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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수도회] 보지 않고도 믿는 가난과 겸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이사 65,17-21
† 복음 요한 4,43-54
★ 오늘 제1독서는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해 오신 하느님의 모든 업적을 능가하는, 놀라운 구원을
약속하시는 말씀이다. 이 새로운 창조 앞에서는 과거의 업적들은
기억되지도 않을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 당신 말씀의 능력으로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실 때,
사람들은 이 표징을 보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생명을 주러 오신 분이심을
믿게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이번 주부터 부활 때까지 요한 복음을 이어서 묵상하게 됩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현양되시는 그분의 ‘때’가 되기
전까지 여러 표징을 전해 줍니다.
표징은 믿음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지만, 믿지 않으려는
이들에게는 표징 자체도 거부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표징을 모두 보여
주신 다음,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12,37) 하고 증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표징을 보여 주신
장소는 갈릴래아 카나이지만,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카나 사람이 아닌
이방인 왕실 관리였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와 자기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했던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그의
아들은 살아났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죽어 가는 한 아이를 살아나게 하시는 것은 작은 시작에 불과하지만, 오늘
독서의 말씀처럼 바로 그 시작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싹트고 있음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보라”(이사 65,17).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현재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라는 뜻입니다. 약속은 이미 성취되고 있고 그
완성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 병든 아이를 일으키시는 그분께서는 장차
죽은 라자로를 살아나게 하실 것이고, 당신 자신도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실
것이며, 아울러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표징은 신앙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표징을 알아보고 믿는 이들은
이미 구원되어 생명을 누립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보지 않고도 믿는 가난과 겸손
2015년 나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요한 4,43-54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4,50)
보지 않고도 믿는 가난과 겸손
오늘날은 감성의 시대요 감각의 시대라고 한다. 오감(五感)을 지닌 인간은
물질이나 감각에 의존할 뿐 아니라 감각에 의한 경험을 중요시하며
살아간다. 영성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보지 않고도 믿는 이는
복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보이는 것을 더 중요시하며
살아갈 때가 많은 듯싶다. 끊임없는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사순시기에 참으로 보지 않고도 믿으며, 그분의 말씀의 힘을
믿는 복된 순례를 떠나도록 하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이틀 동안 머물렀다가 갈릴래아로 가셨다
(4,3 참조). 거기서 그분은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행한 표징들을 목격한
갈릴래아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요한 복음사가는 그분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멀리 갈수록 더 따뜻한 환영을 받았음을 전하고자 한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갈릴래아에서 자신이 최초로 복음의 창조적인 힘을
드러냈던 카나로 가셨다. 그런데 카파르나움에 사는 왕실 관리 한 사람이
약 32 킬로미터나 떨어진 카나에 있는 예수님께 찾아와, 병으로 죽어가는
자기 아들을 고쳐주시라고 사정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4,48) 하고 책망 섞인 말씀을 하신다. 그래도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4,49) 하고
애원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집에 가시지 않고 “가가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4,50)라고 하신다. 이에 그 이방인 왕실 관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도 그분의 말씀을 믿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간에 관리의 아들은 완쾌되었고, 그의 온 집안은 그분을 믿게
되었다(4,51-53).
나자렛에서 목수일을 하고 살아온 보잘것없는 예수를, 당시 사회에서
지위가 높은 왕실 관리가 찾아와서 간청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예수님께 아들의 치유를 청한 것은 그의 가난하고 겸손한 자세에서
나오는 영의 눈길 때문이었다. 더구나 고관은 카파르나움에서 카나까지의
먼 거리를 고생하며 걸어와 예수를 찾아왔을 뿐 아니라, 위기에 빠진
아들을 위해 신분이나 인습이나 주위 시선이나 어떤 야유에도 개의치 않고
예수님을 믿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단순한 믿음이 있었고, 자신이 아닌
살려주시는 분, 예수께 시선을 두었으며, 인내와 희망, 진지함과 성실함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 관리는 예루살렘에서 표징을 보았던 갈릴래아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나았다.
나의 삶을 성찰해보자. 나는 왕실 관리처럼 가난하고 겸손한 자세로 주님을
믿는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나 체면, 자만심을 철저히
버리고 단순한 믿음으로 청했던 왕실 관리처럼 전적으로 의탁하는가? 이젠
껍데기 인생, 흉내내는 인생, 남의 눈치보며 사는 인생을 그만 두고 내
믿음을 살자. 또한 참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며 이웃을 이롭게
하려고 땀을 흘리고 고통을 겪어내는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인생살이에서 그저 내 원의나 취향에 따라 취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
아니며, 인간 조건에 따라 평가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으나 인간이도록 해주는 근원적인 창조의 원점이다. 뿐만 아니라 신앙은
왕실 관리처럼 아픈 아들이 신음하는 자기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씀
한마디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엄청난 도전이다. 이제 이 도전 앞에 나를
포장하고 있는 모든 인간조건과 장치들과 가면을 벗어버리고,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이요 생명이신 그분을 만나기 위해 빈그릇을
마련하자! 진정한 믿음이란 나를 비워 주님을 받아들임이요, 나를 포기하고
주님께 맡기는 것이니...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내 삶의 목적이 주님을 향했으면 합니다.
2015년 나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5,17-21
복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43-54
삶의 역경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는 희망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의학자가 있습니다. 바로 세계적인 심신의학자이자
암전문의인 버니 시걸(Bernie Siegel) 박사입니다.
그는 자신이 돌보는 암환자와 면담하면서 가장 먼저 “100세까지 살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서 누가
병마를 이기고 회복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자기 삶의
목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는 사람은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면서
절대로 희망을 잃지 않고 있으며, 실제로 이런 사람이 생존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희망은 이렇게 삶의 목적을 갖는 것에서부터 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살아가면서 삶의 목적을 확실하게 갖고 살아갑니까? 그냥 하루하루 아무런
생각 없이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죽지 못해 사는 것이죠.’라는 말을
하시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또한 말끝마다 ‘죽겠네.’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삶의 목적 없이 그냥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분명히 다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어도 그
목적이 희망을 간직할 수 있도록 하며, 그 희망을 통해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기쁨을 얻게 됩니다.
이 희망은 신앙인들에게 믿음으로써 더욱 더 굳건해집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믿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왕실관리는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는 것 자체가
믿음의 표시이지요. 또한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떠나간 것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도 믿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봅니다. 왜냐하면 그가 완전히
믿은 것은 아들이 나은 것을 종들이 알려 주었을 때였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라고 한 것은,
아들이 죽고 나면 예수님께서 아이를 되살릴 수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너희는 표징이나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나 봅니다.
믿음이 부족한 이들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표징이나 이적을 사용하시지만,
이를 보고도 믿지 못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고, 세상의 흐름에 아무
생각도 없이 따라만 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성인께서는 “기적은 믿는 이들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과 믿음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삶 전체가 기적 그 자체이기 때문에, 깜짝 놀랄만한
특별한 일들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목적이 주님을 향했으면 합니다. 분명히 지금의 내 삶을 더욱 더
풍요롭게 만들 것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타인과의 원만한 관계로서만 측정될 수 있다.(니체)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세요~~~
나의 꿈은?
제가 어렸을 때 선생님께서는 학년 초에 늘 ‘장래희망’을 묻곤 하셨었습니다.
그때 가장 많이 나왔던 장래희망은 과학자, 의사, 간호사, 선생님, 군인,
경찰 등이었습니다. 참, 대통령도 한 번에 몇 명씩은 있었던 것 같네요.
그렇다면 요즘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뭐가 바뀌었을까요? 비슷하기는
하지만, 어렸을 때는 나오지 않았던 직업군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연예인, 운동선수 그리고 공무원입니다(이 숫자는 상당한
수를 차지합니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이라는 화려한 삶을 원한다는 것은 매스컴의 발달로
그럴 수 있다고 하지만, 반대로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삶을 선택했다는
것은 참 의외였습니다. 아이들 역시 취업전쟁이라고 하는 요즘 사회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요?
다양한 꿈을 꿔야 할 시기에 벌써부터 취업을 걱정하면서 자신의 꿈을
축소해버리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갖게 하네요.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아이들 중에서는 꿈이 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과 목표 없이 살아가는 삶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삶의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꿈을 키워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꿈도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꿈이 확실하게 세워져 있는 사람만이 아이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꿈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특강을 했던 부평4동성당입니다.
◈ [수도회] 2015.03.1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아니 보면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 4,48)
사람을 점점 믿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사람들간의 신뢰가 무너지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무너집니다.
나에게 유익한 사람으로 검증된 경우에만 신뢰를 보내고
그것도 여차하면 다시 불신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도 나에게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주신다고
여길 때만 믿습니다. 나에게 조그마한 어려움과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되면 그만 냉담하고 맙니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이 바로 이런 세태를 두고 하는 말같지 않습니까?
나는 사람을 어떻게 신뢰하고 있는지, 나는 하느님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 되돌아보라 하시네요.
하느님과의 신앙을 회복하고 사람들간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믿음과 신뢰를 회복시켜 주시고자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하느님과 나와의 믿음을,
나와 이웃의 신뢰를 되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구원을 부른 고통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요한 4,43-54)
제1독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5,17-21
복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43-54
구원을 부른 고통
왕실의 한 관리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앓아누웠습니다. 그러자 그 관리는
예수님께 쫓아가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관리는
예수님께 관심도 없던 사람입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 기적을 행하실 때는
자기와는 상관없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에게 고통이
왔기 때문에 위신 체면 다 버리고 예수님께 달려와서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에게 닥친 시련은 불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발견하게 되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주님,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4,48-49).
하며 사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거라.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
는 예수님의 응답을 얻어냈고 그 시간에 아이는 나았습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 사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들
때문입니다. 아들의 고통이 관리를 애원하게 했고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면박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 는 말씀에 두 말 없이 믿음을 걸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고통이 하나의
시련이었지만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왕실의 관리의
믿음이 만나서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요한4,53).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주십니다”(야고5,10). 시련과 고통은 은총의 기회이고 기적을 낳는
원천입니다.
믿음 없이 살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그제서 밤을 지새가며 기도하고
부산을 떠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매달리면
주님께서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십니다. 우리의 간청에 당신의 계획마저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채워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가시길 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을 낫게 해준 것은 약초나 연고가 아닙니다. 주님, 그것은 모든
사람을 고쳐 주는 당신의 말씀입니다”(지혜16,12).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4,12-13).
그러므로 내 방식으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이루어 주심을 믿고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 하십시오”(로마12,12). “아무것도 걱정
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줄 것입니다”(필리피4,6-7).
고통은 결코 죄의 벌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하느님의 섭리요, 은총의
기회입니다. 또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부활의 기쁨으로 끝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꼈을 때는 이제 다가올 부활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모두가 다 귀한 것입니다. 고통 이라할지라도....이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아듣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더욱 튼튼하여지고
아름다워지길 빕니다. 우리는 믿음의 특권에서 오는 고난의 특권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곧 영광의 특권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기도란?
1. 하느님 앞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리는 영적인 포복이다.
2. 세상 욕심의 발전소가 아니라 욕망의 불을 끄는 소방서이다.
3. 기도가 없을 때 마음은 세상의 것으로 무거워지고, 기도가 있을 때
마음은 성령과 천상의 것으로 충만하다.
4. 세상에서 가장 줄을 잘 서는 방법이다.
5. 세상의 성공에는 후유증이 따르나 기도에는 후유증도 뒤탈도 전혀 없다.
6. 세상의 모든 후원에는 용수철처럼 조건이 달려 있지만 기도에는
기도하는 사람을 하느님 아버지께 매어다는 용수철이 달려 있다.
7. 기도 없는 곳에 사람만 일하고, 기도 있는 곳에 하느님께서 일하신다.
8. ‘노력 더하기 노력’이 아니라 나의 ‘노력 곱하기 노력’이다.
9. 기도가 없는 곳은 마귀의 잔치집이고, 기도가 있는 곳은 마귀의
초상집이다.
10. 하느님은 기도에 응답하시고, 기도하는 사람은 삶으로 하느님께
응답한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새 하늘과 새 땅 -꿈꾸는 사람, 춤추는 사람-
이수철 프란치스코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이사65,17-21 요한4,43-54
제1독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5,17-21
복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43-54
새 하늘과 새 땅 -꿈꾸는 사람, 춤추는 사람-
하루하루가 주님이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선물입니다.
꿈이,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꿈이, 희망이 있어야 광야세상 살아 낼 수 있습니다.
오늘 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는 물론이고 성경의 사람들, 모두가 꿈꾸는
꿈의 사람들, 희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꿈도 하늘나라의 꿈이었습니다.
통일문제에 앞장선 시민사회운동가로서 현재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인
백기완 선생의 인터뷰중 한 대목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요새 젊은이들은 꿈은 없고 욕구, 욕망만 있는 것 같아.
욕구와 욕망은 꿈이 아니야. 젊은이들은 욕심의 포로가 되어 있어.“
어찌 젊은이들뿐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심의, 돈의 포로가 되어 살아갑니다.
꿈과 욕심은 다릅니다.
꿈은 사람을 고귀하고 만들고 욕심은 사람을 비천하게 만듭니다.
사람만이 꿈을 꿉니다. 꿈을 잃으면 본능의 욕심만 남습니다.
고결한 사람은 하느님을,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이런 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기도하게 하고 믿음을 지니게 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이사65,17-18).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 꿈도 하느님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간절한 믿음으로 기도할 때 선사되는 꿈입니다. 주님을 만나 치유되어 눈만
열리면 바로 지금 여기가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입니다.
즐거움과 기쁨으로 창조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이런 간절한 청의 기도는 그대로 믿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입당송, '저는 오로지 주님만 믿나이다. 가련한 저를 굽어보시니,
당신 자애로 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라는 시편 고백은 왕실관리의
심중을 고스란히 대변합니다. 왕실관리의 간절한 기도에 예수님의
즉각적인 응답입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왕실관리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갑니다.
일방적인 기적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우리의 믿음이 만날 때 치유의
기적이요 새 하늘과 새 땅의 체험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시간에 왕실관리의 아들은 열이 떨어져
살아났고, 그와 그의 온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표징이 새 하늘과 새 땅의 표징입니다. 사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표징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어 주님을 만나 아들이 치유됨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체험한 왕실관리입니다. 오늘 화답송 다음 시편 역시 왕실관리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 되어
주소서." 당신은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니, 주 하느님, 영원히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꿈꾸는 사람'에서 그 영혼 하느님 찬송의 '춤추는 사람'으로 바뀐
왕실관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의 선사와 더불어 영육을 치유해 주시어 기쁨으로 춤추는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 -
◈ [서울] 사순 제4주간 월요일
2015년 나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5,17-21
복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43-54
시간은 흐른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말을 합니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 우리는
태어나고, 나이를 먹고, 병이 들고, 죽어 땅에 묻히게 됩니다. 50년을 조금
넘긴 세월을 살면서 저 역시 나이를 먹고, 때로 아프기도 했고,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저 자신의 부족함을 보게 됩니다. ‘엔트로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시간 속에서 질서는 점차 무질서를 향해서 나가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시간의 이해는 서양에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시간의
이해 속에서 우리는 진보, 발전, 성장, 오메가 포인트라는 패러다임을
만들어 갔습니다.
시간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있습니다. 시간은 순환한다는 생각입니다. 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고,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온다는 생각입니다. 자연의
시대, 신의 시대, 이성의 시대가 반복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패션도,
문학도, 예술도 새로운 유행을 만들기도 하고, 예전의 흐름으로 돌아가기도
한다고 말을 합니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시간은 분명 흐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거시적인 측면에서 시간은 순환하는 것도 같습니다. 달은 지구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고,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습니다. 태양은
또 다른 중심을 향해서 공전하고 있습니다. 그 순환의 주기가 어떤 것은
하루, 어떤 것은 30일, 어떤 것은 1년, 어떤 것은 몇 억년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런 시간의 이해는 동양에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시간의
이해 속에서 우리는 겸손, 순응, 천륜, 기다림이라는 패러다임을
만들어 갔습니다.
하루를 살아야하는 하루살이에게 인간의 삶은 영원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100년을 살아가는 인간에서 100억년은 어쩌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시간을 길이와 흐름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나무는 보지만
숲은 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시간에서 의미와 가치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영원을 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은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예술가만 느끼는 창조의 기쁨
2015년 나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복음: 요한 4,43-54
< 예술가만 느끼는 창조의 기쁨 >
이탈리아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의사요 과학자요 건축자였지만
예술가로써도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에게 어느 날 부호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가 찾아와 작품을 부탁했습니다.
“내 아내의 초상화를 그려주십시오. 1개월이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러면 1년이면 되겠습니까?”
“그것은 내게 맡겨 주시지요.”
다 빈치는 무려 4년이나 걸려 초상화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작품을
조콘다에게 건네면서 말했습니다.
“이 그림은 아직도 미완성입니다.”
그 그림이 모나리자라는 작품입니다.
돈을 바라고 예술을 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기뻐합니다. 예술가라기보다는
장사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창조해내는 작품 때문에 기뻐합니다. 그래서 위대한 예술가들이 단 한 장의
그림이 팔리지 않아도 죽을 때까지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만족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다 해도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합니다. 반대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만족하면
그것으로 행복합니다.
하느님을 창조자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는 하느님도 예술가라는 뜻입니다.
모든 예술가가 창조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이 만드시고 하느님이 보시니 참
좋았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훌륭한 예술작품입니까?
그런데 오늘 독서에서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처음 창조하신 것이 마음에 들기는 하셨지만
완전히 마음에 드셨던 것은 아닙니다. 마치 다 빈치처럼 시간이
필요하더라도 완성된 작품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관계만큼
아름다운 예술은 없습니다. 18세기 독일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Novalis)
는 “사람을 만드는 것, 그것은 최고의 예술”이라고 썼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과의 예술적 관계를 원했지만 인간은 하느님의
예술성에 부합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미완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기로 마음먹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위대한 예술가시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은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시고 새 땅은 천상 예루살렘,
곧 교회를 상징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 즉 하느님의
어린양과 천상 예루살렘이 혼인하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결국 창조의 목적은 만드시는 분도 즐겁고 만들어진 것도 즐겁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오직 창조자에 부합되는 예술작품만이 천상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창조자에 합당한 예술작품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구보타 시게코의 ‘나의 사랑, 백남준’중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스물일곱 살에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별처럼 멀리 있는 예술가였다.
남자로서도 좋아했지만 예술가로도 흠모했다. 저렇게 빛나는 남자를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느냐고 친구가 물었을 때, 나 역시 치열한 예술가가
되어 그에게 닿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의 연인으로, 그리고 아내로 살아
온 지난 40년은 그의 예술적 동반자가 되기 위한 열망과 정진의
시간들이기도 했다. 때론 고통스러웠지만, 더 큰 희열이 있었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우리 또한 예술작품이지만 창조자에 합당한 예술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분의 창조성을 닮아야만 합니다. 태초의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작품성에 부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완전히 새로운 교회를 탄생시키셨습니다. 희생 없이 창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희생함으로써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들을 내어놓음으로써 누군가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이웃을 새로운 창조에로 초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행복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가르쳐준 유일한 길입니다. 예술가는
창조하면서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닮은
예술가들임을 명심합시다. 창조하지 않으면서 기쁨을 얻는 예술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믿을 만한 분을 소개하자면
2015년 나해 3월16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5,17-21
복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43-54
믿을 만한 분을 소개하자면
믿을 만한 사람들이 많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아니라는 분도 많습니다.
물론 크고 작은 사기도 매년 당하며 그저 늘 그렇게 산 건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믿어주면 믿을 만한 사람 되려고 노력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제 눈의 안경이란 말, 믿을 만한 사람은 자기 이웃도 그렇다고 볼 겁니다.
믿을 만한 분을 찾아서 믿음주며 살면 자신도 믿을 만한 사람이 될 겁니다.
그 중 제일 믿을 만한 분을 소개하자면 인류사에 예수님만한 분 없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 4,50)”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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