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서원에 모셔진 최진립의 위패 최진립이 사용하던 검
4. 최부자, 그들은 어떻게 부자가 됐을까?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충신집안이
어떻게 조선 최고의 부자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을까?
<한국학 중앙연구원>에는
최근 발견된 최씨 집안의 고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400여 년간에 최씨 가문에서 작성된 각종 문서들은
말로만 듣던 최부자집의 부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것은
최씨 가문의 재산이 기록되어있는 1620년 '최진립 분재기'다.
30년 차이를 두고 있는
1651년 최진립의 아들 '최동량 분재기'를 비교하면,
최진립의 아들 최동량의 재산에서
노비보다 토지증식에 집중되었음을 보여준다.
"동량 같은 경우는 노비 8명을 분재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문서를 보면,
약 한 세대뒤인 30년후에 재산상속을 보여주는 것인데,
노비 8명이 40명으로 늘어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안승준 전문위원(한국학 중앙연구원)
전쟁후의 혼란기.
울산농소(蔚山濃所).
그의 땅은 이미 울산에까지 이르렀다.
형산강 유역의 경주 내남 이조리 들판.
경주의 대표적 평야지대다.
최부자집이 터를 잡은 형상강 상류지역은
전쟁이후 버려진 농토와 습지들이 널려 있었다.
양난 이후 피폐해진 경제를 복구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농토개간을 독려했고
최부자집은 이런 정책에 힘입어 이조리들을 경작지로 확보했다.
그리고 볍씨를 논에 직접 뿌리는 직파법 대신
모판에 모를 심어 이앙하는 '이앙법(모내기법)'을 도입한다.
'물꼬싸움'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앙법엔 물이 필수적이다.
물이 모자라면 옮겨 심은 모들이 말라버린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수리시설이 확보되지 않으면 이를 절대적으로 금지시켰다.
이조리들에는 수백년전 인공적으로 형성된 수리시설이 있다.
최부자집은 형산강 하류의 수리시설을 이어
중상류에도 농업용수를 확보한다.
1960년대까지만해도
최부자집이 '나무목으로 만든 인공수로'가
수백년을 이어 사용되고 있었다.
이양법의 보급으로 노동력은 1/10로 줄었고
모판에서 모를 키우는 동안,
논에서 보리를 키우는 이모작이 가능해지면서
생산력은 크게 증가되었다.
최부자집의 실학적 가풍은 또 다른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남대 도서관 <문파문고>.
최부자집이 조상 대대로 보관해온
7천여 권의 유명인사의 고서와 수십 권의 필첩을 기증해
특별히 따로 보관하고 있다.
이 필첩들은 그 양이나 연대로 봐서
조선 최고 필첩으로 부를 만한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들이다.
그런데 여기에 정무공 최진립이 아들 최동량에게 쓴 편지가 한 통 있다.
집안 살림을 맡아 하던 아들에게 보낸 편지로
최진립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며느리의 옷을 지어주려하니 치수를 재어 적어보내라는
시아버지의 자상한 모습이 나타나 있기도 하다.
그런데 뒤이어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뒤 큰 논은 종들에게 나눠 짓게 하라."
무슨 뜻일까?
이 말 속에 최부자집의 또 다른 농업경영법이 들어있다.
"성과급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과가 난 것은 노비가 나눠가진다,
요즘 '논내기'라고 말하는 것으로,
생산력 증대의 한 수단으로써 최씨 가문의 농업경영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 안승준 전문위원
그것은 경영 성과에 따라 종들과 이윤을 나눠가지는 방식으로
이는 노동의욕과 생산성을 높이는 자율적인 농업생산법이었다.
이것은 최부자집이 '마름'을 두지 않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당시 '마름'은 소작인들의 관리권을 쥔 사람으로,
소작인들에게 횡포를 부려 소작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최부자집은 중간관리인 '마름'을 배제하고
그 이윤을 소작인에게 돌려주었다.
"소작인중에 사정이 어려운 집이 있으면,
혹 병자가 있거나 혹은 부녀자만 있으면,
문중에서 의논을 하여 세를 많이 깍아주는것을 어릴 때 보았습니다."
- 최재량(14대 종손)
마름을 두지 않은 것은
소작료 인하와 더불어 부수적인 효과를 주었다.
지주와 소작인의 직접적 만남은
소작인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게 했고 지주의 신뢰를 받게 했다.
매년 음력 12월 27일밤.
정무공 최진립장군의 기제사를 지낸다.
이조리 정무공파 최부자집에서 이뤄지는 제사는 일 년중 가장 큰 행사로
아랫사람을 대하는 최부자집의 인간적인 가풍의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
최씨 집안을 조선에서 일약 명문가 반열에 올린 최진립.
나라에서는 최진립을 영원히 제사지내는 불천위로 지정했다.
역대 국왕들은 네 번이나 사액제문을 보냈고
후손들은 수백 년째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그런데 이 제사의 백미는 최진립의 제사를 끝내면서 다시 시작된다.
제사가 끝나면 그 제사상을 그대로 들고 나가 마루로 옮긴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제사가 이뤄진다.
놀랍게도 그것은 최진립을 모신 두 명의 종을 위한 제사다.
종을 위한 제사.
종손은 최진립과 두 종이 만나도록 촛불을 밝혀 이어준다.
옥동과 기별.
옥동은 임란때 최진립을 왜구의 칼날에서 구해내었고,
기별은 예순 아홉에 전쟁에 나간 최진립을 끝까지 따랐다.
"이미 주인이 충신의 길을 가기로 하였는데
어찌 충노가 그 뒤를 따르지 않겠습니까"
- <동경지>중에서
기별은 최진립과 함께 온 몸에 화살을 맞고 죽어간다.
"함께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조상과 다름없이 생각해서 함께 제사를 지냅니다.
주변에서 어떻게 양반가에서 종의 제사를 같이 지내냐고 말이 많았지만
우리들은 정무공과 일신(一身)이라 생각하면서
수백 년 동안 함께 제사지내오고 있습니다."
- 최재량 14대 종손
'충노불망비(忠奴不忘碑)'
주인을 위해 목숨을 던진 종을 위해
세상의 비난과 손가락질에도 굴하지 않고
종에게 머리를 숙일 줄 아는 양반가.
그것이 경주 최부자집안이 사람 대하는 기본자세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의 시작은 '아껴쓰기'
최부자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부자집 며느리는 시집오면 3년간 무명옷만 입어야 했다.
옷을 덧대어 깁고 또 기워 입어서
치마 하나를 솥에 넣어 삶으면 서말치 가마솥이 가득찰 정도였다고 한다.
만석꾼 며느리도 보통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최부자집은 7대 최부자 최연경때 경주 중심 교동으로 이사를 한다.
흔히 경주 최부자 하면 교동 최부자를 말하는데
이는 정무공 최진립이 아닌,
세째 아들 동량의 후손들이다.
18세기 후반의 <경주읍내도>.
경주부윤과 향교가 인접하게 됨으로써
최부자집은 경주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향교옆에 집을 짓는 것에 유림들은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향교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최부자집의 처마를 보면 의외로 낮다.
마지막 설득 수단으로 집터를 낮춘 것이다.
집터를 한 자 이상 깍아냄으로써 유림의 반발을 막을 수 있었다.
이즈음 최부자집은 경주 사마소를 통해
진사와 생원을 대거 배출해 지역사회의 중심이 된다.
'벼슬은 진사와 생원 이상 하지 마라!'
경주 최부자집의 또 하나의 가훈이었다.
당시 경주는 남인과 노론의 당쟁이 치열했다.
그러나 최부자집은 무반가였기 때문에
당쟁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경주 전체의 사림가, 관가와의 유대 뿐만 아니라,
촌락민들을 함께 아우르는 역할을 서원을 통해 꾸준히 해왔고,
또 많은 선행들을 통해 범민들로부터 존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잡아
그들의 가문의 위치를 점차 상승시키게 합니다."
- 정순우 대학원장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은 덕망있는 부자.
왜 최부자만이 이런 명망을 가져올까?
어디에도 최부자집의 선행의 동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왜 이들은 이런 훌륭한 부자가 되었을까?
1650년경의 최부자집 재산내역 문서.
그 의문을 풀기 이해 최부자집의 고문서를 분석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노비보다는 토지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서 매입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과 범위는 굉장히 방대합니다.
'매득(買得)'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후 신분제의 혼란속에
양반과 농민들로부터 땅을 헐값에 매입해 재산을 늘리는 게
당시 전반적인 풍조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회문제에 부딪힌다.
'도적 백 여명'
'도적패에 의한 피해상황 수사보고서'
최씨 문중의 문서에는 백여 명의 도적떼가 침입한 기록이 있다.
최진립의 손자 최국선때 '명화적'이란 도적떼를 만나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도적들의 소행이 특이했다.
문서들을 불태우고 찢어버린다.
'열파(裂破)'
충격적인 기록들은 이어진다.
불시에 들이닥친 도적들은 칼로 얼굴을 긋고 허벅지를 찌르나 죽이지는 않았다.
살해 목적이 아니라 괴롭히고 위협하는 정도였다.
'칼로 온 몸에 상처'
불을 밝히고 공공연히 약탈을 한다는 뜻의 '명화적(明火賊)'
전쟁후 몰락하여 먹고 살 길이 없는 최하위계층이었다.
이들의 행위는 일종의 절망이었고, 격렬한 사회적 저항이었다.
참혹한 일을 겪은 3대 최부자 최국선은
합법적인 부의 축적이라고 해서 모두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국선에게 대전환의 계기였다.
"슬기롭고 효과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명화적'이
자기 이웃이고,
자기의 노비들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원한을 가지고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원하는 방향,
가난에서 구제한다든지,
농업경영에 있어서 소작인들과 이익을 더 효과적으로 나누는 방식 등,
이런 방향으로 원한관계를 긍정적 방향으로 바꾼,
타 가문들과 비교가 되는,
역사적으로 교훈이 되는,
대단히 귀중하고 훌륭한 재산운영방식을 취하게 됩니다."
- 안승준
경주 최부자집의 진정한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뜻하지 않은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그것을 새로운 방향으로 바꿀 줄 아는 지혜.
이때부터 최부자집은 하층민들과 철저히 나누는 상생의 길을 걷게 된다.
5.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
역사의 뼈저린 경험에서 교훈을 얻게 된 최부자집.
다른 양반들이 권위와 힘으로 이웃들을 장악했다면
최부자집은 이웃들과 신뢰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유지하게 된다.
이미 400년전에 최부자집은 상생의 길을 통해 부를 유지하는 지혜를 가진다.
그런 경주 최부자집에 최대 위기가 닥친다.
그러나 바로 이때 수백 년을 이어온 최부자집의 저력이 드러난다.
1910년. 나라가 망했다.
11대 최부자 최현식과 아들 최준은
집밖 출입을 끊고 매일 아침 북쪽을 향해 곡을 했다.
최현식(1854~1928)은 집안 살림을 아들 최준에게 넘겨주고 은거한다.
당시 최준(1884~1970)의 나이는 20대 중반,
망국한을 참기에는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그는 집안살림에 몰두하는 듯 했다.
그러나 최준의 전혀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일본고등경찰 비밀문건인 <요사>.
구한말부터 1920년대까지 시국사건을 정리한 귀중한 자료다.
1915년에 조직된 비밀독립투쟁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
여기에 뜻밖에도 최준의 이름이 있다.
이 단체 조직원으로서 자금을 제공한 것이다.
'경주군 대표 최준'
'최준 자금 제공(崔浚亦其出資)'
최준은 당시 영남지역 독립군들과 더불어
'조선국권회복단 및 대한광복회' 주요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1917년 공주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10월 출소되었다.
<독립기념관>에는 최준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문서가 있다.
1921년 태평양회의 독립청원서.
워싱턴에 보내는 조선 인민의 탄원서로 조선 독립을 호소하는 내용과 함께
각계 각층 사람들의 서명을 담았다.
최준은 역시 경주대표로 참여했다.
그리고 조선 독립 투쟁사에 큰 획을 긋는 만남이 이루어진다.
백산 안희제(1885~1943, 독립투사)와의 만남.
백범 김구와 함께 양맥인 백산 안희제는
다각적인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안희제가 1918년 최준을 찾아온다.
그는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부산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중요성을 최준에게 설명하며,
이 회사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데 동참하자고 제의한다.
최준은 안희제의 뜻을 받아들이고 백산상회의 사장을 만난다.
백산상회는 조선 최고의 무역회사로 성장한다.
최준의 장손인 최염(75세)은 최준의 소중한 문서를 내놓았다.
최준앞으로 온 '대차대조표'였다.
무역업체로 위장한 <백산상회>는 독립운동의 자금줄이었다.
막대한 독립자금을 제공하느라 <백산상회>는 늘 적자에 허덕였다.
"백산상회 운영을 통해서 상해 임시정부로 자금을 보내게 되는데
그 방법은 늘 결산 적자로 처리해 감시를 피할 수 있었고
지속적으로 상해 임정에 자금을 보내게 됩니다."
- 이동인 책임연구원(독립운동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