 고쳐서 쓰고 계시다. 선생님은 자연농법으로 재배하고 계신 작물들은 돈을 주고 팔지 않으신다. 3,000평 정도 되는 논과 밭에서 나오는 농작물은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거나 암환자와 같은 중병을 앓는 분들에게 그냥 나눠 주신다. 선생님은 경작하고 계신 땅을 사모님의 전세보증금과 아는 치과의사분이 후원해 준 돈으로 조금씩 마련하셨다. 한 평당 5천원 내지 3천원이다. 선생님은 돈이 전혀 없이 돈과 전혀 무관하게 살고 계셨다. 돈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더 무서운 것이지 실제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다. 두려움의 권세에서 벗어나면 선생님과 같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돈의 노예가 된다는 의미를 돈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10. 자유한 삶 선생님은 주변 마을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인정을 받고 계시는 것은 아니다. 농업인이 농사꾼을 이해하기 힘든 탓이다. 선생님은 나눔으로 인해 함께하는 분들이 많으셨다. 돈을 벌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돈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돈이 필요할 때면 주변의 누군가가 돈을 보내주셔서 이를 유용하게 쓰신 경험이 굉장히 많으셨다. 선생님이 계신 마을 인근에 네 분이 거주하면서 자연농법을 전수받고 계신다. 시골에만 계시다가 공해와 소음이 넘치고 번잡한 서울에 오셔서 힘들지 않느냐는 답변에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오히려 즐겁다고 하셨다. 숨통이 제대로 트이면 공해가 문제되지 않는다. 번잡한 서울에 와서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나누는 것이 즐겁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다양한 질문에 대해 머뭇거림이나 거침이 없었다. 숨통에 대한 깨달음과 트임, 즉각적 실천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듯하다. 德不孤 必有隣(덕불고 필유린). 정말 선생님과 같이 돈에서 해방되어 나눔을 행하면 비루하고 비참한 삶이 아니라 자유한 삶을 살 수 있다. 나를 포함한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이 누리고 있고 이것이 독이 되어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병들게 하는 것이다. 참고로 물을 마실 때 한 번에 들이키듯이 마시면 안 된다. 침과 섞어서 천천히 마셔야 신장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위가 소화를 시키는 것이 아니고 잘 씹는 것이 소화를 시키는 것이다. 위는 위산 분비를 통해 먹은 것을 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피는 위에서 위산을 통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위산이 과다하게 분비되면 몸에 문제가 생긴다. 11. 혁명 나눔, 자족(절로 함)을 그냥 살아버리시는 선생님의 모습은 마치 수도사의 모습과 너무도닮아 있다. 함께 나누는 자리가 명당이다. 숨통(받아들여 변화시키고 내보냄)과 두 끼 통쌀 식사, 이렇게 단 두 가지만 잘 실천해도 삶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즉각적인 실천”이 문제다. 이것을 행하면 개인, 사회에 조용히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의 대안은 바로 선생님과 같이 자본에 거스르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학자의 이론이나 혁명가의 혁명이 아니다. 삼성의 이모 회장으로 대표되는 자본가가 제일 무서워해야 할 사람은 자본에 반대하는 학자나 단체보다 전남 순천에서 묵묵히 자본의 힘을 무력화시켜 버리신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자본과 공해 등 우리가 부정하고 싶은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것을 오히려 품어버리셨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분이다. 국정원이나 검찰이 국가보안법상 국가의 현 체제(status quo)를 위협하는 요주의 인물로 감시해야 할 제1의 인물이 바로 선생님이다. 그런데 세상은 아직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다!! 우공이산(寓公移山)! 이 단어가 강의를 정리하면서 뇌리를 계속 맴돌았다. |
출처: CHINA STORY 원문보기 글쓴이: 임연옥
첫댓글
" 현대의학은 꾸민 것이다. 꾸민 것은 미신이다.
병은 빛을 가린 것이다. 병원이 없는 삶이 될 때 온전한 나눔의 삶으로 갈 수 있다.
의학의 문제에서 해방될 때 온전한 나눔이 가능한 것이다."
" 자본주의의 대안은 바로 선생님과 같이 자본에 거스르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학자의 이론이나 혁명가의 혁명이 아니다.
삼성의 이모 회장으로 대표되는 자본가가 제일 무서워해야 할 사람은
자본에 반대하는 학자나 단체보다 전남 순천에서 묵묵히 자본의 힘을 무력화시켜 버리신 선생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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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리스트, 딥스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런 선구자적인 사상을 가지신 분이
진정한 혁명가가 아니겠습니까???
글 감사합니다.
농사꾼vs농업인
참된 것은 생명을 잃지 않는다
제도화된 종교는 구원을 마케팅!
복누리세요~로 바꿔요
앎은 행동으로 나온다
내 안에 이미 갖춰져있다
지구(땅)은 내 것이 아니고 모두의 것이다
아이들은 공부할 이유가 없다
공부,숙제,저금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부자가 되면 누군가는 가난하게 되고 불행해진다
무소유는 꾸민 말이다
자족이 진정한 말이다
현대의학은 꾸민 것이다
병원이 없는 삶이 될 때 온전한 나눔의 삶으로 갈수있다
물질이 정신을 변화시킬수 있다
의,식,주가 아니라==> 식,주,의
아침을 먹지 않아야 한다?
예방주사는 면역을 높여준다?
(이 부분은 논쟁여지가 있어 패스)
모든 병의 원인은 독이 쌓인 데서 비롯된다 독을 제거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두 끼 통쌀 식사와 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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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제도화된 종교화는 구원을 마케팅!
내가 부자가 되면 누군가는 가난하게 되고 불행해진다.
무소유는 꾸민 말이다.
현대의학은 꾸민 말이다.
아침을 먹지 않아야 건강해 진다.
ㅡㅡㅡㅡㅡㅡ
감사합니다..^^
좋은 글이 너무 많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