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 / 박용하
화를 옮기지 않는다
- 논어
별거 아닌 일로 딸아이에게 화를 낸다
딸아이에게 화를 내기 전에
이미 배우자한테 화가 나 있다
배우자한테 화를 내기 전에
나 자신한테 화가 나 있다
별거 아닌 일로 학생에게 화를 낸다
학생에게 화를 내기 전에
이미 음악 선생한테 화가 나 있다
음악 선생한테 화를 내기 전에
체육 선생한테 더 화가 나 있다
무엇보다
이웃 주민한테
일가친척한테 단단히 화가 나 있다
옛말에 군자는 화를 옮기지 않는다 했는데
나는 옛날 사람도 아니고
군자는 되고 싶지도 않고
감정 위아래의 사람이어서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의 사람이어서
피부병 옮기듯
정신병 옮기듯
화를 옮긴다
별거 아닌 일로 화를 내고 동물을 공격하고
별거 아닌 일로 이웃이 되고 원수가 되고
별거 아닌 일로 집안을 거덜 내고
한 나라를 밥 말아먹듯 말아먹는다
마치 분노의 나라에서 지금 막 도착한 사람처럼
쓰레기 투기한 이웃 주민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거들먹거리는 전직 신문기자였던 방송기자에게 재떨이를 날린다
그림을 찢고 악기를 부수고
친구와 결별하고
애인과 나를 말아먹는다
화를 다스리듯이
한 나라를 다스리고
화를 놓아주듯이
사람을 놓아줄 수 있을까
화를 옮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군자와 친위대원의 차이만큼이나 거대하리라
한순간이다
천지를 다 받아줄 것 같은 사람이
손가락 하나 들이밀 데가 없게 되는 순간이
화의 신통방통함이여
화의 구제불능이여
화를 버리기보다 박살내려는
나한테 지기 어려운 나여
그 사람은 원망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보복하지 않았다
- 시집 『이 격렬한 유한 속에서』 (달아실, 2022)
* 박용하 시인
1963년 강릉 출생, 강원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89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및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바다로 가는 서른세번째 길』, 『영혼의 북쪽』, 『견자』, 『한 남자』, 『이 격렬한 유한 속에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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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하 시인이 10년 만에 세상에 내놓은 시집 『이 격렬한 유한 속에서』.
용하 형이 그러더군요.
"제영 씨, 그거 알아? 지금까지 내가 낸 시집 중에서 하나만 고르라면 이번 시집이야."
형이 지금까지 낸 시집 중 어느 하나도 내겐 벅차지 않은 게 없지만, 형의 말마따나 이번 시집은 그야말로 최고 중의 최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의 깜량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무게가 실린 까닭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번 시집에서 그나마 가장 가벼운 시를 옮깁니다. 「아름다운 사람」.
제목만 보고 어쩌면 당신은 벌써 김민기의 노래 <아름다운 사람>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에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 불어오면
벌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새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 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아니면 서유석의 노래 <아름다운 사람>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네요.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기어이 부숴버리는
내일이면 벌써 그를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오 오오오오 아름다운 나의 사람아
당신은 내가 드린 내 마음을 고운 장난감처럼
조그만 손으로 장난하고
내 마음이 고민에 잠겨 있는
돌보지 않는 나의 여인아 나의 사람아
오 오오오오 아름다운 나의 사람아
만약에 이성선 시인의 시 「아름다운 사람」을 떠올린다면 당신은 이미 시인일 테지요.
바라보면 지상에는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늘 하늘빛에 젖어서 허공에 팔을 들고
촛불인 듯 지상을 밝혀준다.
땅속 깊이 발을 묻고 하늘 구석을 쓸고 있다.
머리엔 바람을 이고
별을 이고 악기가 되어 온다.
내가 저 나무를 바라보듯
나무도 나를 바라보고 아름다워할까
나이 먹을수록 가슴에
깊은 영혼의 강물이 빛나
머리 숙여질까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무처럼 외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혼자 있어도 놀이 찾아와 빛내주고
새들이 품속을 드나들며 집을 짓고
영원의 길을 놓는다.
바람이 와서 별이 와서 함께 밤을 지샌다.
그리고 오늘 이후, 당신은 이제 <아름다운 사람> 하면 박용하 시인의 시 「아름다운 사람」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요.
"뺑소니로 아내와 딸을 잃은 덕구 형은 그해 겨울 산에 들어가 겨우내 항아리를 구웠다 // -울화가 맺혀 살이 든 것이니 불로 태워버려야 한다 백 개의 항아리에 백 개의 매화가 필 때쯤이면 풀릴 거다 // 스님의 처방대로 백 개의 항아리를 구웠지만 한 계절 또 한 계절이 지났지만 매화는 끝내 피지 않았다"(졸시, 「연분」 부분)
"뺑소니로 아내와 딸을 잃은 덕구 형"처럼 가슴에 울화가 가득 찬 당신, 그렇지 않아도 화를 치밀어오르게 만드는 세상인데 어쩌지요.
가문 날 바람타고 이산 저산 옮겨붙는 산불처럼 걷잡을 수 없는 가슴속 화의 불길을 어쩌지요.
스님의 처방대로 백 개의 항아리를 구우면, 그때는 화가 다스려질 수 있을까요.
저요?
저는 아무래도 이생에서는 그른 모양입니다.
"한순간이다 / 천지를 다 받아줄 것 같은 사람이 / 손가락 하나 들이밀 데가 없게 되는 순간이"
그래도 이 문장 하나만큼은 가슴에 담아두어야겠다 생각하는 아침입니다.
2022. 4. 25.
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