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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거란의 전쟁 (10) - 양규, 거란을 향해 포효하다
항복이냐 피난이냐를 두고 논쟁을 거듭하던 고려 조정은 강감찬의 의견에 따라 피난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는지 피난 행렬의 출발은 계속 늦어졌고, 거란군이 코앞에 임박해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고려 현종(왕순, 992~1031년)은 이 피난 행렬 중에 각 지의 향리와 호족의 위협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대단히 많은 관료가 도망쳤다. 다행인 것은 서경 공방전에서 패하고 돌아온 지채문이 현종이 곁에서 온 힘을 다해 공격해오는 이들을 막아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전쟁의 단초가 되었던 하공진이 나타나 거란군이 임박해있으므로 자신이 가서 거짓항복을 말해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나서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거란군영에 도착한 하공진이 '임금이 이미 강남 멀리 떠났다'라고 거짓을 말하자 거란군은 철수를 준비했다. 애초에 거란군에겐 현종을 더 쫓을 여력도 없었던 모양이다.
거란 지휘부의 군사 능력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이미 수없이 서술했지만, 이 철수 과정에서 거란 지휘부의 결단은 놀라운 것이었다. 10일 동안 개경에서 휴식을 취한 거란군은 철수를 시작하자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정확하게 말해서 사라진 게 아니라 군사를 여러 부대로 나눈 뒤 흩어져서 철수하도록 한 것이다. 첩보 교란을 위해서기도 하고, 유목민인 거란의 기동력을 믿은 것이기도 하지만, 자칫 각개격파 당할 수 있으므로 과감한 결단이다.
그러나 양규는 천재였다. 교란 작전에 휘둘릴 인물이 아니었다는 뜻. 거란군이 어떤 식으로 가든 결국, 흥화진과 무로대 일대의 압록강 하류로 모여들게 되어 있었고, 만약 병사 수가 많은 부대라면 반드시 통주성과 귀주성 둘 중에 한쪽을 지나게 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귀주성(훗날 귀주대첩이 이곳에서 벌어진다) 앞에 거란군이 나타났다. 귀주성을 지키던 별장 김숙홍이 군사를 이끌고 거란군을 공격해 무려 1만 명을 참살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서 모두 거란군이 피해를 입고도 계속해서 도망쳤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은데, 글쓴이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그들이 그대로 올라갔다면 양규가 수차례 거란군을 아작내는 동안 나타나지 않을 리 없다. 즉, 이 전투에서 (군사 수가 얼마인지 모르지만) 김숙홍의 귀주성 병력과 전투를 벌인 거란군은 군사 역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패배를 당해 뿔뿔이 흩어졌던 것 같다. 본래 전투에서 1만 명이 죽으면, 부상자는 그 두 배에 가깝다고 봐야 옳다.
귀주성에 거란군이 나타난 뒤 전장은 갑자기 북쪽으로 이동한다. 김숙홍이 승전보를 거둔 바로 다음 날 무로대에서 양규가 거란군을 공격해 2천 명을 참살하고, 포로 3천 명을 구출했다. 본래 무로대엔 거란군 20만 명이 머무르고 있었지만, 전쟁이 지속되고 거란군의 피해가 막심해지면서 보충을 거듭한 결과 남겨뒀던 병력이 없어졌던 모양이다. 이 시점부터 양규의 '무쌍'이 시작된다.
무로대에서 승전한 다음 날 양규는 이수에서 거란군을 공격해 패퇴시키고, 추격을 거듭하며 2,500명을 추가로 참살하는 승리를 거뒀다. 이 전투가 왜 놀랍냐면, 계속되는 전투로 지쳐있던 거란군이라고 하지만 그 기동력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개경에서 11일 출발했던 거란군이 귀주에 나타난 것은 17일. 소름이 끼칠 정도의 기동력이다. 양규는 그런 거란군을 상대로 '기동력 싸움'을 벌여서 데리고 놀아버린 셈이니 놀라울 수밖에. 그리고 양규는 이 전투에서 1,000명의 포로를 구출했다. 다른 전투 기록이 포로에 관해 잘 적지 않는 것과 다르게 양규는 전투 기록과 포로 구출 기록이 함께 붙어 다니는 것을 보아 거란군을 섬멸하는 것보다 포로 구출을 우선시한 것으로 봐야 한다. '거란 이 악당들을 모조리 죽여야 한다.' 가 아니라 도망치는 거란군을 보고도 '거란군을 쫓지 말고 포로들을 먼저 수습하라.'가 명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수에서 승리한 뒤 도망치는 거란군을 추격한 것은 거란군 사망자 바로 뒤에 포로 수습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거란군이 포로들을 데리고 도망쳤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다음 전투는 여리참이란 곳에서 벌어지는데, 이날 양규는 하루에 세 번 싸워서 1,000명을 격멸하고 1,000명의 포로를 구출해냈다.
이렇게 양규의 부대와 거란군 부대가 전투를 벌인 것을 보면, 그 위치를 명확하게 정할 순 없으나 압록강 인근에서 도하할 수 있는 모든 길이 양규의 고려군에게 차단당한 것이 아닌가 싶다. 양규가 벌인 무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전투들은 거란군에게 경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너희는 강을 건너갈 수 없다."
거란 역시 이 경고를 받아들였다. 여리참 전투 이후 6일 동안 전투 기록이 없는 것은 거란이 부대를 나누어서 북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흩어진 병사를 모으고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양규 역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신이 계속 이끌던 병력만이 아니라 귀주의 병력까지 불러온 모양이고, 얼마 안 있어서 귀주의 김숙홍이 합류했다. 귀주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거란군을 10,000명이나 죽였을 정도로 많은 병력이었다. 통주 전투, 서경 전투에 이은 세 번째 대규모 회전이었다.
양쪽은 자연스럽게 '애전'이란 장소에서 마주했다. 사실, 거란이 퇴각하는 과정에 벌어진 전투는 기록이 심할 정도로 부족하다. 거란 쪽은 (당연히) 제대로 된 기록을 적지 않았고, 고려 쪽은 전투에 참여했던 지휘관이 대부분 죽어서 기록이 남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애전 전투도 마찬가지인데, 전투 과정에 대한 기록은 그저 거란의 선봉이 고려군에게 크게 패해 1,000명의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전부다. 그렇게 고려군이 여세를 몰아서 공격하려는 찰나 갑자기 거란 성종의 어장친군이 나타났다.
양동작전이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양규가 이전 전투들에서 거란군이 나타나는 곳마다 등장해 응징한 것을 보아 그 일대는 이미 양규에 의해 조사가 끝났고, 정찰병도 가득했을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흥화진성에는 아직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병력이 최대 10,000명이나 존재했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된 건지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게 정말 아쉬울 따름이다. 어쨌든 양규를 가로막은 거란군은 어장친군으로 거란의 모든 군사 가운데서도 최고 정예병이라 할 병력이다. 이들이 뜬금없이 나타나 기습을 가해오니 당해낼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여기서 양규의 올바른 선택은 도망치는 것 하나뿐이었으나 양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구출해낸 포로를 안전하게 이동시키려는 의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정도 규모의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포로를 껴안고 있었을 리 없는데다 6일 동안 포로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양규는 패하더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평지와 산지가 번갈아가며 나타나고, 실제 양규가 전투를 벌인 것으로 보이는 압록강 하류 지대는 상당히 넓은 평지가 펼쳐지긴 해도 역시 산지가 맞물려 있어서 산 쪽으로 방향을 잡고 힘을 다해 도주하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양규는 도망치는 게 아니라 싸우는 걸 택했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총을 맞고도 군사를 독려한 것처럼 그는 병장기가 떨어질 때까지 싸우다 병장기가 다 떨어지자 적진을 향해 돌진하며 장렬하게 전사했다.
'서북면도순검사'라는 군부 최고 직책에 있던 인물이 이토록 헌신적으로 싸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분전이 무너지는 조선을 계속 되살렸던 것처럼 거란과의 전투에서 양규의 헌신은 이후 고려의 항전의지를 불태우게 했을 것이다.
애전 전투 바로 다음 날. 거란이 압록강을 도하할 때 겨울비가 내렸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흥화진의 고려군이 거란군을 맹렬하게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양규의 헌신이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길고 긴 전투가 끝나고 남겨진 기록은 꽤 단출하지만, 굉장히 강렬하다.
"전쟁이 끝나고 압록강을 건너는 중에 비가 내려 많은 사람이 수장되었다. - 거란 측 기록"
"압록강 일대의 전투에서 거란군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강을 건널 때 비가 내리고 고려군이 다시 공격해와 병장기 대부분을 버렸다. 또한, 관원의 대부분이 죽어 각지에서 다시 뽑아야 했다. - 송나라 기록"
거란은 병민일체라 '관원'은 곧 '장교'를 의미한다. 고려가 입은 피해도 끔찍했지만, 거란이 입은 피해 역시 끔찍했다.
이렇게 지독했던 2차 여요전쟁이 끝났다.
조금 더 적어보기
- 현종은 나주로 향하는 피난길에서 계속되는 반란으로 죽을 위기를 여러 차례 넘겼다.
- 거란은 거짓항복을 고한 하공진을 극진하게 대접하며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하공진은 끝까지 거란을 탈출해 고려로 돌아가려다 처형된다.
- 지채문은 용맹하게 현종을 호위한 결과 상장군까지 올랐다.
- 양규는 사후 '삼한후'라는 칭호를 얻었다. 당시 인식으로 '삼한'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의미하므로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 (11) - 필요할 때 나타난 명군주 현종
이쯤에서 우린 고려 현종의 시점에서 이 전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현종의 이름은 순. 그는 천추태후의 동생인 헌정왕후의 아들로 아버지인 왕욱이 죽고 나서야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돌아온 개경은 이미 천추태후의 세상. 순은 대량원군으로 책봉되었으나 천추태후의 아들인 송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천추태후에 의해 사찰로 떠나게 된다. 그 이후 약 10년 동안 권력욕을 마음속에 품고 찬탈의 기회를 노리던 순. 그러나 긴 시간 절치부심해서 노린 기회는 황당하게 강조의 정변으로 막을 내렸다. 분명히 천추태후와 자신의 정쟁이었는데, 군권을 쥐고 있던 강조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허수아비 임금이 되고 만 것이다. 순은 임금의 자리에 올라 훗날 '현종'이라 불리게 된다.
강조에게 권력을 모조리 빼앗겼지만, 아직 현종에게 가능성이 있었다. 쫓겨난 천추태후 세력도 존재했고, 이름뿐이더라도 자신은 임금이었다. 아무리 강조라고 해도 이미 목종을 죽인 상황에서 현종까지 죽일 순 없는 법이다. 기다림엔 이골이 났지만, 조금 더 기회를 엿보자. 그렇게 조용히 기회를 엿보던 어느 날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엎친 데 덮친 격. 갑자기 거란이 쳐들어온단다. 정변을 일으켰다가 강조에게 뒤통수를 맞은 지 1년 만의 일이다. 그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 전쟁에서 패하면 그는 죽을 수도 있다. 반대로 전쟁에서 승리하면, 군사를 이끌고 거란을 격파한 공로가 인정되어 강조의 힘이 더 강해진다. 이기든 패하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결과가 나온다. 그저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체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격렬했다. 흥화진 전투에서 승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통주에서 고려의 주력군이 박살 났단다. 급히 동북면의 군사를 서경에 투입해서 방어케 했는데, 동북면의 장군 지채문이 사선을 넘어 달려와 서경이 함락되었다고 보고했다. (사실, 서경은 함락되지 않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번엔 서북면도순검사 양규가 곽주성을 탈환해서 거란의 보급선을 끊었다고 한다. 덕택에 피난을 가야 하느냐, 항복을 해야 하느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으나 자신의 의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강감찬의 의견을 따라 피난 가기로 결정했지만,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으리라.
아슬아슬하게 거란군의 선봉을 피해서 떠난 피난 길은 도무지 임금의 길이라고 할 수 없는 수준. 신료들은 대부분 도망쳤고, 군사들도 죄다 도망쳤다. 지채문이 이끄는 소규모 부대가 필사적으로 반란군을 진압해주지 않았다면, 나주까지 도망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현종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탁류에 휘말려 한반도 남쪽 끝에 도착했다. 그가 나주에 도착하고 나자 밀정이 전황을 알렸는데, 드디어 거란군이 퇴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개경에 올라가는 것도 두렵다. 강조를 중심으로 전쟁을 치르던 군부는 대부분 사망했고, 그나마 천추태후 세력의 인재 가운데 현종의 편이 되어줄 것 같던 양규 역시 영웅적인 활약 끝에 사망했다. 쉽게 말해 권력의 공백기를 겪고 있던 셈이다. 천추태후 세력은 쫓겨났고, 자신의 세력은 대부분 도망쳤으며, 강조의 세력은 와해하였다. 심지어 임금의 권위를 말해주던 '황도皇都'개경마저 불타 없어졌다.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믿을 사람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다시 쌓아 올려야 하는 절망적인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거의 담기지 않은 힘겨운 여정이 끝나고 개경에 도착했을 때 현종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개경은 잿더미가 된 채로 위대한 군주를 맞이했다.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은 이전 임금들이 쌓아 놓은 기반을 모조리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가장 먼저 그는 거란과의 외교 조절부터 시작했는데, 비록 자신이 직접 친조하겠다는 항복 맹세는 지킬 수 없지만, 꾸준히 거란에 사대하겠노라고 사신을 보냈다. 물론, 거란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다. 거란 성종이 직접 최정예병 40만 명을 이끌고 친정한 상황에서 그 결과가 그저 이전과 같이 사대하겠노라는 친서에 불과하다면 국격에 흠집이 생기고, 임금에 도전하는 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거란은 명분을 위해서라도 두 가지 중 하나는 꼭 챙겨야 했다. 고려 현종의 친조(현종보고 직접 와서 항복하란 의미라 여기면 적당하겠다.) 혹은 강동 6주의 확보가 그 두 가지다.
거란에서 계속 사신을 보내 압박하자 현종은 여유롭게 무시했다. 죽으면 죽었지 거란에 친조하거나 땅을 내줄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무모하다고만 할 순 없다. 지난 전쟁 당시 거란은 강동 6주 대부분을 함락하지 못하고 퇴각할 때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강동 6주는 고려의 목숨줄임과 동시에 거란의 목덜미를 잡는 도구이기도 했던 셈이다. 거란이 강동 6주를 내놓으라 압박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현종이 절대 돌려주지 않겠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렇게 외교 관계가 미묘하게 흘러가자 급해진 거란이 군사적 수단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거란군은 기습적으로 압록강을 넘어 고려 땅으로 진격하려고 했으나 흥화진의 대장군 김승위가 이를 막아섰다. 거란 역시 본격적 전투를 벌일 생각은 없었던 모양으로 이 상황에도 양국의 외교 교섭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현종에게 필요했던 건 '시간'일 뿐이었고, 거란은 고려가 힘을 회복할까봐 마음이 급했던 것에 불과하다. 급기야 거란은 도통까지 임명해 군사를 모아 고려 땅으로 침공해왔는데, 이 전투에서 흥화진의 반격을 받아 700명이 죽고, 많은 사람이 압록강 인근에서 익사했다. 이후 거란은 강동 6주를 타격하기 시작한다.
거란은 주로 흥화진, 통주, 곽주를 중심으로 기동 타격을 가했다. 비록 고려군이 잘 막아냈지만, 고려 내지에서 벌어진 전쟁이라 피해가 심각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곽주에선 고려군 수만 명이 죽는 참사가 있었다.
거란의 공격이 시작되자 현종은 아주 간단하게 당연한 일을 했다. 거란 사신을 억류해버린 것. 그저 거란의 요구를 거절한 게 아니라 아예 사신을 억류한다는 건 대단히 강경책인데, 당연한 일임과 동시에 어려운 일이다. 거란 성종이 분노해 대군을 이끌고 재침공한다면, 고려엔 버틸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종은 위태롭지만 승부를 걸 법한 패를 계속해서 던졌고, 거란은 현종의 태도에 의구심을 가지며 휘둘리기 시작한다. 수백만 사람의 목숨을 걸고 하는 위험한 게임이었지만, 막다른 골목에 서 있던 현종의 담대함을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그렇게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외교를 이어가며 내부를 단단하게 다지기 시작했다.
당시 고려는 전비가 급했다. 무신의 급여를 제대로 주지 못해서 반란이 일어났을 정도로 재정 상태가 심각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현종은 궁궐을 다시 짓고, 이전엔 없었던 '개경성'을 축조하기 시작했으며, 북방에 최소 10만의 병력을 배치해 거란군과 전쟁을 수행하게 했다. 공백 상태였던 권력은 자신의 세력을 추스르고, 천추태후와 정치적 화해에 성공하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으며, 강조의 잔존 세력도 어느 정도 끌어안으면서 채웠다. 그러나 그가 가장 중시했던 건 그런 '구세대' 세력이 아니라 지난 거란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던 '숨겨진 보석'들의 발굴이다. 강감찬, 지채문을 필두로 강민첨, 정신용, 김훤 등의 전쟁 공로자가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빛을 발하려면 전비를 마련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여긴 현종은 지방 행정망을 완벽하게 구축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기존의 행정망을 배경으로 군현제를 거의 완성했으며, 완성하기 전까진 안무사를 순행케 함으로써 행정 공백이 없도록 노력했다.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은 국제 정세에서 아주 정확한 말이다. 당시 고려가 처한 상황도 그랬는데, 고려와 거란이 전쟁으로 쇠약해지자 여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현종은 여진과의 교섭과 전투를 아직 검증되지 않은 지휘관인 강감찬과 강민첨에게 모조리 맡기는 강수를 두었다. 이렇게 인재 선발과 전쟁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고려는 2군 6위라는 중앙군 편제를 완성하게 된다. 현종은 평범한 군주였으면 평생을 다 쏟아 부어도 못할 업적을 거란과 전쟁을 치르면서 수년 만에 다 해내고 있었다.
현종의 놀라운 정치력이 발휘되는 동안 거란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거란군의 증원되는 병력의 규모도 수만 명에 이르렀고, 1016년 1월 5일엔 거란의 대군이 곽주까지 내려와 고려군 수만 명을 죽이고 돌아갔다. 대체 왜 고려군 수만 명이 곽주에 모여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전투에서 고려는 주력군의 상당수를 잃어버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 거란은 쾌재를 불렀으리라. 그러나 이 전투에 대한 고려의 반응이 거란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분노한 현종이 거란 사신을 고려 땅 안으로 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수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잃었으니 벌벌 떨며 항복할 줄 알았던 거란은 고려의 반응에 당황했다. 덕분에 1년 동안 거란은 고려를 어떻게 공격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는데, 그 사이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버리고 송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초강수를 뒀다. 현종이 거란에 무릎을 굽힐 생각을 조금도 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이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던 거란은 결국, 기동 타격전을 포기하고 점령전을 시작하려 했는지 중국 출신의 병사를 모아 흥화진을 포위 공격했다. 중국 출신의 병사를 모았다는 것은 아마 단순히 함락하는 게 아니라 성을 차지하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거란은 흥화진을 함락하긴 커녕 고려의 반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제 고려와 거란은 다시 한 번 큰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거란은 국력을 더 키우기 위해서 반드시 후방의 고려를 잡아야 했고, 고려 역시 앞으로 영토 확장을 위해서 거란을 꺾어둘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고려인들 사이에서 지난 전쟁들로 팽배해졌을 거란에 대한 적개심은 단순히 국지전으로 치고받는다고 해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고려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10년에 걸친 전쟁 덕분에 고려군은 정예군이 되어 있었고, 다소 익숙하지 않던 강동 6주의 전장도 이제 익숙해졌다. 강동 6주의 군사들은 양규의 헌신과 전우들의 죽음을 똑똑하게 기억할 터. 그들에게 거란은 더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미완성이지만, 어느 정도 방어책이 될 수도 있는 개경성도 있었다. 이전과는 확실하게 달랐다.
절대적 강자를 상대로 이런 상황을 이끌어낸 현종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야 한다. 고려의 북부가 초토화되는 큰 전쟁을 치르고 수도가 함락된 절망적 상황에서 그는 개경을 복구하고, 개경성을 쌓았으며 군사 -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그렇게 수백 년 고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