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사창리 패전
다시 움직인 적군
전체적인 전투 흐름으로 이야기하자면, 중공군이 1951년 4월 들어서 펼친 공세는 제 5차에 속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조금 부연할 필요가 있다. 중공군은 한반도 참전 직후에 바로 공세를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평양을 넘어 압록강을 향해 북진하고 있던 유엔군을 향해 평북 일대에 매복했다가 벌인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이 바로 1차 공세다. 그런 중공군의 참전 및 공세 의도를 오독(誤讀)했다가 1950년 11월 말에서 12월 중순까지 전투를 벌이다 유엔군은 다시 뼈아픈 패배를 당하고 만다.
그때의 중공군 공세가 2차에 해당한다. 유엔군은 이미 등을 보인 상태였다. 한 번 밀리면 둑을 무너뜨린 물에 밀리듯 뒤로 줄곧 밀리는 것이 전투다. 그런 기세에 따라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내주고, 북위 37도선까지 밀렸다. 그 당시의 중공군 공세가 3차다. 이른바 ‘1.4 후퇴’의 상황이다. 4차는 그 직후 벌어진다. 그러나 새로 한반도 전선에 부임한 매슈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의 창과 방패가 날카롭고 두터웠다. 중공군은 한국군 8사단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지만 1951년 2월 말 경기도 지평리에서 증강한 미 23연대전투단에게 참패하면서 공세가 꺾인다. 이것이 4차다.
다시 움직인 적군
전체적인 전투 흐름으로 이야기하자면, 중공군이 1951년 4월 들어서 펼친 공세는 제 5차에 속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조금 부연할 필요가 있다. 중공군은 한반도 참전 직후에 바로 공세를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평양을 넘어 압록강을 향해 북진하고 있던 유엔군을 향해 평북 일대에 매복했다가 벌인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이 바로 1차 공세다. 그런 중공군의 참전 및 공세 의도를 오독(誤讀)했다가 1950년 11월 말에서 12월 중순까지 전투를 벌이다 유엔군은 다시 뼈아픈 패배를 당하고 만다.
그때의 중공군 공세가 2차에 해당한다. 유엔군은 이미 등을 보인 상태였다. 한 번 밀리면 둑을 무너뜨린 물에 밀리듯 뒤로 줄곧 밀리는 것이 전투다. 그런 기세에 따라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내주고, 북위 37도선까지 밀렸다. 그 당시의 중공군 공세가 3차다. 이른바 ‘1.4 후퇴’의 상황이다. 4차는 그 직후 벌어진다. 그러나 새로 한반도 전선에 부임한 매슈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의 창과 방패가 날카롭고 두터웠다. 중공군은 한국군 8사단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지만 1951년 2월 말 경기도 지평리에서 증강한 미 23연대전투단에게 참패하면서 공세가 꺾인다. 이것이 4차다.
- 전쟁에 참전한 미 공군기가 항공모함 위를 비행하고 있다.
중공군은 제5차 1, 2단계의 거센 공세를 밀어붙인 끝에 결국 한반도에서 더 이상의 승세를 이어갈 수 없다고 판단한다. 체력의 거의 밑바닥을 다 소진한 싸움이기도 했다. 전법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점도 생각해야 했다. 큰 흐름으로 볼 때, 중공군은 이 5차의 두 단계 공세를 마친 뒤에 더 이상의 대규모 공세에 나서지 않는다. 미군이 갑자기 강해졌다거나, 허약했던 국군이 체력을 보강한 게 아니었다. 중공군을 포함해 북한군, 소련의 지원까지 등에 업은 공산주의 군대가 미군과 유엔군 등 서방 진영의 군대를 상대로 더 이상 뚜렷한 승세를 이어가기 어렵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나중의 판단이다.
중공군의 의도
당시 중공군은 마지막 희망을 5차 공세에 걸었던 듯하다. 야무지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전선의 넓은 구역을 때리고 들어왔다. 만주에서 준비를 마쳤던 군대, 1~2차 공세에 나섰다가 체력이 달려 쉬면서 재정비에 들어갔던 군대를 모두 동원했다. 3개 병단 11개 군, 33개 사단이었다. 북한군은 4개 군단 12개 사단이 나섰다. 내가 당시 섰던 전선은 앞에서도 소개한 대로 강릉의 1군단이었다. 당시 1군단의 예하에는 두 사단이 있었다. 개전 뒤부터 줄곧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거나 남하하며 작전을 벌였던 수도사단과 전투 경험이 거의 없던 11사단이었다. 1101 야전공병단을 그에 추가할 수 있었으나 군단이라는 이름을 달기에는 초라한 역량이었다.
- 6.25전쟁 기간 동안 동해안에서 작전을 수행한 미 7함대 소속 뉴저지함의 앞 모습.
화력은 매우 부족했다. 그전까지 내가 이끌던 1사단이 미 1군단에 배속해 강력한 야포와 전차의 지원을 받았던 것과는 커다란 차이를 드러냈다. 군단의 화력으로는 겨우 105㎜ 18문을 거느린 포병 1개 대대가 있었다. 나는 전쟁 발발 뒤 줄곧 1사단에만 있었던 까닭에 강릉의 1군단 상황을 보면서 마음이 스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보잘것없는 화력으로 공산주의 군대에 맞서 싸웠던 국군이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이 정도의 화력으로는 유사시의 커다란 전투를 결코 수행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동해안은 한반도에서 펼쳐지는 아군 전선의 동쪽 끝이다. 전쟁의 큰 승패가 갈리는 곳도 아니었다. 따라서 전쟁의 흐름에서는 오지(奧地)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전쟁은 늘 변수에 올라타 벌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머무는 곳이 중심에서 멀리 떨어졌다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떤 경우라도 적이 이곳을 노릴 때 맞서 싸울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