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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86~289)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286>쑨원, 펑위샹과 합작 위해 베이징行 도착 후 자리보전
|제287호| 2012년 9월 9일
▲“뜻이 있으면 이루고야 만다”(가운데 위),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오른쪽), “동지들은 여전히 노력해라”가 내걸린 쑨원의 빈소를 지키는 가족들. 오른쪽부터 손위 동서 쿵샹시(孔祥熙), 처남 쑹즈원(宋子文), 쑨원의 아들 쑨커(孫科), 사위 따이언싸이(戴恩賽). 쑹칭링(宋慶齡), 쑨즈핑(孫治平·쑨커의 장남), 쿵링이(孔令儀·쿵샹시 장녀), 쑨즈창(孫治强·쑨커의 차남), 쑹메이링(宋美齡), 쑹아이링(宋靄齡). 장제스(蔣介石)는 쑹메이링과 결혼 전이라 가족에 끼지 못했다. [사진 김명호]
1924년 9월 중순 봉천(奉天)군벌 장쭤린(張作霖)이 병력 17만을 산하이관(山海關)으로 이동시켰다. 산하이관은 수도 베이징의 관문이나 다름없었다. 총통 차오쿤(曹琨)은 우페이푸(吳佩孚)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두 사람은 지금의 허베이(河北)성 일대를 근거지로 한 직례(直隷)파의 영수 격이었다.
제2차 봉직전쟁(奉直戰爭)의 막이 올랐다. 25만 대군을 거느린 우페이푸는 산하이관과 러허(熱河)에서 장쭤린의 봉천군과 치고받았다. 베이징이 허술해진 틈을 같은 직례파 군벌 펑위샹(馮玉祥)이 파고들었다. 10월 23일 심야에 병력을 몰고 회군한 펑위샹은 총통부를 포위하고, 차오쿤을 연금시켰다. 소문이 퍼지자 전선에 있던 우페이푸의 병력은 와해됐다. 우페이푸는 전쟁 할 맛이 안 났다. 초라하기가 패잔병보다 못한 병력을 이끌고 바다로 나갔다. 뱃길을 이용해 후베이(湖北)성에 안착하자 정신이 돌아왔다.
정변에 성공한 펑위샹은 차오쿤을 총통직에서 퇴위시켰다. 자금성에 살며 외국 국가원수 예우를 받던 마지막 황제 푸이도 궁궐에서 내쫓았다. 군대 명칭도 국민군(國民軍)으로 바꿔버렸다. 펑위샹은 남쪽의 혁명세력을 대표하는 쑨원(孫文)에게 전보를 보냈다. 내용이 밥상 기다리는 거지보다 더 절박했다. “국민들은 온갖 눈치 보며 생글거리기 잘하고, 말장난이나 일삼는 무리들에게 농락당하기 쉽다. 국가대계는 현명하고, 무모할 정도로 의지가 강한 사람들끼리 머리를 맞대야 한다. 나는 선생이야말로 민국의 창조자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열정과 기백을 전 국민이 추앙한 지 오래다. 빨리 북쪽으로 와서 우리를 어루만져주기 바란다.”
광저우(廣州)의 대원수부(大元帥府)에 있던 쑨원은 북행(北行)을 결심했다. “북방은 호랑이 굴이다. 장쭤린의 존재가 찜찜하다. 무슨 흉악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막는 사람이 많았다. 쑨원은 “나도 저들 못지않게 흉악한 사람”이라며 안심시켰다. 부인 쑹칭링도 걱정이 태산 같았다. 정국이 워낙 복잡해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쑨원의 건강이 문제였다. 남편의 기력이 전만 못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남들에게 말했다간 속으로 너 때문이라고 흉볼게 뻔했다. 가끔 통증을 호소했지만 주변에 그 정도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11월 10일 쑨원이 북상선언(北上宣言)을 발표했다. “제국주의와 봉건군벌의 정치적 주장에 반대한다. 국민회의 소집을 요구하고, 중국의 통일과 건설을 도모하겠다.” 전국이 환호했다. 선언 3일 후 쑨원은 쑹칭링과 수행원 20명을 데리고 광저우를 떠났다. 쑨원은 결혼한 날부터 가는 곳마다 쑹칭링을 데리고 다녔다. 전쟁에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오죽 심했으면 “전쟁터에 여자가 어른거리면 재수 없다. 병사들 사기에도 문제가 많다”며 만류하는 측근이 있을 정도였다. 이번에는 쑹칭링의 동행을 막는 사람이 없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누가 봐도 쑨원은 환자 티가 났다.
1925년 1월 1일, 베이징역에 도착한 쑨원을 10만 인파가 에워쌌다. 중도에 온갖 행사를 치른, 47일간의 여행은 쑨원을 중환자로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시국 논의는커녕 몸도 가누지 못했다. 3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287>쑨원 사망 56년 만에 공산당 입당한 쑹칭링 |제288호| 2012년 9월 16일
◀1924년 1월 1일, 쑨원·쑹칭링 부부는 2년 전 목숨을 구해준 경호원들에게 직접 훈장을 달아줬다. 탄후이촨과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사진 김명호]
쑨원 사망 56년이 지난 1981년 5월 14일 밤, 중국 국가 부주석 쑹칭링(宋慶齡)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고열로 온몸이 펄펄 끓었다. 이튿날 새벽, 잠시 정신이 들자 병문안 온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부인 덩잉차오(鄧潁超)와 중공 정법위원회 서기 펑전(彭眞)에게 입당(入黨) 의사를 밝혔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 반복했다.
쑹칭링의 입당 요구는 처음이 아니었다. 1958년 저우언라이에게 입당을 자청했을 때 “한동안 당 밖에 있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유리하다. 입당을 안 해도 우리는 모든 일을 수시로 보고하고 고견을 듣겠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어찌나 훌쩍거리며 울던지 옆에 있던 류샤오치(劉少奇)가 혼비백산한 적이 있었다.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반세기 동안 형제들과 결별까지 해가며 중공을 지지한 쑹칭링의 마지막 소원을 못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정신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해주자는 공감대가 전화 몇 통으로 형성됐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었다. 몇 시간 후 중공 중앙 정치국은 긴급회의를 열었다. “열렬히 환영한다”며 쑹칭링의 입당을 의결했다. 그날 밤, 중공 중앙과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代), 국무원은 “중국 혁명의 선구자 쑨원 선생의 부인이며 국제적으로 공인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여성, 쑹칭링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동시에 발표했다.
다음 날 오전, 권한은 있어도 책임은 없는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쑹칭링을 찾아왔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 중앙은 선생의 의견을 존중한다. 만에 하나, 예측치 못한 일이 발생할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겠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주기 바란다. 아무리 사소한 내용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
쑹칭링은 “유구한 역사에 비하면 인간의 생명은 보잘것없는 것”이라며 ‘국제문제와 인류의 진보, 아동 교육의 중요성’ 외에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타이완과 미국에 있는 동생과 친척들이 장례식에 오겠다면 허락해 달라는 얘기를 할 법도 했지만 입에도 올리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죽음을 앞둔 귀부인의 자존심에 혀를 내둘렀다. 같은 날 오후,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쑹칭링에게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 칭호를 수여하자”는 중공의 건의를 통과시켰다.
덩샤오핑을 필두로 국가주석 리셴넨(李先念), 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 총리 자오즈양(趙紫陽), 군 최고원로 네룽전(聂榮臻), 친자식이나 다름없는 랴오중카이(廖仲愷)와 허샹닝(何香凝)의 아들 랴오청즈(廖承志) 등 최고위급 인사들이 신중국 최초의 명예주석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병실에 줄을 이었다. 축하를 겸한 작별 인사나 다름없었다.
쑹칭링의 병세는 매시간 전파를 탔다. 전 세계에 널려 있는 중국인들은 뉴스를 들으며 숨을 죽였다. 장제스(蔣介石) 사망 후 뉴욕에 머무르던 동생 쑹메이링(宋美齡)과 타이완 총통 장징궈(蔣經國)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세상 떠날 날이 임박했다는 것을 안 쑹칭링은 외부세계와 마지막 대화를 시도했다. 베이징 교외 샹산(香山) 언저리에 사는 탄후이촨(譚惠全)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몇 달 전, 덩잉차오가 쑹칭링을 대신해 탄후이촨의 가족들과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위로를 삼는 수밖에 없었다.
20년 전, 88세로 세상을 떠난 탄후이촨은 쑨원·쑹칭링 부부와 기막힌 사연이 있는 사이였다. (계속) <288>탄후이촨(譚惠全), 쑨원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밀착 경호 |제289 | 2012년 9월 23일
▲1958년 겨울,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민혁) 전국대회에 나타난 탄후이촨(왼쪽). 민혁 부주석이었던 항일명장 차이팅카이(가운데)와 초기 중공당원 샤오리즈(오른쪽)는 탄후이촨을 신해노인(辛亥老人)이라고 불렀다. [사진 김명호]
탄후이촨(譚惠全)은 쑨원의 충직한 경호원이었다. 쑨원은 생전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탄후이촨의 극진한 보호를 받았다.
1922년, 광둥(廣東)성 광저우에 총통부를 차린 쑨원은 통일전쟁(北伐)을 시작했다. 성장 천중밍(陳炯明)은 지방자치의 신봉자였다. 북벌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광둥군 총사령관을 겸하고 있던 천중밍은 쑨원을 없애기로 작정했다. 휘하에 1만5000명가량의 무장병력이 있었다. 쑨원의 군대는 거의 전선에 나가 있었다.
쑨원은 중국인답지 않게 사람을 잘 믿는 습관이 있었다. “의심 많아서 손해 볼 것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무시할 때가 많았다. “의심은 죄악이다. 단 국민들이 국가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워낙 잘 속이기 때문이다.”
“광저우를 떠나라. 천중밍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일러바치는 사람이 있어도 믿지 않았다. 확인은커녕 “반란이 발생해도 광저우를 떠나지 않겠다”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6월 15일 밤, 광둥군이 총통부와 쑨원의 거처를 포위했다. 16일 새벽 2시, 총통부 비서와 군 연락책이 특무대장과 함께 쑨원의 방문을 도끼로 내리쳤다. 잠결에 피신을 강요당한 쑨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급하게 쑹칭링을 흔들어 깨웠다. “큰일 났다. 빨리 도망가자.” 잠시 후 쑨원의 후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후한민(胡漢民)의 동생이 달려와 합세했다. 쑹칭링은 이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까치발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초로의 경호원이 눈에 들어오자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쑹칭링의 진가가 들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에 나 같은 건 없어도 된다. 너는 없으면 안 된다.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먼저 피신해라.” 쑨원은 의사 복장을 하고 세 사람을 따라 나섰다.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이 자주 하던 “정 급할 때는 여자 치마폭에 숨어라. 그것처럼 안전한 게 없다”는 말이 실감 나는 밤이었다. 그간 부하들 앞에서 큰소리친 걸 후회했다는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쑨원의 탈출을 먼발치에서 지켜본 사람이 구술을 남겼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요란했다. 다섯 명이 총통을 에워싸고 나갔다. 총통은 백색 가운에 청진기 목에 걸고 약 상자를 들고 있었다. 와중에 응급 환자를 치료하러 나가는 사람들 같았다.”
다섯 명 중 네 명은 국민당 당사(黨史)에 이름을 남겼다. 나머지 한 사람, 탄후이촨은 사건 82년이 지난 2006년에 와서야 쑹칭링의 유물을 정리하면서 신원이 밝혀졌다. 1961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아무런 직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중(喪中)의 쑹칭링. 1925년 3월, 베이징 티에스즈골목(鐵獅子胡同) 5호. 국제사회에서 ‘웰링턴 쿠’라고 불리던 외교부장 구웨이쥔(顧維鈞)의 집이었다.
인간사가 다 그렇듯이 탄후이촨과 쑨원 부부의 인연도 우연히 시작됐다. 1911년 10월, 어쩌다 보니 신해혁명에 졸병으로 참여했고, 쑨원이 미국에서 귀국하던 날 주변에 칼 차고 왔다갔다한 게 다였다. 쑨원은 어수룩해 보이는 탄후이촨을 총애했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같은 마을 태생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쑹칭링의 신임도 남달랐다. 늦은 결혼을 한다는 소문을 접하자 직접 찾아가 옷과 철제금고를 선물할 정도였다.
쑨원에게 피신을 권한 네 사람은 단순한 비서들이었다. 말은 청산유수였지만 전쟁 경험이 없고 무기도 다룰 줄 몰랐다. 총알이 빗발치는, 이승과 저승이 종잇장 하나 차이인 상황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탄후이촨은 이들과 달랐다. 사격은 백발백중이었고 못하는 무술이 없었다. 현지인이라 광둥어에 능숙했고 지리에도 밝았다. 생김새도 유리했다. 나이가 많고(당시 49세) 체격이 왜소해 군인 티가 나지 않았다. 이날 쑨원은 탄후이촨 덕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1925년 3월, 쑨원이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난 후에도 탄후이촨은 쑨원의 영구(靈柩)를 떠나지 않았다. 2년 후, 엉뚱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베이징은 봉천군벌 장쭤린(張作霖)의 천하였다. 1927년 말 봉천군벌 확대회의가 열렸다. 장제스의 국민혁명군(북벌군)에게 위협을 느낀 장쭝창(張宗昌)이 대담한 발언을 했다. “베이징 교외 샹산(香山) 비윈쓰(碧雲寺)의 금강보좌탑(金剛寶座塔)인지 뭔지에 안치된 쑨원의 시신을 없애버리자.” 난징에 쑨원의 묘지를 마련한 북벌군이 국부 쑨원의 시신을 모실 날이 임박했다며 기세가 등등할 때였다.
장쭝창은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부하들을 몰고 비윈쓰에 들이닥쳤다. 쑨원의 영구에 삿대질을 해댔다. “평생 혁명 타령만 해 대더니 꼴좋다. 죽어서 탑 속에 갇힐 주제에.” 나이를 헤아리기 힘든, 초라한 모습의 탄후이촨이 노려보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계속) <289>탄후이촨, 쑨원 유해 관에 담아 깊은 동굴로 피신 |제290호| 2012년 9월 30일
▲국민정부 시절 중국 최고 권력자들의 야유회. 장쉐량(왼쪽 첫째)은 쑹즈원(왼쪽 둘째), 장제스(왼쪽 여섯째), 쿵샹시(왼쪽 일곱째) 세 가족과 친분이 두터웠다. 쑹씨 세 자매 중 쿵샹시의 부인 쑹아이링(왼쪽 넷째)과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왼쪽 다섯째)은 함께 어울렸지만 쑹칭링은 쑨원 사후 자매들과 결별하다시피 했다. 왼쪽 셋째는 장쉐량 부인 위펑즈. [사진 김명호]
장쭝창(張宗昌)은 봉천군벌 중에서 거친 축에 속했다. 봉천파 영수 장쭤린(張作霖) 부자라면 모를까, 쑨원의 유해를 없애 버리겠다는 개고기 장군(장쭝창의 별명)을 꺾을 사람은 중국 천지에 없었다. 영구를 지키던 탄후이촨(譚惠全)은 쑨원의 아들 쑨커(孫科)에게 달려갔다. 남편의 유지를 계승하겠다며 모스크바로 떠난 쑹칭링과는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다.
탄후이촨은 장쭤린의 장남 장쉐량(張學良)이 쑨원이 보낸 휘호를 받고 몸 둘 바 몰라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쑨커에게 장쉐량을 소개만 시켜 달라고 청했다. 해질 무렵, 장쉐량은 불청객의 면담 요청을 허락했다. 27세의 청년원수는 50대 초반의 충직한 경호원을 안심시켰다. “네가 누군지 잘 안다. 내가 저지하겠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연락해라.”
장쉐량은 장쭝창을 불러서 호통을 쳤다. “비윈쓰(碧雲寺)까지 가서 행패 부렸다는 말을 들었다. 다시 그러면 가만 내버려두지 않겠다.” 난징의 국민정부에도 급전을 보냈다. “유해를 하루빨리 남쪽으로 옮겨라. 무슨 흉측한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1991년, 연금에서 풀려난 장쉐량은 64년 전에 만난 탄후이촨을 회상한 적이 있다. “90 평생에 그처럼 애절한 눈빛을 본 적이 없다.”
1927년 10월, 비적들이 쑨원의 유해를 탈취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장쉐량은 탄후이촨에게 방법을 일러줬다. “동굴이 가장 안전하다.” 11월 25일 밤, 탄후이촨은 레닌이 보낸 소련제 관에 방부처리된 쑨원의 유해를 옮겼다. 시산(西山)에 인간의 발길이 닿은 적 없는, 깊은 동굴이 많았다.
1928년 6월 4일, 장제스가 지휘하는 북벌군이 베이징을 압박했다. 근거지 동북으로 철수하던 장쭤린은 선양(瀋陽) 인근에서 폭사했다. 범인은 일본 관동군이었다. 동북의 지배자가 된 장쉐량은 봉천군벌을 해체시키고 장제스의 난징정부에 합류했다. 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한 장제스는 장쉐량을 부위원장에 임명하고 베이징을 포함한 5개 성의 통치권을 일임했다. 탄후이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쑨원의 유해도 비윈쓰로 돌아왔다.
이듬해 1월, 난징에 쑨원의 능원(陵園)이 완성됐다. 이장(移葬) 준비를 마친 국민정부는 탄후이촨에게 공문을 보냈다. “비윈쓰의 금강보전을 총리 의관총(衣冠塚)이라 명명하고 탄후이촨에게 관리를 맡긴다.”
쑨원의 유해가 베이징을 떠나는 날 소련에서 돌아온 쑹칭링은 탄후이촨을 붙잡고 통곡했다. “미욱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간 주름살이 늘었다. 내가 없더라도 의관총을 잘 보호해라.”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국민정부는 탄후이촨에게 지급하던 봉급을 중단했다. 탄은 부인이 식모살이해서 벌어온 돈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의관총을 떠나지 않았다.
신중국 수립 후 비윈쓰는 베이징 원림국(園林局)에 귀속됐다. 탄후이촨도 고정 월급을 받았다. 1956년 11월 12일, 쑨원 탄생 90주년 기념행사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의식을 마친 저우언라이(周恩來)가 각계 대표들과 의관총을 찾았다. 83세의 탄후이촨은 44년 전 쑨원이 준 옷에 쑹칭링이 직접 달아줬던 훈장 비슷한 것을 가슴에 붙이고 총리를 안내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사람이 기록을 남겼다. “쑨원 선생의 목숨을 구한 후에 받은 기념품인가” “맞다” “상금은 없었나” “40원 받았다” “계속 받았나” “아니다” 저우언라이는 매달 40원을 추가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탄후이촨이 받는 액수가 조직 내에서 가장 많다며 재고를 요청하는 간부가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당과 정부에 기웃거리지 않고, 평생 한 가지 일만 한 사람에게 표하는 예의”라며 일축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