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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훤당 김굉필선생의 생애와 사상
서 론
한·두 모현회 창립총회(2004.2.26)에 즈음하여 10년전에 상재(上梓) 되었던 졸고 「한빙계에서 본 한훤당의 천리사상(踐履思想)을 발표코자 했으나 발기총회에 「만세 경모 한훤당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알고자 붓을 들었다. 아동방십팔현 중에서도 조선조 오현 가운데 수위(首位)이신 한훤당 선생은 조선조 성리학 사상(史上) 어떠한 위상을 갖고 있었는지 그 경개(梗槩)를 소개코자 한다.
본 론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은 단종 2년 갑술(1454년) 5월25일 이른 새벽 서울시 중구 정릉동(貞陵洞)(지금의 덕수궁 근처) 사제(私第)에서 태어나 전남 순천 유배지에서 연산군 10년(1504년)에 유명(幽明)을 달리하였으니 향년 51세로서 지명(知命)을 갓 넘겨 그 웅장했던 학자의 지기(志氣)를 다 펴지도 못하고 연세(捐世)하고 말았다. 아명은 효동(孝童)이었으니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매불기(豪邁不羈)하였고, 영기(英氣)가 출중(出衆)하여 절절발분(折節發憤)하였다. 선생은 황해도 서흥(瑞興)김씨로서 19세에 합천에 사는 박씨댁으로 결혼하였고,그 처가댁 근처 시냇물가에 서재를 짓고 이름하여 한훤당(寒暄堂)이라 하였다. 이것이 후일에 선생의 아호(雅號)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후일에 현풍(玄風)으로 와서 살았는데 이것은 선생의 증조 참의공(參議公) 세장지지(世葬之地) 때문의 일인 즉 선생의 증조모가 현풍 곽씨로서 공조전서(工曹典書) 곽주(郭珠) 의 따님이었다는 사실이다. 선생은 21세 때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선생 문하에서 소학(小學)을 공부 하고, 선생의「독소학시」중에 「소학서중오작비」(小學書中悟昨非)라 한 바가 있다. 당시 세인이 그 언젠가 정사를 물으면 「소학동자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 수 있겠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오로지 절문근사(切問近思)하였기에 1480년(25세 때 성종 1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척불(斥佛)을 상소하였으며 그로부터 15년 후인 1494년 은일(隱逸)로 추천되어 남부참봉(南部參奉)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등을 거쳐 그로부터 4년 후인 44세 때(1947-연산군 3년)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인 1498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 45세 때 저 희천 땅에서 만난 제자가 바로 나이 17세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이었다. 여기서 잠시 한훤당 선생과 그의 문제자 정암선생의 사이에 예로부터 「조선명현록」에 전하여 온 일화(逸話)를 보면 이러하다 한훤당 선생이 제수감으로 쓰기 위하여 어느 날 꿩을 잡아 앞 뜰에 펼쳐 놓아 햇볕에 마르게 하고 있었는데 지키는 자가 각근(恪勤)하지 못하여 고양이가 훔쳐 가버리게 되었다 선생은 성기(盛氣)에 넘쳐 수자(守者)를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 정암선생이 말하였다. 「봉선지성(奉先之誠)이 수절(雖切)이나 군자(君子) 사기지간(辭氣之間)에 불가불성찰(不可不省察)이오이다 하였다. 이 때에 선생은 정암의 손을 붙잡고 사과하면서 내 또한 후회하고 있었던 차에 그대의 말이 또 다시 이와 같으니 나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부끄럽구나. 「차녀내오사(且汝乃吾師)요, 오비여사(吾非汝師)」라 했다는 것이다. 저 당나라 한퇴지 사설(師說)에도 이러한 말이 있다 「제자불필불여사」(弟子不必不如師)요, 「사불필현어제자」(師不必賢於弟子)라고 했듯이 스승이라고 해도 제자에게 배울것이 있다고 고백했던 그 모습은 그 제자에게 또 다른 훈도(薰陶)의 빛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당송팔대가의 한 분인 한 퇴지도 사설 첫 머리에 「고지학자필유사」(古之學者必有師)하니 사자소이전도수업해야혹야(師者所以傳道授業解惑也)라 인비생이지지자(人非生而知之者)에 숙능무혹(孰能無惑)이리요 혹이불능종사(惑而不能從師)에 기위혹야(其爲惑也) 종불해의(終不解矣)라 한 데서 스승과 제자가 어떠한 관계인지 잘 말하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조선명현록」경성(京城) 광동서국인행(光東書局印行) <1925년>에서 한훤당 선생을 보면 이러하다.「기장(旣長)에 발분학문(發憤學文)하니 천자심고(天資甚高)하고 덕기혼후(德器渾厚)라 조종 김종직(早從金宗直)할새 평생에 이소학으로 율신(律身)하며 이고현(以古賢)으로 위준칙(爲準則)하야 독지역학(篤志力學)에 진실천리(眞實踐履)하여 여 일두 정여창(與 一蠹 鄭汝昌) 지동도합(志同道合)하여 창명성리지학에 훈적후생(訓迪後生)하여 불이방의이혹지(不以謗議而或止)하고 의연특립(毅然特立)하니 일시학자(一時學者) 존여산두(尊如山斗)더라 하였다.
남효온(南孝溫)과는 삼십여년의 지기(知己)로서 탁마보인(琢磨輔仁)하고 존심지경(存心持敬)하며 진심천리(眞心踐履)하여 온 것이다. 이렇듯 태산북두의 선생도 운을 만나지 못하여 평안북도 희천땅 적소(謫所)에서 순천으로 이배(移配)되던 때가 47세 되던 해요 그로부터 4년 후 순천(順天)땅에서 1504년 갑자사화로 사사(賜死)케 된 것이다. 선생은 34세 때에 부친상을 당하고 여묘(廬墓) 3년을 마치고도 지성으로 예제(禮制)를 다 하였다. 선생의 모부인께서 예도가 엄격하였으므로 선생은 효경(孝敬)을 다하여 모시었고 아래로는 비복(婢僕)에게도 내외를 다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선생이 생존시에 사회적인 배경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였으니 무오사화는 연산군(燕山君)4년 무오(戊午) 년 7월 사옥(史獄)이 일어나게 되어 그의 스승 점필재(佔畢齋) 선생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찬(撰)했다는 죄목을 씌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하게 되었고, 선생은 문제자(門弟子)라는 이유 때문에 적소에서 인생무상을 되뇌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조선조 역사의 참화로서 무갑기을(戊甲己乙)의 사대사화의 갑자사화시 (1504년) 9월에 사화(士禍)가 일어나게 되었고 그 해 10월 초하루에 천추(千秋)의 한(恨)을 뿌리게 된 것이다. 선생의 45세 때 희천 땅과 만년의 순천땅은 다 같은 적소(謫所)였다.
선생은 사약(賜藥)이 도래하자 의연자적(毅然自適)하였으니 그날 따라 목욕관때(沐浴冠帶)하고 신색(神色)은 태연자약하였으며 수염을 손으로 다듬어 입에다 물고 나아가 임금을 향하여 숙배(肅拜)하고 임종을 맞았으니 살아서 반 백년이요 죽어서 천년만년의 세월을 낳게 된 것이다. 선생은 적소생활 7년 만에 고뇌(苦惱)하시다가 참경(慘景)을 당한 다음 옛날 우거(寓居)하셨던 현풍(玄風) 오설리(烏舌里) 노포동(老圃洞) 선영(先塋)아래에 모셔지게 되었다.
조선조 역사의 인물로서 한훤당 선생은 1507년에 원죄(寃罪)가 사면(赦免)되어 도승지(都承旨)로 증직되었고 1517년(中宗12년)에 특증우의정(特贈右議政)하고 1575(宣祖8년)에 우의정 겸 영경연감 춘추관사로 증직되면서 문경(文敬)의 시호(諡號)가 내려진 것이다 문(文)은 도덕박문(道德博文)이요 경은 숙야경의(夙夜敬義)를 뜻한 것이라 하겠다. 그 후 광해(光海) 2년 1610년에 문묘(文廟)에 오위(五位)중에서 수위(首位)에 앉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현의 문묘배향(文廟配享)이란 무엇인가? 1610년 9월 광해군의 명(命)으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이렇게 조선조 성리학의 오현으로 추앙되었다. 여기서 성리학은 순수이학(純粹理學)과 실천도학(實踐道學)을 함께 말한 것이다. 이 문묘종사(文廟從祀)의 문제는 이미 광해군 이전 선대(先代)로서 중종 선조 때부터 거론되었으니 1517년(丁丑)에 영의정 정광필(領議政 鄭光弼)등의 상소와 홍문관 부제학 김정(金淨)등의 종사문묘상청 및 관학(館學) 유생들이 김굉필 선생과 정여창 선생의 포장(褒獎)을 청하는 장계(狀啓)를 올려 한훤당 선생과 일두선생은 다함께 우의정으로 추증받게 하였다. 그후 1568년 (선조1년)에 성균관 유생들에 의하여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의 문묘배향이 건의 되었으니 일찍부터 봉사(奉祀)할 것을 주창한 데에 기인한 바가 컸었기 때문에 43년만인 1610년(광해군 2년)에 그 종사운동의 결실을 본 것이다. 이때에 율곡은 유독 조광조를 추켜세웠고 래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은 이언적과 이황의 종사문제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함에 이르러 성균관 유생들은 래암을 청금록(靑衿錄:유림목)에서 삭제하는 등 격렬한 항의로 일단락을 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제 한훤당 철학의 ①본체론과 ②수양론을 약찰하자면 ①에 관해서는 그의 역저 「추호가병어태산부」(秋毫可並於泰山賦-326字)에서 만수일본(萬殊一本)과 일본만수(一本萬殊)를 살펴 보아야겠다. 「부천하지물(夫天下之物) 유리유분(有理有分) 이회만물이위일(理會萬物而爲一) 분만수혜(分萬殊兮) 불문(不紊)」이라 하였다. 새겨보면 「천하의 사물에는 일리(一理)가 있고 분수지리(分殊之理)가 있으니 일리는 만가지 것이 모여 하나가 된 것이요,분수지리라는 것은 만가지로 나뉘어져도 어지럽혀지지 않는다 」고 한 것이다. 생각하여 보면 보편질리로서 일리(一理)는 특수 개별자로서 천리가 인간 기질속에 타재함으로써 인성이 되므로 천리와 인성은 두 가닥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 것이라 하겠다. 우리의 기질지성속에 내재한 본연지리(本然之理)가 곧 본연지성이요, 본성이다. 인간성회복(人間性恢復) 이란 이 본성을 넓히고 확충하자는 것이다.여기서 잠시 이(理)와 기(氣)는 23글자요,성(性)과 이(理)는 34글자로 정의하여 놓은 학자가 다름아닌 한훤당 사후 1세대 후학으로서 태어난 율곡(1536~1584)이다 율곡은 그의 도우인 우계 (牛溪)(1535~1598)에게 37세요 38세로서 이기인도(理氣人道) 문답왕복서를 가지고 아홉차례나 묻고 답하게 된 것이다. 그 율곡의 스물세 글자는 「발한 것은 기요,발하게 한 것은 이(理) 이다.기가 아닌 즉 발하지 못하고 이가 아닌 즉 발할 바가 없도다」 (發之者 氣也 所以發者 理也 非氣則不能發 非理 則無所發)가 그것이요, 그 서른 네 글자는 「성이란 것은 이와 기가 합해진 것이다 대개 이가 기가운데에 있는 연후에 성이로다. 만약 그 (이가 )형질 속에 떨어져 있지 않다면 마땅히 이라고 할 것이요 성이라고 해서는 부당한 것이로다. (性者理氣之合也 蓋理在氣中然後爲性 若不在形質之中 則當謂之理 不當謂之性也)고 한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 성(性)이란 것은 우리의 생명이다. 일찍이 율곡이 그렇게도 경모(景慕)했던 정암도 「알성시책」(謁聖試策)에서 간곡한 성리학이 논의되고 있었으니 졸고 「정암 조광조의 철학사상으로써 서울대학교 전국철학자 대회에서 발표한바 있다.-1991.8」 이렇게 훤·두사림시대야말로 퇴고우율 성리학의 기조(基肇)되고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끝으로 졸고(拙稿)「한빙계(寒氷戒)에서 본 한훤당의 천리사상(踐履思想)」(대구가톨릭대 연구논문집 제50집 1995.2)을 해제 삼아 「한빙」을 풀어볼까 한다. 선생이 손수 써서 한빙계 18조목에 연의(衍義)까지 하여 놓았으니 옥계(玉溪) 반우형(潘佑亨)이 선생으로부터 받은 글이다 국역경행록에서 P393~P425로서 모두 22혈(頁)이다 한빙(寒氷)이란 말은 「순자(荀子)」에서 나온 말로서 청출어람이청어람(靑出於藍而靑於藍)이요, 빙수위지이한어수(氷水爲之而寒於水)에서 따온 말이었는데 옥계(玉溪)가 「제한빙계후」(題寒氷戒後)에서는 「빙출우수이한어수」(氷出于水而寒於水)라고 갖다 놓았다 선생이 굳이 「한빙」으로 한 것은 옥계가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그렇게 되려고 하거든 논어와 소학에서 증자의 이른바 「여림심연 여리박빙」(如臨深淵, 如履薄氷) 하라 했으며,「계신공구」(戒愼恐懼)하고 인의예지(仁義禮智), 효제충신(孝悌忠臣)할 적에 사무사무불경(思無邪毋不敬)을 잊지 말아야 비로소 성인자기(聖人自期)할 수 있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결 론
앞에서 「여림심연」과 「여리박빙」은 그 출처가 논어라고 하였지만 실은 시경 소아(小雅) 편(篇) 절민장(節旻章)에서 나온 말이다. 독신호학(篤信好學) 할 적에 깊은 연못가를 거닐 듯 살얼음을 밟고 지나가듯이 조리(操履;마음으로 지키는 지조(志操), 몸으로 행하는 행실)하되 수진지만(守眞志滿)한 태세로 자아확충을 잠시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한훤당의 한빙계를 통해서 잠심이거(潛心以居) 체인(體認)해야 할 것이다.이제 그 18가지 조목을 나열코자 한다. ①동정유상(動靜有常) ②정심솔성(正心率性) ③정관위좌(正冠危坐)④심척선불(深斥仙佛) ⑤통절구습(痛絶舊習) ⑥질욕징분(窒慾懲忿 ) ⑦지명돈인(知命敦仁) ⑧안빈수분(安貧守分) ⑨거사종검(去奢從儉 ⑩일신공부(日新工夫) ⑪독서궁리(讀書窮理) ⑫불망언(不妄言)⑬주일불이(主一不二) ⑭극념극근(克念克勤) ⑮지언(知言) ⑯ 지기(知幾) ⑰ 신종여시(愼終如始) ⑱지경존성(持敬存誠) 이 그것이다 여기서 ⑱번은 맹자 소위 성자천지도야 사성자인지도야 (誠者天之道也 思誠者人之道也)가 곧 그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모두 참을 생각하는 길이 무엇인지 한 번 쯤 돌이켜 보아야 할 듯 하다.
2004년 2월 26일
성 교 진 전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출처] 생애와 사상|작성자 태잎
[출처]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생애와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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