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공주의 생애
세종 때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그 가운데는 특히 가족으로 세종을 도운 부인 소헌(昭憲)왕후와
딸 정의공주(1415년 ~ 1477)가 있다.
세종은 딸 2명과 아들 8명을 두었다.
맏딸 정소(貞昭) 공주와 맏아들 이향(李珦, 문종)에 이어 둘째 딸 정의 공주다.
세종은 그 밖에 아들 7이 더 있다.
정의공주는 세종 즉위 전에 출생하였다고 하나
다만 오빠 문종(文宗)과 동생 세조(世祖) 사이에 태어난 사실에 비추어
태종 15년(1415)~16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녀는 세종 10년(1428)에 정의공주에 봉해졌고, 안맹담(安孟聃)과 가례를 치렀다.
안맹담은 관찰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이다.
그와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두었다.
이후 안맹담은 계유정난에 협조하여 성록대부로 가자(加資)되었고,
세조 3년(1457)에 수록대부에 가자되었다.
이러한 남편의 공훈에 힘입어 정의공주는 세조로부터 노비와 전토 등을 받았다.
또한 성종은 공주의 건강이 좋지 않자 4남 안빈세를 동부승지에 임명하였고,
왕비와 함께 친히 문병을 하러 가기도 하였다.
정의공주는 1477년(성종 8)에 세상을 떴다.
정의공주의 활동
정의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웠는데, 역산(曆算)에 능하였다.
정의공주는 세종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이에 일화도 전한다.
세종이 중국에서 사 온 안장을 손수 고치려고 칼로 깎다가 칼끝이 다리에 박히자
공주는 술을 만들고 난 지게미[醋粕]를 데워 상처에 붙여 부기가 빠져나가게 한 뒤
자석{指南鐵]을 가지고 부러진 칼끝을 빼어냈다는 것이다.
열세 살 나이에 시집을 가서 궁중을 떠났지만,
세종은 그녀의 재능을 인정하고 훈민정음 만드는 데 참여시켰다.
《죽산 안씨 대동보》에 따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이 잘 풀리지 않아
여러 대군과 공주에게 풀어보도록 하였는데,
공주가 이를 풀어 세종의 칭찬을 듣고 노비를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철저하게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대다수 백성은 어려운 한문 때문에 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었다.
《세종실록》을 깊이 들여다보면 세종의 의도는 익히기 쉬운 훈민정음을 통해
백성들이 쉽게 글을 배워 억울한 송사(訟事)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창제 막바지에 변화하는 소리인
변음(變音)과 입안에서 나왔다 들어가는 소리인 토착(吐着)을 글자로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세종은 천하영재로 소문난
자기 왕자들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에게 해결 방안을 찾게 했다.
하지만 이들 모두가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세종은 정의공주에게 부탁했고 그녀가 이를 해결해 훈민정음을 완성할 수 있었다. (참고:김준혁교수)
또한 세종이 창제된 훈민정음을 공주에게 주어 민간에서 시험해 보도록 하자,
공주는 그 결과를 세종께 바쳤다고 전해진다.
변음(變音)과 토착(吐着)
참고로 우리는 역사적으로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말을 글자로 표현하고자 노력해 왔다.
먼저 삼국통일부터 고려 초까지의 향가(鄕歌)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처용의 이야기다.
“東京明期月良 ... 동경밝이달”에 식이다.
그밖에 이두(吏讀)가 있다.
이는 순수한 한문도 아니고 순수한 우리말도 아닌 그 두 언어의 혼합체 같은 것이다.
“凡僧人等亦 聚妻妾爲在乙良 亦=이 爲在乙良= 하겨늘랑”
그리고 토가 있다. 한문 이해를 돕기 위해 한자의 음을 빌려서 표기했다.
“崖=애(에), 伊=이 爲尼=하니” 등이 있다.
그밖에 한자의 약체(略體)를 부호 쓰듯 했으나
한자가 우리 소리와 뜻을 담는 글이 될 수는 없었다. (참조: 허웅, 《한글과 민족문화》)
이런 과정을 거쳐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 정의공주가 세종 곁에서 직접 여러 훈민정음 기호의 소리를 내어
‘글자 기호와 실제 소리’의 차이를 실험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리라 추측해 본다.
'변음(變音)'은 '말로 할 때 변하는 음'을 뜻하고 반설음[《훈민정음》의 용자례에는 반설음 ‘ㄹ’에 해당되는 예로 ‘ㆍ무뤼[雹], ㆍ[月], :별[星]’을 제시하였다.
‘ㆍ무뤼’는 ‘ㄹ’이 초성으로 쓰인 예이고 ‘ㆍ, :별’은 종성으로 쓰인 예이다.] 등의 표기에서의 음의 차이를, '토착(吐着)'은 '한문 구절 아래에 토를 다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근거가 확실하지는 않은 면이 있다. 토착(吐着)은 토(吐)의 사용례를 볼 때,
현토[토를 다는]와 깊은 관련이 있을 듯하나 이 또한 불확실하긴 마찬가지다.
그 시작과 끝은 우리말을 글자로 적기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훈민정문이 아니라 훈민정음이라는 것이다.
곧 글월 문(文)이 아니라 소리 음(音)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종래 쓰고 있던 바른 한자음의 발음기호로 훈민정음[한글]을
제정한 것으로 본 것이다.
한자의 소리표기가 사람마다 달라 이를 통일하기 위해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려 전기까지 사서오경으로 배운 한문으로 중국인과 소통할 수 있었는데
원대 이후 북경 한어의 발음이 우리의 전통 한자음과 매우 달라서
이 말과는 전혀 통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우리 한자음을 수정하여 예전처럼 한문 학습에 의하여
중국과의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가능하게 하려는 의도로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구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개정된 한자음이야말로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바른 한자음,
곧 훈민정음이었으며 이것의 발음기호로 정음을 제정했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제정된 한글[훈민정음]은
변음토착(발음을 바꿔 토를 다는 것)의 난제를 해결한 다음에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그리고 《월인석보》를 거쳐
우리말 표기에도 가능한 것이 입증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말을 기록하는 언문(諺文)이란 이름을 얻었고 전통한자음, 곧 동음(東音,
중국한자음에 대한 우리 한자음)의 표기에도 이 문자가 사용되었고 이때도 언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중국어의 정음을 표기할 때 사용한
새 문자이기에 정음이라 불렀고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표음할 때 사용한 글자는
훈민정음이었으며 우리말과 우리 한자음을 적기 위한 글자는 언문이었다.
실록에 "상친제언문이십팔자(上親製諺文二十八字)"(《세종실록》 25/12/30)라고 한 것을 보면 처음에는 한문자(漢文字)에 대한 말로서 한글을 통칭한 것이다.
정의공주와 훈민정음
정의공주는 어려서부터 영특했다.
일찍 시집을 가서 궁중을 떠났지만,
세종은 그녀의 재능을 인정하고 훈민정음 만드는 데 참여시켰다.
1443년(세종 25년) 9월 23일 세종 왕녀 정의공주(貞懿公主) 양모인
전 경창부윤 유한의 처 박 씨가 죽었다.
양모의 죽음에 정의공주가 크게 슬퍼했지만,
세종은 심상(心喪, 상복은 입지 않으나 상제와 같은 마음으로 근신하는 일)만 하게 하고
상복을 입지 못 하게 했다.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있는 정의공주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3달 뒤인 12월에 훈민정음이 완성됐고 3년 뒤인 1446년(세종 28년) 반포했다.
정의공주는 불교에 조예가 있었다.
연창위 안맹담과 함께 세종 승하 뒤 소헌왕후와 세종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문수사(文殊寺)를 중창하였다.
안맹담도 평소 불경을 읽고, 살생을 싫어하여 양잠(養蠶)도 하지 않는 등
공주 부부는 불교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
정의공주는 예종 1년(1469)에) 지장신앙의 기본 경전인 《지장보살본원경》을 펴냈는데,
이는 죽은 안맹담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 정의공주가 펴낸 《지장보살본원경》은
보물 제966호로 지정되었다.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