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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메서슈미트(Willy Messerschmitt)BF-109 전투기
독일은 충분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미리 대비하지 못하면서 결국 비참한 결과를 맛보게 되었다. 뒤늦게 보조 연료 탱크를 장착할 수 있도록 메서슈미트 박사에게 설계변경을 의뢰하였으나 보조연료탱크 장착이 가능한 Bf 109가 일선에 배치되었을 때는 이미 영국 본토 항공전이 끝나 버렸다.
이 정도 결과면 독일 공군이 일방적으로 완패 당하지 않았다는 시각이 있는데, 중요한 건 기체가 아니라 조종사다. 영국은 해상이던 육상에서든 격추당해도 자국 영토 안이니 조종사를 구조해서 신규 기체만 새로 지급해서 싸우게 하면 되는 상황이지만 독일 공군 파일럿들은 격추 당하면 육지에 내리면 포로로 잡히거나 혹은 바다에 내리면 희박한 확률로 구조되지 않는 한 그대로 둥둥 떠다니다 죽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다 공중전이 해상을 통한 지상군의 침공 예비 작전이기도 했는데, 이것이 실행되기 위해 독일로써는 격추 교환비의 단순 우위를 넘어, 압도하는 것이 목표였다. 무엇보다도 승패는 손실비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작전 목표를 달성했는지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독일은 당초 작전 목표인 영국 공군을 전멸시키고 제공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물론 손실비도 중요하지만 그걸로 승패가 결정되면 독소전쟁은 독일의 승리라고 봐야 할 판이다. 또한 손실 기체의 가치 측면에서도 단발 전투기보다 더 비싸고 항법사, 폭격수, 방어 기총 사수 등 승무원도 많이 탑승하는 폭격기를 더 많이 잃은 독일 측의 손실이 더 크다.
영국 본토 항공전 이후 새로운 엔진을 장착한 개량형인 F형이 등장하였다. F형은 기체 전체가 대폭 재설계되어 동체 전방과 주익은 완전히 형체가 바뀌었고, 수평미익의 버팀목 등도 제거되어 더욱 매끈한 형상이 되었다. 이 형태는 Bf109의 초기형과 중-후기형을 갈라 놓는 중요한 구분 포인트이다.
이제서야 기축 기관포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최초에 의도했던 대로 주익의 MG FF 2문 대신 기축의 MG 151 1문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 형태의 무장 배치는 조준하기는 편하나 화력 자체는 줄어들었고, 또한 F 초기형에 장착된 기축 기관포는 20mm가 아닌 15mm 구경의 MG 151이었다. 때문에 기총 조준실력이 좋았던 조종사들은 거리를 신경쓸 필요가 없어 좋아했던 반면, 그렇지 못한 일반 조종사들은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아돌프 갈란트 같은 경우가 대표적. 갈란트는 F형의 기수 카울링 상단무장을 MG 131로 변경한 기체와 주익에 MG FF/M을 E형처럼 날개에 장착한 기체를 옥탄가 100 세팅으로 마개조해서 몰고 다녔다. 형식은 둘 다 F-6U. 이 화력 문제는 MG 151의 구경을 확대한 MG 151/20 20mm 기관포가 신뢰할 만한 탄도와 뛰어난 신뢰성을 발휘하자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이래저래 F형은 가벼워진 무게와 높아진 출력의 엔진 등으로 한껏 높아진 능력을 뽐내며 말 그대로 '날아다녔다'. F형의 에이스로는 독일 공군의 전술에서는 보기 드문 이단아인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유가 유명하다. 이후 동부전선에 대량 투입, 1930년대 초반 기종들이었던 소련 공군기들을 도륙하며 활약했다.
고고도 전투기형으로 F형의 주익을 연장한 H형 또한 등장하였지만, 많이 쓰이지는 못하였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시에 고공 정찰 임무를 띠고 비행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영국 항공전이 끝난 후 정찰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다. 다만 투입 대수가 매우 적었다.
점점 독일이 수세에 몰리면서, Bf109의 성격도 제공전투기에 점차 요격기의 성격이 강조되게 되었다. G형으로 넘어오면서 가장 중요한 변경점은 고공 요격을 위한 여압 장치가 된 조종석과 폭격기 기총 화력에서 조종사를 보호할 수 있는 장갑판, 방탄 유리의 채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요격을 위해 튜닝된 고출력의 엔진도 포함된다. 이에 F형에 비하면 무거워졌으며 이로 인하여 상승력 등 일부 비행성능에서 약간의 저하가 발생하기도 했다. 물론 동체의 형상을 좀 더 공기역학적으로 다듬는 등의 조치를 취해서 이러한 손해를 최소화하기는 했다. 또한, 생산성을 위해 꼬리 바퀴를 F형의 수납식에서 고정식으로 교체했다. 당시 독일 조종사들은 공장에서 요격용으로만 양산되는 Bf109들이 저속이든 고속이든 순수하게 폭격기만을 잡기 위해 탄속 등을 포기한 "중무장"덕에 독일 조종사들은 사전에 일부 Bf109를 경무장화시킨 연합군 전투기와의 공중전을 벌이는 편대와 요격편대를 따로 나눠서 운용하였다.
요격적 성격을 더욱 중시한 G-5 등의 파생형부터는 기수의 기관총이 MG 131 13mm 기관총 2정으로 바뀌었고, 기존의 MG 17보다 더 커진 이 신형 무기 때문에 엔진 카울링에는 G 중기형 특유의 벌지가 생겨났다. 또한 G-6 부터 기축 기관포로도 한 방 한 방의 위력이 확실한 MK 108 30mm 기관포를 탑재하는 일도 잦았다. MK 108은 구경에 비해 가벼워 Bf109 같은 경량기체에도 탑재할 수 있었으나, 화력이 극히 우수하나 포구 초속이 느린 관계로 대형 폭격기 공격에는 효과적이었지만 작은 전투기를 상대로는 맞추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그리고 1943년 말부터 전쟁 상황이 매우 악화되기 시작하자 동체 후방 구조물(수직미익 등)을 원가 절감을 위해 목재로도 만들기 시작했다. 잘 보면 수직 꼬리 날개 부분에서 G-6과 G-10, K의 차이점을 볼 수 있는데, 키가 큰 쪽을 대형 수직미익이라 하며 쉽게 구별이 가능하다. 대형 수직미익은 높이가 더 높아서 고속 안정성을 확보해주었으나, 도리어 무게가 늘어나서 앞쪽에 밸런스용으로 무게추를 더 넣어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목재가 금속보다 방호력이 떨어지는 것도 있었다. 금속은 구멍이 나고 너덜너덜하게 유지되지만, 목재는 그 정도 데미지를 입으면 그대로 깨져버리기 때문. 대형 수직미익은 Tall tail이라 하며 금속재 두 종류(G-6/10/14 AS버젼용과 G-14용)와 목재 두 종류(G-10/14용과 G-10전용)가 있다.
당시 보조 전투기로 개발되던 Fw190이 중저고도에서는 Bf109보다 우수한 성능을 보였고, 또한 조종하기도 편하다는 점 때문에 일선 전투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떨어져 갔으나, 대신 높은 추중비로 상승력이 우수하고 고공에서도 성능저하가 적은 1단 대형 슈퍼차저 탑재형 수랭 엔진을 가진 덕에(하지만 DB605L과 같이 2단 슈퍼챠저로 더욱 고고도 전투기 개발에 열을 내기도 했다.)영미 폭격기군에 대항하는 요격기로 대량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Fw190이 폭격기 요격에 투입되면서 폭격기 요격은 보다 우수한 화력의 Fw190에게 넘겨주고 주로 호위기와의 전투를 담당하게 되는데 덕분에 전투기를 상대하기에 적합한 무장으로 교체할 수 있었다. Bf109와 연합군의 P-51과 비교하면 최고속력에서 열세이며 익면하중에 열세에 놓여있었지만 상승력, 화력 등에서는 여전히 우세해 전체적으로 비등비등한 성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더 높은 고도에 있던 P-51이 상승해오는 Bf109를 공격하는 상황이 많아 조금 더 상승력이 높은 정도로 유리한 상황을 낳았다 보기 어렵다.
최후기형의 경우에는 최대속도에서도 P-51D를 다소 상회하는 수준까지 향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연합군 파일럿들의 기초적인 비행훈련과 비행기들의 물량은 압도적이었고 기체 자체의 성능은 밀리지 않았으나 앞서 영국본토 항공전 패배 부분에서도 언급했지만 수많은 숙련된 조종사를 잃고 급한 동부전선으로 조종사들이 차출되면서 44년 서부전선에 배치된 조종사의 숙련도와 물량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이 무렵 독일의 조종사 손실은 심각한 수준이어서 아돌프 갈란트가 1944년 4월에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10회 이전의 작전에서 400명 이상의 조종사가 사망했다고 하며 이전의 4개월 동안 1000명 가량의 조종사가 사망했다고 언급했다. 거기에 연합군의 숙련도와 물량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독일은 호위기를 무시하고 폭격기만 공격했기에 교환비가 불리하게 나왔다는 의견이 있으나 그 근거로 대주간이나 슈바인푸르트 공습 등에서 연합군의 폭격기 손실이 전투기 손실에 비해서 미약하는 것을 들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 본토 항공전 전 기간동안 연합군의 전체 손실은 전투기 18,465대, 폭격기 21,914대이며 전투기/폭격기 손실비는 0.84로 폭격기가 더 많은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전투기를 무시하고 폭격기만 노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대주간이나 슈바인푸르트 공습에서 폭격기 손실이 압도적인 것이 당연하다면 당연한게 대주간 이전까지 연합군 폭격기들은 제대로 된 호위기의 호위를 받지 못했고(항속거리의 문제로 중간에 돌아와야 했다.) 루프프바페는 호위기가 돌아갈 즈음부터 폭격기들을 요격했으므로 호위기의 손실이 적은 것은 이상한게 아니다. 또한 대주간의 경우도 아직 독일이 연합군의 새로운 방법(폭격기+호위기)에 대응할 마땅한 전술이 없는 상태에서 기존처럼 폭격기만 노리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라고 봐야한다. 게다가 대주간 이전에는 호위 자체를 제대로 못받는 상태에서 폭격기들이 격추되었으므로 제대로 호위를 받은 이후만 고려하면 당연히 전투기/폭격기 손실비는 커질 것이다.
한편, 소련군은 노획한 Bf109를 보고 상당히 좋은 평을 내렸다. 일단 출력 관련 부분이 전부 기계식으로 자동 조절되는 부분은 그 당시 소련군으로써는 가히 외계인 납치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프로펠러 피치 조정이 전기식으로 되어 있어 시동이 꺼져도 쉽게 대응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반면 소련군 전투기는 유압식이라 엔진이 꺼지면 프로펠러 피치를 조절할 수 없어 재시동을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물론, 이외에도 정비가 상당히 편리하며 라디에이터 2개중 하나가 피탄돼서 냉각수가 누수하면 해당라인을 차단하는 기능이 장착되어 있는 등 기계적인 완성도는 당시 소련에서 사용하던 어떤 항공기들보다 나았다고 한다. 한편, 소련 전투기들은 연료 탱크가 날개에 장착되어 있었고, 장갑도 별로 탄탄하지 않아 피탄시 그대로 뽀개지거나 제로센처럼 불타는 경우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소련군 상대로는 그랬지만 미군 상대로는 또다른 문제로 Bf109의 플랩 조작이 P-51, P-47 등 다른 전투기에 비해 어렵고 반응성이 낮았다. 물론 전투중 플랩 조작은 게임과 다르게 고급 기술에 속하는 어려운 기술이긴 하고, Bf109의 지속 선회력은 괜찮은 수준이긴 했으나 상술한 문제로 인해 아무래도 순간적으로 플랩을 이용한 급선회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JG3 소속의 Bf109 K-4. 1943년 말에 양산에 들어가려했는데 폭격에 연구진, 설계도, 시제기, 공장이 전부 날아갔다! 그 덕에 생산이 늦어졌다. 늦게 나온 결과 장비된 출력 자체는 상승했지만 결과적으로 G 시리즈만 쓰던 것을 생각한다면...
1944년 8월 이후 G-10과 K-4 등의 파생형에서는 더욱 강력해진 DB 605D 엔진을 탑재하여 성능의 확대를 꾀하였다. G-10이나 K-4 등의 최후기형들은 최대 속도도 700kph 이상에 달하였으며, 연합군의 P-51 머스탱 등에 대해서 약간의 우세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모든 Bf109에는 에를라 하우베(Erla Haube)라는 프레임이 적은 신형 캐노피를 장착하여 조종사의 시야 향상 또한 꾀하였다. 그러나 이미 독일에는 극소수의 생존한 에이스들을 제외하고 이런 전투기를 조종할 조종사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K-4는 전후 미 육군항공대에서의 고옥탄 가솔린으로 시험 비행에서 725Km/h라는 일급의 스피드를 낼 수 있었지만 나치 독일은 이미 패망해가고 있었다.
K-4에는 MK 108 기관포가 표준장비로 자리잡았다. 이미 G-6부터 이 30mm 기관포를 기본 장착하는 경우가 많았고 G-10부터 일반화된다. 중폭격기 요격 때문이었다. 일부 부대에서는 야전 개조로 기축 기관포를 MK 108 대신 기존의 MG 151/20으로 바꿔서 쓰기도 했다고 한다. 단포신의 MK 108 은 불안정한 곡사탄도에 가깝기 때문에 전투기 상대로는 안정적인 탄도의 MG 151 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독일이 제안한 고고도 초고성능 요격기 사업에서 메서슈미트는 야심차게 Bf109 G형을 기반으로 만든 Me 155B를 내놓았지만, Fw190 D형 기반인 Ta152에 밀려 탈락했다. 함재기형으로 Me 155G가 계획되었으나, 그라프 체펠린 프로젝트가 폐기되면서 프로젝트가 중단되고, 이는 이후 BV 155로 넘어가게 된다.
요격기, 전폭기 등의 용도로 1942년 말 부터 개발이 시작되어 제작이 거의 완료되었고 1대의 프로토타입만 만들어 둔 상태로 상부의 생산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서슈미트사의 공장은 생산 지시만 떨어지면 당장 생산할 수 있는 상태였으나 '현재 생산 중인 기체를 사용할 것'이라는 제국항공성의 요구로 인해 생산이 지연되었다. 1944년에 상승력, 속도 등 많은 측면에서 Z형보다 우월한 Me 262 프로젝트가 성공하였기 때문에 쌍둥이 비행기를 제작할 필요성이 사라진 데다, 1943년 연합군의 공습으로 시제기마저 파괴되면서 Bf 109Z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Bf 109에 공랭식 엔진을 얹아보려는 계획도 있었다. 이 계획은 크게 두 번 진행되었는데, 첫 번째 시도는 1937년 DB 601 외에 다른 엔진을 사용한 Bf 109를 제작하라는 에른스트 우데트의 명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독일 공군은 21번째 Bf 109 생산분을 개조하여 P&W 트윈 와스프 엔진을 장착하였고, 이 기체를 Bf 109V-21으로 명명되었다. 이후 Bf 109V-21은 1939년 8월 17일 아우스부르크에서 테스트 파일럿 Hermann Wurster가 조종하는 가운데 초도비행을 마쳤다. 그러나 Bf 109V21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정식 채용되지는 않았고 이후의 Bf 109는 전부 우리가 아는 DB 계열 수랭식 엔진을 장착하게 된다.
이후 대전 중기에 Bf 109에 공랭식 엔진을 달아본다는 계획은 한 번 부활하게 된다. 이번에는 P&W 엔진 대신 자국 엔진인 BMW 801 엔진을 장착되었고, 프로토타입 기체는 Bf 109F(콜사인 D-ITXP)를 개조했다. 이후 이 기체는 Bf 109X로 명명되며 개발이 진행된다. 그러나, 독일 공군의 입장에서는 굳이 수랭식으로도 충분한 Bf 109에 공랭식 엔진을 다는 것보다는 설계적인 면에서 훨씬 더 진보된 Fw 190를 만드는 것이 더 나았던 관계로 1943년 Bf 109X 계획은 중지되었다.
Bf 109V21과 Bf 109X 두 기체 모두 시제기의 최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청사진으로만 존재하는 사양으로, Bf 109의 제트 엔진 장착형이다. 1943년 1월에 Me 262의 개발 실패에 대비한 예비형으로 계획되었으나 Bf 109Z와 마찬가지로 Me 262의 개발이 성공적으로 완료되면서 중단되었다.
보통 나치 독일 패망과 함께 퇴장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G형을 베이스로 개조된 버전들도 계속 사용되었다. 이들 기체의 공통점은 오리지널 DB(다임러-벤츠)605 엔진을 구할 수 없어 다른 엔진을 사용하여 기수 부분의 모양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Avia S-199
이 파생기종 중 하나로 이스라엘이 중동전쟁에서 사용하였던 체코제 Avia S-199가 있다. S-199는 He 111 폭격기에 장비되었던 융커스 유모(Jumo)211 엔진을 사용하였으나 토크 응답성이 늦은 유모 엔진 탓에 조종성이 나빴다고 하며 엔진이 다른 탓에 기수의 13mm MG 131 기관총과 동조기어가 잘 맞지 않아 자신의 프로펠러를 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엔진의 V 뱅크 사이로 20mm 기관포를 탑재할 수 있었던 DB605엔진보다 부피가 큰 유모 엔진 탓에 기관포의 중앙탑재가 불가하여 대신 R6 야전개조 키트를 이용해 날개 양측 아래에 MG 151 기관포를 하나씩 장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 기체는 유모 엔진도 벤츠 엔진과 같이 역V형 엔진이었기 때문에 외모 너프가 적은 편이다. 190 D형의 기수와 109의 몸통이 합쳐진 듯한 모양인데 오리지날 109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S-199는 이스라엘 공군 최초로 운용한 제대로 된 전투기이기도 한데, 재미있는 사실은,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군의 스핏파이어와 이스라엘군의 S-199가 맞붙어서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대결이 비슷하게 재현된 적도 있다는 것이다.
이 S-199의 이전 기종으로 S-99가 있었는데, 이 S-99는 체코슬로바키아에 DB 605 엔진이 아직 남아 있었을 때 제작한 기체로 Bf 109 G형들과 동일한 사양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DB 605 엔진들이 저장되어 있던 창고가 폭발하는 바람에 DB 605 엔진을 더 이상 달 수 없게 되자 나온 기체가 S-199인 것.
HA-1112
그리고 스페인의 이스파노-수이자에서 독일의 라이센스를 얻어 제작한 Ha 1112도 유명한데, 1970년대까지 운용하였다. 서사하라 분쟁에서 스페인 공군 소속 Ha 1112가 투입되기도 했는데 이것이 Bf 109 계열기의 마지막 실전 기록이다. 원본과 다른 엔진을 사용한 이유는 자국 Bf 109 생산하기도 바쁜 독일이 엔진을 제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반에는 이스파노-수이자의 12Z엔진이 탑재되었다가 1954년의 최종 개량형에는 영국의 멀린 엔진을 프로펠러랑 세트로 사와서 장비하였다. 부촌(buchón, 닭둘기)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Ha 1112는 현재도 비행 가능한 잔존기체가 많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보니 2차대전 영화를 찍을 때 Bf 109의 대역으로 간간히 등장하고 있다. 영화에 Bf 109가 CG가 아닌 실사로 나온다면 십중팔구는 이 기종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Ha-1112] Ha-1112들은 현재 항공애호가들에게 매각, 오리지날 Bf 109 G형의 사양에 준하게 복원시켜 에어쇼 등에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벤츠제 역V형 엔진이 아닌 롤스로이스제 정V형 엔진을 장착한 관계로 Ha 1112는 기수 모양이 상당히 달라서 구분이 꽤나 쉽다. 배기 분출구가 위에 달려있으며, 엔진 카울링이 뚱뚱해져서 109답지 않게 무슨 팰리컨 주둥이같이 정말 못생겼다. 그래서 항공기 동호인 및 밀리터리 동호인들 사이에서는 실사로 오리지널 Bf109가 제대로 나오는 영상물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적잖이 아쉬움을 표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