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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을 남으로 넘으면 끝자락 쯤 마지막 힘을 모은 듯 금오산이 우뚝 솟아있다. 그 주위로 오밀조밀 낙동강이 물길을 잡고 있으니 구미 선산은 어디를 가나 금오산 손바닥 안일 수밖에 없다. 답사를 가기 전 꼭 찾아보는 것이 지도이며, 꼭 읽어 보는 책이 이중환의 「택리지」이다. 그 곳의 산세의 흐름이나 지류, 물길, 인물이나 풍수 등등 참고할 자료가 많이 있기 때문이지만, 그곳에 서면 지형을 살펴보게 되는 고마운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의 시각으로 보자면 약간의 편견 된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것도 그리 없는 것이 「택리지」이다.
딱 하나만 인용하자면, ‘조선의 인재 중 반은 영남에 있으며, 그 중에 반은 선산에 있다.’ 이 말은 고려 말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고려삼은(三隱)이라 불리는 야은 길재가 이 고장 사람이며, 그의 제자가 강호 김숙자이며, 김숙자의 아들이 바로 점필재 김종직이다. 이후 현풍의 한훤당 김굉필, 조광조로 사림문화의 계보가 점착된 곳이기도 하니 그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세조 때 단종 복위를 꿈꾸다 죽음으로 항거한 사육신인 하위지 또한 이곳 사람이니 그 의미를 새겨봄직 하다.
선산은 또 하나의 답사지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도(혹은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불교의 포교를 위해 처음 숨어들어 살았던 곳이 이곳 선산 모례가정(최초의 불자 모례의 집)이며, 아도가 창건했다는 신라 최초의 절집 도리사가 있는 곳이다. 그러니 곳곳에 불교 문화재가 산재해 있으니 풍족한 답사길이 더불어 즐거울 수밖에 없는 곳이다. 특이하면서도 빼어난 멋을 자랑하는 신라시대 죽장동 오층석탑, 그와 형제의 모습을 한 낙산동 삼층석탑은 불탑을 보는 새로운 눈을 뜨게 해주며, 야은 길재의 금오서원이 낙동강을 굽어보며 꼿꼿한 절개를 토하고 있다. 상상 만으로 발걸음이 가벼우니 답사는 이렇듯 늘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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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은 길재의 금오서원
야은 길재, 고려 말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고려삼은(三隱)이라 불리는 길재선생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몽주 학통으로 성리학을 배웠고, 그의 제자 김숙자, 아들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진다. 조광조가 무오사화 때 평안도로 유배생활을 온 김굉필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니 사림의 학통이 성립이 된다.
또한 길재는 조선3대왕 태종 이방원과 함께 동문수학한 한 사이이다. 이방원은 그를 불러 함께 새 나라를 만들자고 간곡히 부탁을 하였으나 길재는 ‘한 여자가 두 남자를 섬길 수없 듯, 어찌 두 임금을 섬길 수 있냐’고 하며 낙향하여 이곳 선산으로 내려와 후학양성에 힘쓰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금오서원은 처음 금오산에 세웠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의 자리에 옮겨지었다.
비탈진 터에 계단을 오르면 삼문 읍청루가 굽이 흐르는 낙동강을 넓게 조망하며 서 있고, 안으로 들어서면 동제 서제가 동서로 놓여있다. 더 높은 터에 강학공간인 정학당(正學堂)이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날개를 펼치며 금오산을 마주하며 넓은 들판과 낙동강 줄기를 바라보고 있다. 그 뒤를 돌아 삼문을 지나면 제향공간인 상현묘가 자리하고 있다. 남북으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서원의 양식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번 답사 길은 금오서원은 한창 수리 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삼문에서서 앞의 넓은 공간에 폐부 깊숙이 맑은 공기만 불어넣고 돌아서 왔다.
몇 해 전에 찾았을 때 정학당 내부에 걸린 글들을 자세히 보질 못해 아쉬웠는데 또 다른 미련이 생겨난다. 또한 여전히 미결인 정학당 지붕측면 합각에 새겨진 大자와 子의 글씨들 의미를 몰라 여전히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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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장동 오층석탑
지금은 서황사로 불리고 있지만 몇 해 전에 찾았을 때만 해도 법륜사였었다. 그러나 그 옛날 이곳은 죽장사라는 사찰이 있었다. 이름 하나 때문에 힘들게 찾았다. 고운 단청으로 칠이 된 지금의 지금의 서황사에는 참 멋진 보배가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 국보 제130호 죽장동 오층석탑이다. 높이 10여m로 우리나라 오층 석탑 중에서 가장 큰 탑이다.
7년 전인가? 흐린 날씨 속에 처음 찾아왔던, 그 때 보았던 석탑은 간간히 떨어지는 빗물 때문인지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람의 살결 같은 부드러운 색상과 손으로 눌리면 통통 튕길 것 같은 질감, 웅장하지만 매끄러움,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감실 속에 포근히 앉아 있던 불상과 어울려 참 잘생긴 공간을 연출하고 있었다. 한참을 올려다보고 돌아서 보고, 목을 길게 빼어내서 보며 감탄을 한 기억에 가는 발길에 흥분이 묻어있다.
해살이 쨍하게 내리쬔다. 가는 길이 도로포장이 한창이라 그 흔한 표지판 하나 없다. 그러나 그리 불만하지 않는다. 어디 여기뿐이며, 어디 한 두 번이던가! 기억을 더듬어 오른 그곳에는 여전히 그때의 그 석탑이 반겨주고 있다. 그러나 그때의 느낌과 사뭇 달랐다. 봄날의 햇살과 달리 가을의 햇살을 붉은 빛을 머금고 있다. 그 빛에 딱 어울리는 석탑의 색상이 햇살과 하나 되어있다.
여전히 웅장하게 서 있는 당당한 석탑은 전처럼 자가발전 하듯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화강석의 색상이 그랬을 뿐이었으며, 매끄러움은 여전하나 딱딱한 돌이 도리어 태양 빛을 흡수하고 있는 듯 빛을 머금은 질감이다. 오랜 세월에 탈색되어 가는 돌이 생명을 머금어 가는 과정이라 홀로만의 상상이 즐겁다. 그것은 바로 흐린 날엔 스스로 빛을 발하며, 밝은 날에는 빛을 머금는 살아 숨 쉬는 자연의 생명줄과도 같은 것이다.
감실 속에는 황금빛 불상이 고개를 숙이며 들여져 있다. 참 침묵할 수밖에 없는 공간연출이며, 상상만 하던 경외의 대상을 확인시키고 있으니 절로 고개를 숙이고 합장을 한다. 이것은 순한 감성을 만들어 주는 시간이며, 나 스스로 다독여 가는 생명의 시간이며, 각박한 세상을 비추는 밝은 빛을 연결하는 공간이다. 또한 천년을 훌쩍 뛰어넘어 온 석탑이 교훈이 되는 순간이다.
천 몇 백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 세상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사람인가. 이 석탑 또한 세월의 무게를 어느 정도 감내하고 지나왔음은 부분에 떨어져 나간 흔적들이 말을 해주고 있다.
자세히 보면 신라 전형의 원조 석탑격인 의성 탑리 석탑모습을 어느 정도 닮아있다. 그 이후에 나온 탑이다 싶지만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는 없는 노릇이니 하나하나 뜯어서 보자.
넓은 지대석 위에 두 개의 기단을 올리고 그 위에 5단의 몸돌과 지붕돌을 얹었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있어 그 위의 것은 상상만 할 수 있다. 복발, 보개, 보주, 찰주 등 상상을 하면 더욱 아름다워 진다. 마음대로 상상하는 것은 무궁한 자유이니 하늘 높이 올려다본다.
여러 개의 돌로 짜 맞춘 기단석 하대석과 그 위를 덮는 덮개석의 낙수면의 각이 기울고, 두터운 층급받침 두 단을 올렸다. 그 위 사방으로 상대석이 어느 건물의 기둥처럼 세 개의 탱주를 박아 넣고, 모서리에는 각진 모서리 기중인 우주를 만들었다. 여느 석탑처럼 돋을 새김을 한 것이 아니라 같은 높이로 끼워 넣었으며 다만 면석과 기둥석의 색상을 달리하니 마당, 봉당, 대청, 그 위에 작은 계단을 놓고 네 칸의 집을 완성한 모습이다.
그 위 일층의 몸돌이 단정하며, 정면 가운데 감실을 만들어 놓았다. 감실 입구에 문을 달았던 흔적으로 보아 이 절집의 주인공 역할을 톡톡히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이 더욱 특이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은 지붕돌에 있다. 지붕돌 층급받침이 일 층 여섯 단에서 올라갈수록 하나씩 줄어들어 오층의 지붕돌 층급받침은 세 단으로 되었으니 그 시기를 짐작 할 수 있다. 또한 지붕돌 낙수면도 이와 같이 같은 모습의 계단으로 되어있어 신라 전형의 지붕돌 모서리 반전은 전혀 없다. 가로의 직선으로 마감을 하였으니 우리나라 지붕돌 낙수면이 이렇게 된 석탑은 바로 가까이 있는 낙산동 석탑과 이 석탑뿐이니 그만큼 귀하다 하겠다.
석탑은 큰 돌과 작은 돌을 조각처럼 끼워 맞추었으니 전탑은 당연히 아니고, 그렇다고 벽돌처럼 돌을 다듬어 만들지도 않았으니 모전석탑도 아니고, 그렇다고 석탑으로만 구분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으니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모전석탑과 석탑의 중간 형태이니 경주 바닷길 감은사지 석탑보다 조금 앞선 탑의 형태로 볼 수도 있고, 의성 탑리 오층 석탑보다 비슷하거나 조금 늦은 석탑일 수 있다. 감은사지 석탑 이후 일 금당 쌍 탑이 시작되었으며, 신라 석탑의 정형화를 이루었으니 그 이후에 감히 그것을 어겨가며 용기 있게 나름으로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나의 욕심으로는 그 이전의 석탑이 분명하다면 통일신라 이전, 즉 삼국이 치열한 세력경쟁을 할 때 세워진 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안내문에는 통일신라 탑이라고 적어놓았으니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또 그 내용을 부정할 단서도 없으니 나의 바람으로만 상상하며 접어놓는다. 다만 석탑의 위치나 크기로 보아 대단한 사찰이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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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동 삼층석탑
가장 사랑하는 탑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곳 낙산동 삼층석탑을 꼽는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그 많은 탑들 중에서 하필이면 낙산동 석탑일까? 그런 나를 나도 이해를 하지 못할 때가 있지만 그것은 첫 감동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작은 실개천 다리를 건너는 순간 나와 딱 마주하는 석탑은 감동이었다. 주위 만추의 색상과 어우러져 약간은 퇴색되고 풍화되고, 시달림을 당했지만, 딱 맞아 떨어지는 균형감, 건방진 반전도 없는 지붕돌, 황금비율로 올라가며 줄어드는 체감, 위압감 없이 적당이 편안함을 주는 크기, 논 한 가운데 주위의 황금들녘과 함께 조화롭게 서 있는 석탑이 바로 낙산동 삼층석탑이다.
그러나 죽장동 석탑과 무던히 닮아있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를 주는 탑이다. 먼저 크기부터가 다르다. 죽장동 석탑은 하늘을 찌르는 모습에 나 같은 필부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지만 이곳의 석탑은 내 눈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음이며, 색상 또한 깔끔한 미감과 달리 어수룩한 모습에 약간은 비어있는 친근함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굳이 더 따지자면 같은 모양은 지붕돌이 같고, 일 층 몸돌의 감실이 똑 같다. 다른 모양은 기단부에 있다. 이곳의 기단은 감은사지 석탑과 모양이 같다. 이중 기단에 덮개석의 기울기가 없고, 층급받침의 비율과 가운데 두 개의 탱주모습, 몸돌이 줄어드는 체감비율, 특히 이층 몸돌과 삼층 몸돌이 너비만 다를 뿐 높이가 같음은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각적인 현상을 염두에 둔 것 까지 같은 모양새지만, 다만 지붕돌만 죽장동 석탑과 모양을 함께한다. 그러하니 감은사 석탑과 죽장동 석탑을 반반씩 모아놓은 석탑이니 지금으로 말하면 퓨전이요, 재치와 기치이니 서로의 장점만 모아 탑을 만들었으니 탑에도 벤치마킹이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먼저인지 가늠하기만 할 뿐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 탑의 일부(지붕돌)가 죽장동 석탑의 원조가 되고, 일부(기단부)는 감은사 석탑의 원조가 되었을지 누가 아는가? 그러나 아래 기단과 윗 기단 사이 굄석 두 단이 모두 둥근 형태이니 그 형태로만 보아 신라 말로 보여 지니 여전히 자유로운 발상이 신이난다.
다만 가까이 있는 죽장동 석탑의 화려함과 위력에 눌려 빛을 잃어가고, 관심과 힘을 잃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 만약 홀로 있었다면 귀한 대접을 받았을 탑이 아닌가. 석탑의 질감으로 이야기 하자면 나는 이곳의 석탑질감을 훨씬 사랑한다. 돌에 철분이 포함되었는지 세월에 녹아내리는 철화, 즉 철화분청자기에 나오는 그림의 색상을 간혹 발견할 수 있으며, 어떠한 돌에는 회분이 묻어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스스로 가을의 색상을 연출하고 있으니 유일하게 가을을 타는 외로운 석탑이다.
가까이 있는 석탑에 눌려 사람들의 괄세 속에 기단석과 몸돌에 오만가지 낙서투성이며, 세월의 힘을 견딜 수 없어 깎이고, 깨어지고, 눈보라 비바람을 고스란히 이고서 보낸 세월에 그 억울함이야 오죽하겠냐만, 그러나 탑은 말이 없다. 간혹 탑을 사랑하는 이 몇몇만 찾아 정겨운 눈망울로 바라보노라면 그 속에 살아있는 전설로 석탑은 입을 연다. 내가 입을 닫으면 자연이 입을 열 듯, 내가 입을 닫으면 석탑이 입을 여는 순간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외로움을 달랬을 것이며, 고통을 이겨가며 위안을 얻었을 것인가! 그렇게 묵묵히 견디어 온 세월을 천년을 뛰어넘어 굳건히 서 있는 탑에 나는 존경을 표하고, 경외감을 가지게 된다.
나는 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키 큰 여자도 싫고, 똑 되발아진 여자도 싫다. 또한 뺀질뺀질 광이 나는 여자도 싫어한다. 여자로 비교 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석탑이며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다분히 저자거리 장똘뱅이 시각으로 보자면 적당한 크기 약간은 비어있는 듯 친근함, 그러면서 깊은 속내를 은연중 갖추고 있는 정이 깊은 여자를 사랑한다. 내게는 그 대상이 석탑이기 때문이다. 이곳 낙산동 삼층석탑은 그런 것을 고루 갖추고 있다. 이것은 순전히 나만의 시각이다.
돌아서는 발길에 서로의 섭섭함이 묻어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벗을 만나 헤어짐이니 그 정겨움이 내 등 뒤로 가득 차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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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평 쌍암고가와 북애종택
해가 조금씩 서산으로 기울어 갈 무렵에 쌍암고가를 찾았다. 다소 빈약한 지식인 고택에 대해 공부하며 느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더불어 반가의 삶의 모습들과 전통에 대한 지식과 그들이 가지고 내려온 그들만의 내면을 느껴보고 싶었다. 지금은 비록 터밭으로 변해버린 곳에 흙 속에 묻어 잘 보이지 않은 쌍암, 즉 바위 두 개가 입구에 있어 편하게 붙여진 이름이다. 쌍암고가는 진사 최광익(영조7년, 본관 전주)이 지었으며 이후 400년 내력을 지키며 살고있는 집이다. 지금이야 많이 훼손되고 일부 원형을 잃어버리긴 해도 그 안에서 옛날의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동향을 한 대문채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지금 이 집을 지키고 있는 후손 최상학씨가 아들과 함께 사랑채 앞에 깔린 잔디를 손질하는 중이었다. 불쑥 찾아드는 사람들이 성가시기도 하련만 답사객이 우르르 들어서자 하던 손길을 멈추고 반갑게 맞는다.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찾아온 이유를 말씀 드렸다. “뭐 볼 꺼 있어요?” 말씀은 이렇게 하면서도 반가운 모양이다. 이 고장에 몇 남지 않은 고택이라 의미가 남다르다고 말씀드리니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온다.
그분의 말씀을 잠시 빌리자면 윗대 어른들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항쟁의 위험을 느껴 미리 외가가 있는 이웃의 창녕으로 피난을 가 있었다. 근 2년 동안을 비워두었던 동안 물건들은 부서지고, 건물의 일부는 헐려나갔으며 또한 50리마다 병참기지를 세우던 일본군은 이곳 쌍암고가에 병참기지를 세우게 된다. 때문에 농민군의 공격목표가 되기도 했다한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감영군을 격파하자 경상도 농민들 역시 그 소식에 힘입어 동학을 거점으로 결집하게 된다. 관아의 지나친 수탈과 지방 양반들의 횡포와 아전들의 농간에 피폐해진 농민들은 이들을 징치해 가며 곳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들의 일차적인 목표는 상주와 선산지방이었다. 수천의 농민군은 상주와 선산의 관아를 순식간에 점령하고, 다음 목표가 바로 일본군의 병참부였다. 그 병참부가 바로 이곳 쌍암고가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기습을 감행하여 관아를 다시 점령하고, 농민군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농민군은 이곳 일본의 병참부에 대한 공격은 실행해 보지도 못하고 계획에만 그치고 말았다.
19세기 전 기간에 걸쳐 거듭 일어난 극심한 자연재해를 무방비 상태로 맞으면서 생존 그 자체를 위협 당해온 농민들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를 독점한 양반 지주들에게 공세를 취하게 된다. 1860년 이래 각 군현에서 빈번히 발생했던 농민항쟁도 관가의 가렴과 이교들의 수탈에서 비롯하였으나 농민들의 불만은 부가(富家)들에게도 겨냥되었던 것이다.
불행인가 다행인가. 공격에 성공했다면 쌍암고가는 남아있지 못했을 것이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관계로 우리는 답사란 명목으로 고택을 찾아 옛날의 모습을 찾는다. 양반지주였으며 천석꾼이었던 이 집안사람들은 이미 농민군을 피해 피난을 가고 없었다.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에 위기를 느껴 피난을 할 정도였다니 당시 사회에 어떤 역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후손의 입을 빌어 답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름으로 상상만 해볼 뿐이다.
당시의 농민군들의 처절했던 마음과, 역사적 사실을 바로직시하며 다시는 이 땅에서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기리며 숙연해 지는 시간이었다.
또한 어쩌다 최상학씨와 대화에서 청도의 밀양박씨 세거지 운강고택이 잠시 화두에 올랐다. 자신의 할머니가 밀양박씨로 그곳에서 시집을 왔으며 당시 큰고모님이 그곳으로 시집을 갔단다. 집안끼리 딸을 하나씩 주고받는 이름 하여 겹사돈지간이란 말이다. 서로 보험에 가입하듯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며 계약한 셈이다. 다소 억지를 부리자면 당시에나 지금에나 권력간 재력과 사회적신분에 따라 서로 관계를 엮어왔음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어쩜 삶의 고달픔도 대물림 되는 사회를 바라보는 것 같아 마음이 허허로워지는 느낌이다. ‘사람이란 다 그런 것을...’ 하며 마냥 인정만 하자니 아름답고 마음착한 사람과 정의로운 사람이 더 많이 사는 세상이 분명한 것을. 하며 위로한다.
그만하고 이제 집안구조를 자세히 살펴본다. ㄷ자형 안채에 가운데 모두를 대청을 두었으며, 양 옆으로 방과 작은 마루를 두었다. 흔히 우리들 옛날 집에서 볼 수 있는 편안한 구조로 되어있지만 옆으로 난 눈썹처마가 재미있고, 민가 치고는 높은 축대가 눈에 띄며, 6칸의 대청이라 참으로 재미있다. 대청을 넓게 쓰기 위한 주인장의 마음과 상통하는 것인지 무슨 연유인지 궁금해 하는 것도 답사의 맛 중에 하나가 아닐까? 대청을 넓게 쓴다? 탁 트인 공간에 시원하게 앞에 보이는 자연을 끌어 담는 지혜라 하기엔 앞 시선이 다소 심심하고, 대소사의 행사를 위해 그렇다면 좀 시시하다. 자세히 들어다 보니 왼편 천정가까이 긴 시렁이 설치되어있다.
어릴 적 우리 초가집에 시렁이 모두 여섯 개가 있었다. 대청의 시렁에는 보리쌀 삶은 것, 고구마 삶은 것, 안방의 시렁에는 반닫이나 장롱이 부족한 관계로 겨울이불 홑이불 반짇고리 등을 올려놓는 용도로 쓰였으며, 사랑방의 시렁에는 아버지가 읽던 고서들이 차곡차곡 놓여 그 용도를 다했었다. 아마 이 또한 옛날 시원한 통풍구조와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오른편 천정에서 대청까지 세로로 다섯 단의 긴 시렁을 설치했다. 이것은 주인장의 깔끔한 성정을 보는 듯하다. 즉 단단 마다 작은 화분이나 칫솔 물 컵 그리고 작은 소품들이 놓여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 모습은 여전히 변한 게 없는 모습이다. 당시에는 얼마나 재치가 있어 보였을까.
또 있다. 대청과 연결된 부엌을 들어다 보았다. 부엌의 바닥은 마당의 높이와 같이 되어있다. 옛 가옥은 그렇다. 대청을 높게 올린다는 것은 그만큼 부와 권력을 상징한다. 그것은 부엌의 바닥을 낮추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이 있기 때문이다. 옛날 어릴 적 우리 집 부엌의 바닥은 마당보다 일 미터쯤 낮아있었다. 궁핍한 생활고에 부엌바닥이 낮아야 방구들을 놓아 따듯한 겨울을 날 수 있으니 마당에서 방과 대청을 높이지 못할 사정이면 당연히 부엌바닥을 파 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높은 계단 셋을 그렇게 오르내렸을 어머니 무릎이 빨리 시들어 버린 것도 이 부엌 바닥에 있었을 것이다. 양반지주가 그런 불편한 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며, 장마철만 되면 부엌바닥에 물이 차올라 퍼내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안대문채는 사랑채의 기능은 없고 곳간기능과 새롭게 방을 개조하여 안주인의 취미인 다실(茶室)로 꾸며 놓았다.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茶에 관련된 물건들이 작은 다탁과 함께 놓여있어 반가 안주인의 고운심성을 보는 것 같아 편안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안채로 통하는 안대문이 약간 어긋나 있다. 이것은 밖 사랑채에서 안채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옛날 가옥의 구조상 특징이다. 즉 밖에서 보았을 때 담장처럼 안채의 왼편 측면만 보이게 하여 그 안에서의 안주인 행동을 자유스럽게 만들어 주는 우리 민족의 혜안이다. 만약 어긋나 있지 않고 정口자 형태를 갖추었다면 대구의 남평문씨 세거지 광거당처럼 대문 앞에 헛 담이 가로막혀있듯 비슷한 의미가 담긴 구조라 해석 할 수 있다. 담이란 막아주는 것도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이며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영양의 민간서원 서석지처럼 대문이 정침과 달리 어긋나 있는 경우는 손이 불쑥 찾아왔을 때 안에서 잠시 옷 가짐을 추스르는 여유를 주기위한 서로의 배려이니 대대로 되 물림 되어야 할 귀한 마음일 수 있다.
이제 사랑채를 돌아보자. 사랑채는 지형에 맞게 안채보다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집의 가옥 중 유일하게 남향을 한 건물이다. 정면은 네 칸에 반이라 하기엔 약간 모자라게 구분된 면이 더 있으며 그 부분 옆으로 밖에서 보이는 부엌을 달아 그 위로 눈썹처마를 내었다. 음양을 달리하듯 안채의 사각기둥과 달리 두리기둥에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두 칸은 방을 꾸몄으며 두 칸은 대청을 놓았다. 그러나 대청 두 칸 측면에 장지문을 달아 여름철이면 위로 올려 시원하게 트인 공간으로 활용하게 해 놓았다. 물 좋고 산 좋고 빼어난 곳에 위치한 서원이나 정자에서 늘 느껴왔듯 나는 늘어지는 풍악소리를 상상한다. 참 삐뚤어진 나 자신만의 사고이다.
이 집과 형태를 비슷하게 한 집이 한 채 더 있다. 바로 길 건너에 위치하고 있는 북애종택이다. 쌍암고가를 지은 분이 동생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큰집 북쪽 언덕에 있다고 해서 북애종택이라 불린다고 한다. 이 집은 쌍암고가에서 골목을 지나면 같은 방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처음 형제애가 남달랐음을 느꼈지만 현재 소유주인 최상학씨에 따르면 아들을 위해 집을 지은 진사 최광익의 큰아들은 쌍암고가를 짖고 3~40년 뒤 동생을 위해 북애종택을 새로 지었을 때 이집 안주인은 낡은 쌍암고가 보다 새집인 북애종택이 더 마음에 들어 했다. 결국 남편을 졸라 집을 바꿔버렸다. 하여 형은 새집으로 이사를 가고 동생이 쌍암고가로 이사를 하여살았다.
나는 어디를 가면 늘 뒤를 찾는다. 정리정돈 되지 않은 허술함도 있지만 작고 예쁜 그리고 기둥도 없는 쪽마루에 걸터앉아 허전한 공간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감한다. 해는 벌써 그렇게 산을 기울어가고 있었다.
도리사
도리사, 아도화상이 한겨울에 복사꽃 오얏꽃이 피어난 것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불렀다. 신라 최초의 절집이 그렇게 생겨난 셈이다.
「아도본비」를 살펴보면
- 아도는 고려(고구려)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모령인데 어머니가 이르기를 “이 나라가 아직은 불법을 알지 못하나 이후 3천 여달 뒤에는 계림에 성왕이 출현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중략)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지금의 선산)에 이르자 군사람 모례가 집에 들여 굴방을 만들고 모셨다. 이때 중국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의복과 향물을 보내왔으나 향의 용도를 모르는 신라 왕실에 그 용도를 알려주어 왕실과 가까워지게 된다. “이것을 불에 태우면 향이 나고, 신성에 통달할 수 있다. 이른바 신성은 삼보(三寶)인데 첫째는 불타이고, 둘째는 달마이며, 셋째는 승가이다. 만약 이것을 불태우면서 발원하면 반드시 신령의 응함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 마침 왕녀가 병이 들어 위태하므로 왕이 묵호자로 하여금 발원하게 하니 그 후 왕녀의병이 다 나았다.(중략)-
그 후 아도는 견제하는 세력이 생겨나 생명에 위태로움을 느껴 다시 모례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하여 모례에게 줄어들지 않는 망태기에 시주할 것을 권하여 모례를 실험하고 그것으로 절을 지으니 바로 지금의 도리사가 그곳이다. 신라 불교의 발상지, 신라 최초의 절은 이렇게 생겨났다. 눌지왕 2년(418년) 때의 일이다.
그러나 이 절은 조선 숙종3년에 큰 불이나 대웅전을 비롯한 모든 전각이 몽땅 불에 타버렸으며 그 뒤 영조 5년(1729년) 아미타불상의 금칠을 새로 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당시에는 산내 암자였던 자리가 지금의 도리사 위치이다. 이전의 도리사 금당터는 어디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짐작만 할 뿐이다.
최근 1977년 절담 밖에 있던, 이미 도굴꾼들의 손을 타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조선시대의 석종형 사리탑에서 뜻밖의 물건이 발견되었다. 8세기쯤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리함과 그 안에 담긴 사리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부처님 진신사리라는 소문이 근처에 퍼지면서 다시 호황기를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진신사리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조선시대 사리탑에 8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사리함을 발견했으니 구구한 억척이 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리공을 석회로 잘 밀봉해 놓아 도굴꾼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이 또한 도굴꾼의 손을 거처야 발굴이 되는 악순환은 언제쯤 끝이 날 것인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어느 사회이건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 꼭 나쁜 놈들이 끼여 있기 마련이니 착하게 살기위한 나름대로의 발버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도리사를 오르자면 소나무 사이사이 가끔 땀을 씻으며 한 번씩 뒤를 돌아보라. 그것은 낙동강과 들판의 시원한 풍경들을 내려 올 때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리사 극락전 뒤편에 석종형 부도, 곧 세존사리탑이 있다. 극락전은 조선시대 건축물로서 최근에 해체 복원을 했다.
도리사에는 특이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극락전 뜰 앞에 두부모를 썰어 듬성듬성 올려놓은 이상하게 생긴 것이 사람의 발길을 잡는다. 이것이 바로 도리사 석탑이다. 아마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석탑이 아닌가 생각된다. 분명 이것이 탑이라면 모전석탑인데 생긴 모습도 요상하다. 구태여 탑이라고 하니 탑을 상상하지만 그냥 어디에 쓰려고 돌을 다듬어 놓았다 남은 돌을 모아서 심심하니 모양을 잡아 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나름으로 석탑의 형태를 찾아보려면 찾을 수 있다. 지대석 네 귀퉁이에 석주를 하나씩 세우고, 그 사이에 긴 판석을 가지런히 끼운 후 두꺼운 돌을 덮어 마무리 했다. 탑신은 3층으로 어느 집 벽돌공장 같은 느낌이라 그래도 굄석도 있고, 지붕돌도 있고, 상륜부도 나름대로 만들어 놓았다. 고려시대 만든 석탑이라 어떠한 양식이나 격식 없는 자유로움이 기분 좋게도 한다. 그래도 보물 470호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변형, 혹은 자유로운 모전석탑이다. 생김이 어떠하냐에 따라 편견 된 시각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엄연한 석탑이며, 자주 정을 붙이다 보면 참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 사람간이나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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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례가정
선산에서 상주 방향으로 33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봉천초등학교 삼거리에서 도개방향으로 가다보면 바로 모례장자샘이 나온다. 아도(혹은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처음 신라로 숨어들어와 모례라는 장자의 집에 들어와 5년간 머슴살이를 하며 불법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하니 신라 최초의 불자가 모례, 즉 모(毛)례이니 털이라는 말이 점점 변하여 절(寺)이 되지는 않았을까? 이렇게 주장하는 모 교수의 책을 읽어 본 기억이 가물가물 한다. 얼추 수긍이 가는 일설이다. 그러니 이곳은 바로 신라불교의 시발이 되는 불교의 성지인 셈이다. 지금도 그가 숨어 살았던 집에 우물이 있다. 우물은 우물 정(井)자의 형태를 고스란히 만들어 놓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맑은 물이 나왔다고 했는데 돌보는 이 없어서 그런지 뚜껑을 열자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이물질이 눈에 그슬렸다. 글쎄 지금은 새단장을 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언제고 시간을 내어 발품을 팔아 다시 한 번 다녀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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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개중학교 석불
도개면 소재지에 위치하고 있는 도개중학교 교정에 들어가면 오른편 모래화단에 작은 돌 두 개가 세워진 것을 찾을 수 있다. 형태는 깨어지고 뭉그러져 자세히 알아볼 수는 없지만 두 개 중 하나는 머리 부분을 제외하고는 제법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화려한 법의에 꽃가지를 든 손과 꽃줄기의 형태가 선명하다. 두 개 모두 같은 모습이니 아마도 하나는 관음보살 상이요, 또 하나는 문수보살이나, 대세지보살이 아닐까 상상할 수 있으며, 좌 우 어느 석불의 협시불로 한 때 화려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뒷면을 살펴보면 앞면과 달리 선각으로 뚜렷하게 남은 관음보살상이 예쁜 모습으로 가부좌를 틀고 있다. 그 모습에 실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면 잔잔한 미소에 온화한 인상이 처연하게 다가온다.
언제 어떻게 깨어 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략 짐작은 한다. 많은 전란의 탓이 아니다. 유교문화가 꽃피던 조선시대의 양반가들의 행위로 보는 견해가 많다. 나 또한 그 생각과 다르지 않음이다. 어떤 학문이든 진리가 숨어있게 마련이나 얄팍한 지식과 편율 된 시각이 겹쳐지며 일반적인 학문에만 집착하다 보면 이런 불충한 행위를 정당화 하며 죄책감 없이 저지르는 용기가 생겨난다. 그것은 진정한 용기가 아니라 바로 배타성에 병든 만용이다. 종교든 학문이든 그 자체는 잘못이 없다. 진실과 진리를 찾고자 하는 순수함이 그 속에 담겨있기 때문이지만 문제는항상 그것을 추종하고 믿는 사람들로부터 문제가 생겨난다.
이 불상들은 학교 뒷산에 구르던 것을 지금의 자리에 옮겨 놓았으니 이곳 도개중학교 학생들은 행복하다는 생각이다.
길지요? 나누어 올리기 보다 지역을 묶는다는 생각으로 그냥 올렸습니다.
첫댓글 잘 지내죠?햄...건안 하세요~
선산 그리운 곳입니다.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오랜만에 올라 온 글이라 기대됩니다. 나중에 천천히.... 반가움에 인사 먼저 하고 갑니다. *^^*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천천히 차근차근 공부하는 맘으로 거듭 읽어 보아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오래전 가 보았던 곳이네 자네의 글로 새록새록 기억을 더듬는 것도 좋네 그려
공부하는 기분으로 앍어 보았다오.... 그냥 모르고 지나친 곳도 많은데 새삼스럽게 닥아오네... 고마우이~~~~
초시 님의 글이 사진보다 더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찬찬히 다 읽고 나니 어느덧 제 머리가 커져 있습니다.ㅎ. 귀한 글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가보지 못한 경북선산 많은 유산이 남아있는 곳이네요.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건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