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정(母情)
펠리컨(Pelican)이라는 새(鳥)는 새끼들에게 줄 먹이가 없으면 자신의 가슴살을 뜯어 먹입니다.
병에 걸려 죽어가는 새끼에게는 자신의 핏줄을 터뜨려 그 피를 입에 넣어줍니다.
어미 펠리컨은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새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모성애가 강한 새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펠리컨을 사랑과 희생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개(犬)는 새끼를 낳으면 새끼들의 똥오줌을 어미가 모두 핥아먹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강아지들은 항문과 요도가 막혀 죽고 맙니다.
그래서 개(犬)는 자신의 젖이 떨어져 새끼들이 밥을 먹을 때까지 새끼들의 똥오줌을 어미가 모두 핥아 먹는
것입니다.
남극에 살고 있는 황제 펭귄의 암컷들은 알을 낳으면 수컷에게 알을 품는 일을 맡긴 후 뒤뚱 거리며 100km
이상을 걸어 바다까지 가서는 새끼에게 줄 먹이를 물어오는데 그럴 때면 혹시라도 자신이 그 먹이를 먹을까
봐 먹이가 담긴 자기 몸의 소낭(素囊)에 아예 보호막을 쳐서 소화 기능을 정지시키는 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로 놀라운 정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신 만고 끝에 새끼가 있는 곳에 돌아왔을 때 만에 하나 새끼가 이미 죽고 없으면 소낭 속의 먹이를 그냥
토해버릴지언정 자기가 먹는 일은 결코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한 동물원에서 하루에 물고기 2~3kg을 배급받던 황제펭귄 한 마리가 굶어 죽은 일이 있었는데,
자신에게 배급된 모든 먹이를 새끼에게 주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옛날 중국의 전국 시대 때 진 나라 군사들이 촉 나라 땅을 정벌(征伐)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양자강
기슭, 삼협이란 곳에서 원숭이 새끼 한 마리를 붙잡아 배에 싣고 갔습니다.
그런데 배가 삼협에서 백여 리쯤 떨어진 곳에 정박하자 어미 원숭이 한 마리가 배에 뛰어올라 그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신기하게 여긴 군사들이 그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았더니 창자가 마디 마디 끊어져 있었습니다.
삼협에서 새끼를 빼앗긴 어미가 벼랑으로 이어진 백여 리 강 기슭을 뛰어서 따라왔던 것이고 새끼를 잃은
비통함에 어미의 창자가 끊어졌다는 단장(斷腸)의 고사(古史)입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물 학자들은 ‘단장(斷腸)'의 고사가 실제로도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고릴라나 오랑우탄, 침팬지 등은 새끼를 업거나 안고 다니는 경우가 많으며 새끼가 죽으면 시체가 썩을
때까지 새끼를 안고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1962년 2월 10일, 여수 남 국민학교 졸업식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졸업식 장에서 회색 스웨터에 까만 낡은 바지를 입은 중년 부인이 노력 상을 받았습니다.
그 부인이 단상에 올라가 상장을 받자 장내는 박수 소리로 떠나갈 듯했고 졸업하는 그 부인의 딸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노력 상을 받은 어머니와 딸은 세 채 밖에 집이 없는 외딴 섬에 살고 았었습니다.
주민이라고 는 겨우 20명 뿐인 이 섬에서는 제일 가까운 여수에 볼 일이 있어도 섬사람들이 직접 만든 배를
타고 갈 수밖에 없는 곳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여덟 살이 되자 남편에게 간청하기를 딸을 육지에서 공부시키자는 말을 어렵게 꺼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남편은 "20 리나 되는 뱃길을 어떻게 다닐 수가 있겠느냐"며 반대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믿음을 굽히지 않고 딸을 남편 몰래 육지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로부터 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20 리나 되는 험한 물결을 가로지르며 손수
노를 저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섬으로 돌아와 밭 일을 하다가 저녁이면 다시 배를 타고 딸을 데려와야 했습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딸도 울고 그 어머니도 울었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자신을 육지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두려워 울었고, 어머니는 딸을 데리러 가는 길이
늦어 딸이 애처로워 죽을힘을 다해 노를 저으며 울었습니다.
시계도 없는 섬에서 매일 시간을 맞춰 딸을 학교에 보내고 데려오는 일에 한 번도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6년을 하루같이 오간 뱃길이 무려 3만 3천 리나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주위에 알려지자 졸업생과 학부모, 그리고 선생님들의 감격스러운 울음으로 졸업식 장은 울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음악에 남다른 재능이 많은 이흥렬(李興烈)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가 음악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피아노가 없으면 작곡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 피아노가 없으니 음악 공부를 더 이상은 할 수 없습니다.
음악에는 피아노가 필수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어머니, 송구한 말씀이오나 소자는 음악 공부를 이만 접고 귀국하려고 합니다. “
어머니는 혼자 몸으로 유학 간 아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음날 새벽부터 저녁까지 동네 산이란 산을 모조리 뒤져 두 손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쉼 없이 솔방울을 주어 모았습니다.
불쏘시 개로 화력이 좋은 솔방울을 팔아 거금 400원 (1930년대 쌀 한 가마는 13원)을 만들어 아들에게
보냈습니다.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돈으로 피아노를 샀습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로 작곡한 노래가 이흥렬 작곡 양주동의 시(詩)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 낳으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 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
소싯적 시골집 울타리에는 해마다 오월이면 찔래 꽃이 하얗게 피었습니다.
찔래 꽃은 꽃송이가 소소(小小)하고 가냘프면서 질박(質樸)합니다.
그러나 그 향은 짙고 강렬합니다.
그런 찔래 꽃을 볼 때마다 우리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왠지 애상(哀傷)적이면서 온정(溫情)적인 이미지/Image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를 쏙 빼닮은 노래 가사가 있습니다.
가수 이연실이 부른 '찔래 꽃'입니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래 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요.
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해 질 녘 어스름에 청솔 가지를 한 아름 머리에 이고 찔래 꽃이 하얗게 피어있는 울타리를 돌아,
대(竹) 사립 문을 어렵사리 열고 들어오시면서 "니 배고프재..." 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모습, 다시 들을 수 없는 목소리이기에 더욱 가슴이 쓰리고 아픕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회한(悔恨)과 그리움에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아 "어머니! 어머니!"하고
엉엉 울고 싶어질 뿐입니다.
💢 오늘 하루도 어머니를 생각하시는 행복한 날 되시기 바랍니다. 💢
ㅡㅡ옮겨 온 글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