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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메서슈미트(Willy Messerschmitt)BF-109 전투기
Die Messerschmitt Bf 109, 빌리 메서슈미트(Willy Messerschmitt)가 설계한 제2차 세계 대전 전기간에 걸쳐 사용된 독일 공군의 전투기이다.
부르는 방법도 여러가지인데 원조 독일에서는 "Messerschmitt bf ein hundert neun / 메서쉬밋트 베에프 아인훈데어트노인"이라고 읽으며, 영미권에서는 주로 쉽게 발음하기 위해 숫자 109가운데의 0을 모양이 같은 알파벳 O로 치환해서 "비에프 원오나인"이라고 읽는다. 한국에서는 숫자 셋을 각자 따로해서 "비에프 일공구", 간단하게 그대로 "백구(109)"라고 읽기도 한다. 또한 Bf가 아닌 Me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스페인 내전에서 첫 실전투입된 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도 각국에서 주력 전투기로 활약했는데 총 30,000대 이상이 생산되어 전투기 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기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소련의 Il-2 슈투르모빅에 이어 두번째로 많이 생산된 군용 항공기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독일에서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스페인에서 오리지널과 전후 생산형 등을 계속 사용하였으며 스페인 공군에서는 1965년에야 퇴역하여 1937년 정식 취역한 이후 28년이나 운용되었다. E형은 '에밀', F형은 '프리드리히', G형은 '구스타프', K형은 '쿠어퓌르스트(Kurfürst; 선제후)'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현재 비행가능한 Bf 109는 6대 정도 있는데 E-4는 영국, E-3와 G-4는 미국, G-4와 G-6, G-10는 독일에 있으며 독일에 있는 기체 중 G-6는 2대가 남아있는데 1대는 EADS의 Messerschmitt Stiftung Heritage Flight에서 소유하고 있으며(EADS/Messerschmitt Foundation 에서 Hispano Aviación HA-1112를 오리지널 G-6엔진을 이용해서 재복원한 기체이다.) G-6는 매물로 나와있다.
기종의 역사
설계와 시제기 등은 이미 1930년대부터 등장하였으며 이후 전쟁기간까지 합쳐 10여 년간 생산되었다. 심지어는 전후에도 알음알음 생산되고 사용된 Bf 109의 역사는 매우 길며, 나치 독일의 흥망과도 연결되어 있다.
전쟁 말기에도 지속적인 개량을 통해 1944년 전반을 제외하고는 동등 내지 우수한 성능으로 요격기는 물론이고 전선 전투기로도 계속 사용되었다. 게다가 플랩을 제외한 기본적인 작업(믹스쳐나 라디에이터 조정)을 기체가 거의 다 알아서 해주었기에 조종사의 숙달도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쉬운 편이었다. 또한 숙련된 파일럿이 타고 있을 경우 매우 위협적인 전투기였으며, 최고의 독일 공군 에이스 상당수가 첫 출격부터 종전 때까지 Bf 109만을 탑승하고 전투를 했다는 점에서라도 그 가치는 무시할 수 없다. 또한 1944년 초까지도 거의 동등한 격추비를 보여주었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20배가 적은 소티수로도 호각의 격추비를 보여 주었다. 전투기는 란체스터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출격비 20:1이면 400:1의 전력차가 난다는 것을 감안하면 루프트바페와 그 에이스 조종사들의 자존심을 상징하는 기종이기도 하다.
아울러 비행기의 역사가 시작되고 나서 현재까지 가장 많이 생산된 단발 전투기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첨단 기술의 집합체로서 제작 단가뿐 아니라 조종사의 훈련 비용도 그 당시와 비교하여 천정부지로 오른 현대 전투기들을 보면 이 기록이 무너질 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외에 당시 추축군의 일원이었던 루마니아, 핀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이탈리아에도 수출 혹은 공여되어 대전기간 해당국가의 주력 전투기로 활약하며 해당국가의 에이스들을 여럿 배출했다. 그리고 당시 중립국가였던 스위스에서도 운용된 역사가 있다. 초창기 관계가 나쁘지 않을때 Bf 109 E-4형을 사두었다가, 이후 스위스의 중립에 불만을 갖게 된 독일이 항공기로 영공을 침범하며 충돌을 유도하자 응수해서 Bf 109간의 교전이 벌어지는가 하면, 대전의 중후반기엔 리히텐슈타인 레이더를 장착한 Bf 110 한 대가 스위스 영토 내에 불시착하자, 무사히 돌려받는 대가로 Bf 109 G-6 12대를 추가로 들여와서 나중에 자국 영토에 불법으로 침입하는 B-17을 격추시키는 데 사용하는 등... 다이나믹한 운용사를 가지고 있다.
명칭 논란
본래 Bf 109를 생산하던 바이에른 항공사(Bayerischen Flugzeugwerken)를 이후 메서슈미트가 인수, 회사 이름을 메서슈미트로 개칭하면서 Me 109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만 실제로 독일군은 Me 109라 부르지 않았으며, 최후기형인 Bf 109 K의 기체나 비행 매뉴얼에도 여전히 Bf 109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다만 이 항공기가 당시 중립국인 스위스에도 여러가지 경위로 들어가 배치되기도 했는데 그곳에서는 Me 109라고 공식적으로 부른 듯하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메서슈미트가 본인의 이름을 설계안에 쓰기 시작한 것이 1941년부터였기 때문이다. 바이에른 항공사를 인수한 이후 메서슈미트는 본인이 설계한 항공기 도안에는 Bf를 붙였다. Bf 109의 채택에 영향을 미친 Bf 109의 형뻘 되는 경기용 항공기 Bf 108 A가 대표적인 사례다. 메서슈미트는 Bf 109가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1941년에 달해서야 자신의 이름을 달면 홍보효과가 있다고 여겼고, Bf 109 G를 Me 109 G로 명명했다. 그러나 군대라는 조직이 다 그렇듯 한 번 정한 명칭은 웬만하면 바꾸지 않고 쭉 쓰기 때문에 Bf 109 G는 Bf 109 G로 남았다고 보면 된다.
Bf-109나 Me-109처럼 하이픈('-')을 넣는 것도 잘못된 표기로, 독일군은 'Bf109', 또는 한 칸 띄어서 'Bf 109'라고만 표기했다. 이는 다른 독일군 항공기도 마찬가지로, 하이픈을 사용한 것은 개량형을 뜻하는 뒤에 오는 숫자, 이를테면 Bf 109 F-4나 Bf 109 G-10의 4나 10같은 숫자 앞이었다. 또한 개량형 숫자 뒤에 추가적인 변형 또는 무장 추가장착 등에 슬래시('/')를 붙이고 항공기별 R키트의 이름을 썼다. Bf 109 G형의 경우에는 동축기관포로 MK 108 30 mm 기관포를 장착한 U4, 對폭격기 무장으로 주익에 MG151/20 기관포팩을 추가한 R6 등의 추가 세트가 유명하다.
1933년 말,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은 새로운 단좌 단엽 전투기 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독일의 4개 항공사가 각기 새로운 전투기 디자인에 착수했는데, 아라도(Arado), 하인켈(Heinkel), 포케불프(Focke-Wulf), 바이에른 항공사(BFW, Bayerische Flugzeugwerke)가 그들이었다. 독일 공군이 이들 항공사에 요청한 전투기의 요건은 다음과 같았다.
1개의 엔진을 탑재한 완전 금속제 단좌 단엽전투기이며, 기관총 2정(각기 1000 발 장전) 혹은 20 mm 기관포(200발 장전) 1정을 장착해야 한다.
6000m 고도에서 400 kph 속력을 낼수 있어야 하며, 적어도 1시간 반 이상 비행 가능해야 한다. 또한, 한계고도는 10,000m 이상이어야 한다.
최고속력으로 20분 이상 비행가능해야 하며, 조종석 시야가 좋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속력, 다음은 상승력, 마지막으로 기동성 순으로 우선순위를 둔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경쟁에 뛰어든 4개의 항공사 중 최종 생산권을 따내게 되는 바이에른 항공사(BFW:후에 메서슈미트에게 인수되어 메서슈미트사로 이름을 변경)는 군용 항공기 설계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후발 주자였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아라도, 하인켈, 포케불프사는 지금껏 적어도 한번 이상씩은 군용기를 만들어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1930년 메서슈미트사는 M22라는 쌍발 야간 전투기 겸 정찰기를 디자인한 적은 있었으나, 원형기가 시험비행 도중 추락하는 바람에 생산이 백지화된 쓰라린 경험이 있었다.
이렇게 보면 메서슈미트 항공사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경쟁처럼 보이지만, 사실 메서슈미트사는 민간용이기는 해도 전금속제 항공기 제작의 경험이 있었고, 여기에 빌리 메서슈미트의 뛰어난 항공기 제작 감각을 감안했을 때, 다소 불리함을 안기는 했지만 절망적일 정도의 차이는 아니었다.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메서슈미트사는 최종적으로 독일 공군의 단좌 단엽전투기 생산권을 따내게 된다. 사실 전간기 동안 수많은 경주용 비행기들이 만들어졌고, 이 설계들이 기반이 되어 2차 세계대전기 전투기들의 원형이 되기에 도리어 복엽 전투기 만들던 센스보다 경주용 단엽기 만들던 센스가 도움이 되는 건 당연지사.
다른 경쟁사들이 속속 원형기들을 내놓으면서 바이에른 항공사도 Bf109의 원형기를 만들어냈다. Bf109는 밀폐형 콕핏을 채택했고, 조종석의 창이 오른쪽으로 젖혀져 열릴 수 있게 설계되었으며, 비상탈출시 조종석 후방 유리가 떨어져 나가게 고안되었다. 날개는 완전 금속제로 만들어졌는데, 플랩과 에일러론, 방향타는 금속틀 위에 캔버스 천을 덮어 끝마무리를 했다. 플랩은 조종석 좌측에 있는 레버에 의해 작동되도록 설계되었고, 약 40도까지 동작했다. 또 수평 꼬리날개의 양측에는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지지대를 마련했는데, 이 동체 디자인은 E형까지 유지되었다.
Bf 109는 동체를 최대한 간소하게 구성하여 크기가 작고 가벼웠다. 랜딩 기어는 주익이 동체에 부착되는 곳에 장착해, 착륙시 날개에 가해지는 외력을 줄였으며, 경쟁사들이 설계한 주익 장착용 랜딩기어에 비교하면 주익에 별다른 장치가 필요없었고, 이동시 주익을 떼어내고 동체만 트럭에 연결할 수 있어 야전에서 운용하기에도 좋은 편이었다. 단, 랜딩기어 사이의 간격이 좁아 착륙이 다소 까다롭다는 단점이 생겨났다. 이 점은 Bf109가 극초기형에 비해 2-3배 이상 강한 엔진을 달게 되자 더욱 심해지게 된다. F형이 A~E형에 비해 거의 모든 부분에서 다른 항공기였음에도, 이 부분은 전혀 달라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형기에는 엔진 카울링 상당에 MG 17 기관총 2정과 프로펠러 축에 20mm MG C.30L 기관포 1정을 장착했다. 엔진은 BMW 116 엔진을 계획했었지만, 여의치 않아 유모 210 엔진을 탑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생산에 문제가 생겨 최초의 원형기 V1기에는 롤스 로이스(영국의 롤스 로이스가 맞다. 이 때만 해도 영국과 독일은 전쟁 상황은 아니었다.) 케스트렐(Rolls-Royce Kestrel II) 엔진을 탑재했다. 그리고 1935년 5월 28일 대망의 초도비행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시험비행장으로 옮겨진 후, 많은 검열관들 앞에서 비행에 들어간 Bf109 V1기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만다. 착륙 도중 랜딩기어가 문제를 일으켜, 한개의 바퀴로 동체착륙을 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 비행성능에 반해버린 검열관들에게 이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못했고, 기체 디자인 문제가 아닌 조종사 실수로 인정되어 메서슈미트사의 시험 비행조종사가 해고당하는 선에서 그치며 Bf109는 큰 점수를 따냈다. V1기에 이어 두번째로 만들어진 V2기는 예정대로 유모 210 엔진을 탑재하게 되었다.
1936년 2월 말 경쟁에 참가했던 4개의 항공사 중 아라도와 포케불프는 기체 디자인 문제로 중도에 탈락하게 되었고, 남은 것은 하인켈사의 He 112와 메서슈미트사의 Bf 109 뿐이었다.
몇명의 엄선된 독일 베테랑 조종사들이 두 기종을 시험비행했는데 이 중에는 1차대전 독일 격추 2위의 에이스였던 에른스트 우데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시험비행 직후 거의 모두 Bf 109의 손을 들어주었다. 시험비행에는 여러가지 곡예비행 같은 비행술이 선보였는데, 두 기종 모두 급하강후 재상승 시험은 만족스럽게 통과했지만 스핀 회복 시험에서 그만 He 112기가 추락하고 말았다. 다행히 조종사는 낙하산 탈출로 목숨은 건졌지만 하인켈사에게는 엄청난 감점 요인이 되었다. 게다가 He 112는 날개 면적이 넓어 Bf109에 비해 롤 속도가 매우 떨어졌으며, 비행시 조작성도 Bf 109가 더 좋았다. 상승력에서 두 기종이 엇비슷한 점을 제외한다면 Bf 109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날 시험비행을 마치면서 검열관 프란케 박사는 Bf 109를 비행한 조종사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A형의 뒤를 이은 B형은 화력을 보충하여 MG17 기관총 3정을 탑재하게 되었는데, 2정(각기 500발씩 장전)은 카울링 상단에 장착했고, 나머지 1정(600발 장전)은 프로펠러 축에 설치했지만 이후에 프로펠러축의 기관총은 발열 문제 때문에 제거되었다. 이 문제는 E형까지 골머리를 썩히고, 영국 본토 항공전이 끝나고 나온 F형에 이르러서야 해결된다. B형은 총 341기가 만들어졌다.
C형은 1937년 3월 초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는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역시 화력의 보강이었다. 카울링 상단의 MG 17 기관총 2정의 탄환 수를 각각 1000발씩으로 두 배나 증가시켰고 주익에 새로이 2정의 MG 17 기관총(500발씩 장전)을 장착했다. C형의 경우 엔진을 유모 210G형으로, D형은 유모 210D형으로 교체했다. 또 A형과 B형의 경우 235리터 연료 탱크였던 것에 비해 C형과 D형은 L자형으로 생긴 337리터 용량의 연료 탱크를 탑재했다. C형은 58대가 생산되었고, D형은 647대가 만들어졌으며, 1938년에는 D-1형 5대가 스위스에 판매되기도 했다. Bf 109의 세번째 원형기인 V3기부터 시작해 A, B, C, D형 등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고, 스페인 공화국을 위해 분전한 러시아제 전투기 I-15나 I-16보다 훨씬 월등한 기량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Bf 109 E(Emil, 에밀) 형은 진정한 Bf 109의 시작을 알리는 효시라 할 수 있는 버전으로 인류 사상 최대의 항공전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본토 항공전 당시 독일의 주력 전투기로서 활약한 기종이며 빌리 메서슈미트가 가장 깔끔한 외형과 가장 간단한 구조, 가장 소형의 전투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심한 작품이다. 이런 소형이면서 유선형의 동체는 공기 저항을 최소화해서 엔진의 파워가 작아도 기동이 화려할 수 있었고, 또 연료의 소모량도 줄일 수 있었다. 물론 작은 외형으로 피탄률이 낮다는 장점도 있었다.
Bf 109 A형부터 D형까지는 무장과 유모 엔진의 버전이 조금씩 바뀐 것 이외에는 큰 변화는 없었으나 E형부터는 본격적으로 주목할만한 변화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엔진이 종전의 유모 엔진에서 직접 연료 분사 방식의 강력한 다임러 벤츠 601A 엔진으로 교체되어, 동시대 어느 전투기에도 뒤지지 않는 속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대부분 전투기들이 그렇듯, 엔진의 변화는 전투기 디자인 자체의 변화를 야기하는 주된 원인이 된다. Bf 109도 새로운 엔진의 탑재로 카울링 부분의 디자인이 대폭 수정되었다. 크기가 커진 엔진을 장착하기 위해 카울링 부분이 길어지면서 냉각 장치는 주익 아래에 위치하게 되었고, 엔진의 파워가 향상되면서 프로펠러도 종전의 양날에서 3개의 날을 가진 것으로 교체되었다. 구조변화에 따른 늘어난 무게는 약 450kg에 달해, 동체 전체 프레임도 내구성을 높여야 했다.
E형중 가장 많이 생산된 버전은 E-3형으로 이때부터 주익의 기관총 대신 무장도 MG FF 20mm 기관포를 각 주익에 1개씩(각기 60발 장전) 장착했으며, 기본 무장인 카울링 상단의 MG 17 7.92mm 기관총은 그대로 유지시켰다. 프로펠러 축의 기관포는 있긴 했으나, 대부분의 경우 과열 등의 문제로 사용하지 않아 대부분의 자료에서도 없는 듯 취급한다. E-3형은 총 1246대가 생산되었고 이중 일부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독립국, 일본 제국같은 추축국은 물론이고 유고슬라비아 왕국, 스위스, 스페인같은 중립국 등지에 수출되기도 했다.
E-4부터는 이 엔진축 기관포를 완벽히 폐지하여 스피너 끝에 캡을 씌웠다. 주목할만한 또 다른 E형의 세부 버전으로는 E-7형이 있는데, 이미 참패한 영국의 항공전에서 절실하게 체험한 부족한 항속거리를 보상하기 위해 300리터 짜리 외부 보조 탱크를 달기도 했고, 일부 북아프리카에 파견되기도 했는데, 모래사막에서 엔진을 보호하기 위해 에어필터와 강렬한 열사의 태양빛을 차단하기 위한 썬 스크린 등을 추가하여 운용되었다(사막용으로 /Trop을 붙여 구분한다.) 또한 E-4형부터는 엔진을 DB 601 N형으로 바꾸었고, E-7형은 새로운 추가 출력 장치인 GM1 부스터 시스템을 장착했는데, 이것은 액체 일산화이질소(N2O)를 이용해 특히 고공에서 약 250마력 이상의 출력을 더 얻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튜닝된 차에서 흔히 쓰는 니트로 시스템과 같은 것이다.) E-7형은 일본에서 5대를 구매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Bf 109 자체보다는 여기에 사용된 DB 601엔진에 더 관심이 있었고 Ki-61으로 DB601을 라이선스 생산하기도 하였다. 최종적으로 E형은 마지막 버전인 E-9형까지, 총 4000대 가량이 생산되었다.
독일 자국산 항공모함의 건조에 발 맞춰 개발했던 함재기인 Bf 109T 형이 있다. 독일 해군(크릭스마리네)에서 발주한 Bf 109T 형은 거의 기존의 E-7과 동일한 스펙에 연장된 윙스팬과 착함용 어레스팅 후크, 고성능 통신장비를 장착한것이 다였지만, 용도가 용도라 그런지 독일어로 항공모함(Carrier) 를 뜻하는 Träger의 T를 따왔다. 우수한 통신장비, 그리고 본래 이착륙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함이었지만, 주익을 연장시킴으로써 향상된 비행성능 등 나름 함재기로써의 활약이 기대가 되는 항공기였지만, 그분이 관할권을 가지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더 큰 원인은 바렌츠 해 해전의 참패로 인해 빡친 히틀러가 전함, 항모 등 모든 대형함 해체를 명령한 것. 다행히 되니츠 제독의 만류로 전함 해체는 없던 일이 되었지만, 그라프 체펠린은 결국 건조율 95% 상태로 방치되어 버린다. 하염없이 대기중이던 60여대의 기체들은 1943년 즈음 Bf 109를 라이선스 생산하던 피잴러 사에 의해 함재기용 장비들을 모두 제거한 채로 T-2 라는 제식명칭을 부여받고 원래 주문했던 크릭스마리네가 아닌, 공군의 훈련부대나, 비교적 한적했던 노르웨이의 JG 77에 배치되고 만다. 이 때면 아래 G시리즈가 등장할 시기로 성능상으로는 많이 뒤쳐져 있었으나, 뜬금포로 1943년 4월, 갑툭튀한 RAF 소속의 B-17을 발견하고는, 훗날 지겹도록 유럽의 하늘에서 맞닥드릴 이 기체를 대전중 최초로 격추하는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그나마, 방치되거나 훈련용도로 사용되다 스크랩 되는 다른 여러 마이너 기체들과는 달리 1944년 교체되기 전까지 해당 지역에서 제법 운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Bf109 E형은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침공에서 적수가 없는 최강의 전투기로 군림하게 된다.
이후 독일은 세계최강의 공군력을 자부하게 되었으나, 얼마후 그들의 자부심도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영국이라는 끈질긴 상대를 만난 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Bf109 E는 속도가 300mph(약 483km/h)를 넘게 되면, 조종성이 둔해지기 시작하고 400mph(약 644km/h) 이상시에는 에일러론이 조종불능 상태가 되어 이 속도에서는 거의 롤을 할 수 없게 된다. 이 점은 G형으로 가면서 플레트너 탭이 장착되고 해결된다.
또 결정적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보다 선회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Bf109의 개발과정에서 최우선 순위가 속력, 상승력, 선회력 순이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Bf109 E도 당시 선회력이 특출나게 나쁜 기종은 아니었다. 동시기의 미국 육군항공대 주력 전투기로 채택되려 하던 P-40B와 비슷한 수준이다. Bf109E는 스핏파이어보다 예리하게 선회할 수 없었지만 상승력은 약간 더 나았고, 상승 한도도 더 높았으며 급강하 능력도 좋아 에너지 파이팅에서는 한 단계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두 기체의 성능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호각지세로, 공중전에서는 파일럿의 능력에서 승부가 갈리게 되는 정도의 차이였다. 선회력의 스핏파이어, 상승력의 Bf109라고 말하긴 하지만 실제 저 두 기종은 '생각한 것보다 상승력 좋은 스핏파이어, 생각한 것보다 선회력 좋은 Bf109'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 전후 Bf109를 몰아본 영국 파일럿들은 생각보다 좋은 선회력에 놀란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저속 순간 선회의 경우 플랩을 잘 이용하면 거의 호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항속거리가 부족해 영국 상공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이 극히 짧았고, 폭격기 호위를 위해 폭격기와 속도를 맞추어 비행하면서 Bf109의 이점인 고도 우위를 희생해야만 했으니, 영국 전투기와의 대결은 불리한 조건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정이 어찌되었건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는 결과적으로 영국 공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사실 독일 공군은 과거 복엽기를 운용하던 시절부터 보조 연료 탱크를 장착하는 기술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Bf109의 경우에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연료부족에 시달린 후, E-7형에서야 겨우 보조 연료 탱크를 채택하였다. 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2차대전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경우 보통 다음 3가지를 원인으로 제시한다.
유럽 본토에서 작전을 펼치는 동안 Bf 109의 연료문제가 제기된 적이 없다. 무엇보다 유럽 본토에서의 작전은 공군의 지원을 등에 업은 독일 육군이 거침없이 진격하여 적국 공군기지를 점령하면 이 기지를 활용하는 식으로 작전을 한 경우가 많았다.
계속되는 승리와 영국 공군을 얕잡아보던 헤르만 괴링 이하 공군 수뇌부의 자만심으로 영국 공군 따위는 쉽게 도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폭격기 호위 임무는 Bf 110이 맡기로 되어 있었고, Bf 109는 자유롭게 영국 전투기를 추적하여 격추시키는 임무를 맡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전투를 시작해보니 Bf 110이 영국 전투기에게 개털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Bf 109가 호위임무에 투입되면서 독일 공군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사실 영국 본토 항공전 초기에는 영국 남서부 지역의 항공기지 공습에 주로 투입되었고, Bf 109의 경우 초기 자유 추적 임무를 받았기에 연료 부족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점점 폭격기 호위 임무를 수행하게 되고, 여기에 한술 더 떠 훨씬 거리가 먼 런던을 공습하게 되자 곧 심각한 연료부족 문제에 직면하였다. 런던 대공습 당시 Bf 109가 런던 상공에서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5~15분 남짓이었다. 상황이 이 모양이니 영국 전투기들을 제대로 상대할 시간조차 없었고, 연료의 한계로 귀환할 때는 결국 독일군 폭격기들이 영국 전투기들에게 일방적으로 도살당하는 것을 손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꼭지가 돌아서 영국 전투기에게 도전한 조종사들도 있었지만 이 경우 귀환할 연료 부족으로 귀환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결국 항속거리가 짧은 Bf 109들이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영국에 툭툭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실제 영국 상공에서 격추된 Bf 109보다 프랑스 해안에 불시착한 Bf 109들이 더 많다는 기록도 있었을 정도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