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서정주 ‘선운사 동구’>
2007년 납회산행 때 갔던 선운사를 다시 간다. 그때 보지 못했던 동백꽃을 볼 기대
에 부풀었는데 이번에도 동백꽃은 너무 일러 피지 않았다. 서정주 선생은 동백꽃을
못 봤어도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을 들으시며 얼마나 푸근했을까. 박식
하기가 '우리 시대 최고의 지식인(지식 in)'을 무색케 하는 김고문께서 아침부터
서정주 선생과 육자배기 얘기를 한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
배기 가락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선운사 동구의 풍경을
이렇게 절절하게 읊은 서정주 시인을 친일파로 낙인찍는 것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이다. 세월이 흐르고 인정이 바뀌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모든 것이
멋없이 팍팍한 쪽으로만 바뀌는 것이 허전하고 슬프다.
봄꽃과 연두색 새싹들이 다투어 생명의 찬란함을 발산하는데 웬 청승이냐구요?
사실은 동백꽃도 못 보고 육자배기도 못 들었지만 너무나 즐거운 산행이었습니다.
유여사가 체력을 회복하고 재 데뷔하셨다. 반갑고 고마워 모두 한 번씩 안아주고
싶은 눈치다. 선운사를 가면 빠질 수 없는 것이 풍천장어와 복분자술. 그런데
문제는 값이 좀 비싸다는 김고문의 말에 회장님이 나선다. 동호회 보조금 지급
방식이 바뀐 것을 놓고 잠시 논평이 있었지만 결론은 이렇다. 17산악회는 보조금
같은 사소한 일에 개의치 않고 우리의 전문성을 살려 굳건히 전문산악인으로서의
갈 길을 갈 것이다. 박수!!!
오랜만에 하는 장거리 버스 여행이라 버스 안은 온갖 화제가 만발한다. 독일에서
온 외손녀 보느라 파김치가 됐다는 젬마여사 소식에 운봉거사(징기스칸 본인이
이제 나이도 있고 해서 호를 운봉으로 바꿨다니 이제부터는 운봉거사로 부릅니다)
가 읊는다.
“‘딸이 아프면 가슴이 아프고 며느리가 아프면 골치가 아프다.’ 요즘 애들은
과외하느라 책을 안 읽어 문제다. 나는 중2때 수업시간에 ‘채털레이부인의 사랑’
읽다 걸려 교무실에 끌려가 오가는 모든 선생님들한테 쥐어 박혔는데.”
운봉 대단히 조숙했구나. 요즘은 사법연수원생도 수료 후 좋은 자리 가려고
과외 한단다. 창밖을 내다보던 김고문이 새파란 보리밭을 보며 “우리 어릴 땐
홍어 애를 넣고 보리싹국을 끓여 먹었는데...” 아쉬워한다. 이념은 바꿔도
식성은 못 바꾼다는데 어릴 때 먹었던 맛있는 것들도 점점 사라져간다.
10시 20분 선운사 주차장. 역시 사람이 많다. 김고문이 추천하는 코스는 지난번
코스와는 반대방향이다. 유여사가 무리 않고 같이 갈 수 있도록 도솔암에서
용문굴을 거쳐 수리봉(도솔산 정상)까지 갔다 선운사로 내려오는 코스다.
10시 25분 출발, 우거진 숲과 맑은 시냇물, 여기저기 핀 하얀 매화, 시야를 압도
하며 둘러선 기암괴석들...
도솔암을 거쳐 12시 용문굴 도착. 구멍이 뻥 뚫린 아치 모양의 거대한 바위가 두 개
있다. 굴 앞 평상에서 점심을 먹는다. 컨디션이 좋은 유여사가 걱정하는 남편의
하산권유를 무시하고 계속 가겠다고 한다. 잠시 후 올라선 능선에서의 조망이
환상적이다. 웅장한 천마봉과 낙조대. 멀리 보이는 고양이 귀를 닮은 봉우리도
신기하다. 소슬바람과 보라색 제비꽃으로 뒤덮인 폭신한 오솔길에 유여사가 탄성을
지르며 기뻐하니 덩달아 즐겁다. 수리봉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김고문이 수리봉
가봐야 여기보다 더 좋은 전망도 없으니 쇼트 컷으로 내려가 선암사 구경이나
잘하자 한다. 1시 30분, 長沙松 뒤쪽으로 내려와 2시 30분 선운사. 조금도 힘들지
않은 흐뭇한 4시간 산행이었다.
선운사의 여러 보물을 구경하고 萬歲樓에서 모든 방문객에게 무료로 대접하는
차를 마신다. 만세루 넓은 대청마루에 차상이 미리 차려져 있고 뜨거운 물도
준비돼 있어 각자 알아서 차를 다려 마신 후 다음 사람을 위해 茶器 설거지까지
하도록 되어 있다. 장지문을 걷어 올린 커다란 창밖으로 들어오는 풍경이 액자
속의 그림 같다. 김회장이 손수 차를 준비해 접대한다. 선운사 차밭에서 나온
작설차의 향기가 그윽하다. 그런데 차애비(차문화회 이사인 차영민여사의
남편인 김고문을 지칭)는 어디 가서 안 보이냐. 사진 찍느라 바쁘시다. 작설차
이제 그만 마시고 곡차도 좀 마시자.
주차장 근처에 마침 해수탕 사우나가 있다. 緣木求魚도 아니고 산중에 웬 해수탕?
바다에서 바닷물을 실어온단다. 요즘 방사능에 소금이 좋다고 난리라니 일단
해수목욕 해보자. 목욕하고 아침에 들어올 때 미리 예약한 풍천장어 먹으러 간다.
서정주 시인은 막걸리를 마시며 육자배기를 들었는데 우리는 ‘몸에 좋다’는 장어
안주로 복분자술을 마시며 스마트폰과 트위터와 4.27 재보선 얘기를 한다.
세상은 왜 이리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바뀌는가. 막걸릿집 여자가 목쉰 소리로
부르는 육자배기는 이제 어디가도 들을 수 없다. 푸짐한 장어에 복분자주의 취기가
도도하다. 오랜만에 휴게소에서 통신병이 유여사 환영 아이스케키도 산다.
다음 산행은 마침 진달래기 만발할 때니 북한산 진달래능선으로 진달래 보러
갑니다. 소월의 시 한 수씩 외워 오십시오.
참가자(10명): 김숭자(장원찬), 김영길(유수자), 김윤기, 김종남, 김택열,
박정수(노순옥), 한영구(노순옥 기록)
첫댓글 산 능선에서 바라본 높이 300~400m 내외의 산봉우리들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마음과 몸이 젊어졌습니다. 늦깎이 등산객 선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운봉거사님 효자 덕에 우리 모두 게르마늄계란을 즐겼읍니다. 감사합니다.
노기자님 산행 후기 올리시느라 수고 많이 하셨읍니다. 감사합니다.
운봉거사님이 직접 조리해 와 나눠주신 게르마늄 계란 얘기를 깜빡 잊고 빠트렸군요. (중증 치매 진행 중, 입원가료를 요함.) 게르마늄 찜기에 쪘다는데 갈색에 노른자까지 촉촉해 소금 없이도 너무나 맛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오실때마다 꼭 제공하시겠다고 하셨으니 이번에 맛보지 못하신 분들 다음에도 기회가 많습니다. --노순옥
진달래능선에서 맛 불수있었으면 좋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