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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는 성종의 생모이자 폐비윤씨의 시어머니.
연산군은 성종의 적자이자, 폐비윤씨의 친아들이었다.
왕위에 오른 연산군과 인수대비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게 한.,인수대비.
왕위에 오르고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된 연산군.
연산군에게 인수대비의 존재는.,친할머니이자 원수.
한명회와 사둔을 맺고 권신들과 손잡고
친아들인 성종을 왕위에 등극시킨.,인수대비.
그 덕분에 성종의 적자로서 왕위에 오른.,연산군.
인수대비와 연산군은 애증(愛憎)의 관계.
권신정치의 수장격인 대왕대비 인수대비.
성종 대를 이어 왕권정치 수호자였던.,연산군.
인수대비도 죽고 연산군도 죽는 처절한 정권다툼.
'인수대비 vs 연산군'
권신세력 vs 왕권세력.
구데타 세력 승리로 마감.
....................
....................
조선왕조 519년 역사는 왕권과 권신 간 대립으로 점철.
왕권이 강화되면, 권신 세력이 이를 뒤엎고 정권을 장악.
조선시대 27왕들 중에서 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 & 광해군.
조선시대 권신 통치 조정에서는
왕을 통치자 군주로 여기지 않았고
정치권을 조율하는 중재자로만 여겼다.
반면, 왕권이 강화된 조정에서는
왕을 훈구파 세력 우두머리 정도로 여겼고
신권 추구 사림파에게 왕권 세력은., 견제의 대상.
왕권으로 절대 권력을 독점하려는 왕.
자신들이 속한 정당 이념에 맞지 않는 왕.
정변 또는 반정을 통해서 제거하기도 하였다.
절대 권력은 왕의 고유 특권이 아니라는 유교관.
조선을 창업한 태조와 정도전은 개혁을 위한 혁명동지.
조선은 유교관 사대부들이 중심인 국가라는 의식이 강했다.
고려시대는 국가 통치관이 불교였지만
조선시대 통치관은 개국 이념에 따라 유교.
하여, 왕실 내 불당 설치도 극력 반발한.,유림.
정업원 기존 제도까지 폐지와 부활의 반복.
조선시대 행하여진 억불정책 및 폐불정책은
대부분 왕권을 넘어섰던, 신권에 의한 소산물.
조정의 대소 신료들은 물론이고
초야에 묻혀 지내는 유림, 사림파까지
왕의 권력 독점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던 것.
즉, 오늘날 대통령 중심제보다는
내각중심제에 가까웠던.,조선시대.
신하가 군주를 제거할 경우에는 명분이 필요한 법.
그 와중에서 폐외된 왕을 역사는 '군'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그러한 왕이 연산군과 광해군이었던 것이다.
연산군과 광해군의 공통점은
성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지만
어릴 때 이미 생모를 잃은.,군주.
즉, 권좌를 지켜줄 처가 세력이 취약.
그러면서도, 왕권 정치를 강화하려던.,왕.
결국, 왕의 권좌에서 쫓겨나 폐위되었던.,군주.
반면,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자을산군)은
왕실 내 서열로 보면 권좌에 오르기 어려운 여건
그러나, 장인 한명회가 있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아울러, 생모 인수대비가 있어 권좌를 지킬 수 있었다.
권신 한명회와 인수대비의 혼인동맹.
즉, 권신세력과 왕실 척실 세력의 결탁.
이를 역사는 '훈구파 공신세력'이라 칭한다.
훈구파 공신세력은 단종을 폐위 시키고
수양대군을 세조로 등극하게 한.,공신세력.
인수대비는
성종의 생모이자
연산군의 할머니이다.
연산군 생모인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내린 인물이.,인수대비.
그로 인해 일대 파란을 겪은 왕실.
...........폐비윤씨 사사사건..........
윤씨의 아버지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어머니는 신씨(申氏).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성종 4) 후궁 간택 후, 숙의(淑儀)에 봉.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1476년 왕비로 책봉되었고
그해 세자 융(연산군)을 낳았다.
왕비가 된뒤 투기가 심해 부덕한 일을 자주 일으켰다.
1477년 후궁을 독살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아 빈으로 강등.
1479년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
그해, 여러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비되어 친정으로 쫓겨나 바깥 세상과의
모든 접촉이 금지되었고, 이 지경에 이르자
과거를 뉘우치고 부덕을 쌓는 등 근신하였다.
1482년 일부 조정 신료들에 의하여
세자의 어머니를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이어져 정치 문제로 확대.
그러나, 폐비를 미워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정희왕후, 소혜왕후(昭惠王后)는 폐비를 혐오했고,
후궁들인 숙의엄씨, 숙용정씨 등은 폐비를 더욱 모함.
그런데, 폐비의 혈육인 세자가 점점 성장하자
인심도 점차 폐비를 동정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에, 성종은 조정에서 폐비 윤씨의 문제를 논의.
여기에서 성종은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게 되었고.
좌승지 이세좌에게 사사하게 하였다.
이세좌(1445-1504)는 본관이 광주이고, 자는 맹언.
문과 급제후 승지에 올랐다가 훗날, 판서까지 된 인물.
폐비 윤씨를 사사 후, 저녁에 귀가하자 그의 부인이 물었다.
"조정에서의 폐비 처형 논의는 어찌되었습니까?"
"부득이 내가 사약을 전달하는 사명을 맡게 되었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며 탄식.
"아! 슬프도다! 우리 자손도 살아 남는 이가 없겠구려.
죄없이 죽음을 당했는데, 어찌 훗날에 보복함이 없겠오."
훗날,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이세좌는 한양 동쪽 저자거리에서 참형.
그의 아들 수정 또한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그당시 영상이었던 허종(1434-1494).
세조 3년 문과급제 후, 34세에 이시애를 토벌.
그가 폐비윤씨 사사 회의에 참석차 집을 나선 후,
그날은 큰누나 집에 들러서 그 일에 관해 사전 협의.
그의 큰누나는 폐비윤씨 사사에 부당함을 토로.
"비유하자면 민가에서 늙은 종이 집주인의 명령을
거역하기 어려워 함께 주인마님을 죽이는 것과 같으니,
후일 그 아들이 가통을 계승할때 어찌 화환이 없겠는가?"
허종이 크게 깨닫고 돌다리를 지나가다가
고의로 말에서 떨어져 발을 다쳤다고 핑계되어,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훗날 무사할 수 있었다.
폐비윤씨는 당시 묘명도 없이 장단에 매장.
그러나, 1489년 세자 즉위 이후를 고려한 성종.
‘윤씨지묘(尹氏之墓)’라 명명하고 묘지기를 두어 관리.
그리고 이어,
장단도호부사가
속절(俗節) 때마다
제사를 지내게 조처.
1495년(연산군 1)연산군이
생모 폐비 사사 사실을 알고는
신원(원한을 풀어버림)을 모색한다.
1497년 개장(改葬)한 뒤
효사(孝思)라는 묘호(廟號)와
회(懷) 묘호(墓號)가 추봉되었다.
1504년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한 분위기에서
성종의 “폐비의 추숭을 허하지 말라.”는 유교(遺敎)가 무시.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숭되고 묘도 회릉(懷陵)으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효사의 묘호도
혜안전(惠安殿)으로 개칭후, 신원.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인해 폐위된 연산군.
폐비 윤씨는 관작이 추탈, 그후 신원되지 못하였다.
세자를 출산한 정궁이지만 사사된 폐비인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갑자사화의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
연산군이 폐위되는 비극을 촉발한 원인이 된다.
폐비윤씨가 사약을 받았던 1482년.
그당시 연산군은 7세 어린 나이였다.
향년 28세에 생을 마감했던.,폐비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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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는 윤관의11대손.
폐비윤씨 생모는 신씨인데 신숙주의 조카였다.
폐비윤씨를 성종의 후궁으로 추천한 것도 신숙주.
폐비윤씨는 마천목장군의 핏줄도 이어졌다.
태종 이방원의 집권에 기여한.,마천목장군은
조선개국, 정란공신으로 선대에 장흥에서 이주.
폐비윤씨는 아버지를 일찌기 여의고 집안이 가난해.
그녀가 왕비가 된 후에도 그녀의 가문이 피지 않았다.
그런데, 성종의 총애를 받고 연산군을 임신한 폐비윤씨.
그녀는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와 같은 파평윤씨.
항상, 낡고 허름한 옷을 입고 조심성이 있었기에
후궁에서 계비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던 것이었다.
왕실 어른 정희왕후는 숙의였던 윤씨를 중전으로 결정.
그 이유는 윤씨가 검소하고 정성이 넘친다고 이유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당시 정희왕후가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윤씨가 평소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한 것을 숭상,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으니...윤씨가 사양하기를
'나는 덕이 없으며 과부 집에서 자라 보고 들은 것이 없어
주상의 거룩하고 영명한 덕에 누를 끼칠까 몹시 두렵습니다'
고 하니 내가 더욱 그를 현숙하게 여겼다." -조선왕조실록 -
성종도 윤씨를 성품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마음이 깊고 고요하다고 여러차례 추켜세웠다.
그녀가 첨렴한 가문 태생이라는 점이 작용해
왕비로 천거되었으나 중전 자리에 누를 끼칠까
사양하였기에 현숙하게 여겨 왕비까지 올랐던 것.
조선왕조실록에는 윤씨가 성종의 뺨을 때렸다거나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막상 왕비가 되자 후궁을 독살하려 한 것과
성종에게 투기를 부리고, 대비전에 철 없이 행동하여
성종의 생모 인수대비로부터 사약을 받게 되었다는 윤씨.
이는 모함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역사서에서 보여지는 성종의 폐비 이유.
"나인 처소에 들었는데
윤씨가 어찌 알았는지
그곳에 나타났다" - 성종 -
오늘날, 세태 시각으로는
몰래 바람 피다 걸린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하자."는 격이다.
한명회나 윤호 같은 막강한 배경을 갖지 못했던 폐비윤씨.
훈구세력 집권층의 교묘한 공격이 폐비까지 이르게 한걸까?
폐비 윤씨는 조선왕조 최초 폐비이며, 최초로 사사된 왕비이다.
비록, 성종이 어명으로 사약을 내리긴 했지만
인수대비가 아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한 결과였다.
훗날, 연산군이 폭군으로 변한 단초를 제공한.,인수대비.
인수대비는 세자비 때 남편이 운명하자,
궁을 나와 두 아들을 홀로 키운 청상과부.
20세에 출산한 차남을 왕으로 키운.,어머니.
폐비윤씨는 성종의 첫사랑이자 2년 연상녀.
폐비윤씨는 인수대비보다는 18년 연하의 여인.
고부갈등 틈새에서 어느 한쪽을 택해야했던 성종.
첫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모정(母情)을 선택할 것인가?
결국, 모정을 선택하였던.,성종.
이미 폐비윤씨 처소에는 3년간 찾지 않았던 성종.
폐비윤씨와의 사랑은 식었고 바람기가 많았던 군주.
후궁들과 꽃다운 궁녀들, 궐밖에는 8도 선상기 궁궐기생.
그러나, 폐비윤씨는 사랑이 식었어도
장차 왕세자가 될 원자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린 성종.
'성종은 왜
그러한 결단을
내렸던 것일까?'
성종6년 인수대비가 펴낸 ‘내훈’(內訓)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라의 치란(治亂) 흥망(興亡)이 비록 남자에게 달려 있지만
부인의 착하고 그렇지 않음에도 연관되어 여성도 배울 것."을 주장.
인수대비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학문은 성리학.
성리학 이념은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점이 문제.
내훈 <부부장>에서 '아내가 남편과 같다고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므로 마땅히 공경하고 섬기되
그 아버지를 대하듯 할 것.'이라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내훈’은 남녀평등 고려시대 풍습이 남아 있던
조선 초 여성을 강하게 억압해 때로는 충돌 요인.
인수대비와 폐비윤씨와의 충돌이 그 대표적인 사례.
폐비윤씨는 인수대비의 ‘내훈’에서
“(남편에게는) 아내로서 오직 순종할 뿐
감히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그 내용을 수긍할 수 없었고, 따를 수 없었다.
폐비윤씨는 입궐하기 전에 베를 짜서 팔아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만큼 소문난 효녀였지만,
성종의 호색을 받아들이는 열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성종의 바람기에 제동을 걸면서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와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무렵 윤씨 처소에서 비상을 바른 곶감이 나왔다.
그 곶감을 둘러싼 의혹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성종의 총애를 받는 후궁을 독살하려 하였다는
의혹을 받게 되자, 인수대비는 독살 의도로 단정.
왕비 폐출은 명 황실의 승인을 받아야 할 사안.
그러나, 인수대비에게 그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인수대비는 고모 한씨가 선제의 후궁으로서
명나라 황제의 효도를 받는 위치에 있었기에
사촌 한한을 명 사신으로 보내면 해결될.,사안.
폐비윤씨는 폐출되었지만 원자의 생모였다.
폐출 3년 만에 일부 조정 신료들을 복직을 운운.
조정이 시끄러워지자 인수대비는 그 근원을 제거.
폐비윤씨를 사랑하면서도
폐비윤씨를 지켜주지 못했고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내린 성종.
고부 갈등으로 인하여
계비의 폐출과 사사(賜死)라는
극단적인 선례를 남기게 되었던 것.
성종은 세자 때인 1467년 12세에 한명회의 딸과 결혼.
1469년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4년(성종 5년)에 사망.
이때 빈자리를 메운 후궁이 계비 제헌왕후 윤씨(~1482년).
12살 나이에 정략 결혼.
14세에 왕위에 올랐던.,성종.
19세에 1살 연상 공혜왕후와 사별.
......................공혜왕후.........................
한명회의 막내 딸이자 성종의 정비.,공혜왕후.
인수대비는 두 며느리에게 무척 엄격한 시어머니.
세자비 한씨에게 중국의 현모양처들에 관한 이야기인
'열녀전'을 읽게 하는 등 유교 윤리에 따라 철저히 교육.
한씨가 자식을 두지 못하자 성종은 후궁들을 들였는데
한씨는 그들에게 옷을 준비해서 내리고 패물 등을 선물.
한씨는 1473년 음력 7월에 병으로 친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성종이 하루 걸러 한명회의 집에 들러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이후 회복하여 궁궐로 돌아왔으나, 그해 12월에 병이 다시 재발.
병이 낫지 않을 것을 이미 예감하였던 공혜왕후
1474년 음력 3월 창덕궁 구현전으로 처소를 옮겼고,
성종과 삼대비(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가 날마다
구현전으로 가서 정성을 다하여 보살폈지만 차도가 없었다.
친정 부모인 한명회와 부인 민씨도
입궐해 병을 돌보았지만 차도가 없었고
한씨는 친정 부모가 며칠째 밥을 먹지 못하자
밥을 먹도록 명한 후, 1474년 음 4월 15일, 19세 요절.
성종은 공경하고 유순하게 윗사람을 섬김을 공(恭)이라 하고,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함을 혜(惠)라 하여 공혜왕후(恭惠王后).
시호 공혜왕후, 능호 순혼(順魂), 전호는 소경전(昭敬殿)으로 정하였다.
연산군 4년(1498년) 휘의신숙(徽懿愼肅)이라는 존호가 더해지기도 하였다.
종묘 정전(正殿)에 왕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능은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삼릉 내 순릉(順陵).
..................................................................
공혜왕후가 운명한 그해.
연산군 생모인 폐비윤씨는
1474년 8월 9일 계비가 되고
그해 11월에 연산군을 낳았다.
그해 19세 성종은 2년 연상인 윤씨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후궁들이 더 좋았던 것일까?
계비보다 소용 정씨, 엄씨를 찾는 발길이 잦았던 성종.
19세 나이 어린 성종의 배후에서
막후 정치를 주도한 조선왕실의 3대비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예종 계비).
성종은 왕이면서도 아직은 경륜이 미치지 못해
자연히 후궁들의 침소를 자주 찾았던듯 여겨진다.
특히, 성종은 소용정씨의 침소를 많이 찾은듯 하다.
윤씨가 세자 연산군을 임신한 후부터
성종은 소용정씨를 총애하였기 때문에
윤씨는 계비가 되고나서도 늘 불안하였다.
특히, 귀인 엄씨는 소용정씨와 더불어 윤씨를 모함.
윤씨를 폐출하는데 결정적 역활을 한.,성종의 두 후궁.
그래서, 연산군은 귀인 정씨와 소용정씨를 극도로 증오.
훗날, 왕위에 오른 연산군이 갑자사화 때
1504년 음력 3월 20일 밤에 창경궁의 후원에서
엄씨와 정씨를 결박시켜 놓고 몽둥이로 때려 살해.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 엄씨와 정씨가
참혹하게 살해 당했다는 오명까지 쓴.,연산군.
그러나, <연산군 일기>는 <중종실록>과 다르다.
"선왕의 후궁 엄씨가 죽었으니 장례절차를 의논해라"
"선왕의 후궁 정씨가 죽었으니 장례절차를 의논해라"
<연산군 일기>를 보면, 후궁 엄씨와 정씨는.,자연사 한듯.
<중종실록>은 반정 세력에 의한 승자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즉, 반정공신들이 중종 사후 연산군에 관한 사초를 조작한걸까?
조선왕조실록은 사관이 쓴 사초를 토대로
역대왕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문서이다.
그러므로, <연산군 일기>는 사실에 가까운 기록.
그러나, <중종실록>은 중종 사후의 기록.
그러므로, 중종반정 세력에 의한 역사 기록.
이때 연산군에 관한 기록을 조작한듯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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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종은 어릴 때부터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생모의 엄격한 교육과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성종이 왕위에 오른 것은 오직 생모 인수대비의 음덕.
한명회 딸을 며느리로 맞이한 것도
성종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사전 포석.
예종 운명 직후 이례적으로 왕위에 오른 성종.
만 세 살짜리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한씨는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자신이 있었다.
한명회는 예종의 장인이지만 12세 사위 자을산군(성종)을 선택.
성종보다 세 살 위인 월산대군이 있지만
그에게는 '한명회'와 같은 장인이 없었다.
한명회와 밀약한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가
세조의 유언이라는 명분으로 자을산군을 지목.
그 대비의 말을 반박하고 나올 인물도 없었기에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은 왕이 될 수 있었다.
성종의 할머니인
정희왕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도 그녀.
그녀는 자신의 역량을 다 쏟아
두 아들을 왕의 재목으로 키웠고
결국,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린 것.
그후에도 성종이 성군이 될 수 있도록
혼신을 다하여 음으로 양으로 뒷받침하여
조선왕실을 안정시키는데 일조한 인수대비.
남성중심 유교관 조선왕실에서
세조비 시어머니 정희왕후와 더불어
조선 역사 상 최초로 여걸 시대를 연 것.
'그녀는 어떻게 여걸시대를 연 것일까?'
인수대비는 조선 초 명문가 청주한씨, 한확의 막내딸.
수양대군이 '난폭한 며느리''폭빈' 별명을 붙여준 한씨.
미모와는 달리 차가운 성격이라 '얼음미인'이라 불리웠다.
'1445년(세종 27)도원군(桃源君)에 봉해진 남편
1455년(세조 1) 세자로 책봉되어 한씨를 비로 맞아
월산대군과 성종을 낳았으나 병약했던 남편이었다.'
1457년 병이 크게 들어 21명의 승려가
경회루(慶會樓)에 공작재(孔雀齋)를 베풀고
병의 치유를 빌었으며, 의정부 당상관, 육조판서와
좌찬성 신숙주(申叔舟), 도승지 한명회(韓明澮) 등도
함께 참여하여 속한 쾌유를 기원하였으나 20세에 운명.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경릉(敬陵)에 안장.
1471년(성종 2) 덕종으로 추존, 시호는 의경(懿敬).
남편 덕종(1438년 ~ 1457년 음력 9월 2일).
조선 초 왕족이자 왕세자, 문인이며 세조의 장남.
예종의 형이며 월산대군· 성종 형제의 아버지이다.
남편, 덕종보다 한살 연상인 소해왕후 한씨는
(1437년 음력 9월 8일 ~ 1504년 음력 4월 27일)
조선 초기의 세자빈이자, 덕종(德宗, 추존왕)의 왕비.
21살에 홀로된 맏며느리를
시부모님은 측은하게 여겼고
맏아들을 대신해 각별히 아꼈다.
남편 사후에도
시부모님에게는
더할 나위도 없이
효(孝)를 다한 며느리.
그러나, 자녀 교육에는 엄격하였다.
그래서, "폭빈"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
"폭빈"은 시부모님이 붙여준 애칭이었다.
시아버지는 세종의 아들 중에서
가장, 태조 이성계를 닮았던.,세조.
그러한 세조가 전폭적으로 신뢰한 "폭빈".
세조는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명민하여
학문도 잘했으며,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는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 수양대군으로 고쳐 봉해졌다.
1452년 5월에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그해 7월부터 심복인 권람, 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1453년(단종 1) 10월, 정국 전복 이른바 계유정난을 단행.
하룻밤 사이에 정국을 전복시키고
군국(軍國)의 대권을 한 손에 쥔 그는
심복을 요직에 배치,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
그러한 세조가
"폭빈."이라 불렀던
맏며느리.,인수대비.
훗날, 둘째아들을 성종으로 즉위하게 하고
시어머니와 함께 성종을 성군이 되도록 이끌었다.
성종이 성군으로 추앙받게 된 것은 그녀의 교육열 덕분.
시부모님에게는
"폭빈"이라 불릴만큼
자녀교육에 엄격하였다.
결국, 성종을
성군의 재목으로
키워낸.,인수대비.
기다림의 미학(美學).
인내심의 미학(美學).
포용력의 미학(美學).
그것이 그녀가 몸소 실천하며
성종에게 가르쳤던.,정치의 미학.
아울러, 성군이 갖춰야 할.,덕목(德目)
.................
.................
인수대비의 정치적인 스승은.,시어머니 정희왕후.
'폭빈'의 시어머니 정희왕후는 파평윤씨 가문으로
남편 수양대군을 내조하여 세조로 등극시킨 여걸이다.
조선 최초 수렴청정으로
성종을 성군으로 이끈 대비.
인수대비에게는 롤 모델이었다.
시아버지 세조는 정치 운영에 있어서
소신을 강행하는 ‘상명하달(上命下達)’식.
그러한 통치방식으로 인해 정국 경색을 초래,
사회 도처에 특권 횡행의 비리 현상이 나타났다.
결국, 세조의 강권 정치는 왕권을 강화시켰지만
정치 발전 면에서는 세종, 성종에 미치지 못했다.
시어머니 정희왕후는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 후
하의상통(下意上通) 의사소통 방식으로 정치운영.
포용과 대화의 정치로 정국의 경색을 사전에 막았다.
조선 초, 유교관 남성 중심 정치권력, 취약한 왕실에서
늘 대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놀라운 정치력을 발휘.
취약한 조선왕실을 안정권에 올려놓은 여성 정치가 정희왕후.
1453년(단종1년) 계유정난 때 사전 정보 누설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히면서
남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걸.
세조 사후에도 한명회와 신숙주를 중용하고
세조 재위 때 공신들과 반대파 중신들을 포용해
위태롭던 조선 왕조를 안정 시킨 여걸이기도 하다.
정희왕후는 한문을 읽지 못할 정도의 무학(無學).
그러나, 맏며느리 청주한씨는 유학자 수준.,인테리.
그리하여, 정희왕후는 맏며느리와 자주 국사를 의논.
정희왕후는 수렴청정 할 당시
왕 뒤에 발을 치고 앉지 않았고
대신들과 함께 앉아 회의에 참석.
어린 왕이 신하들과 토론하는 내용을 듣고 있다가
정희왕후가 적절한 조언을 주는 방식으로 대화 정치.
조정의 대소 신료들에게는 언로를 활짝 열어놓고 경청.
중요한 국사를 논의할 때마다
대신들의 갑론을박을 경청한 후
회의가 끝난 후에 맏며느리와 의논.
대신들의 중론까지 파악을 한 이후에
어린 왕을 대신하여 신중한 용단을 내렸다.
그녀는 역적도 감싸는 포용력을 보였던.,여걸.
조선 최초로 대왕대비 칭호를 받았던.,정희왕후.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대왕대비이기도 하다.
신중한 용단, 과감한 결단력과 망설임 없는 추진력.
"철의 여인"이라 불리웠던.,정희왕후.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갑작스레 병으로 승하하자
당일 바로 한명회와 결탁하여 둘째 손자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린 왕실 최고어른 대왕대비이자 최초 수렴첨정.
예종에게는 원자(제안대군)가 있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고
의경세자에게도 큰아들인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차남 자을산군을 즉위시킨 것은 정희왕후 개인의 결단.
정희왕후 소생으로는 훗날 덕종에 추존된 의경세자,
예종을 비롯하여, 의숙공주, 세희공주 등 2남 2녀가 있었다.
세희공주는 금계필담에 존재하는 인물로서 김종서 손자와 혼인.
세조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조카 단종의 자리를 빼앗고
유배를 보내자 공주의 자리를 박차고 연을 끊었다는 세희공주.
세조가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된.,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수렴청정 6년 만에 스스로 물러나기도 했다.
한편, 맏며느리인 인수대비를 딸 처럼 아꼈다.
더불어, 정희왕후는 인수대비의 정치 스승이었다.
무학(無學)인 정희왕후가
맏며느리의 능력을 인정하여
국정 파트너로서 동참시켰던 것.
맏며느리가
'환확'의 딸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1450년 수양대군의 정치적 입지를 위하여
명나라 3대 영락제 황제와 사돈 관계였던 한확.
그의 딸을 맏며느리로 받아 들인 것도 그녀의 용단.
수렴청정 당시 그녀의 과단성이 있는 성격과
훌륭한 정치 감각 덕분에 조정은 안정기를 구가.
1483년(성종 14년) 음력 3월 30일 온양 행궁에서 승하.
1418년 음11월 11일 ~ 1483년 음 3월 30일
능은 경기도 양주시 진접읍 부평리.,광릉.
................
................
한확은 명나라와의 외교에 큰 공을 세운 외교관이었다.
하지만, 몰락한 가문이라 끼니 걱정을 할 만큼 가난했다.
그러나, 그후, 몇년 후 왕가와 혼인을 맺을 명문가로 성장.
그 뒷배경에는 조선 초, 명나라와의 굴욕적인 외교사.
한확의 두 누이 한규란, 계란 자매는 명나라 공녀였으며,
한확의 누이 '한규란'은 영락제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여인.
한확은 아름다운 누이 덕분에 조선 왕실에서 승승장구.
수양대군의 맏아들에게 시집보낸 막내딸이 곧 인수대비.
조카를 죽이고 황제에 오른 명나라 영락제는
포악하고 쉽게 남을 의심하는 성격 이상자였다.
영락제 재위 동안에 명나라 국력은 최고조로 왕성.
..........영락제(永樂帝, 1360년~ 1424년)......
명 왕조의 제3대 황제(재위 1402년~1424년)이다.
대외 정벌과 해외 무역로 확장 등의 정책을 펼쳤고,
주변국을 정벌, 정복하거나 굴복시켜 종주권을 확립.
베트남을 점령하여 한때 명 영토로 편입시키기도 했다.
묘호는 태종(太宗), 훗날 가정제 때 성조(成祖)로 고쳤다.
명 태조 홍무제의 4남이며 어머니는 효자고황후 마씨이다.
처음에는 연왕에 봉(封)하여 졌으나,
조카 건문제의 제위계승 및 제후 숙청에 반발.
정변을 일으켜 난징을 함락시키고 스스로 즉위한다.
이후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는 정책을 추진
14년만에 도읍을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다.
건문제 주윤문이 그가 일으킨 정변에 의해 축출되었을 때
영락제 찬탈에 항거한 건문제 스승 방효유는 끝까지 항거.
그의 삼족과 친구, 제자에 이르기까지 847명의 구족을 몰살.
방효유의 친족, 외족, 처족, 십족과 문인, 동지,
그의 서적을 탐독하는 인사들을 모두 숙청하고,
그 집안의 여성들은 노비나 첩, 기녀로 보내었다.
영락제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다섯 번에 걸쳐 몽골 족과 교전.
헤이룽 강까지 진출, 왜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패권 확립,
내정에서는 홍무제의 방침을 거의 대부분 계승하면서 황권을 강화.
그의 치세기간 중 명나라는 전성기를 누렸으나
계속된 해외 원정, 정복 전쟁과 대규모 공사로 인한
막대한 물적·인적 소모는 그 뒤 명나라 황폐화의 요인.
그가 베이징에 건축하였던.,궁궐 자금성.
그후, 명, 청 왕조의 궁궐로 세계 최대 규모.
동서 760m, 남북 960m, 72만 m²의 넓이에 높이 11m,
사방 4km 담과 800채 건물과 9999개 방(8886칸)이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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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역사 상 가장 큰 위업을 달성한 지도자.
50세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영락제를 모시는 일은
어린 나이 조선의 여인에게는 하루 하루가 살얼음판.
자금성 황궁은 황후와 비빈들이 거처하는 곳.
후궁은 ‘치정과 암투가 빚어낸 밤의 잔혹사’처럼
질투, 배신, 치정, 음모, 살인 등이 난무하는 전쟁터.
명 황실 영종 이전의 비빈들은 황제가 죽으면 순장.
선종 주첨기는 재위 10년에 시녀 곽애를 빈으로 책봉.
입궁 20일 만에 선종이 붕어하자 ‘절명사’ 시를 남겼다.
'짧은 삶을 어쩌랴
짧아도 너무 짧구나.
살아온 날이 꿈만 같구나.
죽음을 앞둔 심정
부모를 두고 가려 하니
효를 잃는 것이 부끄럽고
마음 괴로워도 어쩔 수 없으니
그저 슬플 뿐이네.' - 곽애 절명사 -
순장되기 전 비빈들은 진수성찬 연회가 끝나면
대전 앞 대들보 밑으로 가 머리를 풀고 목매 자살.
한확의 누이는 영락제가 죽자 24세에 산채로 순장.
한확은 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상황을 알고 있었던듯.
그러나, 그 상황을 조선왕실은 물론 집안에 알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락제 손자인 선덕제가 즉위하자,
하나뿐인 여동생 '한계란'을 또 다시 공녀로 보냈던.,한확.
그 여동생이 인수대비 고모이자 명나라 황제의 총비가 된다.
“여동생 한 명을 팔아 부귀영화를 누렸으면 되었지,
하나뿐인 동생마저 또 공녀로 보내려는가?” -세종실록-
세종 9년, 명나라 공녀로 가게 된 한확 여동생.,한계란.
병문안을 가서 약을 주자 여동생이 울부짖으며 외친 말.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먼길을 떠나는 여정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고,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었다.
공녀 선출은 자의보다 타의로 이뤄졌기에 식음을 전폐하고 항거.
결국, 사당에 참배하고 어머님께 작별을 고하자
어머님은 눈물을 머금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하시고
한확도 눈물이 흐르고 목이 메어 슬픔을 억제 못했다.
그당시 부귀와 영화, 어느 것 하나 모자람 없던 한확.
자신의 누이 한계란이 순장으로 운명한 사실을 알면서
또 다시 하나 남은 누이 한계란을 명에 공녀로 보냈던 것.
명나라에 보내는 공녀의 기본자격은
사대부 명문 가문의 규수로.,13~16세.
미모와 학문을 겸비한 숫처녀여야 했다.
공녀는 비록 가기 싫은 길을 억지로 떠났다 해도
이들이 만난 새로운 세상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조선은 명나라를 통해 해외 각국 선진문명까지 유입.
그당시, 왜에 파견된
조선통신사 일행 또한
'왜'의 번성한 출판문화와
화려한 도시문화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경이로운 경험과
체험담을 이들은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나, 공녀를 조공하는 굴욕적 외교는
조선의 윤리관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
조선왕실 내에서 풍기문란한 성풍습이 만연.
세종 때 유감동 사건을 비롯하여
성종 때 그와 유사한 어을우동 사건
연산군 재위 때 극에 달하여.,흥청망청.
조선 초까지 조공무역의 일환으로 명나라에 넘겨진 공녀들.
이들은 눈물로 일생을 보냈고 그 해외여정은 지옥과 같았다.
황제가 죽으면 순장되거나 국난에 연루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딸이나 누이가 공녀가 되면 조선에서는
그 공녀 가족에게 관직과 재물을 내려 위로하였다.
명과의 조공무역은 조선 국익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
명나라의 강력한 국방력.
국제무역으로 축적된 부(副)
조선의 국방과 경제에 큰 기여.
여동생 두 명을 명나라로 보낸 한확(1403∼1456)은
이후 우의정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
'청주한씨' 가문을 조선 전기 최고 명문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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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한중 외교관계는 조공외교였다.
큰집에 작은집이 진상하는 굴욕외교.
세종대왕 치세 중에서 비록 일시적이긴 하였지만
처녀, 금,은, 조공 중지는 간과할 수 없는 업적이다.
고려시대 원나라에 이어 명나라에 공녀를 진상한 관례.
세종대왕 재위 때에는
국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일시적으로나마 그 관례를 깬 것.
명에서 공녀를 보내라는 요청이 오면서
조선 조정에서는 “진헌색” 임시기관을 설치.
나이 어린 양가의 처녀들을 선발하여 보낸 것.
기록에 의하면, 명에서는 모두 12차례 공녀를 요구,
그중 명나라 황제 사망 등으로 5차례는 중지되었고
조선시대 명나라에 공녀를 보낸 것은 모두 7차례였다.
그당시, 공녀의 처녀성을 신성하게 여긴.,명나라.
성벽에 생리혈이 묻은 속옷이나 생리대를 걸거나,
처녀성의 혈흔이 묻어있는 설건을 성벽에 걸어 두어도
명은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처녀성은 신성한 가치.
하여, 이미 더렵혀진
처자를 공녀로 보내는 행위는
명나라 황제의 권위를 능멸하는 일이었다.
영락제 재위때 황제 침소에 들기 전에 처녀성을 감별.
앵무새 피가 공녀의 팔뚝에 묻지 않으면 의심받았기에
조선의 공녀 황씨는 그때 스스로 숫처녀가 아님을 토설.
그로 인해, 명나라 황제 영락제는 격로.
직접 공녀 황씨를 국문하는 사건이 발생.
아울러, 조선왕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였다.
그것도 공녀로 선발된 후,
명나라로 들어오기 직전에
이웃집의 노비에게 몸을 허락.
영락제의 분노를 알게 된.,한씨.
자칫 고국에 해가 끼칠 것을 염려.
조선 조정을 대변하여 문제를 해결.
"황씨는 조선 사가(私家)의 사람인데,
조선의 조정에서는 물론이고 조선 왕이
그녀가 처녀인지 아닌지 어찌 알겠나이까?"
영락제는 공녀 황씨의 처벌을 한씨에게 위임.
한씨는 공녀 황씨에게 뺨 한대 때리고 사건 종결.
그리하여, 공녀 황씨는 무사히 살 수 있게 되었던 것.
그러나, 그후 황씨는 물론이고
명나라 황실에 들어온 조선의 공녀들은
영락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한씨를 시샘.
한씨는 영락제의 총애를 받을수록
조선의 공녀들에게 따돌림을 받았다.
한씨의 친정 가문만 번성하였던 탓이다.
그후, 한씨는 더욱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자녀가 없었기에 영락제 사후에 순장을 당하였다.
양육할 자녀 없는 후궁은 순장하는 것이 명 황실 풍습.
영락제 때 명나라 황실에서
처녀성을 신성하게 여긴 것은
정조관념과 주술적인 영향 때문.
주술적 영향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붉은색에서 비롯
신성한 처녀들의 생리혈은 가장 영험한 효능이 있고,
쾌감으로 처음 흘리는 애액을 회춘하는 불로장생의 묘약.
그래서, 중국인들이 붉은색을 좋아하며,
첫날밤 신부의 처녀막이 파열되면서 흘린
선혈을 자랑스레 집 밖에 내걸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처녀성을 귀하게 여겼기에
황제에게 헌처녀를 바친 것은 엄청난 모욕.
신하는 두 임금에게 충성할 수 없다는
선비들의 지조론이 여성에게는 두 남자를
모실 수 없는 ‘열녀불경이부절(烈女不更二不節)’.
그당시 조선은 명나라에 공녀를 보내야만 했다.
태종 때 3차례에 걸쳐 40명의 공녀가 명으로 갔고
세종(1427~1433)때 4차례 74명의 공녀가 받쳐졌다.
명의 경우는 원과 다르게 뽑힌 공녀와
공녀를 모실 여종들 역시 함께 동행했으니
공녀16, 여종 48, 집찹녀 42, 무녀 8, 모두 114.
..............................
..............................
조선시대 굴욕적인 외교 유지는 정치적 목적에 의한 것.
중국의 힘을 뒷배경으로 왕실의 유지를 보장받기 위한 것
한중관계에 있어 조공은 정권유지 안전핀 역할로 상부상조.
원래 만주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진족은
누루하치(청 태조) 아래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1616년 후금(後金)을 세웠고 1627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인조 14년(1636) 재침했던 병자호란.
군사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한 조선은 항복.
결국, 청 요구에 따라 공녀를 바쳐야만 하였다.
1408년(태종 8년) 10월 11일 명 사신대표 황엄
공녀 5명을 최종 선발했는데 이때 뽑힌 처녀로는
권집중 딸(18세), 임첨년 딸(17세), 이문명 딸(17세),
여귀진 딸(16세), 최득비 딸(14세) 등을 데리고 갔다.
‘이때 5 공녀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삶을 산 것으로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 때 들어간 청주 한 씨였다.
명 황제 영락제는 한씨의 인품과 미모에 반했던 것.
조선으로 칙사를 보낼 때마다
한씨 친정집에 선물을 보냈다.
심지어 한씨의 오빠 한확을
사위로 삼아 옆에 두려 했다.
비록, 한확의 거절로 성사되지 않았지만
이런 후광 덕분에 훗날, 한확은 승승장구.
수양대군을 도운 정난공신으로
당대를 주름잡는 거물이 되었다.
그러나, 영락제가 세상을 떠나자
한씨는 공녀로 간지 7년 만에 순장.
한확은 여동생을 잃은 슬픔을 겪었다.
..........한확(韓確, 1400년~1456년 음력 9월 11일)...........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외척, 외교관이며 명나라의 문신이다.
자 자유(子柔), 호 간이재(簡易齋), 본관 청주, 시호는 양절(襄節).
중국어에 능통해 명 사신 입국 때마다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어 접대.
월산대군·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의 친정아버지
세종의 서자 계양군 부인 정선군부인의 친정아버지.
음서로 관직에 올라 명 영락제 후궁으로 간택된 누이 여비를 호송.
1417년(태종 17년) 명나라의 초청을 받고 진헌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광록시 소경 벼슬, 귀국후 판한성부사, 판병조사, 판이조사.의정부좌의정.
그는 계유정난 정난공신 1등과 좌익공신 1등에 녹훈
서성부원군에 봉작되었다가 서원부원군으로 개봉된다.
그의 4째 여동생은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이 된 여비 한씨.
그는 검소하고 청렴하였으며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의 즉위를 도왔다.
1418년 세종 책봉 고명과 1455년 세조 책봉 고명을 받아왔다.
그는 누이들이 황제의 후궁인 점을 활용하여, 외교관으로 활동.
그의 둘째 딸은 세종의 서자 계양군 증에게 출가하고,
여섯째 딸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비 인수대비로서
세종, 세조 2대에 걸쳐 사돈이 되었다. 한명회의 일족이다.
그의 여섯째 딸 인수대비는
덕종 비이며 월산대군· 성종의 어머니.
한확은 세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충신이었다.
그의 누나가 명 성조(成祖) 후궁이 되면서
명 황실의 벼슬을 받고 외교채널이 된.,한확.
그의 누이동생 또한 명나라 선종(宣宗)의 후궁.
그의 외교적인 입지를
더욱 다지게 된 것이다.
한확은 계유정난 때 세조를 도운 1등 정난공신
세조의 왕위 찬탈을 승인하지 않던 명나라에 들어가서
단종이 왕위를 물려준 양위라고 설득하여 외교 문제를 해결
동생 한전(韓磌), 한질이 모두 일찍 죽었는데,
한확이 그 자녀를 자기 자식과 다름없이 양육.
1429년 조종생(趙從生)과 함께 진헌사로서 명에 다녀왔다.
1435년 판한성부사·병조판서·이조판서·평안도관찰사 등 역임.
1451년(문종 1)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단종 즉위) 좌찬성에 올랐다.
1453년 우의정, 정난공신 1등, 서성부원군.
1455년(세조 1) 좌의정 좌익공신 1등, 서원부원군.
1456년 사은 겸 주청사로 다시 명나라에 가서
세조 즉위 정당성 설득후 귀국 중 사하포에서 운명.
1470년(성종 1) 세조 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절(襄節).
.............................................................................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의 아버지 한확은 당시 중추원사(中樞院使)를 지내며
명나라로부터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작위를 받은.,세도가.
큰고모는 명 3대 황제 영락제 태종의 후궁이었던 강혜장숙여비.
작은 고모는 명 5대 황제 선덕제 선종의 후궁.,공신태비(恭愼太妃).
큰고모가 영락제 사후 순장된 그 절개를 높이 평가한다는 명목으로
명나라 선덕제는 그의 둘째 고모를 자신의 후궁으로 맞이하였던 것이다.
한씨의 둘째언니는 세종의 서자인 계양군의 부인.
한씨의 가문은 양국의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었고
한확은 명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던 당시의 외교관.
1450년, 문종이 병약하였을때
김종서와 대립하였던 수양대군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기 위하여
한확의 막내딸 한씨와의 정략결혼을 추진.
소혜왕후는 수양대군의 이복동생인 계양군의 처제였고,
시어머니가 될 정희왕후의 형부인 홍원용의 생질녀였고,
외종언니인 강녕부부인(홍이용의 딸)은 평원대군의 정실.
한씨 가문은 여러모로 왕실과 인연이 깊었다.
한씨는 13살에 수양대군 큰아들 도원군과 혼인.
하여, 도원군부인 한씨(桃源君夫人 韓氏)가 되었다.
1454년 갑술년에는 잠저에서 장남 월산군을 낳았다.
1455년,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양위를 받아
도원군이 왕세자로 책봉되며 한씨도 왕세자빈이 된다.
그해 동궁(東宮)에서 두 번째 자녀인 태안군주를 낳고,
익익년(翌翌年) 1457년 세번째 자녀인 자산군을 낳았다.
자산군이 훗날 성종으로 즉위하면서 인수대비가 된 한씨.
왕세자빈 한씨는 젊어서부터 빈틈이 없고,
시부모(세조와 정희왕후) 섬기는 일엔 극직.
세조로부터 효부(孝婦)라는 칭찬을 늘 들었지만
두아들 월산군과 자산군에게는 엄격한 어머니였다.
사소한 과실만 있어도
추호도 감싸는 법 없이
정색을 하고 꾸짖었던 것.
그래서, 세조(수양대군), 중전 윤씨(정희왕후) 내외가
농담 삼아 부른 맏며느리의 별명이 "폭빈(暴嬪)"이었다.
1457년, 친정아버지 한확의 객사와 함께
남편 의경세자(懿敬世子)가 20살에 요절.
맏며느리의 연이은 불행을 안쓰럽게 여긴 세조는
각별히 배려하여 궐에 살도록 허용하였으나 사양.
그녀는 21살에 두 아들을 데리고 스스로 궐을 나왔다.
남편이 죽어 그녀는 이미 왕세자비 자격은 상실했지만
훗날 두 아들에게 왕세자권이 있다는 것이 유일한 희망.
두 아들을 왕의 재목으로 키울 결심을 하며 궐을 나온 것.
시동생 해양대군(예종)이 남편의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면서
시아버지 세조로부터 정빈(貞嬪)의 작호를 받아 정빈 한씨(貞嬪 韓氏)
1465년 세조가 교지를 통해 원경왕후가 세자빈이 되었을 때 정빈으로 책봉.
한씨의 작호를 수빈(粹嬪)으로 고쳤다.
한씨는 왕세자빈 자격으로 궁궐에서 살았으나
남편 의경세자 사후 그 지위를 잃고 두 아들과 함께 출궁.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시아버지 세조가
궁궐에서 살아도 좋다고 하였으나 사양하자
세조는 그녀를 위해 집을 지어준 곳이.,덕수궁.
덕수궁은 의경세자 사당 옆에 건설되었으며,
일반적으로 고위 사대부나 왕족이 살던 사저보다
그 규모가 웅장하여 훗날 임진왜란 중 선조의 임시거처.
훗날, 한씨 차남 자산군이 보위에 올라
그녀도 모후로서 다시 궁궐에 들어가기에
그녀의 큰아들 월산대군이 사저를 물려받았다.
1467년 수빈 한씨가 병으로
자신의 둘째 언니인 계양군부인
집에서 요양하자 세조가 친히 문병.
병조(兵曹)에 명,
군사 10명을 보내어
수빈이 요양하고 있는
'계양군부인'의 집을 호위.
그리고, 한 달 뒤에는 정희왕후와 동행하였다.
이듬해에는 엄청난 양의 곡물과 땅을 하사하였다.
남편 의경세자의 죽음으로 중전의 꿈을 접었던 그녀.
그러나, 정치적 야심이 대단하여
당대 권신 한명회의 넷째 딸 한씨와
자산군을 혼인시켜 사돈관계를 맺었고
차남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 위하여 노력.
또한 신숙주 등과도 긴밀하게 교류하였는데,
그 결과로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승하한 후
한명회의 강력한 추천과 시어머니 정희왕후 지지로
당시 원자와 제안대군 대신 자산군이 즉위할 수 있었다.
수빈 한씨의 시아버지 세조가 한씨에게는
시동생 해양대군(예종)에게 양위하고 승하.
왕의 맏며느리에서, 왕의 형수로 바뀌었지만
수빈 한씨의 영향력과 위세는 여전히 대단했다.
예종은 병조에 명하기를
“수빈(粹嬪)에게 대군의 예에
의하여 반인(수행원)을 지급하라."
"대비(정희왕후)와 중궁(안순왕후), 수빈 이외에
벼슬을 자청(自請)하는 자는 그 직첩(職牒)을 거두고
영원히 서용(敍用)하지 말라." 했을 만큼 영향력이 대단.
수빈의 동생 한치의(韓致義)는 그녀의 아우라는 이유만으로
당상관(堂上官) 공신의 호를 받고 청성군(淸城君)에 올랐으며
오늘날 국방부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 직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이 시기에 그녀가 정치적인 행보를 이어나간 것은
시어머니인 대비 윤씨와 함께 숭은전에 나아갔을 때.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 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 은천군(銀川君)
이찬(李穳), 사산군(蛇山君) 이호(李灝), 운산군(雲山君) 이계(李誡),
강양군(江陽君) 이융(李瀜), 곡성군(鵠城君) 이금손(李金孫),
모양 도정(牟陽都正) 이직(李稙), 청송군(靑松君) 심회(沈澮),
하성군(河城君) 정현조(鄭顯祖),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윤사흔.
우찬성(右贊成) 노사신(盧思愼), 호조 참판(戶曹參判) 한치인(韓致仁),
병조 참판 한의 등 수많은 공신들과 종친, 외척들이 그녀와 대비를 호위.
이것은 당시 그녀의 위세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
시동생 예종이 재위 14개월만에 갑작스럽게 죽자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논의가 있었다.
마땅히 예종의 원자(제안대군)가 보위에 올라야 했으나
원자(제안대군)의 나이가 겨우 3살밖에 되질 않았을뿐더러,
수빈 한씨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의 장인이 바로 권신 한명회.
조정은 이미 자을산군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
왕실의 어른 대비 윤씨(정희왕후)와 원상 신숙주,
한명회 등의 결정으로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된다
...................
.......................
수빈 한씨의 차남 자산군이
성종으로 왕위에 등극하였으나
그녀는 아들의 인사를 받지 못하였다.
왕의 모후가 되므로 마땅히 인사를 받아야 했지만,
성종은 작은아버지가 되는 예종의 아들로 입적하여
왕위(王位)의 대통(大統)을 이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수빈 한씨가 성종의 어머니로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가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로 법적 어머니.
따라서 수빈 한씨는 그저 왕세자의 부인으로서
지위가 세자빈에 불과했기 때문에 군신관계 상
왕이 된 자을산군 아들의 인사를 받지 못한 것이다.
다만 국왕의 생모기에, 궁궐에 들어와 살았는데
그녀의 호(呼)를 붙여 수빈궁(粹嬪宮)이라 했다.
수빈 한씨가
왕의 모후 임에도
인사를 받지 못하자
조정에서 이 일로 논의.
그녀를 왕비로 추숭하느냐?
아니면, 왕대비로 추숭하느냐?
이 문제는 그녀의 남편인 의경세자를 왕(王)으로 추숭하느냐,
왕(王)과 더불어 종(宗)으로 추숭하느냐 문제와도 연관되었다.
의경세자를 단순히 왕(王)으로 추숭하면 한씨는 왕비가 되는 것.
의경세자를 왕(王)과 더불어 종(宗)으로 추숭하면 한씨는 왕대비.
한씨를 왕비로 추숭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신들은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 봉원부원군 정창손,
고령부원군 신숙주,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
능성부원군 구치관,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 홍윤성 등.
모두 영의정, 부원군
영향력이 있는 공신들.
한씨를 왕대비로 추숭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신들은
남원군 양성지, 양성군 이승소(李承召) 등 소수였다.
"수빈 한씨를 왕비로 추숭해야 한다."는 대세론이 우세.
신숙주 - "의경세자를 추숭하여 의경왕(懿敬王)을 삼으나
종(宗)이라 일컫지 말며, 수빈은 다만 인수왕비라고만 일컬어
예종비 인혜왕대비(안순왕후)와 구별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결국 조정의 논의 끝에 인수왕비(仁粹王妃)가 되어
아들 성종의 인사를 받게 되었으나 문제가 생겼던 것.
왕비라 함은 왕의 부인을 일컫는 것,
한씨는 왕(王)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그녀는 왕대비가 되어야 마땅하였다.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와의 서열문제가 화두.
성종의 할머니가 되는 자성대왕대비 윤씨(정희왕후),
법적 어머니이자 숙모가 되는 인혜왕대비 한씨(안순왕후),
친어머니이지만 법적으로는 큰어머니가 되는 인수왕비 한씨
왕실 서열 1위는 할머니 자성대왕대비 윤씨로 문제가 없었으나
왕실 서열 2위가 인혜왕대비냐 인수왕비냐를 놓고 조정에서 논의.
당시 사관(史官)이 성종에게 아뢰길 "
예종비였던 인혜왕대비는 당시 왕비였고,
인수왕비는 수빈(粹嬪)으로 군신관계였기에
마땅히 인혜왕대비를 윗전으로 해야 맞습니다."
원상(院相) 신숙주가 아뢰길
"인수왕비는 이미 존호를 높이어
명위(名位)가 이미 정하여졌으니,
마땅히 형제의 서열로 하여야 마땅."
왕실의 최고 어른 대왕대비 또한 예조에 전지(傳旨)
"인혜왕대비의 서열이 일찍이 인수왕비의 위에 있었으나,
세조대왕께서 항시 인수왕비에게 명하여 예종을 보호하게 하고
시양(侍養)이라고 일컬었으며, 또 장유(長幼)의 차서(次序)가 있으니,
인수왕비의 서열은 마땅히 인혜왕대비의 위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인수왕비는 세자빈 출신 임에도 왕실서열 2위
인혜왕대비는 왕비 출신이지만 왕실서열 3위로 결정.
인수왕비 한씨가 왕실 서열 2위로 올라섰지만,
그녀에게는 왕대비에 오르는 것이 여전히 숙제
1474년에 성종이 생부를 의경왕으로 추봉하자
그 결과 의경왕이 덕종(德宗)의 묘호를 받았다.
왕의 생모가 되는 인수왕비 또한 왕대비로 진봉.
그녀는 마침내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가 되었다.
왕실 세 윗전 자성대왕대비, 인수왕대비, 인혜왕대비.
그녀들을 모시기 위해 건축한 궁궐이 오늘날 창경궁이다.
명정전(明政殿), 편전인 문정전(文政殿),
침전인 수령전(壽寧殿), 그리고 환경전(歡慶殿),
경춘전(景春殿), 인양전(仁陽殿), 통명전(通明殿),
양화당(養和堂), 여휘당(麗暉堂), 사성각(思誠閣)등.
인수왕대비는 경춘전(景春殿)에 거처
인수대비는 그곳에서 임종을 맞이한다.
1494년, 성종이 승하 후 왕세자 융이 즉위
그가 바로 조선의 제10대 임금 연산군이다.
그녀는 '연산군 할머니' 대왕대비로 진봉.
휘호가 자숙(慈淑)으로 새로이 올려졌다.
실록에는 자숙대왕대비(慈淑大王大妃) 명칭.
이 휘호를 올린 당시에만 실록에 등장할 뿐,
인수대왕대비(仁粹大王大妃)로 일컬어 진다.
연산군은 왕세자 시절에
법적으로 정현왕후의 아들.
정현왕후 한씨는 성종의 계비.
그러나, 연산군은 즉위 이후에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안다.
급기야는 폐비 윤씨를 모함하여 사사(賜死)시킨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철퇴로 내리쳐 죽인 뒤,
그 시체를 찢어 젓갈로 만들어 야산에 뿌리도록 했고
그 뒤에도 귀인 정씨의 아들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강제로
대왕대비전으로 끌고가 인수대비에게 술을 따르게 하였으며
그 뒤에도 '왜 나의 어머니를 죽였느냐'고 인수대비에게 행패.
이후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려 하자
병상에 누운 인수대왕대비가 이를 꾸짖자
화가 치민 연산군은 인수대왕대비 가슴을 밀쳤다.
인수대왕대비는 그 충격으로
1504년 4월 27일, 68세에 승하.
인수대왕대비는 이미 죽기 서너 달 전인
1504년 1월경에 노환으로 목숨이 위태로워
연산군은 의정부 삼정승과 육조 판서들을 불러
미리 인수대왕대비 상제를 의논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연산군은 병석에 누워있던 할머니에게
고함을 지르며 행패를 부려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조선은 유교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였고,
그 중 임금에게 적용되는 가장 큰 덕목은 효(孝)
이와 같은 연산군의 행동은 중종반정의 명분을 제공.
인수대왕대비가 죽어서도
할머니에 대한 연산군의 격하는
그치지 않아 화두에 오른 것이 장례문제
연산군은 할머니의 제사를 왕이나 왕비의 격식이 아닌
왕세자빈 격식에 합당하다고 조정 대신들에게 하문한다.
영의정 유순이 아뢰길
'덕종대왕의 상례로 치루면
주상 전하(연산군)의 본명(本命)을
범하게 됩니다.'를 이유로 들어 반대하고
대제학 김감(金勘)도 이에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그러자 연산군은 타협 안으로
덕종(의경세자)보다는 높게 하고,
예종비 안순왕후보다는 낮게 하라 명.
이것 또한 영의정 유순, 대제학 김감등의 대신들이
예문에 근거가 없기에 의논하기 어렵다고 주장하여
마찬가지로 무산되었고 결국 인수대왕대비의 장례는
안순왕후와 같은 왕후(王后)의 격식으로서 치루어졌다.
연산군은 상제를 단축하여 시행하라는 어명.
이에 자순대비 윤씨(정현왕후)가 연산군에게
"예문에 근거가 없으니 감히 따르지 못하겠다.'
연산군이 화를 내며
"여자는 남편을 잃으면
아들의 뜻에 따라야 한다."
자순대비가 한탄하였다.
"내가 인수대왕대비에게
죄를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
정현왕후는 성종의 계비.
자순대비로도 알려져 있다.
1480년 성종의 세 번째 왕비로 책봉.
연산군이 생모로 알았던.,어머니였다.
중종반정때 중종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승낙.
능은 삼성동 선정릉 내에 위치한 선릉(宣陵)
남편 성종과 동원이강 형태로 같이 묻혀 있다.
..............정현왕후(자순대비)...........
1462(세조 7)∼1530(중종 25). 성종의 계비.
파평윤씨로 우의정 영원부원군의 딸이다.
1473년(성종 4) 대궐에 들어가 처음 숙의(淑儀)에 봉하여졌고,
1479년 6월 연산군 생모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11월 왕비로 책봉.
1497년(연산군 3)에 자순(慈順), 1504년에 화혜(和惠)라 존호되었다.
연산군의 법적인 어머니이며
성종과 사이에 1남1녀를 두었고
그녀가 낳은 아들은 제 11대 중종.
1530년(중종 25) 8월 경복궁에서 운명.
휘호 소의흠숙(昭懿欽淑), 시호 정현(貞顯).
..........................................................
중종은 성종에게는 유일한 정실 소생.
1483년(성종 14)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중종은 아직 출생 전이라 세자로 삼았던 연산군.
1494년 12월 연산군은 성종의 승하와 함께 즉위.
그러나, 재위 12년간 무도한 통치로 인해 폐위되고
이후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있다가 그 해 11월에 운명.
연산군은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폐주 가운데 한 사람.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
그의 재위 기간의 실록도 『연산군일기』로 통칭.
......................................
.......................................
성종의 친모 소혜왕후는 유교 인텔리이자 불교 신자.
불경에 조예가 깊어 범어, 한어(漢語), 국어(國語)로 저술.
불경과 부녀자 예의범절 '내훈(內訓)' 서적을 후세에 남겼다.
성종은 즉위 직후 성리학적 왕도정치에 입각하여
길재, 김숙자, 김종직 제자와 길재파 사류를 적극 등용.
불교, 도교, 무속 등의 종교행사를 미신으로 간주하였다.
한편 소혜왕후는 불교신자이자 불교 옹호론자.
사림의 미신타파 주장과 불교 억압 정책에 반대.
세종과 세조가 불당에 출입한 고사를 들어
궐내 법당을 철폐하려는 사림의 주장에 맞섰다.
궁궐에 설치한 불당은 선조 대에 가서야 철폐되었다.
인수대비의 성격은 강직했던 것으로 유명하였으며
성종의 정비(正妃)인 공혜왕후의 승하 이후 계비로 책봉된
중전 윤씨가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급기야 성종의 용안에
손톱 자국을 내자 인수대비는 윤씨를 폐서인하여 결국 사약을 내렸다.
그런 연유로 해서
인수대비는 당시 원자이자
폐비 윤씨 아들인 연산군 왕위계승에도 부정적
성종의 제2계비인 정현왕후의 소생 진성대군을 편애하였다.
소혜왕후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에
경릉으로 남편인 덕종과 같은 묘역에 묻혀있다.
본디 왕릉을 쓸 때 우측에 왕을, 좌측에 왕비를 안장.
살아있을 때는 좌측이 상석이니
죽으면 그 반대라고 여겼던 것이 상례.
소혜왕후가 상좌인 우측에 안장되어 있다.
이것은 승하할 당시의 신분 차이 때문인데,
덕종의 경우는 승하할 때 세자의 신분이었지만,
소혜왕후 경우는 왕실 최고 어른 대왕대비로서 승하.
조선시대 군신 관계에 따라 위가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덕종의 묘에는 석물도 문인석만 서 있다.
무인석은 왕권의 상징이라
왕이 되지 못한 세자, 세자빈
이하의 무덤에는 세울 수 없다.
소혜왕후 능상의 석물은
무인석까지 갖추고 있다.
인수대비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죽음이
연산군의 정치 생명에 막을 내릴 것을 예상.
그 예상대로 연산군은 2년 후 유폐를 당한다.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4대에 걸쳐
조선의 정권과 왕실을 좌우한 인수대비.
마지막 가는 길에도 조선왕실 권좌를 좌우.
연산군이 폐위되어 유폐를 당하고
중종반정이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하여
생전에 그녀가 편애하였던 중종이 즉위.
연산군.
연산군은 재위 중 무오, 갑자 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비롯한 훈구파 문신들까지 대거 처형.
언관제도를 크게 축소한 폭군으로 널리 알려졌다.
폐비 윤씨의 복위를 강하게 반발하는 사림파.
그에 대한 반발로 경연 등을 없애 학문을 중단했고,
사간원과 사헌부를 폐지하여 언로(言路)를 막기도 했다.
재위 초, 국방과 빈민구제, 간행사업 등 국정에 힘썼으나,
사림파 제거를 노린 훈구파의 정치적인 공작과 어린 나이에
생모를 잃은 후, 형성된 성격 상의 문제가 겹쳐 1498, 1504년
2차례 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파의 반감을 샀다.
홍문관, 사간원을 없애고 경연(經筵)과 상소제도를 중단.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여론 제도를 크게 위축시킨데다가,
갑자사화를 계기로 훈구파도 심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
특히, 인수대비 초상 때 역월지제(易月之制)라 하여
3년상 대신 25일상을 치르는 등 행위는 지탄의 빌미.
결국, 1506년 성희안·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옹립해
왕위에서 쫓겨나 군(君)으로 강등된 뒤 강화도에 유배.
성종의 큰아들이며, 생모는 폐비 윤씨이다.
폐비 윤씨 사사 후, 1483년(성종 14) 세자 책봉.
세자 시절에 허침, 조지서, 서거정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1494년 12월 왕위에 올라 비융사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지방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는 한편, 녹도(鹿島)에 쳐들어온
왜구를 물리치고 건주야인(建州野人)을 토벌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또한, 사창 상평창 진제장을 설치하여.,빈민구제.
집권 초, 개혁 정치를 통하여 성군의 자질을 보였다.
집권 초, 개혁정치를 통하여
빈민층에게는 지지를 받았지만
조정의 신하들에게는 반감을 산다.
1498년 성종실록 편찬 때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실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 즉위를 비방한 것이라고 하여,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김일손·권오복 등을 처형.
그해에 정여창, 이주, 김굉필, 강혼 등을 귀양보냈던.,무오사화.
1504년 폐비윤씨 사사에 관련했던 후궁들과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김굉필 등을 처형.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남효온 등을 부관참시.
갑자사화 옥사에서는 무오사화 때와는 달리
김종직 문하 사림파 및 훈구파 거목들도 대거 참화.
훈구파 재상들의 토지까지 몰수하려는 조짐이 보이자
훈구파가 반발하면서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으로 폐위.
1505년(연산군11년) 내시 김처선 처형 사건.
김처선은 사사된 폐비윤씨의 마지막 유언에 따라
세자를 보호하여 연산군을 보위에 오르게 한.,공신.
하지만 목숨을 바쳐 보호한 연산군이 폭군이 되어가자
직언을 하다가 연산군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었다는 인물.
..............김처선(?∼1505 :연산군 11)......
조선 중기의 환관이며 '세종~연산군' 7 임금을 시종.
문종 때 영해 유배, 단종 때 귀양이 풀리고 복직되었다.
1455년(단종 3) 정변에 관련되어 삭탈관직, 본향의 관노.
세조 때 복직되어 1460년(세조 6) 원종공신 3등에 추록.
그러나, 시종으로 근실하지 못해 자주 장형을 당하였다.
성종 재위 때부터는 전어(傳語: 통역)에 공이 있고,
의술을 알아 대비의 신병 치료에 이바지하였다고 하여
가자(加資)되고 상급 받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그 뒤, 연산군이 즉위하자 다시 시종에 임하였으나
직언을 잘하여 미움을 받던 중 1505년 죽음을 무릅쓰고
연산군의 비행을 직간하다가, 다리와 혀가 잘리고 죽었다.
연산군은 그의 양자 이공신과 7촌까지
연좌시켜 처형하고, 본관인 전의도 없앴다.
그리고, 조야(朝野)에 명하여
‘處(처)’ 자(字)와 ‘善(선)’ 자(字)를
이름에 쓰지 못하게 하였다는 역사 기록.
그뒤 1751년(영조 27) 고향에 정문이 세워졌다.
...................................................................
원래, 환관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벼슬직.
그러나, 국법을 어기고, 정치에 깊이 관여한듯.
중종반정 공신들과도 막후에서 내통한듯 여겨진다.
생모 폐비윤씨 사사 사건으로 인해
원래, 지지기반이 취약했던.,연산군.
측근 김처선 마저 믿을 수 없었던듯.
김처선을 처형한 후, 사면초가
고립무원에 빠지고 만.,연산군.
누구도 직간하는 신하가 없었다.
음력 9월 2일 새벽, 중종반정군의 궁궐의 방화를 틈타
변복 후, 말 타고 궐을 빠져나와 한성부 근처 민가에 숨었다.
그러나, 그를 추격한 박원종의 사병에 의해 체포, 압송 후, 폐위.
연산군은 민가에 숨어있다가 체포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자 유배지 별감과 상궁들은
그를 조롱했으나 이를 묵묵히 참고 인내하였다.
이때 장녹수 등 그의 후궁들은
한성부 종로, 남대문에서 투석사형.
연산군의 어린 아들들도 살해 당했다.
연산군은 강화도 유배 직후 열병에 걸려 고생.
뒤이어 강화도 근처 교동도로 배소가 옮겨진다.
강화군 교동도에 유배된지 2개월 뒤인 그해 음력 11월에
역질을 앓다가 11월 6일 역질, 화병 등의 후유증으로 병사.
운명 직전에 부인인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 산 77번지.,연산군 묘.
도봉산의 한 줄기인 시루봉 끝자락에 위치.
우이 계곡 입구에서 방학 사거리 방향으로
방학로 경유하여 고갯길을 넘어 도로 오른쪽.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1476~1506)과
폐비신씨(1476~1537)의 무덤은 ‘묘’의 격식이다.
연산군과 거창 군부인의 묘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 바로 아래에는 태종의 후궁인
의정 궁주 조씨(義貞宮主趙氏)의 묘.
그 아래 연산군의 사위 능양위 구문경(具文璟)
'연산군의 딸' 휘순 공주(徽順公主)의 묘가 있다.
그가 사망한 후 민간에서는 독살설이 퍼졌다.
사망 당시에 연산군의 나이는 향년 31세였다.
深推物理勝雲空
暗度人間似夢中
饅糾功名徒誕妄
不如長醉賞群紅
세상사 매달려도 뜬구름만 못하다.
생각하면 인간사 꿈속만 같구나.
애써 좇는 공명 모두가 허망해.
꽃속에 파묻혀 취하니만 못하구나.
.................................
.................................
사후, 채청사, 채홍사를 파견해 8도의 말과 미녀를 징발.
장악원을 두어 기녀를 양성하고 서총대 유흥장을 만들면서
백성을 강제노역에 동원하여 민심이 돌아섰다는 오명을 쓴다.
원래, 연산군은 폐비윤씨의 성품을 닮아
재위 때에도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고
관혼상제, 허례허식 등의 절차를 간소화하여
절약된 국고로 자주국방 및 빈민구제에 힘썼다.
중종 실록을 살펴보면, 역사 왜곡의 흔적들이 있다.
연산군이 자신의 유흥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과
사냥터를 조성할 목적으로 철거민들이 발생했다는 대목.
연산군일기 재위 9년 11월 2일 기사에 의하면,
"궁 100척 이내 민가가 불가한 것이 조선의 국법.
이때가 겨울인 것을 감안해 철거민에게 집터 제공.
봄이 될때까지 기다려서 철거하고 보상급을 지급하라."
1505년(연산군 11년) 음력 6월 9일 신료들이 처음으로
헌천 홍도 경문 위무(憲天弘道經文緯武)라는 존호를 올렸으나
과분하다고 물리쳤지만, 차후 마지못해 존호를 받아들여 사용.
채청사와 채홍사를 파견
사헌부 홍문관 성균관 등을
기생 처소로 바꿨다고 전하는데,
이는 반정세력 측에 의한 기록이다.
당시 궁궐생들은 고려시대부터 가무악단.
연산군과 교감을 나눈 여인은 광한선과 월하매.
그리고, 연산군이 총애한 후궁은 장록수 뿐이었다.
연산군이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범했다는 인조반정 세력 측 주장.
박씨는 50대 노인이었고, 연산군은 30대 초반.
이 주장 역시 중종반정 이후
그들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연산군 사후에 조작된 것인듯 하다.
조선시대 내내 폭군과 패륜아의 전형으로
지탄받아오다가 1970년대 이후 재평가 여론.
과연, 그는 흥청망청 황음에 빠진 군주였을까?
..........................흥청(興淸)..............................
연산군 10년(1504)에 나라에서 모아들인 기녀(妓女).
매일 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으며
팔도 처녀와 말을 뽑고 각 고을에서 미녀와 기생들을 관리.
운평, 계평, 채홍, 속평 등 여러 단계 호칭으로 분류.
이들 가운데 제일 나은 자들을 '흥청'이라고 하였는데
연산을 성적으로 만족시켜준 여자는 '천과흥청'이라 했다.
운평들 중에 처음에 온 운평들은 "가흥청(假興淸)"
가흥청을 승격시킨 '흥청망청' 주인공 "흥청(興淸)"
이 때 뒤에 들어온 자들은 "속홍(續紅)"이라 불렀다.
흥청 중 임금 곁에서 모시는 자는 지과(地科)흥청,
잠자리를 같이 하는 자는 천과(天科)흥청이라 구분.
장악원을 개명한 "계방원(繼芳院)"에서 운평을 관리.
흥청들은
원각사 내 연방원
궁궐 내 취홍원에 거처.
그밖에 종실 사대부 자택을 빼앗아
함방원, 뇌양원, 진향원이라 하였고
그곳에 흥청과 광대들을 살게 하였다.
1505년 삼월 삼짓날, 경복궁 후원에서
자순대비를 모시고 외명부를 초대한 잔치.
외명부들은 옷깃에 지아비 성명을 써서 달았다.
이 자리에는 운평 천여명이 동원되었는데
주지육지처럼 술 고기 춤 노래가 흐드러지자
이때 잔치를 사람들은 '흥청망청'이라고 했단다.
연산군은 채홍준사(採紅駿使)를 통해
8도의 미녀와 좋은 말을 찾아내게 하고,
채청사(採靑使)를 보내 어린 처녀들을 색출.
그리하여, 흥청은 '나라를 망치는 청'이란 뜻.
'흥' '망' 두 글자로 비웃는 사자성어 興淸亡淸.
흥에 겨워 거드럭거리는 모양을 비유한 흥청망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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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재위 당시 경국대전 기록에 의하면
8도 선상기 150명, 연화대 10명, 의녀 70명.
삼악에 대하여 조정 신료들과의 접촉을 차단.
연산군 11년 1월에
부모의 장수를 비는 헌수연을
제외하고는 삼악을 국가행사에만 동원.
3악을 국가 최고의 예술가로 예우하였던 것.
조정 중신들의 사가에서 연회를 열때
3악 흥청을 파견해 흥을 돋구는 것이 관행.
연산군은 흥청 대신 장악원 남자 악사 만 파견.
그 이전까지 흥청은
조정 중신들의 예비 첩.
하여, 이에 반발한 조정 중신들.
"운평무(運平舞)란 대궐로 뽑혀가지 못하거나
가지 않으려고 숨고 피신하면서 고을에 남게된
일반기녀인 운평들의 애틋한 삶을 표현한 춤이다."
"지과흥청무(地科興淸舞)란 성은을 입지 못한 흥청이
왕의 시선을 끌고자 꽃(빨강수건)과 나비(노랑수건)가
어우러져 노는 형상을 매혹적인 자태로 표현한 춤이다. "
"왕의 총애를 받지못한 여러 흥청들이
왕의 시선을 끌기위해 교태를 섞어가며
추는 춤을 여럿이 같이 추는 군무로 재구성.
성은을 받고 싶은 흥청들의 마음을 춤으로 표현."
'궁궐 3악' 흥청을 독점하여
'조정 3사'의 반발을 산 연산군,
원래, 나비와 벌을 유혹하기 위한 온갖 자태의 꽃과
꽃잎들을 흩날리는듯한 춤이 운평화화무(運平花花舞).
이를 형상화 하여 발전시킨 선상기 춤이.,진주교방굿거리.
우리나라 춤의 기본적인 성격이 농후하며,
권번 교육과정에서 모든 춤의 기초로 사용.
조선 초부터 궁궐 군무였던 진주교방.,8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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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청무(興淸舞)'는 연산군 즉위 초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8도 흥청들의 춤.
이때 8도 각지에서 동원된 기생 '운평'(運平).
흥청무는 갑자사화의 피비린내를 정화하는 춤으로
'삿되고 더러운 것을 씻고 맑은 기운을 일으키라.,흥청.
그러한 의미가 담겨있는 춤을 '흥청무'(興淸舞)라 하였다.
원래, 흥청이란 태평성대 국가행사 여성 국악인.
그당시 흥청은 궁중 음악을 연주하는 관기들이었다.
장악원에서 학문과 예절, 음악적 소양을 닦아야 했다.
즉, 장악원은 흥청을 배출하는 교육기관이고
국가행사를 위한 기관일뿐, 유흥기관은 아니었다.
조선 초부터 대한제국 멸망까지 함께한 유서깊은 기관.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무수리.,"동이~"
"동이~"는 한때 장악원 소속.,무수리.
훗날, 그 아들이 제21대왕 영조로 즉위.
연산군의 후궁이었던.,장록수(? ~1506 :중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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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무에 능하고 미모와 애교가 특출하였다.
원래는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사비(私婢)로서
대군의 가노(家奴)에게 시집가 자식 하나를 두었으나
훗날 연산군에게 발탁되어 입궐하여 총애를 받았던 후궁.
나이 30이 되었어도 용모가 뛰어나 숙원에 봉작되어
금은 주옥 노비 전택(田宅) 등을 하사받았던 후궁으로
연산군 12년(1506) 친정의 가족들을 모두 양인 신분이 된다.
연산군이 심히 울적하거나 격노해 있을 때라도
그녀를 보면 희색을 띨만큼 교태가 있고 교활하여
1506년 중종반정으로 참형에 처해지고 가산이 적몰.
"백돌아~" 연산군 아명을
공개석상에서도 거침없이
부를 수 있었던 유일한 여성.
모정에 굶주려 있던 연산군을
'어린아이 다루듯 했다.'는 후궁.
조선시대 4대 요부로도 손꼽힌다.
조선왕조 519년 역사 상에서
가장 많은 부인을 거느렸던 왕들은
태종 12, 성종 12, 중종 8, 선조 8, 철종 8.
그러나, 적은 부인을 거느렸던 세조2, 연산2.
흥청망청 색광 폭군으로 평가되었던
역사 기록에 비해 부인은 적었던 연산.
특히, 중종의 8부인과 숫자 상 비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