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에서 보는 창의 - 古制라는 단어 398회 등장… 試驗·실용 단어도 많아 옛 성공사례 찾아 배워라… 실용정신을 강조한 임금 우린 중국과는 다르다 - 中華사상 물든 당시엔 그야말로 혁명적인 선언 세종대왕의 '다름 정신' 창의 리더십의 시작이다
▲ 박현모 한국형리더십개발원 대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창의적인 시대는 세종 시대라는 데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500년도 전에 어떻게 그런 창의적 기풍이 조성됐을까, 창조의 저력은 어디서 우러나왔을까.
'세종실록'에 자주 나온 말들에서 그 단초를 찾아봤다.
첫 번째로 주목되는 것은 '고제(古制)'라는 말이다. '과거의 사례'라는 뜻인데, 세종실록에 398회 나온다. 이는 그 이전의 태종실록 91회는 물론이고, 그 뒤 세종과 재위 기간이 비슷했던 성종실록 129회나 중종실록 54회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세종이 요즘 말로 해서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최고의 성공 사례)'를 찾아서 배우라고 유난히 강조했기 때문이다. 정책 수립, 인재 쓰기, 진법(陣法) 등 여러 분야에서 세종은 고제를 찾으라고 했다.
예컨대 세종은 1432년에 박아생이라는 사람이 "공자를 높여 문묘(文廟)를 만든 것처럼 태공망(太公望), 즉 주나라 문왕(文王)의 스승 여상(呂尙)을 제향하는 무묘(武廟)를 만들자"고 제안하자 집현전에 과거 사례를 조사해 올리라고 지시했다.
재밌는 것은 "옛 사례를 조사해 오라"는 세종의 지시가 늘어나자 집현전 학사들은 아예 경복궁 경회루 남쪽에 장서각이라는 도서관을 짓고 국내외의 책, 심지어 아랍 지역의 책까지도 구입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장서각은 무수한 과거 사례집의 집결처였던 셈인데, 세종 때 집현전 학사를 지낸 서거정에 따르면, 책들이 너무 많이 쌓여서 접근이 어려울 정도가 되자, 부문별로 모으고 표시를 해서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열람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한다.
▲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세종은 또 농업 경영서 농사직설을 제작하기 위해 '각 도(道)의 관찰사에게 명해 여러 지방의 숙련된 농부(老農)들을 찾아가 방문'하게 했으며, 의방유취나 향약집성방 같은 의학 서적을 만들기 위해 '의관(醫官)을 선발해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가서 약방문에 관한 책을 널리 구하게' 했다. '어떤 일을 기획할 때 (왕께서는) 반드시 옛것을 스승 삼았다'는 그에 대한 사후(死後)평가는 세종의 일하는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종실록엔 '시험(試驗)'이란 말도 자주 나온다. 시험의 의미를 담은 다른 말도 매우 많다. 농사직설 서문에 정초(鄭招)는 '농토에서 충분히 시험해 본 증험을 가지고 갖추어 아뢰었다'라고 하고 있으며, 세종 스스로도 '바람에 견디는 볍씨를 관청에 심어서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는 '기리고(記里鼓)를 시험해 사용'하기도 했다. 기리고는 왕의 수레가 1리(里)를 갈 때마다 나무인형이 스스로 북을 치게 하여 자동으로 거리를 측정하는 기구였다.
특히 무기에 관한 실험을 유독 자주 했는데, 영화 '신기전'의 배경이 되기도 한 염초(화약 무기 제조에 쓰이는 물질)의 대량 생산을 위해 종래의 향염초 대신 당염초를 구워 만드는 법을 시험해서 생산량을 배가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분위기였기에 독충에서 나오는 독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스스로에게 중독 시험을 해 보는 황자후(黃子厚) 같은 뛰어난 의원이 나오기도 했다.
'세종실록'엔 '실용(實用)'이란 뜻을 가진 말도 자주 나온다. 세종은 재위 중반부에 "내가 경서(經書)와 역사책 중에서 보지 않은 것이 없지만, 나이가 든 지금까지도 책을 읽는 것은 글을 보는 동안에 생각이 일깨워져서 여러 가지로 정사에 시행되는 것(施諸政事)이 많기 때문"이라고 하여 독서의 목적이 정책의 시행에 있음을 밝혔다. 농사직설을 편찬할 때도 농사에 필요한 것만 뽑아 편집하고, '농사 외에 다른 설(說)은 섞지 아니하고 간략하고 바른 것에 힘을 쓰라'고 지시했다.
세종의 실용정신은 한글을 창제할 때 뚜렷하게 드러났는데, 1446년에 훈민정음을 반포하면서 그 목적을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위의 세 가지, 즉 고제와 실험과 실용이라는 말을 아우르면서 그것을 창조로 이끌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는 태도가 있다. 바로 '다름'을 존중하는 자세이다. 세종실록에 '이(異)'와 '별(別)'은 태종실록의 3배 정도 자주 등장한다.
'오방(五方)의 풍토가 같지 아니하여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이 각기 적성이 있어, 옛 글과 다 같을 수 없다'는 농사직설 서문이 한 예이다. '대개 지세(地勢)가 다름으로써 풍습과 기질이 다르며, 풍습과 기질이 다름으로써 호흡하는 것이 다르다'면서 우리에게 맞는 발음 표기를 위해 '동국정운'이라는 운서(韻書)를 최초로 펴낼 때도 '다르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훈민정음 서문 역시 다름의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세종이 다름을 강조한 것은, 그 당시 대다수 지식인들의 생각이 선진 문명국인 중국의 문자와 제도를 따라서 시행해야 한다는 중화주의에 깊이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분위기에서 '우리는 중국과 다르다'는 세종의 선언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세종은 이같은 혁명적인 생각을 갖고, 다른 시각에서 과거 사례를 모으고, 새롭게 실험했으며,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인재들을 이끌어갔다. 창의란 것은 말로만 떠든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