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이 다가오고 있다. 해마다 벌써..라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올해는 워낙에 개막일이 1달 정도 당겨졌으므로 더욱 그렇게 느껴질 법하다. 하긴 1회 때는 여전히 한 낮의 햇살이 따가웠던 9월 중순에 열렸었다. 이런. 1회 때 이야기를 한가하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해마다 상영작의 종류와 편수가 늘어만가는 PIFF가 올해는 역대 최다인 총 244편의 영화가 상영된다는 것이다. 이 발표를 듣는 순간, 머릿속은 대체 이 영화들을 어떻게 다 섭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쌩쌩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답은 나와있다. 아무리 갖은 수를 쓴다고 해도 몸이 열 개가 아닌 이상 9일 동안 열리는 영화제 기간 동안 이 영화들을 다 섭렵하는 것은 당연히, 그리고 누구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주어진 시간과 돈으로 얼만큼 멋들어진 시간표를 짜느냐가 성공적인 영화제 관람의 최대 목표일 터. 확실한 주관과 약간의 귀동냥. 그리고 해외 영화제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다면 누구도 부럽지 않을 나만의 알찬 영화제 시간표를 짜낼 수가 있다. 시간표를 짜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준인데, 사실 이것만 있다면 왠만한 영화들은 미련 없이 시간표에서 제외시킬 수가 있다. 그래서 씨네서울에서는 바로 이 기준 하에 2003 PIFF에서 눈에 띠는 영화들을 몇 편 골라내 보았다. 기준을 정하기 전에 결국 깨지고 말겠지만 그래도 한 번 세워두는 게 좋을 원칙 몇 가지가 있는데, 대충 적어보면 이렇다.
하나. 꼭 봐야할 영화 대여섯 편은 미리 빼놓는다
둘. 죽을 때까지 부산국제영화제가 아니면 못 볼 것 같은 영화도 몇 편 골라놓는다
셋. 개봉의 기미가 보이거나 이미 개봉 날짜가 잡힌 영화들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넷. 어디어디영화제 수상작이라고 무조건 믿지 마라.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지도 모른다
다섯...
이러다간 결국 시간표 짜는 기준까지 나와버리고 말 것 같으니까 원칙 같은 건 여기까지 뽑기로 하고, 그럼 슬슬 244편이란 영화의 바다에서 빠지지 않고 잘 헤엄치기 위한 워밍업을 해볼까.
하루는 해운대 메가박스에서만, 다른 하루는 남포동에서만 본다
- 메가박스 측 대표 <폭풍의 계절>. <글렌 굴드에 대한 32편의 단편 영화>
- 남포동 측 대표 <몽상가들>.<미국의 광채>.<머나 먼>.<아타나주아>
|
작년 처음 PIFF에선 해운대에 새로 생긴 메가박스의 몇 개관만을 상영관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올해는, 8관을 제외한 모든 관을 PIFF 상영관으로 할애하고 있다. 해운대 근처에 해외 게스트들이나 각종 영화 관계자들이 많이 묵고 있는 것을 감안한 탓일까. 작년 메가박스와 남포동을 오간 사람이라면 영화와 영화 사이에 왔다갔다 한다는 것이 얼마나 촉각을 다투는 일인가를 경험했을 것이므로, 영화 시작을 놓치는 불상사를 당하지 않기 위해선 하루는 메가박스에서만, 다른 하루는 남포동에서만 하는 식으로 시간표를 짜는 것이 최선책일 듯 싶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양 쪽 극장가에서 한 번씩 상영되는데, <폭풍의 계절>이나 <글렌 굴드에 대한 32편의 단편 영화>처럼 아예 메가박스에서만 두 번 상영하는 영화도 있으니 유의할 것. <글렌 굴드에 대한 32편의 단편 영화>는 캐나다 특별전 섹션으로 상영되는 영화로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글렌 굴드의 초상을 32편의 짧은 영화들로 표현해낸 작품이다. 단순하게 스토리로 이끌어가는 영화가 아니라서 난해하거나 지루할수도 있지만, 그 만큼 글렌 굴드에 대한 깊은 성찰이 돋보이는 연출이 인상적. 감독은 <레드 바이올린>의 프랑수아 지라르다.
반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신작 <몽상가들>이나 2003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미국의 광채>. 역시 2003 깐느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이나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머나 먼>. <패스트 러너>란 영어제목으로 유명한 <아타나주아>등은 모두 남포동 극장가에서만 감상이 가능한 영화들이다. <몽상가들>은 최근 들어 활동이 주춤했던 베르나르도 베르툴루치의 최신작으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떠올리는 설정과 젊은 배우들의 헌신적인(?!) 누드연기가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위의 원칙 2번에 해당하는 <아타나주아>는 시간만 된다면 꼭 챙겨봐야 할 듯. 174분이란 런닝 타임도 범상치 않지만 에스키모 유목민들의 권력다툼이라는 내용 또한 만만치 않다. 2001 깐느 영화제 황금카메라 상을 수상하였다.
GV 가 잡힌 영화를 먼저 본다
영화제에서의 GV 란, 그 영화제의 꽃이랄 수 있다. 촌스런 표현이지만 그 만큼 일반 관객들에게 영화제의 참 맛을 느끼게 해주는 코너라는 뜻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감독. 배우 및 관계자들과 즉석에서 Q&A를 나누는 것은 부산까지 내려온 전국의 영화광들에게 영화제의 생생하고 두근거리는 경험을 경험케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언제나 그렇듯 많은 관객이 몰리는 주말에 GV 가 많이 열리는데, 올해는 특히 메가박스에 거의 90프로 이상의 GV가 몰려있기 때문에 GV에 목숨거는 관객이라면 거의 해운대에서 부산영화제를 즐기게 될 것 같다.
하루에 적어도 대 여섯껀의 GV가 마련되어 있지만, 올해는 특히 두 편의 작품을 들고 부산을 찾을 쿠로사와 키요시 감독과의 대화는 특히 기대가 된다. 2001년 전주에서 특별전을 통해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가지게 된 쿠로사와 키요시의 위치를 영화제 측에서도 아는지 이번 PIFF 개막작인 <도플갱어>와 <해파리>에 모두 GV를 마련하고 있다. 특히 <해파리>는 2003 깐느 영화제 경쟁작에 출품, 좋은 평을 얻었으며 주인공 아사노 타다노부 역시 올해 게스트로 참석한다.
그런가 하면 <명일천애>도 빠트릴 수 없는 작품 중 하나. 감독 유릭와이는 그동안 PIFF에서 상영되었던 <소무>와 <임소요>등의 영화에서 촬영 감독을 맡았고, <명일천애>는 그의 감독 데뷰작이다. 이래저래 PIFF와 많은 인연을 맺었던 유릭와이의 작품인 만큼 아마 관객들과 하고 싶은 얘기도 많지 않을까.
3번 상영되는 영화들을 먼저 본다
- 데이빗 맥킨지 <영 아담> 3일 오후 8시/ 5일 오후 2시/ 9일 오후 2시
- 미카엘 하네케 <늑대의 시간> 5일 오후 5시/ 7일 오후 8시/ 9일 오후 8시
- 피터 그리너웨이 <털시 루퍼의 가방> 3일 오후 2시/ 5일 오후 5시/ 7일 오후 2시
- 마이클 윈터바텀 <인 디스 월드> 3일 오후 2시/ 5일 오후 5시/ 9일 오후 5시
- 구스 반 산트 <엘리펀트> 4일 오후 8시/ 6일 오후 5시/ 9일 오후 8시
|
한 작품 당 2번의 상영을 할애하고 아주 드물게 3번의 상영만을 허용하던 PIFF는 좀 더 많은 화제작들을 3번 상영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3번이나 상영하니까 볼 수 있는 기회야 널널하겠지 싶어 미리 예매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큰 오산. 왜냐면 이런 영화들일 수록 분명 3번이나 상영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시 위의 감독 이름과 타이틀을 보면 알겠지만, 거의 올해 세계적으로 주목받거나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탄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다른 영화들이 모두 이름 있는 감독들인데 반해 생소한 데이빗 맥킨지는 영국 출신의 감독으로, 단편 영화들로 호평받다가 2002년 로 극영화 데뷰하였으며, <영 아담>은 그의 두 번째 작품이다. 글래스고우와 에딘버러를 돌아다니며 막노동 일을 하는 조 테일러의 여성편력을 그린 이 작품은 <물랑루즈>에서의 로맨틱한 시인에서 천하의 난봉꾼으로 변신한 이완 맥그리거의 모습에 기대를 걸만한 작품. 물론 올 깐느에서 감독상과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와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인 디스 월드>는 필견이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PIFF를 다시 찾은 감독들의 영화를 먼저 본다
- <나인 소울즈> 감독 토요다 토시아키 - 2002년 <우울한 청춘> 상영
- <하드 럭 히어로> 감독 사부 - 2002년 <행복의 종> 상영
- <윌버> 감독 론 쉐르픽 - 2001년 <초급 이태리어 강습> 상영
- <그의 형제> 감독 파트리스 셰로 - 2001년 <인티머시(개봉명:정사)> 상영
- <안녕, 용문객잔> 감독 차이 밍량 - 1997년 <하류>. 1998년 <구멍>. 2001년 <거기는 지금 몇시니>.<청소년 나타> 상영
- <오후 5시> 감독 사미라 마흐말마프 - 2000년 <칠판>.<사과>. 2002년 <2001년 9월 11일> 상영
- <자토이치> 감독 키타노 타케시 - 1997년 <하나비>. 1999년 <키쿠지로의 여름>. 2000년 <브라더>. 2002년 <돌스> 상영
|
한 감독의 영화를 이어서 본다는 것은 영화 감상에 무척 큰 영향을 미친다. 한 편보다는 두 편이 감독의 영화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게 당연하니까 말이다. PIFF에는 언제나 상영되는 단골손님 같은 감독들의 작품이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PIFF 프로그래머들이 믿는 감독들이고 영화라는 뜻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키타노 타케시는 PIFF가 키운 스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아직 일본 문화가 전면 개방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키타노 타케시의 영화가 알려진 이유도 모두 PIFF의 공이 아닐까. 이번에도 어김없이 상영되는 <자토이치>는 깐느에서 호평 받고 얼마 전 폐막된 캐나다 토론토 영화제에서는 People's Choice 상을 받았는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며 예매에 매달렸을 영화 중 하나다. 사무라이극처럼 보이지만 사무라이극 같지 않은, 키타노 타케시 다운 황당개그와 뮤지컬까지 짬뽕되어 전대미문의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소문이 자자한 작품이다. 주연은 키타노 타케시 이외에 역시 PIFF 단골 배우인 아사노 타다노부.
키타노 만큼이나 부산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감독 중 하나가 차이 밍량. PIFF에서 애정을 가지고 대만 영화를 다양하게 소개해 온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차이 밍량은 그 중에서도 국보급 대접을 받는 인사 중의 인사. 국내에서 정식 소개되지 않은 차이 밍량의 신작은 물론 작년 대만 특별전에선 그의 초기작인 <청소년 나타>까지 다 소개되기도 했었다. 올해 차이 밍량이 들고 온 작품 <안녕 용문객잔>은 사라져 가는 옛 영화문화에 대한 차이 밍량의 따뜻한 소묘와도 같은 영화다. 물론, 그는 올해도 PIFF에 얼굴을 내밀 예정이다.
사족.
물론 위의 기준과 리스트들이 완벽한 가이드라던가 절대적인 잣대가 될 수 없음을, 필자도 잘 알고 누구보다 읽는 사람들이 잘 알 것이다. 영화제란 어차피 자신만의 것. 아무리 많은 영화가 상영되더라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영화의 바다 안에서 허우적대지 않고 유유자적 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끔 물을 먹는 일이 있더라도, 지금 내가 떠있는 곳이 영화의 바다라는 그 사실만으로 그런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럼 이만. 2003 PIFF 영화의 바다로 풍덩.
강혜수 noodles@cineseoul.com
첫댓글 올해는 더욱 더 풍성해지고..해마다 규모도 커지는 것 같군여...이 번엔 참석 못해서 유감...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