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성남시 단대리
1972년 7월 4일에 남북한은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 무렵 남북조절위원회 회의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개최되었었다. 그것 말고도 1971년 8월에 한국 적십자사는 북한 적십자사에 남북 이산가족 찾기의 회담을 제의하였고 북한 적십자사는 이를 수락하였으며, 이에 따라 예비회담이 판문점에서 개최되었다. 남북 적십자 회담의 제1차 본회의는 8월 30일에 평양에서 개최되었고, 제2차 본회의는 9월 13일에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나는 그 무렵 쉐라톤 워커힐이라는 호텔을 처음 알았다. 미국 정부는 처음에는 5.16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이에 5.16 주역이었던 김종필씨는 미국 정부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내놓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주한미군과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위락시설을 갖춘 대규모 호텔 건설'이었다. 위락시설을 만들면 주로 일본으로 휴가 가는 주한미군이 서울에서 휴가를 보내며 돈을 쓰게 하는 동시에 군사정권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이에 따라 1961년 하반기 대규모 호텔을 조성할 곳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한강변 별장터가 선정됐다. 부지 면적은 19만1천여 평. 李대통령은 가끔 이곳에 들러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울창한 아차산을 등진 이곳은 한강의 흐름과 넓은 들녘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이었다. 새 호텔에는 '워커힐(Walker Hill)'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주한미군과 유엔군의 휴가 장병을 유치하기 위해 짓는 호텔인 만큼 한국전쟁 중 의정부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다. 호텔과 함께 들어설 빌라의 이름도 더글러스(맥아더).머슈즈(리지웨이) 등 미군이나 유엔군 장군의 이름을 붙였다.
비밀리에 추진되던 워커힐 건립 계획은 62년 봄 일본의 주간지들이 앞 다퉈 "한국의 군사정권이 미군 장병을 끌어들이기 위해 술과 여자와 도박판 위주의 위락시설을 짓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알려졌다. 미국의 AP.뉴스위크 등도 62년 10월 "이 시설은 매춘굴. 카지노. 미인 호스티스 등을 갖추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미국 부인단체가 유엔군 사령부와 한국 정부에 강력 항의하기도 했다. 나는 멋있는 호텔 덕분에 북한 기자들이 기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들은 언덕 편에 널린 판자촌만 찍어댔다고 신문은 보도를 했고 나는 그 판자촌 때문 속상했었다. 급기야 판자촌에 적개심까지 갖은 나였으니 나와 같은 존재가 바로 맹목적 애국주의자가 아닐까.
두 명의 지식인의 삶의 궤적을 그린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라는 소설. 집과 가족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인간다운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독자들에게 묻는 작품이다. 내 집 마련이라는 소시민의 욕구 성취와 그로 인한 가진 자로서의 위무 그리고 고단한 인생의 역경 속에서 어렵사리 마련한 집이라는 공간의 강탈에 대한 자괴와 체념 등이 '오선생'과 '권씨'의 담담한 대화 속에 자리하고 있다. 도회사람들의 소시민적 욕망과 그런 욕망의 틈바구니에서 가족을 건사하지 못한 한 지식인의 체념이 각각 후회와 실종으로 마감되면서 아직도 진행형이라 할 수 있는 두 부류의 인간군상은 각각 사람이 주위의 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모하게 되는가를 증명하가도 한다. ‘단대리’에서 봇물처럼 번진 도시빈민운동은 윤흥길의 작품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참담한 고생 끝에 성남에서는 기중 고급 주택가로 알려진 시청 뒷산 은행주택을 산 다음 자그마치 1백평 대지 위에 세운 슬라브집의 안주인으로서 아내가 전세 입주자에게 내세운 조건은 사실 그리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첫째, 자녀가 둘 이하라야 한다. 둘째, 집안에서는 언제나 정숙을 유지해야 한다. 이상 두 가지 조건만 지켜준다면 여타의 일, 예컨대 전열기의 사용이나 담요의 물빨래 같은 것은 야박하게 굴지 않을 것이며 오물 수거료나 야경비 따위 제반 공과금 지불에 억울하지 않게시리 선처할 생각이었다. 자녀가 반드시 둘을 넘어서는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아내가 복덕방 영감을 앞세우고 셋방을 구하러 다니면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소리였고, 때문에 그 소리가 가슴에 사무쳐서 아내는 변변한 집주인이라면 당연히 그런 조건을 내세우는 것이려니 믿고 있었다. 집안에선 왜 정숙을 유지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돈을 못 버는 이유가 순전히 공부에 있고 공부는 평생을 계속해야만 하는 것으로 폼을 잡아 온 자칭 선비 남편을 의식한 조치였다. 아내는 꿈에 그리던 내 집을 장만했는데도 여전히 남의 식구들을 둘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슬퍼했다. 하지만 그것은 남의 식구를 둠으로써 주인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기쁨을 다분히 염두에 둔 그런 슬픔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더욱 분명한 것은, 20평 부락에 사는 사람과 1백평 부락에 사는 사람과의 차이였다. 그것은 바로 20평의 마음과 1백 평의 마음의 격차였던 것이다. 시청 뒤로 이사한 그 이후부터 아내에겐 누구하고 현주소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기회마다 언필칭 우리가 은행주택에 살고 있음을 힘주어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77 제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서울, 문학사상사, 1983년 1월, 333~334쪽
이 소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대의 도시빈민 소요사태로 불리는 1971년 8월의 광주단지 도시빈민 소요사건과 그 소용돌이 속에서 고달프게 살아가는 삶을 묘사한 작품이다. 성남시 단대리, 정부는 1966~68년 도시 미화와 정비라는 명목으로 청개천 복개공사를 결정하고 무허가 판자촌 일소 대책을 밀어붙였다. 서울 전역 판자촌을 대책 없이 강제 철거했다. 무려 4만3천동이나. 그리고 철거민 50만 명(후에 35만 명으로 변경)을 수용해 정착시킬 대규모 주택단지 개발계획을 세웠다. 그 후보지로 서울 중심부에서 반경 20Km에 위치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을 선정하여 이를 ‘광주대단지’라 명명하였다.
이 지역에 경기도 광주군 성남출장소를 설치했다. 광주대단지 조성계획의 경우도 발표 당시에는 집 없는 빈민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안겨주었다. 1968년 당시 서울 시장이었던 김현옥의 서울시내 무허가 판자 집 정리사업의 일환으로 계획된 이 사업은 "시내 18만 채의 무허가 건물 중 우선 5만 채를 헐어 옮겨 수도 근교에 새로운 위성도시로 개발을 촉진해 나가겠다"는 구상 아래 1970년까지 3년 동안에 경기도 광주군의 약 200만평의 땅에 50만 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신도시를 개발하여 이곳에 불량주택 주민 약 55,650 세대 278,000명을 이주시킬 예정이었다.
그러나 신도시 개발 계획과는 달리 그 곳 산기슭 구릉지에 대충 나무만 베어내고 토지도 다듬지 않은 채 택지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1969년 5월 2일 첫 철거민 48세대 154명이 트럭으로 이곳에 실려 왔다. 이를 시발로 정부는 광주대단지에 연이어 철거민들을 이주시켰다. 이렇게 무모한 ‘선입주 후 건설’ 이주계획을 단행하며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진 철거민들에게 정부는 임시로 천막을 나누어 주었을 뿐이다. 그 뒤 정부는 청계천변과 영등포, 용산 등지의 철거민들을 대규모로 성남에 이주시켰다.
당시 1971년 8월까지 2년 남짓 동안 성남으로 강제 이주당해 온 철거민 수만 해도 약 12만 5천명에 달했다. 토지 분양과 일터를 약속하고 막무가내로 강제 이주시킨 것이다. 당시 상황은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청계천변에 살던 판자촌 사람들을 하루에 수천 명씩 차에 실어 정비도 안된 언덕에 실어다 놓았다. 기반시설은 텐트가 전부였다. 심지어 당시 상당수의 사람들은 하나의 텐트에서 두 가족 이상이 살 정도로 주거환경은 열악했다. 이렇다보니 천막촌도 극도로 과밀화되었다. 그 뒤 정부는 철거민들에게 천막 부지로 사용했던 20평씩의 땅을 평당 2000원 가격에 할부로 분양해주며 철거민 스스로 집을 짓도록 했다. 그래서 산기슭과 구릉지에 옹기종기 집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당시 철거민들은 도시계획이나 건축법과 아무 상관없이 말그대로 아무렇게나 집을 지었다. 서울 무허가 판자촌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산등성이 여기저기에 집을 짓고 물을 멀리서 길어다 먹으며 고단한 삶을 이어 오던 곳이 바로 40년 전의 성남이었다. 철거민들이 늘어나자 산등성이에 판자촌도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생활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공동변소의 오물은 넘쳐흐르고 비만 오면 배수가 안 돼 땅은 늘 질퍽거렸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사는 곳이었다. 수도․전기․전화․도로 등 사회기반시설이 계획량의 20%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제로 이주된 탓에 주민들의 불만은 시간이 갈수록 고조되어 갔다. 우선 일터를 요구하는 입주민들의 강한 불만과 교통편을 우선 제공해달라는 요구는 그대로 묵살되었다.
그 뒤 서울시 철거 이주민에게 우선 분양권이 주어진다는 계획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광주대단지에 가면 싼 땅값에 건축허가 없이도 집을 지을 수 있고, 입주권(딱지) 매입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기대에 부푼 서울 판자촌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광주단지로 이동을 하였다. 그러자 이에 곁들여 각지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서울시와는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광주단지 일대는 개발붐이 일어 땅값이 치솟기 시작했다. 투기도 가세했다. 처음에 광주대단지에 입주했던 철거민 중 상당수가 그들에게 입주권을 팔고 서울로 되돌아갔다.
이렇게 철거이주민의 분양권이 불법 전매되는 사태가 발생해 당시 불법 전매된 분양권으로 이주한 가구가 단지 내 2만 1,372가구의 약 30%에 달하는 6,343가구였다. 이러한 투기 바람은 정치권에도 책임이 있었다. 71년에는 대통령 선거(4월 27일), 국회의원 선거(5월 25일)가 있었다. 이 양대 선거에서 남발된 공약세례는 많은 빈민들을 대단지로 유혹해 들이는 자극제가 되었다.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은 광주대단지를 지상낙원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서슴지 않았다. 광주대단지뿐 아니라 주변 땅값까지 천정부지로 뛰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마자 땅값은 폭락했다.
그 무렵 성남 인구는 2년 남짓 기간에 15만 명에 육박했다. 정확히는 판자촌 철거민 21,372가구 101,325명 이외에 전매입주자 6,343가구 14,000여명, 공장 입주 및 유보지 매각 등에 따라 전입한 사람 2,950여 가구 13,660여명, 무작정 이주자 15,000여명 등 도합 144,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있었다. 선거열풍이 지나기를 기다려 서울시는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바로 다음날 분양 토지 전매행위 금지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전매입주자들에게 원래 약속했던 이주민 분양가의 4 ~ 8배에 해당하는 평당 8,000 ~ 1만 6,000원의 지가를 일시에 불입할 것을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그 땅은 서울시가 경기도로부터 평당 백 원에 산 땅이었다. 게다가 이주 초기 단지 내 주민들에게 부과된 과중한 각종 세금납부를 동시에 독촉하였다.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일거리조차 없는 지역에 내동댕이쳐진 주민들은 이제 자기 판자집조차 팔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철거민들은 막대한 분양금 일시납부 독촉 앞에 아연실색해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 이에 입주민들은 1971년 7월 17일 '광주대단지 토지불하가격 시정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수 차례의 진정 및 산발 시위에도 당국의 대책이 마련되지 않자, 8월 10일 최소 3만 최대 6만에 이르는 인파가 분양가격 인하와 세금면제를 요구하며 6시간 동안 광주대단지 전역을 장악했다.
“낮 12시10분께 난동자 30여명이 성남지서에 몰려가 몽둥이로 유리창을 부순 후 지서 안에 있던 경찰차를 길로 끌어내 불태웠다. 오후 1시께 10대, 20대 청소년 50여명이 시영버스를 뺏어 타고 지붕에 올라가 탄리천길을 달려 ‘서울로 가자’며 수진리 고개를 넘으려다 되돌아와 거리를 돌았다… 오후 3시반쯤 경찰이 최루탄을 쏘아 난동자들을 길에서 언덕 위로 몰자 500여명으로 줄어든 난동자들은 언덕 위에서 돌을 던지고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5시 반까지 대치했다.…”(경향신문 1971.8.11.)
오후 5시경 양택식 서울시장이 주민들의 요구를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약속해 일단락됐다. 이 사건은 해방 이후 최초의 대규모 도시 빈민 투쟁사건으로 주민과 경찰 100여명이 부상당했고 23명이 구속됐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광주대단지 사건을 도시폭동으로 간주하고 "主動者를 嚴斷에 處하라(1971년 8월 11일자 보고서 (보고번호 제71-458호, 보고관 정종택))"는 메모를 남겼다. 대중 봉기의 위험성을 인지한 대통령 및 정부는 민심 수습과 함께 난동자에 대한 조치를 중요한 문제로 제기했다. 이런 아비규환 조건 속에서 탄생한 도시가 바로 성남시다.
비가 내리던 그날, 성남-천호동(그 당시는 잠실 개발 이전)간 도로로 참외를 가득 싣고 가던 트럭이 빗길에 뒤집어지자, 굶주린 군중들이 모여들어 순식간에 도로 위에 굴러 흩어지던, 깨어지고 오물이 묻은 한 트럭분의 참외를 순식간에 먹어치운 상황을 전하는 당시의 신문 기사는 처절했던 시대의 슬픈 삽화로 남아 있다. 그 사건이 터진 그 다음 날 내무부는 광주대단지를 성남시로 승격시킨다고 발표했다. 1인당 3.6㎏의 구호 밀가루가 지급되었고, 대단지 개발을 위한 공장 건설, 1일 3,000명의 취업인원 확보, 상수도 건설 등의 후속대책이 잇달아 취해졌다.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판자촌 빈민들의 비참한 삶이 세상에 비로소 알려지게도 된 것이다.
당시 박형규 목사를 위시하여 권호경, 박창빈, 이해학, 김동완 등이 빈민문제에 몰두하였으며, 손학규, 허병섭, 이철용 등이 시국사건으로 수배 중 빈민문제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평생 ‘빈자의 벗’으로 삶을 산 제정구도 1972년 대학에서 제적당한 후 청계천변 판자촌에 들어가 판자촌 주민으로서 삶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직접 판자촌에 들어가 주민들과 함께 어울리며 신뢰를 획득한 후 교회를 중심으로 빈민들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끔 지원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1974년 청계천변과 송정동 주민 시위, 1977년 영동 철거민 사건, 1979년 해방촌 주민 농성 사건 등 빈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투쟁이 전개될 수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소설들, 황석영의 ‘객지’, ‘어둠의 자식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이 당시 청계천 판자촌을 포함한 도시 변두리 빈민과 광주대단지 이주민의 꿈과 좌절, 비애와 파열의 삶을 다룬 문학 작품들이다. 화려한 빛의 거리, 청계천의 영광의 뒤안길에 묻혀 있는 무지렁이 민초들의 절망과 한숨도 우리 역사의 한 골짜기로 똑똑히 기억해야할 것이다.
급속한 공업•산업•도시화는 거대한 도시빈민 주거를 만들었다. 서울의 청계천변과 창신동, 용두동, 봉천동 등에 널린 무허가 판잣집.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용산역 부근을 정리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불도저 시장 김현옥은 이를 충실히 이행했다. 별 대책도 강구하지 않은 채. 46년 전 광주가 묻는다. 국민을 개·돼지로 여기는 공직자가 이젠 사라졌는가. 담 하나를 두고 임대아파트에 살면 학급 배정까지 갈리는 사회, 아이들까지 계층을 나누는 우리는 지금 건강하다고 할 것이던가.
1.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내 어릴 적 가치관의 개념이나 의식이 명쾌하지 않았던 무렵 ‘직업에 귀천이 없다’란 표현만큼 혼란을 촉발한 글귀도 없다. 난 지금도 그 표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구심을 갖는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직업에는 반드시 귀천이 있으며 사회 속에는 번듯한 아랫목 자리가 존재한다하는 의미에 귀가 기운다.제목부터가 묘해서 그 시절 단번에 읽어 내렸던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란 중편소설이 오늘 문득 떠올라 나를 다시 휘젓는다.
나는 그 소설을 연상하면 자연스레 변두리란 말이 떠오르고 그 시절의 안양유원지가 생각난다. 내 어릴 적 서울사람들 구경한다고 기웃대던 안양유원지엔 관악산 물줄기가 쏟아져 내려오는 계곡을 차곡차곡 막아서 만년풀이니 대형풀이니 이름을 붙여 찾아오는 서울손님을 맞이했다.
정작 안양촌놈들은 제대로 생긴 푸른 물통에 발 한번 못 넣어 보고 돈 한 푼 안내는 맨 아래에 위치한 그때 말로 자유풀이라 불리는 똥물에서 삼각팬티차림으로 놀곤 했었는데 이를테면 자유 풀 같은 언저리에서 놀던 내 동심의 추억이 나이 들어 변두리란 단어와 용케도 매칭이 되어 그런 연상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가 글 속에 산 곳은 서울의 변두리 70년대의 성남이란 동네이다. 그 글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되어진다.
1인칭 관찰의 주인공 나는 20평짜리 주택에 세 들어 사는 동안, 가난한 이웃들이 보여 준 '선생 댁'에 대한 동경과 지나친 관심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또, 몇 푼 안 되는 과자 부스러기로 가난한 애들에게 못된 일을 시키는 아들의 비뚤어진 행동이 걱정되어 무리하게 성남의 고급 주택가에 집을 마련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재정상의 무리를 다소나마 메워 볼 생각으로 방을 하나 세놓게 되었는데, 권씨 가족이 이사를 왔다. 그것도 전세금 20만 원 중 10만 원은 아예 내지도 않았고, 게다가 두 명의 자식 외에 뱃속에 또 한 명이 자라고 있었다.출판사에 다니던 권씨는 집 장만을 해 볼 생각에 철거민 입주권을 얻어 광주 대단지에 20평을 분양받았으나, 땅값·세금 등을 감당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소요를 일으키게 되었는데 권씨가 이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징역을 살다가 나왔다는 것이다.그는 가난한 살림에도 자신의 구두만은 소중하고 깨끗하게 닦는 버릇이 있었다. 얼마 후 권씨 아내가 애를 순산하지 못해 수술을 받을 처지가 되었다. 권씨가 '나'에게 수술 비용을 빌려 달라고 절박하게 부탁했으나 '나'는 그것을 거절한다. 그러나 뒤늦게 자신의 이중성을 뉘우친 '나'는 권씨 아내가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권씨는 그날 밤 '나'의 집에 강도로 침입했다. '나'는 그가 권씨임을 알아차렸고 되도록 그를 안심시키는 쪽으로 행동했으나 정체가 탄로 난 것을 안 권씨는, "그 따위 이웃은 없다는 걸 난 똑똑히 봤어! 난 이제 아무도 안 믿어!" 하면서 사라져 버린다. 아홉 켤레의 구두만 남긴 채...
작가는 도시 빈민의 소요사건의 주모자로 옥살이를 한 소시민이 지식인이란 자부심에 매달려 무능력의 길을 걷고 마는 소외된 변두리 인생의 어려운 삶을 그려내고 있다.비록 몸은 변두리에서 살지만 마음은 변두리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애써 의식 속에 가두려하는 소시민의 심리를 작가는 아프게 나타내고자 했다. 그 사내에게 있어서 구두는 가고픈 마음의 길에 이르는 작은 문이다. 검은 세단에서 내리는 모습도 호사한 모습으로 폼을 재는 거만도 모두 그 구두에서 출발한다.
닦고 닦으면서 현실을 부정한다.
닦고 닦으면서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현실을 보기 좋게 걷어찬다.
외면한 세상이 미웠다.
세상이 나를 그 지경으로 몰고 간 것이다.
나의 죄는 세상이 반이다.
나의 진실은 저 구두가 알 것이다.
그가 경찰서에 가 내뱉을 말이다.
소시민의 심리와 고상한 의식의 갈림으로서 작가는 은연중 숨 막히는 돈의 동반적 실체를 보여준다. 그는 급변하는 산업사회 속에서 먹이사냥꾼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천박한 휴머니스트로 천식되어가는 인간들의 자화상을 그려 내었다.분명 그의 글 속엔 무직과 선생으로 대조 되었을 뿐 직업의 귀천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의 글은 ‘천한 직업은 없다. 다만 천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는 프랑스 속담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글은 분명 천박과 고상으로서 대비되고 혼돈되어 직업은 귀천이 있다하는 착잡한 잔상과 헛인식의 종착역같은 변두리로 몰려들 것 같은 착각을 강하게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우리는 그때그때의 경우에 맞춰 천박한 휴머니스트로 존재하곤 한다. 때로는 얄팍한 지식을 밑천삼아 철저한 준비의식을 말하고 투철한 사회성을 강요하며 지식 그 자체의 위선과 이중성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과감히 토출하며 사회계급의 한 계단에 서 있음을 스스로 만지작거린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변두리로 내 몰리면서 직업의 귀천을 만들고 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천박한 자본주의 아래 변두리에 처한 소시민의 갈등이 메스껍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차라리 따스했다고 자문을 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어느덧 시대는 바뀌어 그 정도의 비아냥과 반성으론 꺼리도 안 되는 이른바 고상하면서도 철두철미한 프로의 휴머니스트가 쉽게 등장하였기 때문은 아닐까. 명문들은 선진의 시민권을 유지하기 위해 년에 한번은 지구 끝을 구경하고 출생 또한 지구 끝이다. 사회 정의는 물론 양심은 이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돈에 굶주린 난폭한 심성은 날로 뜨악하여 우주만치 멀리 가버렸고 횡행한 부패와 부조리의 액수는 천문학적인 세상이다. 지금 아홉 켤레의 구두가 남은 성남 옆엔 분당이라는 도시가 같이 서있다. 지금은 한 동네라 칭하지만 도시의 풍기는 뉘앙스가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분명 사고의 어눌함이고 변두리 발상일 것인데 심적 귀천이 추적추적 기어코 따라나서고 만다. 그간 작가랍시고 어디서든 하다못해 집에서도 이를 밑천삼아 따로 대접받기를 바랐던 나는 분명 변두리 태생이 맞고 그와 다를 바 없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자칭 지성인이 어디 이 세상에 한 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